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ebrazione Eucaristica nel 77° Anniversario Transito al Cielo della Serva di Dio Luisa Piccarreta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Luisa Piccarrita)의 천국 이동 77주년 기념 미사
( 1947.3.4 일 루이사 피카레타 선종.)
2024년 3월 4일
코라토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
몬시뇰 다센조 대주교님 집전
https://www.youtube.com/live/3MLfMgCbu7w?si=gn_C9khxCnEpZWn3
이탈리아 코라토에서 2024년 3월 4일 있었던
하느님의 종 루이사 피카레타(Luisa Piccarrita)의 천국 이동 77주년 기념 미사 강론입니다.
이탈리아어 자동자막을 구글번역한 것으로 자막과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 스크립트, 구글 번역입니다.)
2024년 03월 04일 월요일
[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참조).>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15ㄷ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권위가 있어 모두 놀라는데, 오히려 그 경이로움이 예수님을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놀라운 가르침이 나오자 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믿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1독서에 제시됩니다. 존경받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불치병에 시달렸지만,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 결국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화를 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부하들은 대범하게 권유합니다.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명이 불가능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앎이 과도한 확신으로 왜곡될 때 주변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더구나 그 앎이 비교나 질투, 열등감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앎은 극단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요르단 물은 나아만의 몸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진정한 앎(인식)은 그의 의식과 마음까지 낫게 하여 준 것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2024년 3월 4일 미사 | 매일미사 | 한국천주교주교회의 (cbck.or.kr)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여러분의 영혼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년 3월 4일에 그러하듯이, 루이사 피카레타 협회의 총대리이자 무엇보다도 교회 보좌관인 세르지오 신부와 함께 친애하는 아버지 대주교 다센조 몬시뇰을 우리 가운데서 맞이하고 감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매년 3월 4일에 여러분을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마치 인장처럼, 여러분의 현존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모두에게, 협회의 일부인 이들에게, 또한 이 위대한 성인의 모습을 알고 있는 많은 코라토의 많은 사람들, 단순한 신자들에게도 격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여인에 대해 우리는 아직 공식적인 성인은 아니지만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듯이, 루이사를 아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우리 구역의 이 위대한 여성이 겪은 일을 통해 깨우침을 받았기 때문에 격려가 됩니다.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3 월 4 일은 보통 사순절에 있고, 대부분 이렇게되기 때문에 부활절을 향한 사순절의 여정에서도 우리를 어떻게 말하고 격려하고 확인해야하는지 우리에게 사순절 무대가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또한 친애하는 코라도 데 베네데티스(Corrado De Benedettis) 코라토 시장과 협회 회장인 바레사노(Varesano) 시의원에게도 인사를 드립니다. 이 축하 행사는 루이사가 코라토 사람들에게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확인하는 도시 축제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 자매 여러분께 고백하건대, 저는 생각과 말과 행동과 부작위, 제 잘못, 제 잘못, 아주 큰 잘못으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 천사들, 성인들, 그리고 형제자매 여러분, 저를 위해 주 우리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아멘.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께서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은 자비를 베푸소서. 오 아버지, 당신의 끊임없는 자비로 당신의 교회를 정결케 하시고 강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녀가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으므로, 당신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하나 되심 안에서 영원무궁토록 당신과 함께 사시고 통치하시는 당신의 은총으로 항상 그녀를 인도하소서. 아멘.
<강론>
"주 그리스도여, 주님. "자기 나라에서는 어떤 선지자도 환영받지 못합니다. " 오늘 선포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에서 많은 동료 시민들과 함께 회당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루마리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눌린 사람에게 구원을, 눈먼 사람에게 시력을,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기 위해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셨으니, 이는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여러분이 들었던 이 말씀이 여러분을 위해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이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인물, 즉 기다림과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아임을 확언하십니다. 그의 동료 시민들은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당신을 알았습니다. 당신은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목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는 당신을 압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우리는 당신이 지금 선포하는 이 참신함을 환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을 거의 예상하신 듯이 '자기 나라에서는 선지자를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이야기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는 동포 과부들이 많았지만 그는 시돈의 사렙타에서 한 외국인을 고쳤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국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는 나에게 속담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의사, 네 자신을 고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가파르나움에서 한 일, 즉 많은 치유와 많은 기적을 행했는데, 왜 여기, 당신을 잘 아는 당신의 마을 나사렛에서도 행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도 기적을 행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위대한 기적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사람들은 마음이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도 그들을 위해 이루고자 하셨을 일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딱딱한 사람들.
마음이 강팍하고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딱딱한 마음, 즉 거듭나지 않은 마음, 선하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살아 계시고, 현재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심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우리 삶과 우리가 자주 접하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역사의 사건들 속에서? 우리에게 선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에게 거듭난 마음이 없다면?
거의 매년 사순절 기간에 루이사의 수난에 대한 기억이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바로 회심의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회심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회심은 지속적인 여정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받아들이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나사렛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그를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그분의 뜻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말씀과 성체성사의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며, 우리는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자신 있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열왕기 하권에서. 그 당시에 아람 왕의 군대 사령관 나아만은 주께서 그를 통해 아람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그의 주인에게 권위가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용감한 사람은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람 사람들의 무리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한 소녀를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 소녀는 결국 나아만의 아내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주인에게 "오, 내 주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선지자에게 자신을 내어주실 수만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하면 나병에서 구출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가서 주인에게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아무개라고 말했다"고 말했습니다. 아람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리라 그래서 그는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세겔과 옷 열 벌을 가지고 떠나 그 편지를 이스라엘 왕에게 가지고 갔는데, 그 편지에는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내 신하 나아만을 네게 보냈으니 이는 네가 그를 문둥병에서 건지게 하려 함이니라" 이스라엘 왕이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 그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하느님이냐 내가 죽든지 살리든지 어찌하여 사람을 문둥병에서 건지라고 명하느냐 그가 나에 대한 구실을 찾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고 보아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는 말을 듣고 왕에게 "어찌하여 네 옷을 찢었느냐?"
그 사람은 우리에게 성찰을 위한 영적 이유, 삶에 대한 구체적인 헌신을 위한 이유가 될 수 있는 사람에게서 올 수 있습니다. 루이사가 죽었을 때,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이 그것이 또 다른 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매일 강직증을 앓았고, 거의 매일 반복되는 죽음을 살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우리가 매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죽고, 이기심에 대해 죽고, 우리의 폐쇄에 대해 죽고, 우리의 선입견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을 할 수 없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인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미사에서 주 예수님께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삶의 행동이 변화할 수 있는 힘을 주시도록, 즉 우리의 마음, 참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회심하고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간청합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환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매일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새로움 안에서, 생명의 새로움 안에서만 그분을 환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동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일 동상 앞에 서면 동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문이 막히고, 움직이지 않고, 귀머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가 회개할 수 있는 마음,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매일 우리에게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을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를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의 동료 시민들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고,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그들의 도시가 세워진 산 가장자리로 데려갔지만, 자신을 항복하고 죽음을 받아들일 때를 결정하는 것은 예수 자신입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그분의 때가 언제인지 결정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 환영받고 인정받아야 하며, 그분이 매일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새로움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우리 교회에서 지난 수년간의 시노드 여정에서 우리가 살고자 하는 것과 같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아니요, 저는 우리 교회, 보편 교회, 우리 교구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끄는 시노드의 길을 살고 있으며, 이탈리아 주교들의 지시에 따라 시노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수반합니까?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새로운 것들을 환영할 수 있도록 마음의 회심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마음의 회심을 실천하고자 하지 않는 사람들은 특별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매일 우리 손에 기꺼이 주시고, 우리의 삶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와 모든 그리스도인을 위해 주님께 여쭈어 봅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소식을 환영할 수 없는 사람들도 등록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신문에서 그것에 대해 읽거나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듣기 때문에 많은 경우 그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교황이 만든 이 참신한 뉴스는 도대체 무엇일까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구의 사제들과 주교들은 무엇을 생각해내고 있는가?" 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회의와 함께 공동합의적 여정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 지속적인 회심의 길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놓치기 때문에 안타깝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새로움은 우리가 매일 눈을 뜨면 하느님이 우리에게 새로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회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지루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즉, 매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 데워진 수프에 만족하는 사람들은 지루합니다. 한때는 괜찮았지만, 매일이 지루함으로 이어지고, "그만! 저는 이 본당 안에서, 그 본당 안에서, 저 교구에서, 저 교구에서, 저 주교와 함께 항상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 곁에 있는 것이 지겹습니다."
그들은 재가열 수프를 먹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데워진 수프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매일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아름다움과 새로움을 원합니다. 그리고 이 사순 시기는 기도와 금식과 자선을 통해 우리에게 이러한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이 길을 걸으면 만족하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여정을 지탱해 주시는 성령의 지혜를 하느님 아버지께 간구합시다. 쇄신. "오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오 주님, 거룩하신 아버지, 우리는 교회를 위해 당신께 기도합니다, 교회가 신성한 뜻(Fiat)의 풍요로움을 보충하게 하시고, 교회가 모든 곳에서 항상 당신의 사랑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과 성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당신께 간청하오니, 오 주여, 오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이것이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그래서 스승님, 무한한 자비의 아버지시여, 영원하신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빛을 주시고,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회개의 몸짓과 말씀을 일깨우소서.
봉헌을 위한 노래: "오 하느님, 당신은 나의 구원이십니다. 시선을 내 마음으로 돌려라. 아버지와 함께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위해 찬양의 희생을 드리며 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항상 제게 주시는 모든 것을 제가 바치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살면서 제 마음을 살피고 아버지를 찬양하겠습니다...
<유튜브 자막 스크립트 이탈리아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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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e può essere per noi motivo spirituale di riflessione, di impegno concreto di vita. Quando Luisa morì e tutti pensavano in quel momento che fosse l'ennesimo fenomeno, che lei viveva tutti i giorni di catalessi, quasi di una morte che ogni giorno si rinnovava, è quello di cui noi abbiamo bisogno ogni giorno: di morire al Peccato, di morire all'egoismo, di morire alle nostre chiusure, di morire ai nostri preconcetti. Perché altrimenti non saremo persone in grado di accogliere Gesù e di riconoscere quella che è la sua volontà per noi.
Allora in questa messa chiediamo al Signore Gesù che ci doni la forza di cambiare nella mente, nel cuore, nei comportamenti della nostra vita, cioè di convertirci nel cuore, appunto, nel profondo del nostro cuore, e di accogliere Gesù così come lui è, perché Gesù non può essere come noi diciamo. E Gesù è il figlio di Dio e noi non possiamo che accoglierlo. E ogni giorno non possiamo che accoglierlo nella novità che lui ci propone, nella novità di vita. Perché Gesù non è una statua, no. Quando noi ci mettiamo di fronte ad una statua e quella è così tutti i giorni, non dice nulla, è muta, è immobile, è sorda. No, ma Gesù è vivo e se noi abbiamo un cuore capace di conversione, un cuore buono, ogni giorno Gesù ha da rivelarci qualcosa di nuovo, qualcosa di bello.
Noi non possiamo mettere le mani su di lui. Questi suoi concittadini avevano deciso di ucciderlo, l'avevano portato fin sul ciglio del monte dove era costruita la loro città per gettarlo giù, ma è Gesù a decidere quando è il momento di consegnarsi, per poi abbracciare la morte. Non sono gli altri a decidere quando è il momento, quando è la sua ora. Gesù va accolto e riconosciuto come Dio e nella disponibilità alla novità che ogni giorno ci rivela.
Vedete, concludo, mi sembra che tutto questo è quello che stiamo cercando di vivere in questi anni di cammino sinodale nella nostra chiesa. No, dico la nostra chiesa, la chiesa universale, la nostra chiesa diocesana. Stiamo vivendo un cammino sinodale, guidati da Papa Francesco, guidati dalle indicazioni dei vescovi italiani, e vivere un cammino sinodale, che cosa comporta concretamente? Se non vivere una conversione del cuore per poter accogliere poi tutte le novità che lo Spirito Santo, giorno dopo giorno, ci rivela, ci consegna.
Vedete, chi non è disponibile a vivere la conversione del cuore si perde qualcosa di straordinario. Chi ha il cuore indurito si perde la novità, la bellezza che Dio ogni giorno è disposto a mettere nelle nostre mani, a consegnarci per la nostra vita. Allora, domandiamo Signore, per ciascuno di noi e per tutti i cristiani perché poi dobbiamo anche registrare persone che non sono disponibili ad accogliere la novità, no?
E tante volte lo sentiamo dire perché poi lo leggiamo magari dai giornali o lo ascoltiamo dalla radio, dalla televisione. Ci sono persone che dicono "Ma che sono queste novità che si è inventato Papa Francesco? Che si inventano i preti e il vescovo della nostra diocesi?" Stiamo camminando sinodale con gli incontri. Verrebbe da dire dispiace per loro, perché chi non si immette in questo cammino di conversione continuo si perde la novità. La novità che è Dio, perché Dio ogni giorno, quando apriamo gli occhi, è novità per noi. E chi ha un cuore che si converte è una persona che non s'annoia.
Cioè, si annoiano quelle persone che ogni giorno rifanno le stesse cose, che si accontentano della minestra scaldata. Che una volta va bene, ma tutti i giorni poi ti porta alla noia, a dire "Basta! Mi sono stancato di stare appresso a queste persone che dicono sempre le stesse cose, dentro questa parrocchia, per dire no, dentro quella parrocchia, con quel gruppo, con quella diocesi, con quel vescovo."
Sono quelle persone che hanno deciso di mangiare la minestra scaldata. Noi non vogliamo la minestra riscaldata, noi vogliamo la bellezza e la novità che lo Spirito ogni giorno vuole darci, a noi di convertirci. E questo tempo di Quaresima ci offre, per l'ennesima volta, questa possibilità, attraverso la preghiera, il digiuno e la carità. Camminiamo su questa strada e saremo contenti e felici.
Fratelli e sorelle, chiediamo al Padre la sapienza dello Spirito che sostiene il nostro cammino. Rinnovamento. Preghiamo insieme e diciamo: "Ascoltaci, o Signore, ascoltaci, o Signore, Padre Santo, ti preghiamo per la chiesa, perché ricompa della ricchezza del Fiat Divino, sia sempre in ogni luogo testimonianza credibile del tuo amore e strumento di salvezza e santificazione per ogni uomo."
Per questo ti preghiamo, ascoltaci, o Signore, o Signor, resao sol per contemp finin. Per questo ti preghiamo, ascoltaci, signore. Per questo pri, signore. Ining gfen, enamo Signore, Padre di infinita Misericordia, ascolta le nostre preghiere e donaci la tua luce, suscita in noi gesti e le parole di un'autentica conversione per Cristo nostro Signore.
Canto di presentazione dei doni a pagina 61: "Nelle tue mani, nelle tue mani, affido la vita, Dio, mia salvezza sei tu. Volgi il tuo sguardo al mio cuore. Con te, assicuro, sarò, Padre del Cielo, per il tuo nome vivrò un sacrificio con la mia lode. Ti offrirò per tutto ciò che sempre mi dai."
Padre del Cielo, per il tuo nome vivrò, scruta il mio cuore e la mia lode io ti offrirò ...
첫댓글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회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네~ 수정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