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 관한 시모음 4)
꽃밭에서 /鞍山백원기
어제는 하늘과 맞닿은 곳
울긋불긋 피어있는 야생화 동네서 살았다
어쩌다 보이는 산 사람
온통 꽃으로 둘러싸인 꽃동네
언덕 너머에서 봄바람 불어오면
좋아라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는 애교
벌, 나비도 한 몫 거들며 넘나든다
한 겨울에는 소식도 모르던 고요
화신의 날개 퍼덕이며 날아와
웃고 떠들다간 산바람 사이로
야생화 꽃밭은 물들어
지나가며 쓰다듬고 입 맞추다
가야 할 길 재촉하며 발길을 옮기누나
꽃밭에는 /미나
오월의 꽃밭에는
사랑이 너울대고
오월의 꽃밭에는
희망도 핍니다
솟아오르는 봉오리가
젊음이라 한다면
활짝핀 꽃송이는
아름다운 중년이겠지요
나는
활짝핀 꽃으로 영원하고 싶습니다
세월을 어길수없어
시드는 꽃이여야 한다면
마음만이라도
활짝핀 꽃으로 남겠습니다
아름다운 꽃에서 나오는
좋은향기를 품고
세상 살다보면
속마음은 활짝핀 꽃송이되어
인생을 아는
마음 넉넉한
어느 예쁜 할머니가 되겠지요
나는
그런 할머니가 되어야겠습니다
Happy 할머니가 되어야겠습니다
푸른 손들의 꽃밭 /류외향
들판에 손이 자라고 있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에 먹는 일에 열중했고 읽은 수 없는 책들이 쌓여가던 봄날이었다
정찰병처럼 한 잎 두 잎 연둣빛 손톱이 흙을 뚫고 솟아나더니 들판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쑥쑥 자라난 손가락들의 마디가 굵어질 때쯤 손목께에서 성장을 멈춘 푸른 손들이 지천이었다
마른 모래바람이 창틈으로 기어이 흘러들어오는 날이면 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날벌레처럼 잠든 귓속까지 파고들었다
손을 뻗어 그 손들과 악수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알아들을 길 없었기에 등 돌리고 누웠다 꿈속에서 손목이 자꾸만 가려워왔다
어느 하루, 서럽게 비 내리고 간 뒤 잎맥처럼 선명하게 지문이 돋아났으며 저마다 깊고 굵은 이랑이 소용돌이쳤다
수천수만의 손들이 한꺼번에 흐느끼며 마른 땅 위로 눈물을 떨어뜨렸다
손을 뻗어 그들을 어루만지려 했으나 오, 왜 몰랐을까 내 손도 진즉에 저 들판 어딘가에 떨어뜰고 온 것을
잘린 손목으로 밥 먹는 일에 열중했던 나날이었음을
수많은 손 잘린 사람들이 푸른 손들의 꽃밭을 헤집다가 제각기 빈손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아무도 자신의 손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등 뒤에서 무리를 잃은 재두루미 홀로 먹을 것 없는 땅을 한사코 헤집던 봄날이었다
꽃밭에서 /김덕성
모퉁이 꽃밭에
피어 있는
한 송이 백일홍
하늘을 품고
곱게
웃음 지우며 반긴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반갑게 다가서다
내가 좋아 하는
아주 엷은 분홍색
그 고운
얼굴을 본다
방끗 웃는
미소에
나도 살짝
미소를 지우니
온 세상은 하늘나라
튜울립 꽃밭 /김영남
아이들이 울고 있다
소리 없이
빨갛게 노랗게
난 그 아이들을 달래고 있다
동색으로 울고 있는 것들을
아니 무더기로 우는 것들을
그러나 내 노력 효험 없어
꽃밭이 더 시끄러워지고
자전거 세우고 소녀 한 명이 내린다
여기저길 기웃기웃하더니
튜울립꽃 한 송이 꺾는다
아이들 울음이 뚝 그친다
그러고 보면 이 세상 애증은
저 튜울립 꽃밭에서부터 출발한 거고
내 사춘긴 그 소녀 자전거에서 내린 것
소녀가 다시 자전거에 오른다
아이들도 다시 울기 시작한다
나만의 꽃밭 /송정숙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에 텃밭 생기고
예쁜 말을 들으면 그 밭에
씨앗이 자라고 꽃피우니
우리 마음자리, 작은 텃밭
꽃밭으로 만들자
허망함은 친구처럼
늘 곁에 머무는 것
겨울에 물이 흐르면
얼음이 얼지 않듯
좋은 말을 담고 또 담아
꽃이 져도 꽃망울을 틔우자
꽃밭에서 /송찬호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겠다
바지랑대 끝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김선우
보라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
을 조금 찢어 입 속에 넣고 우물거린다 염소의 몸 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
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나오
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망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
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내 고향은 검은 염소의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
과 혼열이어서 나는 손톱니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손으로 무른 밥을 먹
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
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새 나를
잊었지만, 괜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
렸어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거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
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상사화 1. 꽃밭에 누워 /여울 김준기
꽃밭에 누워
주홍글씨로 쓴 전설을 읽는다
찬 눈 땅 속에 엎드려 익혀낸
연둣빛 풀잎으로 나와서
장미보다 더 붉은 정열로 다가올 그대를 기다리며
한 여름 불덩이 같은 해와 버티었다
제풀에 햇살이 거두어지고서야
붉게 타지 못해
분홍으로 다가오는 그대
미처 맞이하지 못하고 떠나는
그처럼 푸르렀던 풀잎을
꽃잎 그대는 생각이나 하는가
잦아드는 풀잎 안타까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채 익지 못해 설익은 분홍 입술 내밀고
초록 드레스 걷어 올리는 그대를 향해
애타게 손짓하는 꽃잎을
풀잎 그대는 생각이나 하는가.
살피꽃밭 /장하빈
저녁밥 짓는 연기 탈래탈래 돌아가는 골목길
눈에 자꾸 밟히는 꽃밭 있네
이 빠진 사발과 깨진 접시, 빈 술병과 찌그러진 깡통
집 나온 갖가지 살림살이, 돌담 아래 납작 엎디어
길과 빈터 아우르는 꽃밭 있네
꽃씨 뿌려본 사람들은 끄덕이지
골목골목 등불 켜는 꽃밭 있어
이웃끼리 울타리 갖고 다투는 일 없는 것을
조붓한 길모퉁이 접시꽃 봉선화 살사리꽃 피고지고
하늘과 땅, 빛과 소리의 경계 스러지는 것을
꽃밭을 바라보는 일 /장석남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면,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온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국화꽃밭에서 /최영희
가을날, 국화꽃
서리 같은 향기로 피었다
세 명의 여류 시인
머-언 길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서정주님의 그때 그 누님처럼
국화 꽃잎 속, 앉아 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라고 노래한
미당 서정주님의,
노오란 국화 향기 속
머-언 산으로부터
시인의 80%를 키웠다는
바람은 불고
우리는 여기, 다시
그리움을 노래하는
고독한 시인들,
그 남자의 꽃밭 /신미애
그의 집엔 꽃이 피지 않는다 친구들이 몰려와 사라진 글라디올러스나 장미를 들먹거리면
시큰둥하게 기억이 잘 안 나, 그렇다면 수국이나 목련을 심지 그래, 바빠서 나중에… 그는 말
을 흘린다
그의 꽃밭은 정말 사라졌을까 눈부신 꽃의 모가지가 어른거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그는 커튼
을 친다 언제부턴가 햇살을 자르는 버릇이 생겼다 식탁, 소파, 침대에선 꽃향기가 나지않는다
너무 조용해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공기가 부딪히는 소리, 맥박소리, 자박자박 어둠
이 걸어오는 소리, 거실에 무성한 말만 떠다닌다
얼마 전까지 그는 완벽했다 넘쳐나던 웃음과 나른하게 들뜬 공기를 믿었다 이름을 지우니
웃음도 차가워졌다 안녕! 붉은 입술이 가버렸다 갑자기 길이 끊어진 느낌, 말이 짧아지고 목
덜미가 길어졌다 입술에 찍힌 무늬가 희미해졌다 시간이 고인다 술잔을 기울이면 까르르 웃
음소리가 쏟아진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하며 소파에 쪼그려 눕는다 벨은 울리지 않는다
꽃밭에서 /박영희
봉선화 분꽃 피어 있는 꽃밭에서
스무살 시절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꽃밭 가득
온통 꽃들뿐이었습니다
꽃대도 이파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서른을 생각하니
피어 있는 꽃들 어느덧 나이를 닮아갑니다
진분홍 봉선화는 나비를 부르고
코스모스는 잠자리를 부릅니다
잠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구름인 듯 바람인 듯
쓸쓸하게 흘러가는 마흔,
마흔을 생각하니 옛사랑의 그림자가
꿀벌들처럼 잉잉거리며 꽃밭 주변을 맴돕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요
쉰은 온데간데 없고
어느새 예순이 되어버린 나는
꽃보다는 씨앗에 눈이 먼저 가는 겁니다
꽃 지는 건 두렵지 않으나
씨앗들 썩을까봐 장마가 염려되는 겁니다
오늘은
꽃밭에서 한 생애를 다 살아버렸습니다
꽃밭과 무덤 사이 /배옥주
꽃이 울음을 터트리는 사이, 씨방이 첫웃음을 퍼뜨리는 사이, 서로 다른 꽃말이 채식주의에
관한 잡담을 나누는 사이, 꽃밭이 꽃숙회를 편애하는 사이, 암술이 마리화나를 들이키는 사
이, 중독된 꽃뱀이 꽃그늘에 안기는 사이, 잎맥이 빗방울을 따라 뒷걸음치는 사이, 꽃잎이 꽃
가루 알레르기를 증오하는 사이, 꽃밭과 무덤 사이, 출렁! 구름이 다리를 건너뛰는 사이
흰개미들이 무덤을 파고 제국을 건설하는 사이, 무덤에서 태어날 장정들이 하루 만에 늙어
버리는 사이, 짚으로 허공을 내리치는 사이, 벼락 맞은 무덤이 환호하는 사이, 눈에 묻힌 무덤
과 눈보라가 맞닥뜨리는 사이, 교미 중인 수컷머리가 얼어붙는 사이, 독약을 삼킨 봉분들의
닿지 않는 눈웃음 사이, 세네카가 누운 음지의 눈밭이 녹지 않는 사이, 무덤과 꽃밭 사이 툭!
쇠비름이 호미의 언 목을 꺾는 사이
봄과 겨울 사이, 중력이 추에 걸리는 사이, 봄이 깃털을 치며 신방을 차리는 사이, 겨울이 긴
목 화병에 늘어진 목을 담그는 사이, 구름과 다리가 결별하는 사이, 대롱거리는 꽃대궁이 무
덤 위로 떨어지는 사이, 꽃밭과 무덤이 사뿐! 자리를 바꾸는 사이,
눈 깜빡할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