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겸 시인>>
<<정겸 시인의 양력>>
* 본명 : 정승렬
* 1957년 경기도 화성에서 출생.
* 경희대대학원(사회복지학과)졸업.
*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을 통해 등단.
* 시집 : 『공무원』, 『궁평항』
* 2004년 공무원문예대전 시부문 행정자치부장관상.
* 2009년 공무원문예대전 시조부문 행정안전부장관상 수상.
* 현재 :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
<<정겸 시인의 시>>
백밀러 속의 영상/정겸
낡은 승용차 한 대
오르막 산길에 버려져 있다
깊이 패인 헛바퀴자국에서
산길을 오르고 싶은 필사의 흔적을 알 수 있다
번호판은 탈색되어 앞 범퍼에 힘겹게 매달려 있고
투명했던 앞 유리는 병든 폐부처럼 뚫려 있다.
바람이 빠져나간 네 바퀴의 홈에는
거친 황토와 모래알들이 촘촘히 박혀 있다
운전자가 없는 운전석
하이웨이 주유소 상표가 부착된
크리넷스티슈 박스가 구겨져 있다
조수석, 손 달력에는
반라의 여인이 말 잔등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처럼 소주병을 높이 치켜들며 찡긋 웃고 있다
달리는 동안 운전자는
저 여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유혹을 받아 왔을까
깨진 차 유리문으로 차안에 갇혀 있던
욕망의 잔재들이 영혼처럼 빠져 나가고 있다
실명한 양쪽 헤드라이트 앞으로
어둠이 눈치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다
사선으로 깨어진 백미러를 본다
황토 빛 빗살무늬토기 한 점 클로즈업 되고 있다
선線에 대한 기억/정겸
효원공원 앞 스마트 학생복 전시매장
종업원들이 포장지에서
새 교복들을 꺼내어 진열대에 전시하고 있다
투명한 통유리 사이로 ‘라인이 예술이다’라고 쓰인
동방신기의 대형 브로마이드가 환하게 웃고 있다
건물 외벽에는 40대 사내가
탯줄처럼 늘어진 밧줄에 몸을 의지한 채
바람에 흔들리며 창문에 얼룩진 시간의 흔적을 지운다
도로변 전신주를 따라 KT 직원들이
전화선로 위를 조심스럽게 포복하며
오래전에 끊어진 기억과 안부를 이어준다
편도4차선 차도에는 승용차들이
차선을 따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인근 공원에서 날아온 비둘기 한 마리
중앙선을 넘을 듯 말 듯 위험스럽게 기어가고 있는 순간
정지선에 멈춰 있던 검은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황색 선을 넘어 불법U턴을 한다
이어서 금속성 굉음이 들리고
119구급차의 경고음이 요란스럽게 울리며 주위가 소란스럽다
60대 노부부가 학생복이 담겨져 있던 버려진 포장지에
자신들의 삶을 주섬주섬 접어 넣어 리어카에 싣는다
더듬거리며 따라가던 자전거도로 경계선이
어둠 속에서 뚝뚝 끊어진다
평생을 관능처럼 따라다니던 경계선이 사라지자
노부부가 잠시 당황하며 서 있다
까르르, 여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전시매장을 빠져나와
리어카 바퀴가 그려놓은 희미한 선을 따라가고 있다
마음속 무게/정겸
사랑채 벽을 허물고 리모델링을 하던 날
방안의 벽지를 한 꺼풀 볏겨 내자
초배지初褙紙로 사용했던 낡은 신문 속에서
황토가루를 뒤집어 쓴 활자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1970년 4월
서울 마포에 있는 와우아파트가
준공된 지 4개월도 못 버티고 붕괴되었다는 어이없는 기사
외신들은 붕괴 원인에 대하여 부실공사보다는
한여름에도 연탄을 100여장씩 숨겨 보관하는
한국인의 내면적 마음속 무게를 측정하지 못하였고
장롱을 윗목에 배열하는
정서적 마음속 무게를 측정하지 못한 결과
쏠림현상으로 나타나는 하중荷重을
설계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분석하였다.
문득, 결혼 전에 그려 두었던
나의 설계도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았다
두꺼운 백지위에 청색 펜으로 그려진 직선과 곡선
그리고 원형이 섬세하게 조합된 설계도면
길게 늘어진 굴곡의 선이 뚜렷하다
무엇인가 비어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당신과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당신 마음속 무게를 측정한 기억이 없고
당신 또한 내 마음속 무게를 측정한 기억이 없다
어쩌면 당신과 나
언젠가는 워르르 소리를 내며 무너질지도 모를 것이다.
바벨탑의 저주/정겸
타워패리스가 뜨렷이 보이는 행복한 교회 벽면
피터르 브리헐의 명작 바벨탑이
처참하게 붕괴되어 도심의 심장을 짓누를고 있다
강남 구룡마을 재개발 단지에는
건너편 바벨탑에서 쏘아대는 불빛에
검정 비닐을 뒤집어 쓴 움마들이
서로의 몸을 부둥어안고 긴장하고 있다
불도저의 굉음이
낮은 지붕위를 무참히 짓밟고 지나갔다
슬레이트 지붕 사이에 숨겨져 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흙더미 속으로 퇴작되어 갔다
또 하나의 바벨탑이
오만한 몸짓으로 하늘을 오르고 있다
땅바닥과 맞대어 살아왔던
일개미떼와 민달팽이들이
갈 곳을 잃은 채 땡볕에 나뒹굴고 있다
핀자촌을 감싸고 있던 조팝나무꽃잎들이
힘에 겨운 듯 고개를 떨어뜨리며 백기를 냐걸고 있다
바벨탑의 저주는 이미 시작 되었다
까치밥/정겸
늙은 감나무 한 그루
한쪽 팔이 잘린 채 홀로 서 있다
새들에게 짓밟힌 흔적과
날카로운 부리에 찢긴 상처가
옹이 속에서 화석처럼 굳어져 있다
성근 수수울타리 사이로 황소바람 지나갈 때
감나무는 모든 것을 다 내주었다
또 한 차례의 바람이
창호 문을 마구 흔들고 지나갔다
쪼그라든 홍시 하나만은
손에 꽉 쥐고 놓지 않았다
저수지 얼음이 크르렁 거리며 울고
마른 삭정이 우수수 떨어져
사랑채 함석지붕을 마구 두들기던 아침
아버지는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어머니에게 밥상을 슬그머니 물려주었다
밥그릇 귀퉁이에
밥 한 숟갈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부엌문을 닫는 순간
감나무 위에서 까치 한 마리
조용히 홍시를 쪼아 먹고 있었다.
공무원/정겸
그녀는 나를 우측통행자이거나
뒷문 통로와 연결된 지하계단에서 은밀한 거래를 즐기며
꽃 밥을 훔쳐 먹는 언더그라운드 이코노미 정도로 알고 있다
가끔은 건전지를 혹처럼 매달고 있는
낡은 금성라디오로 생각 할 때도 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산불과 홍수가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도
폭설과 태풍이 도로를 끊어 놓아도
가뭄이 들거나 흉년이 들어도
모두가 내 탓이라며 나에게 돌을 던지고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일상의 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리에서 휴지 한조각 주운 일이 없고
집 앞에 쌓인 눈조차 치운 일이 없다
길가에 엎드려 있는 노숙인 에게
동전 한 푼 던져 준 적 없다
그 녀는 내가
모래 바람 부는 황무지 속에서
경운기 한 대 몰고
밥 대신 흙먼지로 배를 채우며
녹색물결을 일으킨 농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오늘은 중국 북동쪽에 있는 내몽고지방에서
황사가 몰려온다고 했다
그녀가 돌을 던질 것 같다
돌 바람 맞고 곰보가 되어 버린 돌하르방
좌측방향과 우측방향으로 갈라진 삼거리 중심에서
오늘도 꼿꼿이 서 있다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이끼 예찬(禮讚)/정겸
조간신문 사회면을 뒤척인다
100여 통의 이력서를 수정(受精)시켜 놓고도
불임(不姙) 시킨 30대 사내
죄책감에 시달리다
18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하늘을 향하여
몸을 날렸다는 기사(記事)
그 아래 화단에서는 붉은색 맨드라미꽃이
지천으로 피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記事)
이름조차 이니셜로 처리된 안개 같은 기사(記事)
문득,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가 궁금해진다
아직까지는 단단한 철재 난간
발밑으로 보이는 풍경이 아찔하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하얀 주차선이 십자가처럼 연이어 그어져 있고
사람들은 그 사이를
하등동물이 되어 꼬물꼬물 기어간다
발코니 문을 열어 본다
한동안 눈이 닿지 못한 틈새에
조그만 모래습지가 생겨나고
푸른 이끼들이 군락을 이루며
악착같이 자라고 있다
반란을 꿈꾸는 여자/정겸
작은딸 대학 진로문제로
아내와 한바탕 서바이벌 게임을 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난타전은
승자도 패자도 없는 휴전중이다
아내는 복수라도 하듯 20여년 전 내게 짜 주었던
털조끼의 실을 풀어내고 있다
한동안 내 가슴을 감싸주었던 몸을 일부가
둥근 실타래로 변신하여 거실 바닥을 뒹굴고 있다
다시 뜨개질을 하는 아내의 손이 다소 거칠어져 있다
손때 묻은 대나무 바늘을 엇대면서
칸칸이 새 집을 짓고 있다
낡은 실 속에 맺혀 있던 찌든 먼지를 삼키며
비집고 비틀면서 이제 겨우 벽돌 한 켜를 쌓아 올렸다
탄력을 잃어버린 느슨해진 털실
이제야 바로 잡겠다는 듯
정사각형의 틀을 촘촘히 엮으가고 있다
저 여자
어쩌면 내 몸을 해체시키고
반란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른다
삼류가 본 삼류들-이재무 시인의"삼류들"을 읽고/정겸
녹산문고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신간 시집코너 앞에서,
나는 본다, 이 무더운 여름에
에어컨의 냉기보다 무수히 쏟아지는 역겨운 시집들을,
누구도 읽지 않은 일류의 시집들을.
한때 가이아의 향기가 흘렀던 이 시집의 종이,
폐지도 되기 전에 벌써
썩은 냄새를 풍기며
한물간 채소처럼 버려지고 있다.
아직도 착각에 빠져있는 배우들이
검정천으로 가려진 무대에서
저희들만의 유령 왕국을 만들고
북을 치고 장구도 치며 공연을 하고 있다.
대본에도 없는 왕을 옹립하고
군주가 되어 옥새도 찍히지 않은
교지를 남발하며
누구는 정승이 되어 우쭐거리고
누구는 남원고을 원님이 되어 주색잡기로 하루를 보내고
누구는 고부군수가 되어 수탈을 일삼고 있다.
누구는 관기가 되어 소모품처럼 노리개가 되었고
누구는 미관말직이라도 얻어 보려고 산해진미를 진상하고 있다.
매관이 성행하는 이상한 왕국
백성들이 이반한 유령 왕국
백색의 양귀비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그 향기에 취해 흔들거리는 폐허가 된 왕국
사방을 둘러보아도 관객은 없다
저희들끼리 웃다가 울다가
박수를 치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공연을 마친 속물들이 가면을 쓰고
굶주린 승냥이로 변하여 먹잇감을 사냥하고 있다.
하늘을 막 날려던 가냘픈 까투리 한 마리
목덜미를 물려 피를 흘리고 있다.
악보 위를 걷는 고양이/정겸
카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도심으로 손돌바람 몰아치자
전선줄은 일제히 발정 난 암고양이 울음 토해냈다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누군가를 흘긋흘긋 훔쳐보며
좀비 영화의 엑스트라처럼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하나 둘 불이 켜지고 있는 베스트실버요양병원
고양이 한 마리 음식물 쓰레기통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가시 덮인 청미래넝쿨 숲을 뚫고
흙먼지 날리는 황토길 달려 왔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짙은 어둠을 밀어 내고 빛을 모았다
크로노스가 작곡했다는 쉼표도 없는 악보 속에서
난이도가 높은 음계 따라 파도를 타며 살아 왔다
아다지오와 안단테가 표시되지 않은 악보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찾아 거친 사막을 가로질러 가야만 했다
삶을 끌고 가던 주파수가 끊겼다 이어지고 다시 끊긴다
희미해지는 전파채널을 잡으려 양쪽 귀와 꼬리를 곧추세워 본다.
음파가 멈춘 난청지대에서 안테나를 조절하며
주파수를 찾고 있지만 이제는 잡음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이다
무뎌진 발톱 보듬고 허공 향해 앞발 치켜들며 휘젓는 늙은 고양이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시 비틀거리며 걷는다
길 옆, 폐휴지 가득 실은 낡은 리어카 가로수에 몸 지탱하고 있다.
참깨라면/정겸
광교 호수공원 매점 인근
젊은이들의 품에 안긴 포메라니안, 시추, 치와와, 말티즈가
전망 좋은 의자를 모두 점령했다
새마을 모자를 눌러 쓴 초로의 사내가
의자 쪽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낡은 계단 한구석에 엉거주춤 자리 잡더니
단무지도 없이
컵에 담긴 참깨라면을 먹고 있다
중량 110g
면 중 참깨성분 1.7%
스프류 중 참깨 2.0% 계란 4.0%
2%의 참깨 성분이 라면 이름을 독점했다
하기야, 여의도 샛강변에는 0.1%도 안 되는
변이종들이 민중의 이름을 차용하며
세상을 독점하고 있다
진화된 광풍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갈대밭을 휩쓸고 지나간다
호수의 물결이 출렁거리고
물고기 떼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라면으로 허기를 채운 사내가
갈 곳을 잃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고급 장식품으로 치장한 애완견들이
사내를 향해 일제히 짖어댄다
퍼렇게 멍든 햇덩이가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노예들/정겸
도심의 한복판에서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새들의 울음소리, 휘파람소리,
팝송, 가요, 가곡… 때로는 G선상의 아리아가 들려오고
세상은 온통 노천공연장이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 들려요
말씀하세요, 좀 더 크게 말해요
글쎄, 안 들린다니까…
비켜주세요, 앞 좀 보고 다니세요,
어느새 나는 어비스리움 게임에 빠져들어
산호초가 있는 바닷속을 헤매고 있다
순간, 한줄기 회오리바람은
푸른 가로수 줄기를 마구 흔들고 지나갔다
후드득 떨어지는 나뭇가지 사이로
어지럽게 펼쳐진 시가지가 보이고
붉은 하늘 아래서 귀를 막고 서 있는 사람들,
강물이 요동치며 흐르는
요단강 다리를 건너는 절규의 소리들
이제는 거대한 강물도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들이 스마트폰 명령에 따라
헝클어진 빌딩 숲 사이를 비틀거리며 기어가고 있다
누군가의 폰에서 흘러나오는 컬러링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애잔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꽃못/정겸
마룻대 상량문이 희미해진 봉선사* 운하당
대목장大木匠 정씨는 낡은 법당이나 요사채를 수선할 때마다
결 곧고 심지 굳은 나무못 만들었다
굵거나 가는, 길거나 짧은
나무못 수십 개가 가지런히 툇마루에서 햇볕 쬐고 있다
대들보와 서까래 사이가 느슨해져 틈 벌어졌다
나무와 나무 잇댄 자리 홈을 내어
다시는 인연의 끈 놓지 말라고
나무못으로 옭죄며 접합시켰다
맞대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상
서로에게 아픔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같은 유전인자끼리 살을 섞어야
오래오래 버티며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화중생련火中生蓮’
연꽃 축제가 한창인 사찰 앞 연蓮밭
이곳은 향기와 소리, 바람마저 묵언이다
초록빛 못들이 들쭉날쭉 무수히 박혀있고
정두頂頭에는 꽃등 하나씩 매달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아프지 않게 이어주는 꽃못
하늘과 물과 땅을 단단히 묶어놓고 있다
* 남양주시 진접읍에 소재한 조계종 제25교구 본사.
이상한 섬/정겸
루시 모드 몽고메리로부터 빨강머리 앤을 소개 받은 기억이 있다
그 후, 나는 날마다 이상한 꿈을 품게 되었다
프린스 애드워드 섬에 초록색 지붕을 가진 집 한 채 갖고 싶었다
고향집 갈 때마다 스트로브 잣나무와 백자작나무. 벚나무도 심었다
그리고 사과나무 길도 만들었다
바다로 향하는 불도저와 포클레인의 긴 행렬
불길한 마찰음이 귀청을 따갑게 한다
바다에는 물이 마르고 수평선이 없어지고
섬들은 하나둘씩 도심으로 기어 나왔다
불안한 지층은 자고 나면 융기되거나 침강되었다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섬, 또 하나의 작은 모래섬이 생기고
자동차들은 거친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밀려갔다
친환경 로고가 그려진 자연&아파트
파란색으로 덧칠된 선박카페 한 척 정박해 있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주위의 섬들
동굴마다 천박한 벽화로 경계를 만들며 누란왕국이 되어가고 있다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푸른빛을 잃어가며
견고한 석회동굴로 점점 굳어지고 있다
전봇대에 둥지 튼 검은지빠귀마저 어디로 날아가 버렸다
일개미 떼, 동굴 속으로 들락날락거린다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공갈꽃 정겸
여의도 서편에 자리 잡은 아고라 정원
울긋불긋한 꽃들이 정결한 척, 한바탕 피어 있다
자유와 민주, 평화를 위한 구원의 나팔수라며
세상에 좋다는 소리는 모두 따 붙여 가며
4년마다 피는 꽃, 파리지옥 같은
공ㆍ갈ㆍ꽃
아무 꽃나무에 물거름 주어도
꽃놀이패라며 흥얼거리다 꽃 농사 망친 아버지
파랑꽃 노랑꽃 빨강꽃…
꽃 소리만 들어도 질린다 했다
아버지, 이제는 아무 나무에 물거름 주지마세요
이번에는 튼실하고 향기 좋은 꽃, 제대로 찍어보세요
언뜻 불어 온 봄바람에 흔들리지 마세요
촛불에 현혹되면 안 돼요
아프리카 사막에 피어난 재스민 같은
그 꽃, 기어코 만나고 싶어요
붉은 추억/정겸
경기도청 신관 앞 유토피아 정원
배롱나무는 입고 있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앞단추를 서둘러 풀어내고 있다
쏟아지는 붉은 웃음들
잘 익은 바람이 꽃술 살며시 만지고 간다
꽃잎과 꽃잎 사이를 비집고 힐긋 고개를 내민 도정 홍보판
‘동탄에서 강남까지 18분, GTX* ’
날씬한 기차가 시간을 조각내며 힘차게 달리고 있다
그녀가 배롱나무 아래서 비스듬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간지러움에 배롱나무 덩달아 흔들거린다
사진 한방 찍는 사이, 서 있던 배롱나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나 벌건 대낮에 저렇게 진한 포옹을 하다니”
그녀의 가슴마다 꽃잎자국 선명하다
꽃잎에 입을 맞춘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백일홍 꽃잎 정말 맛이 있다고 이렇게 달콤한 입맞춤은 처음이라고”
그녀는 나에게 백일간의 외도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목백일홍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가 배롱나무라 했다
나는 목소리를 돋워 간지럼나무라 했다
나무와 나무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내가 빙고게임을 하는 사이 시간의 틈새는 멀어져갔다
이내 나의 여름은 갔다
*경기도가 제안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
워낭소리 땅에 묻다/정겸
몰랐어요
가이아의 미소로 가득 찼던 들판, 킬링필드 될 줄은
서쪽으로 기운 낮달, 왠지 슬퍼 보이네요
기억나시나요
당신은 나에게 멋진 교복을 선물하였죠
대학등록금도 내 주었잖아요
눈 비 오는 날 달구지를 끌며 읍내 학교까지 데려다 준적 있었지요
착한 눈빛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뒤돌아서는 모습
눈에 밟히네요
그때는 너무너무 고마웠어요
우우우
오늘은 당신에게 마른 풀, 한 입 못 먹인 채
요단강으로 몰고 가야 하네요당
신이 들려주던 워낭소리 점점 멀어지네요
죄송해요, 지켜주지 못해서······
나는 힘없는 목동인 걸요
당신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네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날 용서하지 마세요
유서/정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나는 전류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고독하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아버지가 가출 했다
실종신고 석 달 만에
돌아온 것은 달랑 유서 한 장 이었다
검은색 비닐 봉투 속
꼬깃꼬깃 접혀 있는 색 바랜 종이에는
농협 통장의 비밀번호와
‘늘 바람과의 전쟁에서
겨우 살아 온 늙은 몸
손자에게 티비 채널권 빼앗기고
애완견에게 밥 먹는 순서마저 빼앗겼다‘ 라고 적혀 있었다
좀비족이 사는 섬/정겸
SBS 모닝와이드 뉴스
일본 북해도 남서 해역 부근에서 진도7.6의 지진 발생,
국지적으로 30m의 높은 쓰나미파의 쳐올림이 활동 중이며
우리나라 동해안 일부에서 쓰나미 월파고가 관측되었음.
중생대 이후 가장 활발한 지각운동이 시작 되었다
바다에는 물이 마르고 수평선이 없어지고
섬들은 하나 둘씩 기형화 되어 도심으로 기어 나왔다
불안한 지층은 자고 나면 융기되거나 침강되었다
삐죽삐죽 솟아오르는 섬들 사이에서
자동차들은 거친 파도처럼
갈기를 세우고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다
나는 유대인이 되어 바람막이 없는 교통섬에서
초조하게 모세의 기적을 기다린다
온종일 나를 괴롭혔던 애굽인*들이
아직도 목덜미를 잡으며 놓아주지 않고 있다
파란불이 켜지자 바닷길이 열리고
쫓기던 유대인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친 환경 로고가 그려진 자연&아파트 단지 옆,
초록색으로 덧칠된 선박 카페 한척이 정박해 있다
선상에서 주위의 섬들을 바라보고 있다
툭툭 터진 마른 갯벌사이로 푸른 바닷말이 간간히 보이고
촘촘히 떠 있는 섬들은 날이 갈수록 견고한 석회석으로 진화되어 갔다
한 무리의 좀비족들이 석회석 동굴 속으로
일개미처럼 들락날락거리고 있다.
*애굽 : 고대 이집트국가로써 유대인을 노예화하였음.
바오밥나무가 있는 별나라/정겸
내가 살고 있는 별나라에는 바오밥나무가 울창하다.
그곳에는 태생에 대한 비밀이 있고
고향의 전설과 아내와 아이들이 있다
별나라를 갈 때에는 주민등록증도 필요 없고
비자와 여권이 필요 없다
비밀번호 하나만 있으면 갈 수 있다
나는 별나라를 가기 위해
하루 종일 땀에 젖었던 발을 말리며
도심의 유리관 속에서 꽃이 필 때를 기다린다
어두워지는 거리마다 형형색색의 꽃들이 피어 날 즈음
별나라로 가는 문턱에서 비밀번호를 꾹꾹 누른다
몇 번씩 클릭 하는 숫자 앞에 나타나는 불청객
번호가 틀렸으니 다시 한 번 눌러 주세요
몇 개의 숫자를 조합해 가며 번호를 누른다
힘을 주어 반복하기를 다시 몇 번
철컥, 문이 열린다
현관 게시판에 나란히 꽂힌 메모지들
“문화센터에 갔다 오겠음”
“오늘 친구와 저녁약속 있어 늦습니다”
“학원 다녀오겠습니다”
이사 올 때 증정 받은 거실의 걸개그림에는
바오밥나무 한 그루가 모래 바람을 맞으며
꼿꼿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판화처럼 음양의 윤곽이 뚜렷한
바오밥나무 갈피사이로 적막이 숨어 있다
나도 바오밥나무처럼 우두커니 서 있다
별이 총총한 사막의 밤하늘에서 별 비가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