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기산혼
혈리는 유현강의 안위가 걱정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무거운 소리
로 말했다.
[소궁주, 나는...... 이제 독기가 많이 가신 것 같소이다.]
유현강은 이미 영마의 곁으로 다가가 있었는데 혈리의 말을 듣는 순
간 고개를 돌리다가 갑자기 말등에 올라탔다.
[세상에 독기가 저절로 풀어지는 독이 어디 있단 말이오. 혈리는 명
심해 두시오. 이 유현강이나 금벽궁은 당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오.]
초몽평은 유현강이 말에 오르는 것을 보자 당황한 소리로 외쳤다.
[유공자, 당신...... 당신은 어디로 가려는 건가요?]
그녀의 음성에는 우수와 고독이 가득 차 있었다. 유현강은 차분한
음성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초낭자, 당신은 내가 어디로 가려는지 모르지는 않을 게요.]
초몽평은 유현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처량한 목소리로 나직이 말
하였다.
[저는 제 생각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며, 제발 당신이 그 곳으로 가
시지 않기를 바래요.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나도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유공자, 제가 풍하령에서 드린 말씀을 당신은 기
억하고 계시나요?]
그녀는 말 앞으로 가서 섬섬옥수로 말고삐를 잡고 애틋한 미련이 가
득한 눈빛으로 유현강을 주시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녀는 그런 상태로
있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죽음이 도사리는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 싫어
하는 심정...... 그것을 어찌 미련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으랴. 싸늘한
밤 공기는 그녀의 얼굴을 덮었고 희미한 달빛은 머리칼이 흩날리는 그
녀의 앞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고 이윽고 수
정같이 맑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유현강은 말 위에 올라
탄 채 묵묵히 초몽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에 이슬
같은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잔잔하던 마음에 파문이 일었
는지, 그는 마음속으로 괴로움을 씹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음성은 여
전히 차분하기만 했다.
[초낭자, 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소. 그리고 당신도 내가 한 말을
부디 잊지 말기를 바라오.]
초몽평은 처량한 안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유공자, 저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요.
가겠어요. 저도...... 당신과 함께 가겠어요.]
혈리는 큰 눈으로 줄곧 유현강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의 눈빛에 격
동의 빛이 가득한 것을 보아 이 순간 그가 진심으로 감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돌리더니 나무 밑동을 잡고 일어섰
다.
[소궁주, 금벽궁에 혈리 하나가 없어졌다고 별로 영향받을 일은 없
소이다. 그러나 당신이 없어지면 금벽궁도 따라서 멸망하게 되니......
이 혈리가 살아 있다손 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이까?]
유현강은 냉담하게 웃었다.
[혈리, 당신은 이 영마가 천하에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소?
유현강은 백검영마의 주인이오. 당신은 내 말을 새겨 두기 바라오.]
초몽평을 돌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초낭자, 나와 함께 갔다가 만약에 이 유현강이 패하게 된다면 어찌
하려고 그러는 것이오? 더우기 만유보는 공연히 강적을 하나 더 만들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오.]
[몰라요. 난 몰라요!]
초몽평은 애교 띤 어조로 어리광을 부리듯 떼를 쓰는 것이었다. 그
녀의 예쁜 얼굴 위로는 이미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초남
안은 사랑하는 딸의 그런 처량한 얼굴을 대하게 되자 가슴이 찢어질 것
만 같아 침통한 음성으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유공자, 노부는 강적을 하나 더 만드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네.]
유현강은 흠칫했다가 돌연 손을 들어 초몽평의 수혈(睡穴)을 가볍게
찔렀다. 그리고 즉시 말고삐를 늦췄다. 말은 히힝, 하고 길게 울음소리
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하하...... 초선배님, 나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방울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허공을 가르는 화살처럼 말은 갑자
기 속력을 내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백검영마의 모습은 순식간에 짙은
야색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혈리의 큰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괴었고,
유현강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순간 뜨거운 눈물이 비가 쏟아져
내리듯 흘렀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궁주에게는 끊임없이 액운이 이어지는군! 어린 나이에...... 궁주가
그런 일들을 얼마나 감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초남안은 땅에 쓰러진 채 깊은 잠에 빠져 든 딸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방울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주위에는 만유보의 장정들이 우두커니 지켜서 있고 땅바닥에
는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밤이 깊어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몸에
밤이슬이 촉촉히 내렸다. 초남안은 허리를 굽혀 딸아이를 일으켜 안았
고, 혈리는 나무를 의지하여 힘겹게 일어났다. 주위에 둘러선 장정들은
모두 무거운 심정으로 묵묵히 보 안을 향하여 몸을 돌렸다. 달은 중천
에 떠올랐고 달빛은 휘영청 밝았다. 하지만 비록 고요 속에 월색(月色)
이 좋은 밤이었지만 어쩐지 서글픈 기분만 들었다. 정녕 처량한 밤이었
다.
풍하령 뒤로 굽이굽이 석령(石嶺)이 가로놓여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석령은 오랜 옛날 청룡과 황룡이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누느라 그
만 하늘로 올라갈 시기를 놓치고 옥황상제의 버림을 받아 돌로 변한 것
이라고 한다. 그 모습이 하도 괴이하여 보는 이들이 절로 얼굴을 붉히
곤 하는 것이었다. 석령의 양쪽에는 단풍나무가 있어 지금은 한잎 두잎
단풍나무의 낙엽이 석령에 떨어져 길고도 긴 석령 전체를 붉은 길로
만들었다. 그리고 달빛이 석령 위를 비추고 있어 석령 둘레를 온통 붉은
그림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무슨 괴이한 일일까? 석령 위 높이 솟아오
른 바위에 홍의를 걸친 소녀 하나와 은발의 외눈노인 하나가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두 사람 얼굴은 똑같이 엄숙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두 사
람은 그곳에서 무슨 중대한 일을 논의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돌연
청아한 말방울소리가 밤 공기를 가르며 석령 위로 들려 왔다. 홍의소
녀는 말방울소리를 인식했는지 흠칫 놀라 안색이 변하여 즉시 앞에 있는
외눈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하세요. 줄 테에요, 안 줄 테에요?]
외눈노인이 무거운 소리로 말을 받았다.
[어디에 쓰겠다는 건지 알려 주지는 않고, 게다가 혈교(血蛟)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말해 주지도 않으면서......]
홍의소녀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건 제 자신의 일이에요. 소저가 오시면 제가 그분에게 직접 알려
드릴 것인데......]
노인은 외눈을 크게 떴다.
[아니, 소저께선 우리 세 사람을 보내 그를 추적하라고 하지 않았
냐?]
홍의소녀는 약간 화내는 시늉을 해 보이며 안타깝다는 듯 발을 굴렀
다.
[몰라요, 몰라! 빨리 내놓기나 하세요. 소저가 오신다 하더라도 당신
에게 문책을 하지 않도록 해드릴 게요. 그러면 되지 않아요. 모든 것은
이 염홍이 책임지겠어요.
[염홍, 이건 우리 붕성의 제일 중요한 일이라 절대로 네 생각대로만
행동해선 안 돼. 일이 중대한 만큼 깊이 상의해 볼 일이지 화를 낼 게
뭐 있냐?]
방울소리는 점점 분명하게 들려 오고 있었다. 염홍은 다급했다.
[당신들이 영마를 놓쳐 버렸으니, 흥! 나는 두고 보겠어요. 소저가 오
시면 어떻게 답변을 하시는가 이 염홍은 똑똑히 듣겠어요. 한 마디도
거들어 주지 않겠어요. 주기 싫으면 그만둬요. 당신은 도와 주는 사람
하나 없이 난처한 입장을 어떻게 넘기는지 한번 볼 테니까 말이에요.]
외눈노인의 안색이 홱 변하면서 외눈에 불빛이 번쩍했다. 그러나 화
를 내려다 말고 갑자기 참아 버리며 웃음을 지었다.
[염홍아, 우리가 힘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실은 유현강이
그곳으로 지나가지 않았네. 그러니 소저 앞에서 우리를 위해 좋은 말을
좀 해다오. 소저는 누구보다 너와 설영이를 가장 귀여워하니 말이네.]
말을 마치자 손을 품 속에 넣어 약을 꺼내려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말방울소리가 크게 울리며 풍하령 위로 백마 한 필
이 올라섰다. 외눈노인은 그것을 보자 흠칫하면서 순간 품 속에 넣었던
손의 위치를 바꾸었다. 백마는 영 위로 올라선 뒤 지체없이 두 사람에
게 다가갔다. 홍의소녀는 이런 상황을 대하게 되자 내심 다급했다. 외
눈노인이 이때 품 속에 넣었던 손을 꺼냈다.
[약은 누구에게 주려고 그러는 거지?]
동시에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염홍은 약을 받아 들었다. 영마는
마침 두 사람과 이 장 떨어진 거리에 와 있었는데, 염홍이 대뜸 손
을 들어 유현강에게 약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받아요.]
말소리와 함께 한 가닥 녹색 선이 그어지면서 유현강의 앞으로 날아갔
다. 그런데 누가 알았으랴! 유현강은 그것이 해독약인 줄만 알고 녹색
환약을 식지와 중지 사이에 끼어 받았는데 다음 순간, 환약이 딱 갈라
지면서 손가락 사이가 저려 오는 것이 아닌가! 그의 안색은 즉시 변했
지만 환약을 버리지 않았다. 분노의 빛을 띠며 환약을 끼고 있는 두 손
가락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하하......]
외눈노인이 별안간 소리 내어 웃었다.
[유현강, 어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염홍은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바싹 죄어 드는 것 같아 날카롭게 외쳐
물었다.
[제백원(齊伯元), 당신이 내게 준 것은 진짜 해독약이 아니란 말인가
요?]
외눈노인 제백원은 득의한 빛으로 길게 웃었다.
[하하...... 물론 아니지. 그 해독약은 소저께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약인데 어찌 함부로 남에게 내 줄 수 있단 말인가? 노부가 준 약은 살
속에 파고들어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는 기독(奇毒)이지.]
염홍은 안색이 크게 변하여 소리 쳤다.
[제백원, 당신은 대막붕성의 명예와 위신을 한꺼번에 망쳐 놓았으니
단단히 각오해야 될 거예요!]
말을 끝낸 뒤 미안하고 부끄러운 표정으로 유현강에게 고개를 돌렸
다.
[당신은...... 그래도...... 이 염홍을 믿을 수 있나요?]
그녀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유현강은 안색을 침중하게 굳힌 채 제
백원을 쳐다보고 한 번 냉담하게 웃어 보이더니 염홍에게 눈길을 돌렸
다.
[낭자, 이런 일은 나도 진작부터 짐작했던 것이오. 하지만 한 번
시험해보아야겠다고 느꼈소. 왜 그 런지 아시오? 그건 혈리의 상세가
위급하기 때문이오.]
말소리는 너무나 차분했다. 제백원의 안색은 이 순간 약간 변하는
것 같았다. 염홍이 급히 소리 쳤다.
[유공자, 빨리 손에 든 것을 버리세요!]
유현강은 냉랭하게 웃다가 환약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이 약은 붕성에서 왔으니 응당 붕성으로 돌아가야 될 거요.]
이어 제백원에게 물었다.
[이제 귀하는 어찌 하겠소?]
제백원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해독약을 주겠소. 하나 당신의 독을 해소시키는 것은 아니오.]
유현강은 냉담하게 웃었다.
[설사 본인의 독을 해소시키는 약을 준다 하더라도 귀하의 운명은 이
미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이오.]
제백원은 냉소했다.
[노부는 다만 붕성의 위신을 수호하려는 것뿐이오.]
염홍이 화난 소리로 외쳤다.
[붕성을 위한다면 당신은 그런 수단으로 사람을 해치지 말았어야 했
어요.]
유현강은 제백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냉랭하게 웃었다.
[만약 귀하가 진정으로 붕성의 위신을 지킬 생각을 가지셨다면 이곳
에서 본인을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기 바라오.]
제백원의 안색은 다시 변했다. 그는 품 속에서 황색의 환약을 꺼내
유현강에게 던져 주면서,
[만약 당신이 다시 오면 나는 당신의 몸에 퍼진 독을 제거해 주겠
소. 그런 다음에, 하하하...... 우리는 서로 자웅을 겨루어 보는 것이
오.]
하고 커다랗게 웃어 젖혔다. 유현강은 손을 내밀어 해독약을 받아들
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만하면 당신의 웅심도 보통이 아니구려. 당신의 무공
이 남천문의 사람들을 능가하길 바라오.]
말을 끝내자 말머리를 돌려 석령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제백원은 멀
어져 가는 유현강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순 흠칫 놀란 듯 눈살을
떨었다. 유현강의 등뒤에서 적혈검을 본 것이었다. 그는 적혈검을 응
시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과연 백검이구나!]
염홍은 유현강의 뒷모습을 응시한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한 쌍의 잘 어울리는 남녀가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하나는 유현강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녀의 소저
였다.
유현강은 혈리의 독을 풀어 주는 것이 시급하여 자신이 중독된 것은
까맣게 잊은 채 말을 달려 풍하령을 내려갔다. 말은 번개같이 달려갔다.
고요한 밤하늘의 적막을 깨뜨리고 말발굽소리와 청아한 말방울소리가
함께 퍼져나갔다. 붉은 단풍잎이 잔뜩 깔린 밤길은 조용하기만 했다.
이때 갑자기 전방 삼 장 밖에서 귓전을 진동시키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하하하...... 꽤나 멀리 그리고 빠르게도 달려왔구려. 그러나 당신은
운비의 잠재력에 소홀하지 말았어야 했소. 하하하......]
다음 순간 오른편에 있는 나무 뒤로부터 흑건을 쓴 복면인이 칠팔 명
나타났다. 유현강은 가슴이 섬뜩하여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백마는 앞발을 번쩍 쳐들더니 달리던 기세를 급히 멈추었다. 유현강은
빛나는 시선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차츰 냉엄한 빛을 떠올렸다.
[하하...... 알고 보니 소화단에서 오신 손님이구려. 오래 기다리게 해
서 안됐소이다.]
호방한 웃음소리와 함께 싸늘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유현강은 백마 앞으로 내려섰다. 그런데 그는 땅에 내려섰을
때 몸이 갑자기 비틀거렸으며 중심을 잃은 듯 두어 걸음 옮기고 난 다
음에야 바로 섰다. 상대방 중 두 노인이 그를 보고 동시에 희색을 떠올
렸다. 오른쪽의 한 노인이 냉랭하게 웃었다.
[하하...... 유대협은 말을 너무 오래 탔기 때문에 땅에 내려서는 습관
이 잘 안 된 것 같구려.]
말하는 노인은 장작개비처럼 마른데다가 납작한 코에 부채같이 큰 귀
가 눈에 몹시 거슬렸지만, 두 눈에는 강렬한 신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매부리코에 닭눈을 가진 비대한 노인이 있었는데 이상하
게도 얼굴에 기가 없어서 회백색으로 보였다. 그는 음산한 눈빛을 발
하고 있었다.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으므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었다. 유현강은 냉소를 쳤다.
[두 분은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 소화단에서 이름깨나 있는 인
물이라 생각되는구려? 하하...... 그러시다면 불초가 비틀거리는 원인을
두 분은 벌써부터 알고 계실 거요.]
깡마른 노인이 냉소하며 말을 받았다.
[유대협께선 이 고골수(枯骨首)와 백면귀(白面蚣를 너무 높이 평가한
게 아니오?]
유현강은 음침하게 웃었다.
[귀하는 짐짓 겸손한 척하지 마시오. 만약 두 분께서 나의 내력을 몰
랐다면 아마 오늘 밤 내가 풍하령 길목을 수백 번 지나간다 하더라도
서로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오. 하하...... 정말이지 소화단의 친구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무림 정의를 위호하는지 모르겠구려.]
말 속에는 풍자의 뜻이 충만되어 있었다. 고골수와 백면귀의 얼굴에
는 동시에 분노의 기색이 떠올랐다. 백면귀가 음침한 소리로 말했다.
[유가야, 너는 말하기에 앞서 먼저 눈앞의 처지를 생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유현강은 사방을 훑어보다가 경멸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유아무개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의 목숨을 노
리고 온 운비 휘하의 사람들에게 실망을 시키지 않을 것이니, 여러분은
안심하고 손을 쓰시오.]
고골수와 백면귀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눈짓을 교환한 뒤 곧 앞으
로 한 걸음씩 걸어나왔다. 고골수가 냉랭하게 말했다.
[유현강, 지금은 그렇게 호언장담할 때가 아니다!]
유현강은 혈리의 안위가 걱정되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으므로 대뜸
두어 걸음 앞으로 나갔다.
[두 분께선 시간을 끄실 필요가 없소.]
백면귀는 성미가 급한데다가 유현강이 걸음을 내걸을 때 약간 비틀거
리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상대방을 처치하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옳은 말이다. 자, 그럼 초식이나 받아라!]
외침소리와 함께 대뜸 추산진해(推山土眞海)의 초식을 펼쳐 공격해
왔다. 초식은 민첩했으며 공력은 칠교요호보다 한층 뛰어난 것 같았다.
유현강은 상대방의 장세에서 힘으로 맞서려고 한다는 것임을 알아채고
냉소를 치면서 오른손을 들어 맞서 나갔다. 두 사람의 거리는 이 장이
나 되었지만 장풍은 극히 빠른 속도로 부딪쳤다. 쾅! 폭음이 산을 진동
시키는 가운데 이 장 둘레에 있는 단풍잎이 모두 날아가 없어져 버렸
다. 붉은 잎사귀들도 격렬하게 맴도는 힘의 기류에 휘말려 삼 장 가량
이나 높이 솟아올랐다. 백면귀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유현강도 몸
을 가누지 못하고 연방 세 걸음이나 밀려났다. 이런 상황은 소화단 사람
들의 상상을 크게 벗어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흠칫했다가 모두 희색
에 찬 빛을 떠올렸다. 유현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속으로 놀라움
을 금치 못했다.
침기산혼(沈氣散魂)의 독은 정말 비할 데 없이 무섭구나. 나는 다만
두 손가락에 잠깐 끼었을 뿐인데 이토록 두드러지게 그 영향이 나타나
다니! 나의 공력이 어찌 이토록 많이 감소되었을까?
백면귀는 뜻밖의 상황을 접하게 되자 기고만장하여 대소를 터뜨렸
다.
[하하하...... 나는 유대협의 공력이 하늘을 치닿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다지도 보잘것 없다니. 하하...... 나는 당신이 그런 공력으
로 운비의 세력을 궤멸시키려 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구려, 하하...
...]
비웃음이 잔뜩 서려 있는 말투였다. 유현강은 냉담하게 웃었다. 그
러다가 눈가에 짙은 살기를 떠올렸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차분
하게 웃고 있었다. 고골수가 눈을 껌벅거리다가 유현강을 향해 경멸에
찬 웃음을 보냈다.
[유대협, 당신의 공력은 그래도 꽤나 높구려. 허허......]
유현강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고 나서 냉랭하게 한 마디 했다.
[하지만 당신들은 잘못했소. 불초가 숨이 끊어질 때, 그때 나타났어
야 했소!]
백면귀는 조금 전의 일전에서 우세를 보이자 대뜸 몸을 날려 일 장
이나 다가와서 얼굴색을 다시 굳혔다.
[흐흐...... 노부는 성미가 급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기다릴 수는 없소.
미안하지만 먼저 죽어 주는 것이 옳겠소......]
말을 하면서 암암리에 쌍장에다 공력을 모았다. 유현강은 비웃었다.
[그렇지, 귀하가 나를 처치하기만 하면 하룻밤 사이에 무림에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될 것이니 말이오. 하하...... 그러니 목숨을 걸고 한번 시
도해 볼 만도 하시겠지.
[잔소리는 치워라!]
백면귀는 눈에서 사나운 독광을 쏟아 내며 쌍장을 휘둘렀다. 눈 깜
짝할 사이에 그는 잇따라 칠팔 장이나 공격해 냈다. 장풍은 아까의 흉
맹함에다 날카로움까지 곁들였고, 휙, 휙, 하는 바람소리는 사람의 간
담을 서늘케 하였다. 유현강의 눈에는 살기가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는 즉시 반격을 않고 오른발로 경쾌하게 땅을 내디딘 채 몸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그의 체구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질풍같이 오 척
이나 옆으로 빠져 나왔다. 동시에 유현강의 입에서 냉엄한 비웃음소리
가 터져 나왔다.
[하하...... 귀하는 아무래도 먼저 대가를 치러야겠구려!]
무림에는 명리를 다투는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고골수와 함께 온
복면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보자, 자기들이 너무나 조심한
나머지 유현강을 제거함으로써 강호에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절호의 기
회를 놓쳤다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유현강이
오늘 밤에는 영락없이 패하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한결같이 모순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백면귀가 유현강의 손에 패하되 유현강의 공력이 그리 높지 않기
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백면귀는 유현강이 반격하지 않고 피하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던 터
라 초식에 힘을 너무 가한 나머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기우뚱
했다. 이때 유현강의 얼굴에는 느닷없이 살기가 엄습해 오고 있었다.
백면귀는 자기가 허탕을 쳤다고 생각되자 급히 오른발을 뒤로 내질렀
으며, 그와 동시에 왼발 끝으로 땅을 찍고 몸을 빙그르르 돌리면서 산
천이 떠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러고는 상대방의 위치도 판단하지
않은 채 필사적으로 십팔 장이나 쳐 댔다. 왜냐하면 그가 십팔 장을 쳐
낼 때 암암리에 유현강이 서 있을 방위를 짐작하고 펼쳤는데 유현강의
모습은 종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고골수의 놀란
외침소리가 들렸다.
[머리 위! 머리 위! 앗! 염양칠......]
백면귀는 강호에 오랫동안 몸 담아 온 인물이니 만큼 적을 상대하는
경험도 풍부했다. 그는 머리 위란 말을 듣자 즉각 몸을 낮추고 쌍장을
쳐들어 위를 공격했다. 그의 이런 동작은 완전히 본능에 의한 반응이
었다. 그의 반응은 비록 빨랐지만 그가 머리를 쳐들어 위를 올려다보
았을 때는 이미 허공에서 큰 황색 동그라미가 아래를 향해 내리눌러
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는 공력을 쏟아 내기는커녕 공포에 질려 비명
만 질렀다.
[앗! 염양칠환......]
다음 순간 말소리는 처절한 비명으로 변했다. 경미한 바람이 장 내
를 쓸고 지나가자 땅바닥에는 백면귀의 시체가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그의 잿빛 얼굴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찍혀 있었는데 창백한 얼굴빛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무서워 보였다. 이런 모든 변화는 극히 짧은 순간에
일어난 것이었다. 유현강은 표연히 땅에 내려섰으나 내려선 다음 몸이
한 번 흔들거렸다. 그는 가슴에 격렬한 기복을 일으키며 호흡이 급박
해지는 것을 느꼈으며, 준수한 얼굴은 금세 창백하게 변했다. 고골수는
놀란 눈빛으로 죽어 있는 백면귀 얼굴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유현강에
게 눈길을 옮겼다. 이때 고골수는 유현강의 신변에 이상이 있음을 눈
치 챘다. 고골수의 음침한 얼굴에는 악독한 빛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조금 전에 떠올랐던 공포의 기색은 즉시 사라져 버렸다.
[유현강, 너도 이제 마지막이 된 모양이구나......]
그러다가 갑자기,
[우리는 모두 한꺼번에 덤비자!]
하고 뒤를 향해 외쳤다. 이어 그는 먼저 몸을 날려 유현강에게 덮쳐
들었다. 칠팔 명의 복면인들도 그를 따라 일제히 노성을 지르며 유현강
에게 달려들었다. 유현강은 몸을 날려 피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공력을 일으킬 때마다 독상이 악화되니 아무래도 속전속결의 방법을
써야겠구나!
그는 이런 생각을 하고 즉시 몸을 움직여 삼 척 가량 옆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고골수의 장력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려는 듯 유도했다. 고골수
는 앞서 백면귀가 당한 본보기가 있기 때문에 유현강이 몸을 날리는 순
간 무턱대고 덮치지 않고 공력을 하반신에 모았다가 발길질로 공격해
갔다. 이때 칠팔 명의 복면인도 사면팔방에서 공격해 그야말로 그들의
공세는 장영으로 담장을 이루고 검막으로 허공을 뒤덮었다. 휙휙, 하
는 바람소리와 번뜩이는 도영(刀影)은 귀신의 얼이라도 빼앗을 듯 눈을
어지럽게 하고 심신을 흐트려놓았다. 유현강의 철석 같은 간담도 이
때는 약간 진동되었다. 그는 사방에서 장풍과 검영이 덮쳐 드는 순간
진기를 한 모금 들이마시고 급히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고골수는 비
할 데 없이 교활한 사람인지라 이런 처지에 놓여서도 태연자약하게 오
척이나 몸을 솟구쳐 물러났다. 그리고 유현강이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큰 소리로 외쳤다.
[염양칠환이다!]
그의 이런 외침은 오히려 복면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염양칠환이란 말에 복면인들은 물러날 생각은 않고
저마다 두려움에 고개를 쳐들어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허공에는
홍색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있었다.
[앗, 염양칠환장!]
누군가의 입에서 다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그라미가 내리누
르는 속도는 아까와 같이 빠르지 못했고 또 그려진 형상도 반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그 반밖에 이루어지지 않은 홍색 동그라미 아래에서
세 차례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으악! 아...... 악!]
땅바닥에는 세 구의 시체가 더 늘어났다. 그때 백영이 번뜩이면서 유
현강이 땅으로 내려섰다. 그는 내려선 뒤 사오 보나 밀려난 후에 몸을
바로세웠는데, 표정은 매우 힘에 겨운 듯했다. 고골수는 미리부터 계산
하고 있던 터라 유현강이 내려서자 이미 쌍검을 가슴 앞에 모았으며,
그가 막 몸을 가누었을 때 고함을 지르면서 공격했다. 유현강은 이미
진기가 많이 소모되어 공력을 끌어올려 힘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그
는 가슴이 섬뜩하여 양 발로 지면을 찍으면서 급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애석하게도 그만 한 발 늦고 말았다. 펑!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유현강은 상대방의 장력에 어깨 부근을 얻어맞고 칠팔 척이나
밀려났다. 그는 어느 큰 단풍나무에 등을 부딪고 멈추어 섰다. 영준한
모습은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하게 변했으며 입에서는 이미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골수가 흉측하게 웃었다.
[흐흐흐...... 유대협, 당신이 이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으리라곤 생
각하지 마시오.]
유현강의 눈에서는 여전히 살기가 번뜩이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내가 애초에 말했듯이 당신들은 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었소.]
고골수는 옮기던 걸음을 멈추며 턱을 들어 네 복면인에게 함께 덤비
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유현강은 이때 암암리 적혈검을만지며 냉담한
웃음을 흘려 냈다.
[친구들, 어쩌면 지금이 바로 당신네들이 득의해 하는 마지막 기회
인지도 모르오.]
이때 하늘 저쪽에 수많은 거붕(巨鵬)들이 구름떼처럼 날아 오는 모습
이 보였다. 그 수효는 천 마리 만 마리도 넘어 보였고, 새들의 무리는
모두 이곳 풍하령을 향해 날아 오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방은 유현강을 복판에 두고 반원형으로 둘러싼 채 천천히 거리
를 좁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 곁눈질로 상대방에게 암시해
보이기만 할 뿐 어느 누구도 감히 앞서 나가려고는 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유현강의 냉담한 표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
다는 잠재적인 압력을 느꼈기 때문이이다.
[유대협, 노부는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소. 그
이유는 당신이 죽어서야 알게 될 것이오.]
고골수가 음침하게 웃었다. 유현강은 여전히 단풍나무에 몸을 기댄
채 양 손을 자연스럽게 내리고 침착하게 서 있었다. 그는 조금도 두려
워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고 냉담하게 웃었다.
[하하...... 나는 아직도 이렇게 서 있지 않소?]
고골수는 암암리 공력을 일으킨 채 냉소를 쳤다.
[곧 쓰러지게 될 거요.]
유현강은 내심 사람들이 다가올 거리를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겉
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않은 채 여전히 냉담하게 말을 받았다.
[하하...... 여러분이 다가올 속도를 추측해 보니 아직도 먼 것 같
소.]
고골수의 얼굴이 별안간 붉어졌다. 눈에선 흉측한 광채가 쏟아져
나왔으며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가 다시 풀어졌다. 그는 가까스로 분노
를 눌러 참으며 교활하게 냉소를 쳤다.
[밥도 빨리 지으려면 선밥이 되는 법, 우리는 때를 기다리고 있소. 하
지만 우리가 당신을 처치하러 온 만큼 이르나 늦으나 죽어 주셔야 하겠
소. 유대협, 그렇지 않으시오?]
이러는 사이에도 중인들은 삼 척 가량이나 더 다가들고 있었다. 이제
유현강과의 거리는 팔 척도 채 되지 않았다. 유현강은 살기를 떠올렸다
가 다시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귀하의 견해가 옳소. 그런데 아깝게도......]
여기서 말을 멈추고는 나머지 공력을 암암리 오른손에다 모았다. 유
현강이 말이 없자 고골수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뭐가 아깝단 말인가?]
이 무렵 그들과 유현강과의 거리는 불과 오 척밖에 되지 않았다. 까
르르...... 공중으로부터 한 차례 날카롭고 우렁찬 새의 울음소리가 들
려 왔다. 다음 순간 달이 가려지면서 땅에 시커먼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것은 구름이 가린 것이 아니라 새의 무리가 달빛을 가린 것이
었다. 고골수는 흠칫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는데 웬 구름이...... 또 저 새의 울
음소리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고골수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얼굴을 위로 쳐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단풍나무 가지와 잎 사이로 수많은 거붕의
무리가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앞장 선 한 마리의 새는 유독 털과 깃이
눈같이 희었다. 고골수는 가슴이 섬뜩하여 나직이 중얼거렸다.
[붕성백봉이 왔나......]
[붕...... 성...... 백...... 봉!]
음성에는 공포가 가득 서려 있었으나 어두워서 얼굴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이 순간에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복면인의 놀란
외침소리가 막 끝났을 때 공교롭게도 유현강의 입에선 별안간 냉소가
터져 나왔다.
[하하...... 아깝게도 당신들과 나는 거리가 너무 가까워졌소!]
상대방은 이 소리를 듣자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각각 무기를 들어
옆으로 휘둘렀는데, 그 반응의 빠르기는 정녕 탄복할 지경이었다. 하지
만 유현강의 행동은 그들보다 더욱 빨랐다. 상대방은 적혈검이 언제 뽑
혔는지 보지도 못했으며, 펼쳐지는 초식도 다만 눈앞에 한 줄기 광채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으악! 악!]
거의 동시에 몇 차례의 비명이 터져 나왔으며 핏줄기가 뻗쳐 나갔다.
그리고 목이 땅에 떨어져 사방으로 굴러 나가고 있었다. 목 없는 시체
들은 허우적거리며 몇 걸음씩 떼어 놓다가 풀썩, 풀썩, 하고 넘어져 버
렸다. 유현강은 기진맥진한 몸에 과분하게 진력을 다했기 때문인지 비
틀거리며 앞으로 몇 걸음 나간 뒤 몸이 기울었다. 다행히 적혈검을 내
밀어 땅을 짚었기 때문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잠시 후 그는 울렁거리는 심신을 겨우 진정시키고 눈길을 돌려 시체
들을 훑어보았다. 얼굴에는 냉혹한 빛이 떠올랐으며 그는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강호에서 소위 정의를 주지한다는 사람이 또 여덟 명이나 사라졌
군.]
청아한 말발굽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영마가 조용히 다가왔다.
[천경아, 나는 지금 너의 등에 기어오를 힘조차 없구나.]
그의 입가에는 처량한 웃음이 번졌다. 영마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영물이고 또 오랫동안 유현강과 같이 생활해 왔음인지 그런 유현강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청아한 말방울소리를
냈다. 그리고 주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꼬리를 흔들었다. 유현강은
말 안장을 잡고 몸을 일으킨 뒤 검끝에 묻은 피를 옷자락에 닦고 말의
귓전에 속삭였다.
[나를 저 청석으로 데려다 다오.]
영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밖에 있는 좀 낮은 청석으로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유현강은 청석에 오른 뒤 다시 말등에 오르려고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별안간 나무 위에서 새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 왔다. 그리고
광풍이 휘몰아치고 단풍잎이 어지럽게 떨어지더니 단풍나무를 뚫고 잇
따라 검은 그림자가 날아 내렸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