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국신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
인도 힌두교 경전 우파니샤드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일몰의 아름다움이나 명산의 웅장함 앞에 잠시 멈춰서 ‘아!’ 하고 탄성을 지르는 것은 신성(神性, divinity)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장아장 걸어가는 세 살 바기 어린아이나, 이른 봄에 맹렬히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들을 보고, ‘귀엽다’, ‘예쁘다’고 하지, ‘아름답다’, ‘곱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서쪽하늘 너머로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석양이 곱다’, ‘장엄하다’,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진정으로 아름답다, 참으로 곱다는 말에는 소멸이 내포되어 있고, 그래서 그 말에는 설움이 배어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 사라지려 할 때, 사람들은 그 마지막 장면을 다치지 않고 생생하게 잡아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이승수, ‘사라지는 것, 그 찰나의 아름다움’ 참조).
오늘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소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너무도 아쉬운 죽음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활활 타오르는 저녁노을보다 훨씬 더 고운 빛깔입니다. 그의 순교는 묵묵히 끌려가 털끝만큼의 저항도 없이 순순히 죽어간 무죄한 어린 양의 죽음과도 흡사합니다. 그의 최후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과 그의 왕국을 위해 온전히 바쳐진 거룩한 산 제물이었기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예언자의 삶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의 삶은 혹독하게도 고독한 삶입니다. 이 땅에서 소멸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춥고 허전합니다. 그의 일상은 고뇌와 번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모든 결핍이 메시아를 위한 것이어서 가치 있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산(辛酸)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이 고독과 외로움,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하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런대로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 누군가로부터 이유 없이 천대받고 갖은 고통을 겪고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말입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이 ‘소멸의 과정’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어느 정도 삶을 이끌어 나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여기저기 상처가 생깁니다. 원치 않는 병고도 뒤따릅니다. 조금도 예기치 않았던 내리막길도 걷게 됩니다.
그 순간이 찾아오면 꼭 세례자 요한의 소멸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소멸의 과정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로 장식하시기 바랍니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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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자신을 속이지 말라
- 이정석 신부-
시(詩)는 처음부터 감동으로 다가와 매번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시집은 부피도 작지만 몇 마디 말이 읽는 이의 마음을 파고들어 ‘찡’하게 울림을 주고 그 여운도 참 오래갑니다. 윤동주의 시집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을 읽다가 윤동주의 시 구절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서시> 중에서)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가엾어집니다/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그대로 있습니다.’(<자화상> 중에서)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죽음을 보도하는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마태 14,9-10) 마르코복음은 요한에 대한 헤로데의 감정을 더욱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19-20)
헤로데가 괴로워한 것은 자신의 판단을 거슬러 하기 싫은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간의 체면 차림을 위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의 목을 베어버린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마음 한편에 짐으로 남아 있던 이 사건을 떠올리고 있습니다(마태 14,1). ‘때린 놈은 발 뻗고 못 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에 대한 용서입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는 사람은 위선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참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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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선포하는 예레미야
-경규봉 신부-
사제들과 예언자들은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라고 요구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자신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을 따름이라며 회개하면 하느님께서 재앙을 거두실 것이라고 선포한다. 아울러 죄 없는 자신을 죽이면 그 책임을 백성과 성읍이 져야 함을 말한다. 무죄한 피를 흘리면, 성읍과 나라에 재앙이 닥친다(신명 19,10.13; 21,8-9 참조).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재판관들은 무죄 판결을 내린다. 처음에는 제사장들 쪽에 섰던 군중도 태도를 바꾸어 재판관들의 판결이 옳다고 받아들인다. 이리하여 예레미야는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는 아히캄(요시야의 왕궁 관리인 : 2열왕22,12)의 도움으로 백성의 손에 죽지 않게 되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안이나 두려움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피해를 입거나 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인하여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한다. 자신을 버리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이 전혀 없다. 이를테면 사형수나 말기 암환자들처럼 자신이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아는 사람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사람, 그는 자기를 버린 사람이다. 그는 오직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믿음이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운다. 믿음으로 인하여 그 안에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고, 주님의 말씀이 그의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이 없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였으며, 자신을 죽이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고발하고 심판하는 이들 앞에서 전혀 불안해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주님께 대한 사명을 받고 온 몸이오.”라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대해 떳떳이 밝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한다. 그는 자신을 원하는 대로 하도록 그들에게 자신 있게 내어놓는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에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3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도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하고 기도하실 정도로 마음 깊이 평화를 누리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먼저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써 우리가 걸어야할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신앙인, 그는 자신을 버린 사람이다. 자신의 목숨을 버린 사람이다.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결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는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하느님을 바라본다.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으려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하느님의 말씀이 그의 힘이 되고 기쁨이 된다.
오늘, 그러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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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차룡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여자 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다고
극찬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미리 닦아놓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 요,
신약의 시대를 열어 놓은 선구자인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친 하느님의 사람입니 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 안티파스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헤로데도 그 소문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종교계의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집권자에게도 두려움을 안겨주었던 것입니 다.
당시 왕의 불의에 대하여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을 때
요한 홀로 그것을 거듭 거듭 충고하였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요.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에게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데리고 사 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에 헤로디아는 호시탐탐 눈에 가시 같은 요한을 죽일 기 회를 엿보며
가슴에 비수를 품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들에게 내린 옳은 충고를 비판과 저주로 받아들여 하느님의 사람인 요한을
죽일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중에 참으로 좋은 기회가 왔고, 그 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 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마태 14, 8)
결국 헤로데 왕은 마음이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백성들이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요한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것이 불의를 자행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 였던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충고라 할지라도 그 순간에는 나를 비판하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는 않습니다.
하지만 나의 태도를 고치기보다 그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를 마음에 담아둔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옳은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진리를 전하는 예언자 와 하느님을
박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의 법을 용기있게 외 쳤기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이름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 모든 사 람에게 알려지고 있습니다.
영원한 삶을 선택하였기에 현세의 부귀영화와 세상이 가져다주는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평신도의 대부로 서 영국의 대법관이며 수상으로 살았던 토마스 모어 성인은
헨리 8세 왕의 이혼 문제로 교회법의 혼인 의 불가해소성을 주장하여 왕과 의견이 엇갈리자
왕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 부인이 면 회를 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여보, 내 가 왕의 말을 들어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무시하고 그 결혼을 인정하여 내가 살 수 있다면
이 지상에서 얼 마나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소 ? 한 20년, 30년 ?
일시적인 생명을 얻기 위해 영 원한 생명을 포기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오,
나는 하늘의 영원한 생명 을 얻기 위해 내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예수님께서는“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 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으며 터무니없는 말로 갖 은 비난을 다 받게 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큰 상이 하늘에 마련되 어 있다.
옛 예언자들도 너희에 앞서 같은 박해를 받았다.”(마태 5,10 - 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밑거름은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신앙입니다.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로 값진 신앙과 교회의 유산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의 박해와 순교의 원인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세상의 권력에 손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인간의 뜻 에 순종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에 먼저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의 편안한 삶을 위해 진 리를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님 을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불의에 항거하며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세례자 요한과 토마스 모어와 같은 진리의 증인이 많았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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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떤 한 젊은이가 자신의 스승님을 찾아가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당신은 정말로 나쁜 사람이오! 당신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지혜를 가르치고 있소!”
그러자 스승님은 손가락에서 반지 하나를 빼내어 이 젊은이에게 던지면 말합니다.
“장터의 노점상들에게 이걸 가지고 가서 금화 한 냥이라도 얻어와 보게.”
젊은이는 비웃으면서 장터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반지의 대가로 금화 한 냥은 커녕 은전 한 닢도 주려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이렇게 쓸데없는 반지는 왜 팔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스승님은 젊은이에게 다시 말합니다.
“그럼 진짜 보석상을 찾아가서 이 반지의 값을 얼마나 쳐주는지 알아보게나.”
젊은이는 아무런 값어치를 매기지 못했던 장터의 상인들을 떠올리면서, 역시 투덜거리면서 보석상을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는 깜짝 놀랄만한 일을 체험하게 됩니다. 글쎄 보석상은 그 반지를 보자마자 욕심을 내면서 말하는 것입니다.
“당장 금화 백 냥이라고 줄 수 있으니 내게 넘기시오.”
젊은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다시 그 스승님께 돌아왔지요. 스승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보석의 가치를 정말로 알고 싶다면 진짜 보석상이 되어라.”
그렇지요. 값비싼 보석을 장터의 상인들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보석상은 그 가치를 잘 알고 어떻게든 그 보석을 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앞서 가치를 몰라서 값비싼 보석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장터의 상인과 똑같은 것입니다.
만약 이 장터의 상인들이 나중에 이 보석의 가치를 알게 되었으면 어떠했을까요? 분명히 후회를 할 것입니다. ‘내가 그 보석의 가치를 알았더라면 금화 한 냥이라는 적은 가격으로도 구입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말이지요.
이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에서도 나타나게 됩니다. 분명히 내 판단이 맞다고 하면서 어떤 사람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했겠지만, 그 판단이 나중에 커다란 후회로 바뀔 때가 얼마나 많았나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헤로디아의 딸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을 죽이지요. 이런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인하여 그는 평생 후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두려워 떨게 됩니다.
헤로데는 보석의 가치를 전혀 몰랐던 장터의 상인과 같았기에 평생 후회의 삶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그렇지 않을까요? 보석상이 아닌 장터의 상인이 되어 값비싼 보석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어리석음을 가지고 나의 이웃을 얼마나 잘못 판단하고 단죄했었던가요? 이제는 후회할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하네요.
즐거운 주말 계획을 세워 보세요.
빠다킹신부
죄를 낳는 죄
-서현승 신부-
창세기에 등장하는 첫 인간의 범죄이야기는 원인론적으로 모든 인류가 저지르는 죄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죄를 지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고, 가리고, 숨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숨어 있는 첫 인간을 몸소 찾아가셔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십니다. 이왕 지은 죄야 돌이킬 수 없지만, 죄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비극적입니다. 끝까지 핑계를 대며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려던 그들은 결국 낙원의 은총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절망의 늪에 빠지고 맙니다.
헤로데 역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더니 훨씬 심한 죄의 나락에 떨어집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였다가 그 잘못을 지적하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사람들 앞에서 헛된 맹세를 한 결과로 무죄한 요한의 목을 베는 지경에까지 이릅니다. 문제는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합리화하려는 태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헤로데는 이스라엘 왕국의 창시자 다윗의 모범을 따라야 했습니다. 그는 무수히 많은 죄를 짓고도 하느님의 축복을 넘치도록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는 겸손함으로 말입니다. 첫 번째 죄가 낳는 두 번째의 더 큰 죄를 두려워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의 솔직함이 우리를 살립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img.blog.yahoo.co.kr%2Fybi%2F1%2F75%2F80%2Fkslofs%2Ffolder%2F2750962%2Fimg_2750962_1371845_2%3F1148074644.gif)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박혜원-
◆헤로데는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세례자 요한의 말에 수긍했고, 자기 죄에 대한 번민도 있었다. 그러나 의붓딸 살로메의 뇌쇄적인 춤 앞에서 우쭐해진 헤로데는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고 허세를 부렸다. 살로메는 요한의 목을 요구했다. 의붓딸의 소원을 듣는 순간 암담했지만 한 번 한 약속을 물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역시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베게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헤로데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보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항상 그 자존심이 문제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의 삶 곳곳을 통해 당신의 메시지를 보내는데 우리는 번번이 그 신호를 무시하고 여전히 체면만을 돌아보며 산다. 아상(我相)에 갇혀 있으니 하느님의 음성에 무디어질 수밖에 없다. 헤로데는 요한의 입을 통해 드러난 자아를 솔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살로메의 춤을 보며 허세를 부렸다. 나탄에게 자기 죄를 고발당한 다윗이 베개가 젖도록 눈물 흘리며 자신을 돌아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는 양심의 소리에 준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했다. ‘본질적인 문제’ 앞에 서는 일이 중요했다. 헤로데에게 본질적인 문제는 ‘헤로디아’였다.
허영을 버려야 할 일이다.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 앞에 발가벗고 양심의 소리, 내면의 소리가 이끄는 대로 따라야 하리라. 이 글을 쓰는 나는 진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 이영훈 신부 -
갓 태어난 세례자 요한을 안고, 아버지 즈카리야는 이렇게 말한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이 말은 요한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에 대한 예언이다. 그의 예언대로 요한은 성장하여 모든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느님께 다시 돌아오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셔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리라는 진리를 전한다. 그러나 진리를 외치던 그가 헤로데에게 바른말을 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리고 끝내 그를 싫어하던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던 군중들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 못한 헤로데가 생일을 맞이하여 자신을 즐겁게 해 준 한 소녀와 그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이게 된 것이다. 군중들의 믿음과 희망을 꺾으면서까지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소수의 이익과 행복과 자신의 체통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진리를 전하는 이의 목숨과 그 진리를 듣고 용기와 희망을 얻는 이들보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제 진리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은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을 지켜본 많은 이가 다시 좌절과 어둠을 맛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진리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은 죽었지만, 즈카리야가 예언한대로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이제 그가 닦아 놓은 길로 그보다 더 위대하신 구원자가 오신다. 거짓으로 진리를 이기고, 권력으로 힘없는 자를 짓누르며,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다른 이의 행복을 앗아가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그리고 그분으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과 해방 그리고 기쁨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덮을 수는 있어도 진리를 죽일 수 없다. 진리를 덮어 놓고 거짓을 앞세우며 이것이 진리라고 우길 수 없다. 왜냐 하면 진리는 영원하고, 거짓은 결국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는 보았다.
그러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진리를 알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진리를 외치면서도 일단 자신의 이익과 행복에 연관이 되면 거짓과 손을 잡는다.
세례자 요한이 전하려고 했던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그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홀로 만족하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프랑스의 엠마우스 운동을 이끌고 있는 피에르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해야 한다. 그 둘은 서로를 부인하고 우롱하지 않고서는 함께 갈 수 없다. 홀로 만족하는 자는 사랑을 모독한다. 자신이 가는 곳마다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그가 깨닫기를, 너무 늦기 전에, 뉘우치고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기를!”
우리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도이다. 그리고 더불어서 주님의 길을 미리 닦아야 할 세례자 요한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사랑과 진리 그리고 평화의 길을 살아가야함은 물론이고, 세상이 거짓과 불의 그리고 미움과 다툼으로 가득 차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정의 그리고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화가 넘쳐흐르는 세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무엇인가?
하느님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인주 신부-
하느님도 인간 세상은 어떻게 못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역사에 등장하는 폭군들의 모습을 보면 ‘하느님은 왜 저런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셨는가?’ 하고는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래도 하느님이 계시니 이만하겠지 싶다.
필리핀의 가난한 가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여러 아이들을 둔 엄마가 생계를 위해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가정부로 취직해서 먼 곳으로 떠났다. 아이들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고, 아버지는 아이들의 등살에 꼼짝도 못하니 당연히 일을 할 수가 없다. 남편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먼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돌아올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곳의 삶이 좋은지 못 오겠다며 버텼다. 그러자 남편은 애들을 다 죽이고 자신도 끝장을 내겠다고 했다. 설마하지만 결국 남편은 피비린내를 내고 말았다. 누구의 잘못인가? 구조적인 잘못이다. 나라·사회·개인 등 잘못된 구조에서 비롯된 깊은 상처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회를 건전하게 만들어야 하고 늘 하느님께 여쭤가며 우리의 삶을 좋게 만들어 가야 한다.”(탐 오골만 신부의 이야기 기록)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최후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 시대의 현실이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 도전을 했으니 그 뒷일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연회장에서 예언자의 목을 벨 줄이야`…. 그들이 요한만 그렇게 죽였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다 그런 식으로 죽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두고 애꿎은 사람들만 죽게 하실까?
그러나 기도하며 그분을 만나다 보면 답이 나온다. 착한 사람은 먼저 하늘나라에 간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연옥도 안 거치고 바로 천국에 가기도 하겠지만, 이 더럽고 지저분한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끔 배려하는 것이라면 좀 위로가 되려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린 이런 세상이 되지 않도록 미리 미리 하느님 나라에 접근해 가는 사람들이 많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이 땅도 바로 하느님 나라에 가깝기에 밝고 맑고 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배려해 주지 않겠는가. 이런 차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사람들이여, 하느님을 온전히 믿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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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양승국신부-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
최근 며칠 동안 에밀 브리에르 신부님의 ‘사제는 사제를 필요로 한다’(분도출판사)는 영성서적을 읽고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절이 제 눈길을 ‘확’ 끌었습니다.
“사제적 위신과 지위에 대해 그리고 사제들이 품고 있는 욕구에 대해 아주 특별한 변칙이 있음을 가끔 보게 된다. 이 욕구는 사제관이든 사제 양성소이든 어디에도 침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답답함이 있다.
사제들 간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라. 더 큰 본당을 추구하고 신학교나 대학의 학장 자리나 명예롭고 존경받는 지위를 주제로 하고 있음을 가끔 듣게 된다.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는 전체 신자 수가 23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시골 본당 주임 신부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비안네 신부가 뭔가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기에 문책성 인사를 당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는 2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영혼을 책임지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 몸까지 떨었다고 한다.”
비안네 신부의 성소여정에 가장 큰 후원자였던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담당주교는 비안네 신부를 불러 아르스로 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비안네 신부, 미안하지만 아르스로 좀 가 주어야겠네. 그 본당 신자들은 하느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네. 자네가 가서 그곳에 하느님 사랑을 좀 심어주었으면 하네.”
아르스에 도착한 비안네 신부님은 드디어 첫 번째 주일 미사를 신자들과 함께 봉헌하게 되었습니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님의 행색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창백한 얼굴, 여기저기 툭툭 튀어나온 뼈들, 가냘픈 몸집, 수줍은 표정, 더듬거리는 말투, 흙 묻은 신발, 거친 천의 수단... 그 행색이 너무나 초라했습니다. 너무나 없어보였습니다.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본 신자들은 이렇게 수근 거렸습니다.
“저 꼬락서니 좀 봐! 저러니 이런 시골까지 쫓겨 왔겠지.”
세월이 흘러가면서 비안네 신부님의 덕행은 영롱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의 가난과 겸손의 덕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명성을 전해들은 수많은 순례자들이 유럽 전역으로부터 아르스를 찾아왔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의 손짓 한번, 눈짓 한번, 단 한 방울의 눈물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이 몰려드는 순례자들로 인해 아르스 사람들은 길을 넓혀야 했습니다. 마침내 순례자들의 인파는 유럽 전역에서 아르스를 향해 흐르는 큰 강이 되었습니다.
고백소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질서유지를 위해 경비원까지 써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비안네 신부님의 수단 자락을 잡아당겼습니다. 어떤 사람은 온 몸으로 돌진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옷을 찢어 달아났습니다. 그래도 비안네 신부님은 조금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죄지은 영혼들의 발자국 소리를 낱낱이 듣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그들을 만나셨고, 뒤틀렸던 그들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한편 이렇게 ‘잘 나가는’ 비안네 신부님에 대해서 갖은 욕설을 퍼붓고 시기 질투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30년 이상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비안네 신부님을 괴롭힌 사제도 있었는데, 신부님은 그 모든 수모를 묵묵히 참아내셨습니다.
교구의 동료 사제들조차도 비안네 신부는 지지리도 못생겼고, 가난한 집안 출신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다고 놀려댔습니다. 쥐뿔도 모르면서 무식한 시골 본당 신자들을 선동한다고 떠들어댔습니다. 낡은 수단과 꿰맨 구두, 거지같은 모자도 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 쇼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모든 비방 앞에서도 비안네 신부님은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그 모든 업신여김 앞에 겸손하셨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고백소 앞 행렬은 비안네 신부님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습니다. 57세 되던 1843년 5월 12일 비안네 신부님은 이런 말을 끝으로 하느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나의 하느님, 이렇게 저는 빈손으로 당신 곁으로 가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제들이 비안네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하루 온종일 헌신하길 바랍니다. 자신의 양들을 위해 매일 목숨을 버리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한 매일의 희생양이 되는 길, 그 길이 결국 사제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 헤로데 가문의 족보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를 자기가 목을 베어 죽인, 그러나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하는 가운데, 이미 과거사가 된 세례자 요한의 수난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4-29)을 그대로 베끼면서 총 16절을 12절의 분량으로 줄였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러나 마태오는 구구한 설(說)을 일축하고 헤로데의 생각만 전해준다.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 또는 헤로데 왕이라는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58번 등장한다. 그 빈도를 살펴보면 마태오복음에 17번, 마르코복음에 11번, 루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15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뒤져보아야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유대교적 종교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333년 희랍의 알렉산델 대왕군대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델(333-201), 프톨로메오 왕가(200-198), 셀레우쿠스 왕가(198-164), 하스모네오 왕가(163-64)가 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屬州)로 삼았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로마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하스모네오 왕가는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누스 형제의 권력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권력을 거머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BC.130년경) 유다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제국과 그의 황제들에 대한 적절한 충성심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독보적인 위치를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BC.40-AD.4 통치) 헤로데는 치세 20년경에 대대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증축을 도모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 피난길에 오른 것도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마태 2,13-18) 헤로데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마태 2,19: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대략 기원전 7-4년 사이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리게 된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AD.6년까지 다스린다.(마태 2,22) 필립보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AD.34년까지,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르단강 동서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AD. 39년까지 다스린다.(루가 3,1)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고(마태 4,8),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알고는 헤로데에게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한다.(루가 23,1-12)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당시 갈릴래아 영주였고, 그 시각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한 사람의 헤로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 12장부터 23장까지 15번 등장한다.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12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 아르켈라오는 이름난 폭군으로 10년간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 죽는다. 그 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관할에 편입되지만, AD.41년-44년까지는 아그리파 1세가, 그 후는 아그리파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마태오복음 2장에 보도된 예수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고, 그 나머지 부분과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하며, 사도행전의 헤로데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언자를 죽인 사람은 다리 펴고 잠을 잘 수 없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헤로데는 예수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단언했을까?
그것은 아무 겁 없이, 아무 욕심 없이 광야를 보금자리로 삼고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와 메시아의 도래를 설파하고, 자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4절)고 간언하다 죽은 예언자 요한의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며, 결국은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헛된 결심이나 맹세를 남발하지 않으며 정의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옳지 않습니다.>(마태 14, 1-12)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크게 부각된 점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인생관이었다.
한 사람은 정의를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하면서까지 옳은 일을 하다가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주위상황과 사람에 의해 줏대없이 살면서 다른 사람의 생명까지 앗아간 헤로데라는 인물이다.
의인인 요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짧고 간단하게 요한의 삶을 표현하였지만 그 짧은 표현 속에 요한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전해주는 데에는 충분하다.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은 아주 짧게 끝났지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때부터 오늘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많은 메시지를 던져 줄 것이다. 반면 옳게 살지 못한 헤로데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장황하게 늘어 놓았지만 모든 이야기들이 추하고 비열하다. 길게 늘어 놓을수록 더욱 추한 이야기의 나열일 뿐이다.
요한 세례자는 패했고 헤로데는 승자같지만 정말로 승리한 이는 요한이고 패자는 헤로데이다. 죽은 이는 요한이요, 살아있는 자는 헤로데였지만 정말로 죽은 자는 헤로데요, 살아있는 이는 요한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삶을 보면서 역사는 진실을 말하고 있고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당대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로 승자이고 영원히 사는 길인가를 알 수 있다.
그럼 좀 더 요한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를 묵상하자.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그의 삶은 항상 예수님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 결국 예수님도 옳은 일을 하다가 반대자들에 의해 죽을 것이지만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선의의 사람들,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대변해주는 것이요, 그리스챤의 삶을 이야기 한다.
요한이 한 일은 옳은 일을 말하고 외쳤고 또 그렇게 살았다. 옳은 일 앞에서 죽음도 명예도 출세도 모든 것을 버렸다. 왜 그렇게 살았는가? 올바르게 사는 것이 요한의 인생관이요,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옳은 일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삶이 바로 의인의 삶이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의 확고한 인생관과 가치관을 갖고 흔들림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사는 삶이다. 정의와 진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순교자라고 한다. 교회는 이런 순교자를 최고의 영예로 여기며 이들을 聖人이라고 한다.
오늘 날 우리 교회는 이런 성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시대에 따라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고 철새처럼 자기의 인생관, 가치관도 없이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이리 붙고 저리 붙어 사는 삶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진리를 쫓아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골베 신부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고 진리에 봉사하는 일이다."라고 말씀하셨다.
헤로데라는 한 인간의 추한 모습을 잠시 묵상하자.
헤로데라는 인물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헤로데라는 인간을 통해서 강하게 다가 오는 것은 인간이 진리를 모를 때 어떻게 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헤로데는 자기의 권좌와 명예를 지키고 쾌락적인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자기에게 옳은 일을 조언하는 의인을 죽였고,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자기도 원치 않았지만 맹세까지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딸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했고, 동생의 부인을 차지하는 불륜의 관계를 서슴없이 범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의 부인인 헤로디아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헤로디아도 자기 욕망에 사로잡혔고 그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인간이 자기 욕망의 노예가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인간으로 타락할 수 있는 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 그 죄가 자기를 얼마나 짖누르고 있는 가를 헤로데와 헤로디의 모습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헤로데는 요한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자기가 죽인 요한이 살아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불안해 하였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헤로디아도 자기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죄의 늪에서 허우적 되고 있다. 사실 헤로데 임금이 베푼 잔치는 헤로디아를 위해서 베푼 잔치가 아니다. 그렇치만 요한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는 헤로디아는 그런 자리를 자기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기회로 이용하였다.
헤로디아는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 딸이 매춘부나 추는 춤을 추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추켰으며 또 딸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청을 자기 욕심을 채우는 데 이용하였다. 그로 인해 자기 남편은 물론 자기 딸마저 사람을 죽이는 공범자로 만들었다. 앙심을 품고 있는 한 여인의 무서운 생각이 결국은 자기도 죽이고 가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헤로디아는 헤로데 임금이 무슨 원이든 딸의 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 요한 세례자를 감옥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앙심을 품고 있었던 헤로디아는 가장 좋은 기회를 자기와 다른 가족들을 가장 불행한 기회로 만들어 버렸다.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잔치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간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헤로디아는 앙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의롭고 거룩한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온 모든 사람들에게 씻을 수 없는 잔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기회가 자주 있는 법이 아니다. 좋은 기회를 잘 살리 수 있는 것,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그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좋은 기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석은 사람을 살아서는 안되겠다. 이런 모든 불행의 원인은 바로 앙심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우리는 여기에서 한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즉 인간이 불행해질 수 있는 길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하나는 마음속에 앙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중에 내뱉는 말이다.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절대로 앙심을 품고 살아서도 안 되고, 취중에 함부로 말해서도 안 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어려운 취중에 어떤 약속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죄는 죄를 낳는 법이다. 모든 죄는 개인적으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준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도 그랬고 헤로디아도 자기 혼자만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하는 남편과 딸까지도 죄를 짓게 만들었고 또 그들에게도 불행을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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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매일 밤 양심의 소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삶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데 그 당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들을 수 없는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소경이 눈을 뜨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나는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된 메시야다, 하느님의 아들인 성자 하느님이다. 나는 생명의 주, 구원의 주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본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갈릴레아는 물론이고 멀리 유다 땅까지 입소문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문은 헤로데 왕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성서에는 헤로데라는 이름이 많이 등장하는데(헤로데 가문족보 : 박상대 신부강론 참조), 그 내용에서 보듯이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의 헤로데는 오늘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할아버지로서 역사가들은 이를 구별하기 위하여 대 헤로데라고 불렀습니다.
대 헤로데는 40여년에 걸쳐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임금이고, 지금도 남아 있는 마싸이다라는 요새를 건축한 임금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신앙심이 좋은 임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에돔 사람인 헤로데는 어떻게 하면 유다인들의 마음을 사서, 효율적으로 유다인들을 다스릴까 하는 것을 생각하다가 유다인들이 소망하는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즉, 신앙심에서 성전을 건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으로 성전을 건축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서에서 이미 읽으셨듯이, 대 헤로데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2살 이하의 아이는 모두 죽여라 명령을 내릴 정도로 잔혹인 임금이었습니다. 자신의 왕의 자리를 노린다는 의심을 하여 몇 명의 부인과 아이들까지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헤로데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보다 개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 하는 말이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헤로데가 죽음이 가까워 온 것을 알고는 마을마다 존경받는 유지들을 다 잡아 옥게 가두게 하였고, 자기가 죽을 때에 유지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온 나라에 슬퍼하는 곡소리를 들리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후대의 역사가는 기록하리라. 온 백성이 위대한 헤로데 왕의 죽음을 이렇게 슬퍼하였도다” 그러나 헤롯이 죽은 뒤에 이 명령은 지켜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대 헤로데의 손주가 되는 헤로데 안티파스는 갈릴레아 지방을 다스리도록 로마 황제에게 위임을 받은 임금입니다. 이 헤로데가 예수님의 능력과 기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었을 때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야 말로 예언자를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야, 우리들이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메시야이신 것이 틀림없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 분은 다윗과 같은 찬란한 유대 왕국을 세우실거야!”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헤로데 안티파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돌아왔어! 예수 안에서 그가 역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 헤로데는 왜 보통의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전에 자신이 한 일 때문입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자신의 한일이란 다음과 같은 추악한 내용입니다.
그의 동생이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아내, 제수씨인 헤로디아가 얼마나 예쁜지? 제수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사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셋말로 자기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듯이... 그만 제수씨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헤로데왕은 권력을 이용하여 동생에게서 아내를 빼앗아서 아내로 삼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은 불륜으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감히 헤로데왕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왕의 아첨꾼들은 “임금님, 사랑은 위대한 것입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습니다. 폐하와 왕비께서는 원앙새도 부러워 할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진작에 만나셨으면 더 좋을 뻔 하였습니다” - 이런 아첨의 말에 헤로데는 사랑의 쟁취자라는 행복감에 젖어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는 날! 세례자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예언자로 믿고,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대신들 앞에서 담대하게 헤로데왕의 잘못을 지적하며 질책하는 것입니다.
“회개하시오! 어찌 동생의 아내인 제수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단 말이오! 동생이 죽은 것도 아니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는 것은 짐승들이나 하는 부도덕하고 더러운 일인데 어찌 한 나라의 왕으로서 그러한 추접스러운 일을 행할 수 있단 말이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준엄한 질책에 당황하였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던 헤로데는 부하들에게 단칼에 목을 베라고 명령을 내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온 백성이 에언자로 믿고 있는 요한의 목을 베면, 예언자를 죽인 왕으로 그 나마 조금 남아 있는 백성들이 존경심이 사라질 것이고, 세례자 요한의 죽음으로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에 폭동이 일어난다면, 갈릴레아 지방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로마 황제의 문책을 받을 것이고, 정치적 생명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보존하기 힘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목을 베고는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대신에 지하 감옥 깊은 곳에 가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헤로데왕은 문무 대신들을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흥겨운 노래 가락 가운데 기름진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습니다. 여인들은 화려한 의복과 몸에 치장한 장신구들을 자랑하고, 남자들은 헤로데 왕 주변에서 듣기 좋아하는 아첨 소리만을 하면서, 출세의 기회로 삼고 있었습니다.
헤로데왕은 이전에는 제수였지만 지금은 아내가 된 요염한 헤로디아와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의자에 비스듬이 걸터앉아 거들먹거리고 있었습니다. 분위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에, 흥겨운 노래와 멋진 춤으로 여흥이 절정에 올랐을 때에, 전에는 조카였지만 지금은 딸이 된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나와서 춤을 추었습니다.
헤로데왕이 헤로디아의 아름다운에 반하여 동생 아내를 탈취하여 아내로 삼았는데, 딸 살로메 역시 엄마의 아름다움과 요염함을 그대로 빼어 닮았을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살로메의 감각적인 춤에 넋이 나갔습니다. 춤추는 것이 끝났을 때에 사람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와 찬사가 이어졌습니다. 기분이 몹시 좋아진 헤롯은 살로메를 불러서 “참 잘 했다. 네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는데 큰 상을 내려야 하지 않겠느냐? 나라의 반이라도 달라면 너에게 줄 것이니, 너는 무슨 상을 받기를 원하느냐?”하고 말했습니다. 헤롯왕의 이 말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환호하며 큰 박수를 쳤습니다. “나라의 반이라도 내어 준다”는 헤로데의 말에 대하여, “역시 왕은 스케일이 보통 사람하고는 달라, 왕의 배짱은 누구도 따라 갈 수 없어” 하는 말로 헤로데를 한껏 치켜 올렸습니다.
살로메는 엄마와 상의하였습니다. 엄마 헤로디아는 귓속말로 살로메에게 속삭였습니다. 이윽고 살로메가 헤로데 왕에게 주기로 한 상에 대하여 말하는데, 그 연회장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살로메가 요구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목”이었습니다.
이것은 헤로디아가 시킨 것입니다. 그녀는 무능한 남편을 버리고 헤로데 왕을 새 남편을 맞이하였는데, 너무도 좋았습니다.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화려한 멋진 파티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화려한 의복을 입고, 몸에 반짝이는 보석을 걸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좋았습니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름답습니다. 보석이 아름답지만 왕비님 때문에 초라해 보입니다” 하는 아첨하는 말에 날아갈 듯 하였습니다. 평상시 꿈꿔오던 황홀한 생활인데 드디어 그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 꿈을 훼방 놓은 오직 한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감히 어디라고 주둥이를 놀려 댄단 말입니까? 단칼에 베 버리면 되는데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세례자 요한을 살려두는 배포 헤로데 안티파스가 원망스럽습니다. 드디어 이제 눈의 가시인 세례자 요한을 제거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는 살로메의 요구 앞에 헤로데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나라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고, 그 소리에 모두들 환호하였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고 말하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체면유지와 남의 눈을 의식하는 연유로... 예언자의 목을 베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결국은 흥겨운 파티장에 피비린내가 덮었습니다. 요한이 목이 베어져 쟁반에 담겨 온 것입니다. 붉은 핏방울이 쟁반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입을 벌려 저주를 퍼 부을 것 같은 목이 담긴 쟁반이 살로메에게 주어졌고, 살로메는 이 쟁반을 받아서 헤로디아에게 주었습니다. 헤로디아는 멋진 파티복이 핏방울로 얼룩졌지만 개의치 않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세례자 요한의 목이 담긴 쟁판을 들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이런 일을 저지른 후에 헤로데는 늘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잠을 자다가 놀라서 깨어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매일 식은땀으로 이불을 적셨습니다. 이러던 차에 서두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에 대하여 듣습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능력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헤로데는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 돌아와 예수 안에서 활동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파스칼은 “하느님께서는 길을 알 수 있도록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을 주셨고, 우리의 가슴에는 양심을 주셨다.” 말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죄를 지으면서 하느님을 닮은 형상은 파괴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형상의 흔적이 조금 남아 있는데 그것이 양심입니다. 죄를 지으면 두렵고, 불의를 행하면 떨립니다. 양심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소리에는 귀를 막고 살 수 있어도 양심의 소리에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양심의 소리는 거부할 수 없습니다.
로마 1,19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께 관해서 알 만한 것은 하느님께서 밝히 보여주셨기 때문에 너무나도 명백합니다.” 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하느님을 멀리하면 떨리고, 하느님의 법을 어기면 두렵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위대한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신성과 능력을 통하여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우리 속에서 속삭이는 양심의 소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심판 때에 하느님을 몰랐다고 어느 누구도 핑계를 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헤로데왕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양심의 소리 때문이며, 떨고 있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장을 보면 엘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은 아주 작은 소리였습니다. 미세한 음성이란 옷깃을 여미고 자세를 가다듬고 조용히 가운데서 들을 수 있는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렇게 미세한 음성으로 말씀하십니다. 미세한 음성이기 때문에 시끄러울 때는 들을 수 없습니다. 온갖 잡념을 가지고 있거나 분심에 빠져 있을 때에는 들을 수 없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곳에서, 조용히 앉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신앙 양심의 소리, 성령 하느님의 재촉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외치며 백성들을 깨우치는 예언자로 부름을 받고, 예언자로서 외치는데, 모두들 귀를 꼭 틀어막고 있는 것입니다. 외치면 외칠수록 더 힘들고,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외치지 않겠습니다” 하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외치지 않고, 외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을 먹지 않고, 핍박을 당하지 아니하고 - 좋았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조용히 집에서 쉬고 있는데 “너는 사명자가 아니냐? 사명자인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네 하느님, 나 야훼가 맡긴 사명인데 네가 그렇게 주저앉아 있느냐?” -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신앙 양심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예언자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예레 20,9입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이와같이 예레미아는 미세한 하느님의 음성, 양심의 외침에 항복하였고, 다시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하였습니다.
여러분!
지금보다 믿음이 더 자라고 싶습니까?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가고 싶습니까?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느님을 가까이 함으로 하느님의 더욱 풍성한 은총 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럴러면 먼저 하느님의 미세한 음성, 신앙 양심의 외침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음성을 듣기 위하여 조용한 곳에서, 조용한 시간에, 조용한 묵상의 환경과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시편 1, 1-2에서는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며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고, 야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묵상의 시간, 경건의 시간,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을 하루 가운데 정해 놓으시고, 하느님이 미세한 음성을 들으며, 나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하느님 마음에 합치한 자가 되기를 바라며, 하느님께서 더욱 풍성한 은혜와 복을 부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이면 하느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데는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라의 반이라고 주겠다고 큰 소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 말을 바꾸는 사람, 실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사람들에게 약속한 것은 손해가 되더라도 꼭 지키는 사람, 신실한 사람, 분명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지는 몰라도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였습니다. 매일 밤 양심의 소리 때문에 괴로워하여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가치관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다르고, 의의 기준이 다르고, 선의 기준이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릅니다. 세상 사람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면 되지만, 하느님의 백성은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박수를 친다고 해도 하느님의 박수를 받는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하지 말라고 말려도 하느님이 원하시면, 하느님의 박수를 받는 일이라면 하여야 합니다. 세상의 의를 이루어야 하지만 먼저 하느님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의 선을 이루어야 하지만 먼저 하느님의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다 사라집니다. 세상 나라는 지나갑니다. 세상의 의는 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한결 같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영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세상천지는 변하여도 하느님의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영원한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영원한 하느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신앙의 용기, 신앙의 결단이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노라고 말할 수 있는 크리스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때로는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때로는 예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에 휩쓸려, 세상의 물결치는 대로, 세상의 사조가 흐르는 대로 이리 저리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잘 순응한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에 적합하지 않으면 “NO"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의를 위하여 “YES"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은 물고기는 물에 떠서 물결대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고기는 아무리 작아도 물살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거친 물살을 헤치고 나갑니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 깨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신앙의 용기와 결단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에게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삶 속에 함께 하며, 마지막 때에 하느님의 의를 이룬 여러분을 향하여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는 하느님의 풍성한 상이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