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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1.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2.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청천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3.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
4.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만 가네
5.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문전에 옥답을 다 어이하고 동냥의 쪽박이 왠 말인가
6.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 싸우다 싸우다 아니되면 이 세상에다가 불을 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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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를 후렴구(後斂句)로
아는 이들이 있으나, 실제 '아리랑'에서는 전렴구(前斂句)에 해당한다 -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현재 일반적(一般的)으로 널리 불리고 있는 ‘아리랑’과 가사는 다르지만 같은 곡조(曲調)로 되어 있다. ‘아리랑’을 지방에 따라 구분하면 경기도(京畿道)지방의 ‘경기아리랑’, 강원도지방의 ‘강원아리랑’ ‘정선(旌善)아리랑’ ‘춘천(春川)아리랑’, 경상도지방의 ‘밀양(密陽)아리랑’, 전라도지방의 ‘진도(珍島)아리랑’ 등이 있다.
‘아리랑’ 분포도
‘경기아리랑’은 ‘서울아리랑’이라고도 하며 ‘신민요아리랑’ 또는 ‘신아리랑’으로 분류된다. 또한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은 ‘신아리랑’과 구별하여 ‘3대 전통아리랑’이라고도 한다. 그동안 해외(海外)에 거주하는 교포들이 지어 부르는 ‘아리랑’ 즉, ‘교포(僑胞)아리랑’도 있다. ‘독립군아리랑’ ‘연변(延邊)아리랑’이 그 예이다. ‘정선아리랑’은 ‘아라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과 영월(寧越)·평창(平昌) 일대에 분포되어 있으며, ‘아리랑’ 중에서 유일하게 지방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선 아리랑
1. 알록달록에 두덩버개 할머니나 비구 총각낭군에 길고 긴 팔 언제나 비리
2. 미나리 밭 칼나물은 개구장에 났는데 큰 아기야 손목은 허공에 떴구나
3. 너는야두야 나를 보면 흑싸리 껍질로 알아도 나는야 너를 보면 공산명월로 안대이
4. 참나무 장작이 세동강 네동강 나도 너하고 나하고는 그여코 살고야 말기다
5. 금강산 딱따구리는 생구녕도 잘 뚫는데 우리 집에 저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네
6. 아오라지 행개 북창아 너 잘 있거라 말고개 넘어스니요 이별이로구나
7. 서울장안 불 붙은 거는 소방대가 끄지 요내 가슴 불 붙은 것은 어느 누가 끄나
8. 공동묘지에 가신 님두 지삿날이면 오지 육이오 전쟁에 가신 남편은 어느 맘때 오시나
9. 동경 가는 배를 타자하면 십삼원 각수가 들어도 요내 배를 타자면 임자 수단에 달렸네
10.노랑저고리 앞섭에 눈물콧물 떨어진 것은 누탓이냐 내탓이냐 즈네비(중신애비)탓이로구나
11.돈 잘 쓰구야 술 잘 먹을 젠 김생복생 하더니 돈 떨어지구 술 못 먹으니 김서방 박서방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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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아리랑’은 ‘자진아리’라고 하던 것으로 ‘정선아리랑’에 비해 장단이 훨씬 빠르고 영서(嶺西)·인제(麟蹄)지방 일대에서는 ‘뗏목아리랑’으로도 알려져 있다. 분포지역은 영동(嶺東)·영서지방이다. ‘진도아리랑’은 전라도(全羅道)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와 경상남도의 일부지역, 제주도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밀양아리랑’은 밀양을 중심으로 경상남도(慶尙南道) 지방에 집중되어 있어 다른 ‘아리랑’에 비해 분포지역이 제한되어 있다.
강원도 아리랑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간다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 마라 누구를 꾀자고 머리에 기름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간다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주까리 동백은 왜 여는가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간다 산중의 귀물은 머루나 다래 인간의 귀물은 나 하나라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아리 고개로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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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 특수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아리랑’이 있다. 천연두(天然痘) 예방주사를 보급시키기 위한 ‘종두(種痘)아리랑’, 문맹퇴치를 위한 ‘한글아리랑’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아리랑’은 민요에만 머물지 않고 대중가요(大衆歌謠)와 접목되면서 많은 ‘창작아리랑’이 만들어졌다.
밀양 아리랑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영남루 명승을 찾아가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있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남천강 구비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날 좀 보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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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아리랑’은 예로부터 그 어원(語源)이 여러 가지다. ‘아리랑’에서 많이 공통적(共通的)으로 쓰이는 표현은 ‘아리랑’, ‘스리랑’,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라는 낱말과 구절이다. 그리고 ‘아리아리랑’에서 ‘아리’는 두 가지의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고운’, ‘곱다’는 뜻과 ‘아름다운’ 또는 ‘아름답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 흔적은 현대 조선말에서 ‘아리따운’으로 나타나고 있고, 사무치게 ‘그리운’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편 ‘아리랑’의 ‘랑’은 ‘님’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이를 적용하면 ‘아리랑’은 ‘고운님’을 의미하게 된다. 대신 ‘스리랑’은 ‘마음이 쓰리도록 그리운 님’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는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 간다’는 뜻이 된다.
이와 같이 ‘아리랑’은 어원적(語源的)의미로 볼 때 남녀사이의 사랑에 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민족적(民族的)으로는 외세(外勢)에 의한 수난의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 민족이 소원하는 모든 것 즉,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충정(愛國忠情)으로 승화된 뜻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지금의 ‘아리랑’은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主題歌)였다. 노랫말은 나운규가 짓고, 김영환이 서울․경기지방의 ‘본조아리랑’을 기본으로 편곡(編曲)했었다. 따라서 지금의 ‘아리랑’은 ‘정선아리랑’과 같이 전통적(傳統的)인 민요가 아닌 일종의 창작민요(創作民謠)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우리 민족의 사랑과 애환(哀歡)을 노래 해온 ‘아리랑’의 편력(編曆)을 알아본다. 먼저 고국과 고향의 상징(象徵)이었던 ‘아리랑’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불리어졌는지를 살펴본다, ‘아리랑’은 먼저 재일동포(在日同胞)들이 피를 토하며 부른 망향가(望鄕歌)였다. 지난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關東) 대지진 후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虐殺)의 때였다.
관동대지진은 1923년 9 월1일 오전11시58분에 일어났는데, 사상최대의 피해를 기록했다. 사망자(死亡者) 10만 여명, 행방불명(行方不明) 4만 여명의 인적손실(人的損失)과 65억 엔에 이르는 물적인 손실을 입어 일본(日本)은 국가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관동 대지진
그런데 일본의 관헌(官憲)과 자경단(自警團)들은 하늘이 내린 천재지변(天災地變)을 두고,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느니, “조선인들이 방화했다”느니,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뜨려 수만 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간악한 일제(日帝)는 학살된 조선인의 수를 231명뿐이라고 발표했으나, 당시 신원(身元)이 확인된 조선인 숫자만도 6천4백15명에 이르렀고, 전체적(全體的)으로는 2만 여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학살(虐殺)은 도쿄와 가나가와현의 경우 군(軍)과 경찰(警察)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치바현과 사이타마현에서는 자경단(自警團)에 의해서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竹槍)과 일본도(日本刀), 도끼와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조선인(朝鮮人)이라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일본관헌(日本官憲)은 이를 방조했었다.
일본군경과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그림
(일본인 화가 ‘가야하라 하쿠도’가 그린 동도대진재과안록)
여기에다 일본정부(日本政府)는 군대와 관헌의 학살은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自警團)에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제는 국제사회의 여론을 의식하여 일부 자경단원을 형식상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전원 석방(釋放)해버렸다. 하루아침에 이리떼 같은 일제의 관헌에 처자식과 부모형제를 모두 잃고, 병신이 되어 살아남은 조선인(朝鮮人)들의 마음들이 어떠했겠는가.
죽창으로 조선인을 학살하는 일본경찰과 '자경단'
일제의 간계(奸計)에 의해 일본(日本)으로 건너온 것이 한이 되었고, 고국과 고향에 돌아가고픈 생각밖에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러나 모두를 짓밟히고 뺏겨버린 그들에게는 고국에 돌아올 여비(旅費)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다. 폐허(廢墟)가 된 잿더미 위에 병신이 되어 널부러진 그들의 입에서 흘러내리는 말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밖에 없었다.
학살하여 내다버린 조선인들의 시체
(이 꼴을 당하고도 지난 60년대에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가도 ‘일본인’이라면 등교하던
여대생들이 학교까지 버리고 '왜놈'의 뒤를 따라가기도 했었다. 사내들도 야구 조금하면 일본에
가지못해 안달을 하고 있고, 지금도 무슨 ‘사마’니 하면서 일본년들의 노리개가 된것을 영광으로
치부하는 얼치기들이 수두룩하다. 이러니 '왜놈'들이 독도가 제땅이라고 들고 나오는 것 아닌가)
일제에 의해 징용(徵用)으로 끌려간 ‘사할린’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니들은 지금도 ‘사할린아리랑’으로 향수(鄕愁)를 달래고 있다. 일제의 대륙침략으로 전쟁물자(戰爭物資)를 조달하기 위해 동토의 땅 사할린의 석탄광산에 끌려간 장정들과 그들의 아내들이 대전의 종결과 함께 소련(蘇聯) 영토가 되어버린 ‘사할린’에서 오도 가도 못하자 밤낮으로 불러오던 망향가(望鄕歌)가 ‘사할린아리랑’이다.
사할린탄광과 조선인 징용자
‘아리랑’은 일제 당시 중국(中國)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투쟁단체(武裝鬪爭團體)들과 독립군에 의해서도 널리 불리어졌다. 특히 간도지방을 중심으로 한 만주일대의 독립군(獨立軍)들은 ‘독립군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 났네’로 시작하는 ‘독립군 아리랑’은 애조(哀調)를 띤 다른 아리랑에 비해 힘이 있고 경쾌(輕快)했었다. ‘독립군아리랑’이 ‘밀양아리랑’ 곡에 맞추어 불리었기 때문이다.
간도지방 지도
‘날 좀 보소’로 시작되는 ‘밀양아리랑’이 만주(滿洲)로 건너가 '독립군(獨立軍)아리랑'의 곡조로 사용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혹 이를 안다고 하더라도 전국(全國)의 많은 ‘아리랑’ 가운데 왜 ‘밀양아리랑’이 ‘독립군(獨立軍)아리랑’의 곡으로 사용됐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런데 이 같은 의문은 최근 일제(日帝) 때 중국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투쟁단체 의열단(義烈團)과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약했던 연변(沿邊)의 한 소설가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당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의 의열단장 김원봉과 의열단 결성에 핵심역할을 한 윤세주가 밀양시(密陽市) 내이동 출신이었고, 강인수, 김성수, 이장수 등 밀양(密陽) 출신 의열단원이 1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이다. ‘밀양아리랑’의 곡조(曲調)가 대원들이 부른 ‘독립군아리랑’에 이입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고 볼 수 있다. ‘독립군아리랑’을 소개한다.
독립군 아리랑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이조왕 말년에 왜 난리 나니 이천만 동포들 살길이 없네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일어나 싸우자 총칼을 매고 일제놈 쳐부숴 조국을 찾자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내고향 산천아 너 잘있거라 이내몸 독립군 떠나가노니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부모님 처자들 이별을 하고서 왜놈을 짓부숴 승리한 후에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태극기 휘날려 만세 만만세 승전고 울리며 돌아오리라
아리아리 스리스리 아라리 났네 독립군 아리랑 불러를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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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滿洲)지방의 ‘아리랑’에는 또 ‘기쁨의 아라랑’이라는 것도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기쁨의 아리랑’은 현재 길림성에 거주하는 김세영씨가 부른 노래로 그가 1948년경에 배운 것이라고 한다. 이 노래는 연변(沿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 성립 40주년을 기념해 펴낸 ‘60청춘 닐리리(1994)’에도 조선족 작곡가 김덕균의 채보로 악보와 함께 실려 있다.
기쁨의 아리랑
(노래: 중국 연길시 김세영 / 1994)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한번 가면 소식 없는 탄식의 고개 엎고 지고 쫓겨서 흘러가더니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넘어 오네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에요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
꽃도 피고 잎도 피는 아리랑 고개 우리 부모 뼈를 묻은 아리랑 고개 막대 끌고 돌아보며 흘러갔더니 원수 갚고 떼를 지어 뛰넘어 오네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에요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
붉게붉게 무궁화 핀 아리랑 고개 웃음소리 넘쳐나는 승리의 고개 원수 피로 삼천리에 땅을 걸구고 보금자리 터 세우며 뛰넘어 오네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에요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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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中國)과 북한 북부지방에는 우리들의 고향 경주시(慶州市)와 연접한 영천시(永川市)의 ‘영천아리랑’이 불리고 있기도 하다. ‘영천아리랑’은 언제 만들어 졌으며, 저작자(著作者)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백의민족(白衣民族)의 노래로 우리나라 대표 ‘아리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천아리랑’은 우리나라의 영천지역 보다 중국과 북한(北韓)에서 더 많이 불리어지고 있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영천(永川)지역에서도 잘 모르는 ‘영천아리랑’이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朝鮮族)과 북한 인민들, 그리고 러시아 한인 동포(同胞)사이에서 더 많이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천아리랑’은 영천지역의 지명(地名)을 따 붙인 ‘아리랑’ 민요로 님에 대한 애정과 행복한 생활에 대한 동경심(憧憬心)을 그린 토속민요(土俗民謠)로 선율구성(旋律構成)은 후렴에서 먼저 시작돼 전렴에서 끝맺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가창자(歌唱者)들에 의해 여러 가지로 변형돼 불리어 왔다. 중국(中國)과 북한지역에서 불리는 ‘영천아리랑’을 소개한다.
중국과 북한에서 불려지는 '영천아리랑'의 노랫말
(중국편)
아라린가 지랄인가 영천인가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
아주까리 동백아 열리지 말아 산골집 큰애기 발덧이 나누나 앵구나 오뒤는 단맛에 먹구요. 딸구나 살구는 신맛에 먹는다.
아리랑 고개는 얼마나 먼지 한번 간 님은 왜 못 오느냐 요놈의 총각아 치마폭 놔라 외벌로 당친 치마폭 콩 튀듯 하누나
(북한편)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 아주까리 동배야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난다
멀구야 다래야 더 많이 열려라 산골 집 큰 애기 신바람난다 울 넘어 담 넘어 님 숨겨두고 호박잎 난들 난들 날 속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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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아리랑’이 우리나라 국내(國內)에서는 언제부터 어떻게 불리어졌는지를 알아본다. 먼저 고대설(古代說)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리랑’은 1392년 7월 28일,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이 성립되던 왕조 교체기(交替期)에 개경(開京)의 만수산 두문동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아리랑’의 원형을 통해, 노래가 만들어진 당시에는 ‘넘어간다’를 ‘나마간다’, ‘가시는 님’은 ‘가시 님’, 아리랑 고개는 ‘아리이랑 곡애(谷涯)’의 발음기호(發音記號)로 ‘푸른 물결’을 뜻하며,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에 있는 것을 뜻한다.
때문에 ‘아리랑’에는 ‘푸른 물결’을 뜻하는 ‘아리 이랑’과 신비(神秘)한 ‘아가씨’를 뜻하는 ‘아아 리랑’이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아리랑’ 노래를 불러보면 ‘아아리랑 아아리랑 아아라리요’로 발음(發音)되는데, 이것은 ‘아아 리랑’이며, 아리랑 보다 더 오래된 ‘구(舊)아리랑’을 주의 깊게 잘 들어보면 ‘아리이랑 아리이랑 아라리로구료오’로 발음되는데 이것은 ‘아리 이랑’이다.
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사람의 한 평생 사연도 많고 구비 구비 감돌아드는 얘기도 많다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아리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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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십 리도 못 가서’가 아니라 ‘신이 막가서’ 발병 나는 것이며, 이것을 참요(讖謠 : 어떤 정치적 징후 등을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다는 ‘계림요’, 이성계의 혁명을 암시했다는 ‘목자요’ 등)의 내용으로 풀이하면, ‘신이(臣李) 막가서’ 즉, 역적 신(臣)하 이(李)가 막가서 고려(高麗)가 망할 것이라는 뜻으로 새로운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부정하고, 고려를 부활(復活)시키자는 내용이 된다.
당시 고려유신(高麗諛臣)들은 ‘참요 아리랑’을 만들어 전국에 있는 동지(同志)들과 2년여에 걸쳐 비밀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개경(開京) 만수산 두문동에서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전국적으로 온갖 형태의 참요(讖謠)들이 이에 화답하여 창화(唱和)하며 자신들만이 이해하는 암호문(暗號文) 통신체계로 비밀스러운 대화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참요아리랑’은 1394년 11월 17일, 노랫말에 숨겨진 내용의 일부가 조선관군(朝鮮官軍)의 암호해독부대에 의해 풀이되어 두문동은 불태워져 말살되고 그때의 ‘아리랑’은 금지곡(禁止曲)이 되었다. 이후 금지곡 상태에서 구전되던 ‘아리랑’은 한양천도(漢陽遷都)로 인해 개경에서 한양(漢陽)으로 지역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른 언어적(言語的)인 변화도 일어나게 된다.
물결을 뜻하던 ‘곡애를’은 땅 위에 있는 ‘고개를’로 오해(誤解)되기 시작했고, ‘나마간다’는 ‘넘어 간다’, ‘바리고’는 ‘버리고’, ‘가시 님’은 ‘가시는 님’, ‘발화병 난다’는 ‘발병난다’로 바뀌게 된다.
다음은 ‘대원군(大院君) 시대설’이다. ‘대원군 시대설’이란 필자가 임의로 부여한 설(說)로 ‘아리랑’은 ‘정선 아라리’가 1865∼1872년 경복궁 공사 때 뗏목을 끌고 온 일꾼들이 부르면서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설(說)이다.
1865년 대원군(大院君)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이를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부역하던 사람들이 원납전(願納錢)을 강요받는 데다, 부녀자까지 부역에 동원시키려 하자 불만이 커져 “차라리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탄식하며 읊조린 ‘아이롱’이 입에서 입으로 전파(轉派)되면서 ‘아리랑’으로 변했다고 한다.
황현이 1900년에 펴낸 ‘매천야록’에도 ‘아리랑’이 궁궐(宮闕) 안에서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종(高宗)은 밤만 되면 배우들을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그때 등장한 노래가 ‘아리랑타령’이다. 고종이 이 노래를 즐겨서 민영주는 배우(俳優)들을 거느리고 ‘아리랑타령’을 전담하면서 그 노래하는 우열(優劣)을 가려 금과 은으로 상을 주었다.
이 놀이는 일본공사(日本公使) ‘오토리 게이스케’가 대궐을 침범한 후에 중지되었다. 그가 대궐을 침범한 때는 갑오개혁(甲午改革) 바로 전인 1893년. 19세기말,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도 ‘아리랑’을 좋아했었다. 아악보다는 진솔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한 노래였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민간(民間)에서만 조심스럽게 불리던 고려의 ‘아리랑’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궁궐에서도 ‘아리랑’을 공연(公演)하게 됨으로써 조선(朝鮮)의 노래로 공인되었고, 이를 통해 민족의 노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아리랑’은 삼국시대(三國時代) 이후 전승(傳乘)되어오는 동안에 모든 고장에서 자유롭게 가사와 곡(曲)을 창작하여 붙이게 되었다. ‘아리랑’의 가락(리듬)도 사랑과 이별의 그리움뿐만 아니라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모두 표현하게 되었다.
예컨대 ‘밀양아리랑’ 계열의 ‘아리랑’은 씩씩하고 약동적(躍動的)이며 낙천적(樂天的)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 ‘아리랑’은 앞서 언급한 대로 모내기와 김매기에서 두레꾼들이 합창(合唱)하는 흥겨운 ‘노동요’로 변신하기도 했었다.
‘아리랑’은 천수백년을 다양하게 계승(繼承) 발전해 오는 동안에 노랫말과 가락도 수 천 개가 창작(創作)되고, 탄생되었지만 변하지 않고 전승(傳乘)되어 오는 가락이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 등의 노랫말이 그것이다.
이것이 뜻을 모르게 된 채 변함없이 반복(反復)되기 때문에 이제는 ‘후렴’이나 ‘앞소리’처럼 변이(變異)되고 말았다. 옛적 삼국시대(三國時代)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 중기까지의 ‘아리랑’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의 것은 채록(採錄)되어 있다. 시대별로 유행했던 당시의 ‘아리랑’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임진왜란 무렵]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만 기다린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병자호란 무렵]
오라배 상투가 왜 그런고 병자년 지내고 안그런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흥선대원군 집정 무렵]
조선 팔도 좋다는 나무는 경복궁 짓느라고 다 들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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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리랑’이 전국적(全國的)으로 널리 불리어지게 된 것은 1926년 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主題歌)로 창작한 '신조 아리랑', 즉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이 널리 전해지면서부터다. 그 뒤 '진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이 창작되고, 각 지방마다 ‘아리랑’을 만들어 불렀다.
영화 ‘아리랑’
이때부터 해외동포(海外同胞)들도 아리랑 제작에 다투어 나섰다. 일본(日本)에서는 '이츠키 자장가', '부산 아리랑' 중국(中國)에서는 '연변 아리랑', '광복군 아리랑' 러시아에서는 '사할린 아리랑', 미국(美國)에서는 '상항 아리랑', '사탕수수 아리랑' 등 수많은 ‘아리랑’이 만들어졌다. ‘아리랑’은 앞으로도 시대와 여건에 따라 계속 재창작(再創作)되고 불리어지게 될 것이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이 상영(上映)되던 1926년 단성사(團成社)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영화의 주제곡(主題曲) ‘아리랑’을 모든 관람자들이 합창을 하곤 했었다. 주인공 ‘영진이’가 낫으로 일본관헌(日本官憲)의 앞잡이를 죽이고,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아리랑고개’를 넘는 영화(映畵)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함께 소리 높여 ‘아리랑’을 불렀다.
1930년대의 단성사
초기 우리나라 영화의 걸작(傑作)이었던 ‘아리랑’은 1926년 4월말 안암골(지금의 서울 안암동)에서 첫 촬영(撮影)에 들어갔다. 당시 ‘안암골’은 기껏 초가집 십여 채만 있는 산골이었다. 풍년잔치를 벌이는 장면을 찍기 위해 엑스트라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내자 무려 800명이나 몰려들었다.
추운 날씨에 고생을 덜기 위해 술을 대접했는데, 술에 취한 엑스트라들이 싸움을 벌여 난장판이 되기도 했었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자 나운규는 극장(劇場) 직원들에게 고깔을 씌우고 징과 북을 두들겨가며 춤추게 했다. 이를 본 엑스트라들이 모두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고, 나운규는 이 장면을 찍어 영화에 삽입할 수 있었다.
아리랑 춤
‘아리랑’은 촬영 기간 4개월에 제작비 1,200원을 들여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촬영을 끝내고, 1926년 10월 1일 단성사(團成社)에서 개봉했다. 꽤 인기를 끌었지만 처음부터 폭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가고 동냥의 쪽박이 웬말인가"하는 주제가의 가사(歌辭)가 문제되어 전단 1만장이 일경(日警)에 압수되기도 했었다.
당시 단성사(團成社)는 하루에 한번, 오후 7시에 영화를 상영(上映)했었는데 ‘아리랑’은 5일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어 지방에서 수많은 관객(觀客)을 끌어들이며 장장 5년간에 걸쳐 최고 흥행작(興行作)으로 손꼽힐 정도로 빅히트를 기록했다.
1950년대의 단성사
나운규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까지 맡은 연출 데뷔작 ‘아리랑’은 우리나라 영화사(映畵史)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이전까지의 감상적(感傷的) 신파 영화와는 다른 충격을 안겨줬다. 피폐(疲弊)한 농촌 삶을 사실적으로 다뤄냈고, 사이사이에 일제(日帝)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았다.
영화 미학적(美學的)으로도 서구(西歐) ‘몽타주 이론’을 적극 소화(消化)해 내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26년에는 한국영화 제작(製作)이 3편에 불과했지만, ‘아리랑’의 성공에 고무되어 다음해에는 무려 14편이나 만들어졌다.
어쨌든 이때 부르던 영화의 주제가(主題歌) ‘아리랑’은 ‘경기아리랑’을 모태로 하여 나운규가 편곡(編曲)하고, 이상숙이 불러 크게 히트한 노래로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이다. 당시 이 ‘아리랑’이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우리나라를 병합(倂合)하여 식민지정책(植民地政策)을 펴던 일제는 ‘아리랑’의 가창(歌唱)을 금지하기도 했었다.
1926년, 민간(民間)에서 불리던 ‘아리랑’이 영화 속의 유행가(流行歌)로 편집되면서 노랫말에도 많은 변형이 일어났다. ‘고개를’은 ‘고개로’, ‘나아를’은 ‘나를’로 바뀐다. 영화 주제가(主題歌) 가사를 편집한 사람들이 원래의 가사(歌辭)를 가능한 한 조금이라도 바꾸려고 노력한 것이다.
아리랑 음반
‘아리랑’에는 ‘아리랑옥중가’라는 노래도 있다. 이 노래는 일제(日帝) 치하 때 조선인 정치범(政治犯)들이 자주 부른 ‘아리랑’이다. 1921년, 투옥된 한 조선인(朝鮮人)에 의해 지어진 이 노래는 죄수(罪囚) 경험을 여러 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즉 일본경찰(日本警察)에 의한 체포, 자백을 강요하는 고문, ‘한강 펌프’라고 명명된 물고문, 사형선고의 기다림, 그리고 다른 혁명가(革命家)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종래의 열두 번째 고개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승리 즉 ‘아리랑’의 열세 번째 고개를 쟁취(爭取)할 것을 의미하는 마지막 구절을 담고 있다.
간이역(簡易驛)과 기차에 대한 언급은 오늘의 죽음이 우선 고개 넘어 교수대(絞首臺)까지 걸어가야 했던 옛날보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쉽게 이루어짐을 뜻한다. 그 시절 ‘아리랑옥중가’를 소개한다.
아리랑 옥중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첫 번째 고개를 넘어간다.
내 들던 막걸리는 어디 있나 이제는 한강에 펌푸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재판장 고개를 넘어간다
내 들던 막걸리는 어디 있나 이제는 한강에 펌푸로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재판장 고개를 넘어간다 금시계 줄은 어디로 갔나 쇠수갑은 맞지를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감옥행 고개를 넘어간다 운명의 선고를 기다리며 나 이제 생사 갈림길에 서 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련다 아리랑 고개에 간이역 하나 지어라 집행인 기차를 기다려야 하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 그대 열두 구비에서 멈추지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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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가 없던 그 시절 독립투사들은 이 아리랑을 부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일제'에 충성하던 무리들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오늘의 세태를 위해서 말이다)
일제 강점기(强占期) 캄캄한 어둠의 시대에는 남녀의 연정(戀情)보다 민족의 ‘자유’ ‘해방’ ‘독립’이 더 절실한 ‘아리랑’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 침략자들을 ‘아리랑’으로 풍자(諷刺)하고 비판하면서 저항(抵抗)했었고 민족의 자유와 해방, 독립(獨立)을 ‘아리랑’으로 노래했었다.
민족의 ‘자유’ ‘해방’ ‘독립’을 노래한 아리랑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놈의 등살에 못살겠네. (아리랑 후렴)
일본 대판이 얼마나 좋아서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 탔는가. (아리랑 후렴)
산천초목은 의구(依舊)한데 이 땅의 주인은 어데 갔나. (아리랑 후렴)
풍년 들어도 먹을 게 없어 북국의 벌판을 찾아 갔나. (아리랑 후렴)
논밭은 헐어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어서 정거장 된다. (아리랑 후렴)
말깨나 하는 놈 감옥소 가고 일깨나 하는 놈 북망산 간다. (아리랑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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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에는 ‘광부아리랑’도 있다. ‘광부아리랑’은 향우님들께서 얼마 전에 들어 보셨을 것이다. 외동(外東)의 딸 신은정양(향우회 신용태 부회장의 영애)이 출연한 드라마 ‘에덴의 동쪽’에서 광부(鑛夫)들이 매몰사고(埋沒事故)로 숨진 광업소 노조위원장(勞組委員長)의 장례식 때 부른 아리랑이다. 광부들이 부른 ‘광부아리랑’은 ‘정선아리랑’ 가락으로 구성지면서도 슬픈 영혼의 소리로 묘사되었다. ‘광부아리랑’ 한 부분을 소개한다.
'에덴의 동쪽'에서 간호사 '미애'역을 맡은 신용태 향우의 영애 탤런트 신은정 양
빚 없으면 돈 번 게지, 몸 성하면 돈 번 게지 자식보고 여기왔지, 나 살자고 여기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날 넘게 주게 산지사방이 일터인데, 그리도 할 일이 없어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막장으로 들어간다. 이판저판이 공사판인데, 한 많고 설움 많은 탄광에 왔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탄광은 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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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아리랑’은 단순한 민요나 유행가(流行歌)가 아니라 망해가는 나라와 시들어가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던 충신(忠臣)들과 애국지사(愛國志士), 정의의 사나이들이 겪어 온 삶과 죽음의 대서사시(大敍事詩)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로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혼(魂)이 되었고 민요의 정수(精髓)가 되었다.
그러나 ‘아리랑’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사랑과 이별, 정의를 기리는 노래였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김매기와 모내기를 할 때 부르는 ‘노동요’로 변이(變異)하여 그 혼과 정수가 퇴색되기도 했었다.
1952년에 창간된 잡지 ‘아리랑’
풍자와 해학(諧謔)이 깃들어 있으며 우리 민족의 감정을 오롯이 담은 ‘아리랑’은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 시위가요(示威歌謠)로 바뀌기도 했고, 1980년대에는 우리 것에 대한 인지도(認知度)와 관심이 증폭되면서 ‘아리랑’은 체념과 한의 노래에서 벗어나 민족행진곡(民族行進曲)으로 거듭나기도 했었다.
서울 올림픽 때, 공식 음악으로 선정되어 선수입장식(先手入場式) 때나 시상식 때 ‘아리랑’이 연주(演奏)되어 지구촌 곳곳까지 울렸고, 폐막식 때도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손에 손을 잡고 석별(惜別)의 정을 나누었다. 1989년 북경아시안게임 단일팀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南北體育會談)에서의 ‘아리랑’은 분단(分斷)을 넘어 화해의 노래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북한의 ‘아리랑’ 축제
1991년 4월 일본(日本)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부터 2001년 시드니올림픽대회에 이르기까지 국제경기(國際競技)에서 ‘아리랑’은 남북의 두터운 이념의 벽을 훌쩍 뛰어 넘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전야제(開幕前夜祭)에 조용필이 부른 ‘꿈의 아리랑’과 개막식에 울려 퍼진 역동적인 ‘상암아리랑’은 희망의 노래로 온 세상을 수놓기도 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은 구한말(舊韓末)에서 일제치하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에 울려 퍼져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민요(民謠)가 되었다.
민요 ‘아리랑’은 평안도(平安道)에서는 '서도아리랑', 강원도(江原道)에서는 '강원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함경도(咸鏡道)에서는 '함경도아리랑', '단천아리랑', ‘어랑타령’ 경상도(慶尙道)에서는 '밀양아리랑', 전라도(全羅道)에서는 '진도아리랑', 경기도(京畿道)에서는 '긴 아리랑' 등이 대표성을 띈 ‘아리랑’이고, 그 밖에 지역마다 각기 다른 ‘아리랑’이 있다.
1960년대에 유행하던 ‘아리랑’ 재떨이
남녀노소 널리 애창(愛唱)되는 ‘아리랑’은 세마치장단으로 우리 정서(情緖)에 알맞고 장단과 사설(辭說)도 매우 다양하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우리 민족의 꽃씨와도 같은 아리랑! 우리 민족(民族)이 가는 곳이면 어디서나 꽃을 피우는 ‘아리랑’ 노래에는 “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라는 능동형(能動型)이 있는가 하면, “아리랑고개로 나를 넘겨주게”라는 수동형(手動型)도 있다.
‘아리랑’에는 어떤 형태(形態)의 것이든 ‘아리랑고개’를 넘도록 되어 있다. 그러면 우리 민족(民族)에게 ‘아리랑고개’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이 교통이 수월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웃 고을에 갈 때마다 산을 넘고 넘었다. 때문에 산고개는 새로운 미지(未知)의 세계로 가는 통로였고, 그 너머에는 언제나 희망과 기대(期待)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랑 담배
그래서 이쁜이도 금순이도 그 고개를 넘었고, 삼돌이와 복돌이도 뒤를 따른 것이다. 굽이도 너무 많아 세다가 지루하거나, 헷갈리면 ‘아흔아홉 굽이’라고도 하고, ‘열두 고개’라고도 했다. “아리랑고개는 열두나 고개인데 넘어 갈 적 넘어 올 적 눈물이 나네.” 우리 조상(祖上)들은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을 인생에 비유(比喩)하며 인생은 시련과 고난이 반복(反復)되는 것이라 여겼다.
“아리랑고개는 웬 고갠가 넘어갈 적 넘어올 적 눈물이 난다(해주아리랑)”,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월강곡)”, “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 고개, 한 번 가면 다시 못 올 탄식의 고개(기쁨의 아리랑)”, “쓰라린 가슴을 움켜쥐고서 백두산(白頭山) 고개를 넘어 간다(영일 아리랑)”는 대목이 모두 시련(試鍊)과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삶 속에서, 그리고 ‘아리랑고개’는 그 삶의 좌절(挫折)과 시련의 역사를 극복시켜 주기도 했었다.
슬픔에서 기쁨으로, 좌절에서 극복(克服)으로, 어둠에서 밝음으로 넘어가는 인생의 분수령(分水嶺). 그래서 수많은 아리랑 가사(歌辭)에는 “아리랑고개로(를) 넘어 간다”고 했지, 넘어보니 어떻더라는 내용은 없다. 우리 민족(民族)의 삶 속에서 꼭 넘어야 하는 현실이며, 미지(未知)의 세계로 이어지는 ‘아리랑고개’는 지도상(地圖上)에는 없지만, 우리 민족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잠시 ‘아라랑 연가’를 음미한다.
아리랑 연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
떠나는 님은 잡지를 마라 못보다 다시 보면 달콤하거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에 물새는 못 사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에 별들도 많은데 구름 뒤에 날보고 웃는 이 누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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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리 민족(民族)에게 ‘아리랑고개’는 무엇일까. 고개는 산을 모태(母胎)로 한다. 산이 유달리 많은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산을 신성시(神聖視)하고, 산에 대한 믿음 또한 강했다. 단군(檀君)이 내려온 곳을 ‘묘향산’ 또는 ‘구월산’이라 하고, 산 곳곳에 ‘국사봉(國師峰)’을 두어 산을 신성시하기도 했다. 또 기우제(祈雨祭)도 산에서 지낼 만큼 산은 절대적(絶對的)이고 신성한 곳이었다.
교통(交通)이 수월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이 신성(神聖)한 산을 넘어 다니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을과 마을을 질러갈 수 있는 산을 '고개'라고 부르고, 산의 일부로 여겼다. 고개는 인적자원이나 물적자원(物的資源)이 넘나들고 군사적(軍事的) 관문 구실을 했기에 국가차원(國家次元)에서 관리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고개는 그 너머의 다른 미지(未知)의 세계로 가는 통로이기에 언제나 두려움과 기대감(期待感)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개 마루에 서낭당을 세워 신성시했고, 장승을 세우거나 돌탑을 쌓아 마을의 경계이자 수호신(守護神)으로 여기며 넘어갈 때 마다 안녕을 빌곤 했었다.
우리 조상들은 또 고개를 오르내리는 것을 인생에 비유(比喩)하기도 했었다. 아리랑 고개를 열두 고개로 표현(表現)하는 것도 시련(試鍊)과 고난의 연속인 인생을 표현한 것이다. 12수는 12지(十二支)와 1년 열두 달을 상징(象徵)하는 수로, 우리 민족이 저승에 이르기 위해 지나야 하는 ‘열 두 대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열 두 대문’은 그 하나하나를 지날 때마다 갖가지 시련이 뒤따랐고, 이를 통과(通過)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으로 여겨져 왔다.
예부터 ‘아리랑고개’는 괴나리봇짐을 짊어지고 넘던 고개였고, 눈물을 뿌리며 넘던 고개였다. 백두산(白頭山)을 넘나들며, 두만강과 압록강(鴨綠江)을 넘어 일제(日帝)와 싸우는 투사들에게는 혁명(革命)의 고개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는 실존(實存)의 고개든, 상징(象徵)의 고개든 ‘아리랑고개’가 많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민족(民族)의 삶 속에서의 ‘아리랑고개’는 결국 자신들이 처한 삶 속에서 꼭 넘어서야만 하는 현실과도 같았다. 그러나 ‘아리랑고개’는 이전의 슬픔이나 탄식(歎息)을 넘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는 약동(躍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아리랑고개’는 미지의 세계이자 불멸(不滅)의 세계로 자리해 온 것이다.
그러나 옛날 봉건사회(封建社會)에서 마을공동체의 활동범위(活動範圍)를 차단하는 것이 ‘고개’였다는 점에서 ‘고개’를 넘어가는 것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 ‘이별(離別)’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 잠시 ‘아리랑고개’를 음미해 본다.
아리랑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오.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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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다시 ‘탄식의 고개’와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조국(祖國)을 잃고 모두가 압록강을 건너 북만주(北滿洲)로 향하던 암흑과 수난(受難)의 시대를 노래하던 일제 때의 또 다른 ‘아리랑’을 소개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간다.
청천 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는 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는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 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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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대로 ‘아리랑고개’는 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물위에 있다고 한다. 실체가 없고, 정신세계(精神世界)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서울에는 실제(實際)로 ‘아리랑고개’라는 고개가 있다. 서울의 성북구 돈암동에 소재하던 ‘정릉고개’가 지난 1926년, 영화 ‘아리랑’의 촬영(撮影)을 계기로 ‘아리랑고개’라는 별칭(別稱)을 갖게 된 것이다.
1930년대의 영화 ‘아리랑고개’의 전단
돈암동에 소재하는 ‘아리랑고개’는 돈암 4거리를 기점(起點)으로 하여 동소문동과 돈암동을 지나 ‘정릉길’과 교차하는 ‘아리랑시장’ 앞까지에 이르는 폭 15m 길이 1천4백50m의 지선도로(支線道路)이다. 예전에는 정릉(貞陵)으로 가는 길의 고개라 하여 ‘정릉고개’로 불렸으나, 1926년 이후 ‘아리랑고개’로 불리어 오고 있다.
‘아리랑고개’의 위치도
일제 때의 영화인(映畵人) 나운규(1902∼1937)가 이곳에서 ‘아리랑’영화를 촬영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다. 1926년 10월 ‘단성사’에서 개봉됐던 영화 ‘아리랑’은 조국(祖國)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보여주어 민족의 저항의식을 고취, 우리나라 영화의 신화(神話)로 남아있는 작품이다. 백난아가 부른 ‘아리랑 낭낭’을 잠시 음미한다.
아리랑 낭낭
백난아 작사 : 처녀림 작곡 : 김교성
봄이 오는 아리랑 고개 제비 오는 아리랑 고개 가는 님은 밉상이요 오는 님은 곱상이라네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님 오는 고개 넘어 넘어도 우리 님만은 안 넘어요
달이 뜨는 아리랑 고개 꽃도 뜯는 아리랑 고개 우는 님은 건달이요 웃는 님은 도련님이지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도련님 고개 울어 울어도 우리 님만은 안 울어요
경사났소 아리랑 고개 입춘대길 아리랑 고개 족도리에 나삼소매 시집가는 아리랑 고개 아리 아리랑 아리랑 고개는 족도리 고개 어찌 어찌도 좋았던지요 쪼끔 울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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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고개’는 또 가끔 이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곳에 그 고개가 있음을 발견하기도 한다. 동짓달 보름달이 중천(中天)에 떠오를 때면 건너 마을 상엿집 아래 울도 담도 없는 오막살이 담벼락 너머 깜깜한 단칸방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교성(嬌聲)이 뚫어진 문구멍으로 새어 나온다. 초등학교 4년 선배인 종구형 내외가 막 ‘아리랑고개’를 넘는 중이다.
지차(之次 ; 차남)라 살림을 나서 부모님을 모시지도 않고 두 내외(內外)만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들은 대낮에도 가끔씩 ‘아리랑고개’를 넘곤 했었다. 그들이 ‘아리랑고개’ 초입(初入)을 오를 때는 비오는 날 시골길을 달리는 말발굽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했었고, 산꼭대기를 기어오를 때는 감기 들린 늑대 울음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어떤 때는 새끼늑대 소리도 섞여 들린 적도 있었다.
‘아리랑’은 악기연주의 기본곡(基本曲)이기도 했었다. 하모니카를 배울 때도, 풍금(風琴)을 배우고 퉁소나 ‘호떼기’를 불 때도 언제나 ‘아리랑’부터 배웠다. 이뿐인가. 노래를 잘 못하는 ‘음치’나 ‘18번지’가 동이 났을 때 부르는 노래도 ‘아리랑’이었다. 최근에는 어느 가수(歌手)가 ‘홀로아리랑’을 불러 애창(愛唱)되기도 했다. ‘홀로아리랑’을 소개한다.
홀로아리랑
한돌 작사 작곡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드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금강산 맑은 물은 동해로 흐르고 설악산 맑은 물도 동해 가는데 우리네 마음들은 어데로 갈까 언제쯤 우리는 하나가 될까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드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선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 서면 닷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 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가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드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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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또래친구 두생이(당시 외동면장의 딸로 동급생이었음) 집에 놀러 가면 안방 벽에 예쁜 그림액자가 걸려있었다. 빨강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은 새색시가 어느 산 고개에서 하얀 수건을 적시며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는 풍경(風景)이었다. 그 액자를 볼 적마다 필자와 두생이는 ‘아리랑’ 노래를 흥얼거렸다. 색시를 두고 떠나간 남자가 야속하여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나기를 바라면서 히죽거리며 부르던 그 시절이 아스라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아리랑고개에서 흔들던 손수건(1952년)
(아리랑의 가사가 영문으로 인쇄되어 있다)
이제 그 새색시가 하얀 손수건을 적시던 그 ‘아리랑 고개’를 뒤따라 넘어가려한다. 실제의 고개도 아니고, 종구 선배내외가 넘어가던 그 고개도 아닌 정신세계(精神世界)의 고개, 그러나 ‘한번 넘어가면 다시는 되넘어오지 못하는’ 그 고개를 말이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도 고개 너머 약방(藥房)에서 ‘이명래 고약’ 사다 바르기로 하고, 그대로 넘어가려 한다. 애조(哀調) 띈 ‘홀로아리랑(필자에게는 찬송가를 말한다)’을 콧노래로 흥얼거리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넘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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