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새벽, 대선 결과를 확인하다.
새벽에 잠이 깨어 TV를 켜서 보니, 문씨의 당선이 확실하다는 보도와 함께, 그의 간난하였지만 굳굳하였던 일생의 이력이 소개되고 있다. 온통 좋은 이야기만 죽 엮어 놓은 것을 보니 확실하게 세상이 바뀐 것이다. 부디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기를 빌 뿐이다.
나는 꼭 1주일 뒤면, 출국을 해야 하는데 떠나기 전까지 마무리하여야 할 일을 생각하여 보니, 서평을 2편 적고, 편지를 1장 보내야 할 곳이 있다.
얼마 전에 카나다의 명문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의 한국학 교수인 Ross King박사가 한말의 한문 소설집 《기문총화紀聞叢話》의 영문 번역본을 보내어 왔다. 한문 소설 117편을, 한말부터 일정시기 초까지 한국에 와서 40년간 선교활동도 하면서, 여러 가지 학술 활동도 하였던 카나다의 선교사 Gale(1863-1937: 한국명 奇一) 목사가 초역을 하여 둔 것을 그 교수가 다시 좀 손질하고 재 편집하여 낸 책이다.
이 게일 목사는 연세대 설립자 언드우드, 배재학교 설립자 아펜젤러 목사 등과 함께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는데, 구교에서 “천주”라고 하는 말을 “하느님”으로 바꾼 것은 그의 주장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1898년에 최초로 한영사전을 만들었으며, 영문 종교소설 《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한글 고전 《구운몽》, 《춘향전》 등을 영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연동교회를 세우고, 정신여학교(지금의 정신여중, 고)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가 살았던 이층집이 연동교회 곁에 아직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3년 전에는 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모임이 이 교회에서 있었고, 또 “게일학회”라는 모임도 생겼다.
그러나 이 목사가 일반 한국인들에게는 위에서 말한 두 목사들보다도 덜 알려진(인기가 없는) 것은, 당시 일제의 한국 침입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서양의 문명인인 백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듯이, 동양의 문명인인 일본인이 동양을 지배하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3,1 운동이 터져 일인들이 한국인인 무자비하게 죽이는 것을 보고서는 조금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는 그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 목사가 위에서 말한 몇 가지 책 이외에도 수많은 한국의 한문 고전을 초고만 남겨두고 죽었는데, 그 자료들이 지금 카나다의 토론토대학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거기 있는 자료들을 발굴하여 2016년부터 토론토대학 출판부에서 “게일한국문학총서Gale Library of Korean Literature”라는 이름으로 11권이나 되는 책을 간행할 계획인데, 여기서 소개하는 《기문총화》가 그 첫째 책이고, 앞으로도 이 게일 목사가 번역하여둔 《이규보선집》, 《고려시선》,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 불교설화집인 《팔상록八相錄》, 어떤 김씨 성을 가진 미혼 여자가 1830년에 한문으로 쓴 금강산 기행록 등등 10권이 더 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 《기문총화》의 편집 작업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마침 UBC대학에 가서 몇 달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킹교수로부터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구상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런대 그 작업에 포함될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연행록老稼齋燕行錄》의 한문 원본은 내가 한국의 고전번역원에서 한글로 번역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 작업에 대하여 매우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교수와 그의 조수 몇 사람과 함께 매주에 한번 씩 만나서, 우선 《기문총화》의 한문 원본과 그 영어 초역본을 대조하여 가면서 윤독을 계속하여본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내가 거기를 떠난 뒤에도 한국의 몇몇 교수들이 잇달아 가서 계속하였다고 한다.
지금 그런 작업이 어느 정도 구체화되어 처음으로 한 권의 두툼한 책(630 쪽)으로 나온 것을 보니 즐거운 마음 가눌 길 없다. 이 책의 앞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긴 제목과, 원 역자, 개역자(편집자)와 한문 원문 교감과 주석을 단 사람들이 이름이 길게 열거 되어 있다.
Score One for the Dancing Girl, and
Other Selections from the Kimun ch’onghwa
A story collection from 19th century Korea
Translated by James Scarth Gale
Edited by Ross King and Si Nae Park
Original hanmun texts with annotations by Kim Tong’uk
첫줄에 보이는 말은 이 《기문총화》 책 56번째로 나오는 이야기의 제목을 영어로 적은 것인데, 투기가 심한 어느 양가 집 본 부인을 이겨낸 한 평양 기생의 슬기로운 이야기이다, 이 책의 영문 제목을 한국어로 풀면 “한 수 높은 기생 및 기문총화의 딴 이야기들-19세기 한국설화 모음”이라고 번역을 하면 되겠는지?
공동 편집자로 되어 있는 박시내는 킹교수의 지도로 UBC에서 박사학위를 한 사람인데, 지금 하버드대학의 한국학과의 조교수가 되어 있다. 한문 원문은 원래 상명대 국문과의 김동욱 교수가 이 기문총화의 한문-한글 대역본을 만들 때 정리한 것을 이용하면서, 그 때 달아둔 각주도 그대로 이용하여 번역한 것이다.
한문으로 된 책을 한글로 번역한다는 것도 쉽지 않은데, 더구나 영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원래 게일 목사가 이런 책을 옮길 때에도 한문을 잘 하는 한국인 보조자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는 목사이기 때문에 옮기는 말투도 영어 성경의 말투를 그대로 많이 써, 한문 원문의 맛이 좀 달라지거나 어색한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하늘 천天” 자가 나오면 보통 “God”으로 옮긴다든가, 책을 읽는다, 글을 읽는다, 공부한다는 뜻으로 쓴 “독서讀書”라는 말에 나오는 “글 서書” 자를 대개 “character(글자)”로만 옭긴다든가 하는 것인데 이러한 점에 관하여, 킹 교수는 책의 첫머리에 〈게일 번역의 문맥정리Further Contextualizing the Translations of James Scarth Gale〉라는 글을 싣고, 이러한 문제를 자세히 논하고 있다. 한 편의 훌륭한 번역학 참고자료라고 말 할만하다.
이번에 낸 책에서는 게일의 이러한 초역은 그대로 적어 두면서도, 지금 일반 영문 독자들에게 잘못 전달될만한 번역어는 주석을 달면서 수정의견을 제시하였다. 또 자주 나오는 관청이름, 관직명 같은 것도 초역에서는 잘 풀어두지 못한 것이 많은데, 이 책의 번역 본문 앞에 무려 9 페이지에 걸쳐서 초역의 번역어와 편집자가 조사한 다른 표현들을 대조표[Table of Equivalents]를 만들어서 제시하고 있다. 매우 힘든 작업이지만 정말 값진 작업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작업을 하기 위하여 영어로 된 한국 역사책이나 논문 같은 데서 관련된 명사가 나올 때 어떻게 번역을 하였는지 면밀하게 조사하여 보고, 그렇게 참고하여본 책이름이나, 논문명을 무려 7페이지가 넘게 밝히고, 또 매 단어 다음에 이러한 명사를 이렇게 옮긴 사람의 이름까지 ()안에 명시하여 두었다. 정말 철두철미한 작업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이 책의 영문 번역문 보다가도 더 큰 활자로 한문 원문을 제시하고서 그 원문 글자들 위에 일일이 한국한자발음을 적어 놓는 것을 반기고 있다. 이러한 치밀한 서비스는 오히려 한국에서 나온 책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아마 앞으로 이 한문 소설을 읽고 연구하는 데는, 서양의 영문 독자들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한국 사람들에도 이만큼 좋은 책이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우견으로 한두 가지 더 보충하여 줄 것을 욕심내어 요구한다면, 모든 소설의 제목을 한문으로는 어떻게 부르는지?, 또 한문 원문에는 구두점을 찍든지, 한글 토를 달아놓든지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아마 여기서 사용한 한문 원문에서는 소설마다 한문으로 제목을 만들어 두지는 않아서, 이 책에서도 그러한 것을 표시하지는 않았을 터이지만, 기왕에 이렇게 치밀한 작업을 하면서 그러한 것을 한번 생각하여 보았으면 어떠하였을지? 이 번역집에서는 모든 소설의 제목을 영어로는 모두 만들어 보았는데, 정작 한문으로는 제목이 없으니 우습다. 편집을 하는 사람들이 그런 제목을 같은 내용을 담은 것이 있는지 여러 판본을 대조하여 찾아본다거나, 또는 만들어 본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원문에는 한문원문을 구절만 떼어놓고 구두점 같은 것을 찍지 않아서 줄이 바뀌면 문맥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때가 더러 있다. 내용이 소설이니 이야기 자체는 재미가 있고, 또 번역과 주석이 소상하니 참작하여 보고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야기 속에는 더러 풍자와 해학 같은 재치가 넘치는 표현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앞뒤를 몇 차례 되짚어가면서 생각하여 보기 전에는 잘 알 수 없는 대목도 수두룩하다. 그래서 구두점까지 찍든지, 아예 현토까지 해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지 간에, 내가 몇 년 전에 잠시 참여하기도 하였던 작업이 이렇게 한 권의 두툼한 책으로 나온 것에 대하여 즐거움을 느끼며, 이 책을 출발로 하여 기획한 책 11권이 모두 다 훌륭하게 완결될 날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나의 좋은 친구인 킹교수와 박시내 교수의 노고에 감사한다.
첫댓글 전 오늘 아니 이젠 어제군요, 밤 10시경 3박 4일의 짧은 미국 뉴욕여행에서 왔는데 선생님은 다음 주 미국을 가시는군요.
선생님의 글을 읽노라면 제가 부끄러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부끄럽게 한국사를 전공했다고 말하곤 하는 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옛 영남의 유생, 선비들의 언행을 생각하곤 합니다.
옛 선비들이 오늘날 대구 경북의 유생들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사실상 글로만 뵈었지만, 선생님이 옛 영남선비의 전통을 간직하고 계신 분이 아닌가 말씀드린다면 주제넘다고 절 꾸짖어시겠지요?
또한 선생님이 꾸준히 연구회 홈피에 글을 남기심은 비록 이젠 멀리계시지만 연구회에 대한 사랑이
변함 없으시다는 것을 보이심이겠지요. 선생님의 연구회에 대한 사랑이 오래가도록 연구회의 전통도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미국 건강하게 잘 다녀 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