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4~31)
김태일 목사(계산장로교회)
김태일 목사 ...@kidok.com
부활 때문에 누릴 은혜가 많습니다
참 평강과 진정한 축복, 영생이 함께 하길 기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 20:29)
▲ 김태일목사
들어가는 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40일 동안 나타나셨던 기념 주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본문 사건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여드레를 지나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부활의 기간은 우리가 기쁨과 감사로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가 누리게 된 네 가지 은혜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하게 된 첫 번째 은혜는 ‘평강’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도마를 포함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날도 제자들은 “문들을 닫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으로 가득찬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평강이 임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제자들은 계속되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기독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진정한 평강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약속하신대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부활을 믿으시고 참 ‘평강’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하게 된 두 번째 은혜는 ‘믿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으라.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 내가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텐데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다면 어느 시점에서부터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한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면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고 그 사람이 한 말들을 다 사실로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활은 이처럼 성경의 다른 모든 기록과 사건을 믿을 수 있게 하는 열쇠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는 것’과 ‘믿음’을 같은 것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믿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는 35가지의 기적이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7가지의 기적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본문에서 도마 사건을 기록한 이유도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실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3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하게 된 세 번째 은혜는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신 말씀에 따라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히 어떤 ‘복’이 가능해졌습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복이 가능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눈으로 보아야만 믿으려고 합니다. 또한 신비한 것을 봤다는 사람을 보면 나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믿는다면 그 사람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부활을 목격한 열한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실히 믿는다면 그 사람은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열 재앙이나 홍해바다 갈라지는 것,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것을 보지 못해서 불신앙의 죄로 멸망한 것이 아니죠? 인간의 죄성은 본다고 다 믿지 못합니다. 도마처럼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으며, 손을 옆구리에 넣어 보아야” 간신히 믿는 것이 죄인들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순수하게 믿는 사람들입니다. 여리고 성의 라합은 하나님에 대한 소문을 듣기만 하고도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보지 못하고도 믿는 성도들을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하고 칭찬했습니다(벧전 1:8, 9).
로켓을 발명한 유명한 과학자 폰 브라운 박사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직도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어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태양을 보기 위해 촛불을 켜야만 하는가?”
우리가 보는 것은 이처럼 촛불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 진리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도 믿을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4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에게 가능하게 된 네 번째 은혜는 ‘영생’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죄로 인해 죽음이 온 이후 ‘생명’보다 더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벌이기 때문에 모든 죽음은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인간 세상의 어떤 문제도 궁극적인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생들을 위해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놓으시고 ‘부활’과 ‘영생’이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맺는 말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된 네 가지 은혜는 첫째는 평강이고, 둘째는 믿음이고, 셋째는 복이며, 넷째는 영생입니다. 모든 분들께서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는 신앙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참 ‘평강’과 진정한 ‘복’과 ‘영생의 복’이 임할 줄 믿습니다.
김태일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 기독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