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숙 시인>>
<<허영숙 시인의 양력>>
* 1965년 경북 포항에서 출생.
* 부산여자대학 졸업.
* 2006년 《시안》으로 등단.
* 시집 : 『바코드』(문학의전당, 2010)가 있음.
* 공저시집 : 『느티나무의 엽서를 받다』등.
* 현재 〈시마을〉동인으로 활동 中.
<<허영숙 시인의 시>>
나의 이웃/허영숙
콩을 서 말 심으면
새가 한 말 먹고
쥐가 한 말 먹고
사람이 한말 먹는다는 노인의 말
그게 이웃이지
끄덕끄덕
땅 한 평 빌려 토마토며 오이를 심었더니
몰래 다녀가는 이웃이 늘었다
밤에는 밤대로
낮에는 낮대로
빈 주머니 차고 다녀가는 눈 밝은 이웃
하루 이틀
다 익기도 전 비어 가는 텃밭
낮밤이 근심이지만
울타리를 칠 수 없는 이유
나의 이웃들은 가끔씩
새끼들을 데려오기도 했다
겨울 주의보/허영숙
흑인가수의 영가처럼 슬프다,
빈 가지만 펄럭이는 나무여
물오른 한 때를 수식하던 바싹한 담쟁이
나무의 등피를 휘감은 채
혹한의 바람을 불안하게 견디고 있다
길게 늘어지는 겨울
닫아 건 창문에는
간간이 햇살만 가볍게 눌러앉았다 가고
솔기터진 골목에는 찬바람이 숭숭하다
마른 논처럼 갈라진 그리움의 손등에서는
서서히 붉은 노을이 번지고
안티푸라민을 문질러 바른 자리마다
매운 눈물이 빼곡하다
건조주의보가 길어질수록
점점 더 바싹한 절명시(絶命詩)를 쓰는 겨울
푸석한 기다림이 죽기 전에
조금만 더 이른 걸음으로 내게 오라, 봄날이여
도라지꽃 비화/허영숙
박 씨의 농장에는 개가 네 마리 있다
암컷 한 마리에 수컷 두 마리
술 먹으면 개만도 못해 아내에게 개취급 받는 박 씨까지
수컷 한 마리는 과묵하지만 한번 덤비면 진짜 개 같은데
개소리만 크지 개 같지 않은 놈도 있어
개 같은 놈 눈치 바깥을 맴돌기만 하다가
암내를 맡으려고 할 때만큼은
개 같지 않은 놈도 개 같은 놈에게 달려들곤 했다
그래도 생일이라
동동주로 남편을 또 개로 만든 아내
거르고 난 술지게미가 아까워
개 같거나 개 같지 않거나 개는 개니까
개들에게 골고루 나눠 준 것이 문제
취한 수컷 두 마리가 앙칼지게 물어뜯고
싸우다가, 개 같은 놈은 지쳐 잠들고
개 같지 않은 놈은 비틀비틀
높이가 있는 도랑에 떨어져 피 흘리며 기절한 것이 답
비몽사몽 취해 개보다 더 개가 된 박씨
개가 죽은 줄 알고
그만,
구덩이에 개를 파고 산을 묻어버리고
취한 뒷산은 도라지꽃을 울컥울컥 뱉어내고
뿔/허영숙
서늘하고 단단한 골질은 좀처럼 순해질 줄 모른다
밤을 뒤척이는 동안
용서와 모략이 서로 교행한다
뒤끝은 왜,
어둠에 무뎠다가 빛에 새로워지나
돌출은 서로 버티는 세계의 무기
너를 찌르거나
스스로 나를 찌르거나
몸의 더운 기운이 좋은 기별로 왔다면
동백처럼 한 모가지 단숨에 꺾어줄 줄도 알았겠지
늦더라도
목련처럼 천천히 덜어낼 줄도 알았겠지
상처를 수락하기 어려워 세운 뿔
내 핏자국만 비린내 나는 후회를 새로 얽고 있지만,
그을음도 남기지 않고
터진 실밥처럼 줄줄이 풀려 사라지는 노을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다 보면
멀리 나가 있던 젖은 마음이 마침 돌아와 뿔을 적신다
피를 팔아서라도 지키고 싶던
단단한 뿔은 투명해지다 사라진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는
달만 한 옹이를 하늘에 울컥 낳아놓고
우리는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허영숙
오래 걷다 잡힌 발의 물집을 위로하자고
죽어서 누운 나무의 등뼈 한 가운데 앉는다
나무가 눕는다는 것은
생사의 금을 긋는 일
햇살과 바람의 간섭으로
틔우거나 피우거나 찬란하거나
보내거나 견디거나 하던 극복의 기록이
오히려 투쟁이었다는 듯
살아서 서 있다는 것이 형벌이었다는 듯
마른 수피 한 벌 입고 누워버린 나무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골진 자리에 하얗게 피고 있는 독버섯
죽은 나무에 햇살 구멍을 만들어 분주히 들락거리는 개미들
아직도 파랗게 날 선 풀꽃군락을 지날 때도
그늘마저 물들이기 위해 골똘히는 느티나무를 지날 때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여기 있다
닫히는 중인 줄 알았는데 한 세계가 새로 열리고 있었다
다른 종들의 거처로 먹이로 다시 쪼개지고 쪼개지다 보면
마침내 흙
물집 잡혔다고 주저앉은 내 발도 마침내 흙
봄을 알리지도 못하고
언젠가는 봄을 보지도 못할 것 끼리 거룩하게 섞이고 섞여
다음 생이 목생이라면 오백 년을 산 나무의
일 년 생 잎으로 와서 함께 펄럭여 볼까
호모나팔꽃족/허영숙
한 줄기 담쟁이가
여름 내내 담벼락을 뒤덮었다
스마트하게 사방으로 줄기를 뻗는다
가장 빨리 번져 나가는 잎들은 서로 더 촘촘하게 닿는다
해마다 진화하는 호모에스엔에스족의 세계
우체국도 없는데
기침만 해도 온 담벼락의 담쟁이들의 안부가 톡톡 도착한다
잎들은 물관을 열어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안간힘이다
번져나가려는 것끼리의 결집은 더 돈독해진다
담쟁이를 자라게 하는 것은
지그시 오는 햇살, 사무치게 젖는 비
서로 등 기대 오를 담벼락
이 아니다
불안의 그늘을 가면 뒤에 숨기고
잎의 층을 쌓으며 서로를 꽁꽁 묶어야 산다
그 담벼락 아래
진화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난 족속
이슬을 들였다 보내며 스스로 고요해 질 줄 아는
외줄기 호모나팔꽃족도 산다
여전히 한 방향으로 세상을 감으며
날아가는 멧새를 지그시 바라보는,
돌의 무늬/허영숙
갈매기가 앉았다간 몽돌에 햇볕이 물려있다
파도는 수시로 달려와 돌의 몸에 새길 무늬를 궁리한다
어떤 돌은 몇 억 광년을 날아온 햇살에 살고
어떤 돌은 물에 살아 무늬가 비리다
말간 얼굴에는 맨 처음 불이 번져간 무늬
바람이 오래도록 길러온 무늬
어떤 돌에는 지상에 내려와 죽은 별이 박혀있다
갈매기가 흘리고 간 기척들도 무늬가 되고
굳은 다짐 없이
몇 천 년의 표정을 몸에 새기지 못한다
돌의 등에 바싹 엎드렸다간 어둠의 무늬가 보인다
누가 낡은 신발을 끌고 여기에 왔다가 벗어 놓고 간
발바닥도 무늬가 되었다
음역이 다른 물소리를 키우는 것은
저 말간 얼굴 속에 그려진 무늬들
종일 드나드는 물결로 다 읽지 못한다
습(習)-감옥/허영숙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아픈 무릎 딛고 간신히 일어나니 비로소 바람이 되었다 우수와 상강의 절기를
오가며 달렸던 길을 모르게 뒤를 밟듯 조용히 따라간다 모란이 피고 동백이 피던 계절의 간극에 늘 있던
우리는 등 돌린 한 걸음만으로도 얼마나 멀리 서로에게 떨어져 나와 버렸나
사람에게 갇히면
기억 속 모든 길은 창살이 되고,
매일
한나절을
익숙한 길을 따라 맴돈다
뼈와 살에 벤 습(習)은 혼자 견뎌내야 하는 독방처럼 무섭다. 좀처럼 내려놓지 못하고 오랜 유적이 되어 버
린 귓불 붉히던 시절의 언저리를 종아리가 붓도록 오가며
스스로 슬픔을 발굴하는 바람이 있다
모란앵무와의 나날/허영숙
아주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이민을 가며 떠안기듯 주고 간 모란앵무가
횃대를 시끄럽게 긁는다
오려는 잠을 며칠째 부리로 물어뜯고 있다
창밖에는 사납게 비가 내리고
막 벌어진 무화과 툭 떨어지고
단단한 먹으로 몸을 갈기갈기 밀어내듯
소리로 갈아내는 밤은 먹물처럼 짙다
새가 부리로 제 깃털을 뽑는다
낯선 이주에 대한 두려움이 횃대에서 깃털로 옮겨간다
정 붙였던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리고
새는 스스로 몸을 후벼 파며 운다
부리로 뽑아 낸 울음이 새장 바닥에 흥건하다
그 즈음, 내 슬픔도 부풀고 있는 중이었다
울음 기둥은 여기저기 솟구쳐 나를 가두고
쏟아 낼 곳을 찾지 못해
깃털을 하나씩 뽑고 있는 중이었다
모란앵무와 내가
맞닿아 있는 아픈 음역을 서로 살핀다
몸의 깃털을 다 뽑아 맨살이 드러날 때쯤
울음은 속도를 늦추다 그칠 것이므로
며칠, 서로의 축축한 무릎을 베고 잠들어야 한다
반얀나무/허영숙
당신은 내게 가지로 자라길 원했으나
나는 기꺼이 뿌리가 되어 당신을 받들기로 한다
가지의 사원
수십 수천그루의 나무가 이루고 있는 반얀나무 숲
그러나 그건 멀리서 봤을 때의 이야기
가지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가지가 되는
오랜 숲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시작은 오직 한 그루
하나의 뿌리에서 오래고 긴 말의 매듭이 풀린다
맨 처음 시작이었던 큰 둥치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중에 뿌리를 두고 아래로 가지를 내리는 나무
그 나무 죽은 자리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반얀나무
한 그루가 내린 사랑이 저토록 넓고 견고하다면
누구도 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은유하지 못한다
수천 갈래의 가지를 내려 받치고 싶은
오직 한 그루, 당신
섬-누군가 잃어버린 퍼즐 조각들/허영숙
바다에 풀린 달이 하얀 길을 낸다, 그 길을 따라
물이 온다
갯벌에 발목만 담그고 있던 바다의 밑그림들이 술렁거린다
오늘은 달도 만조가 되는 날
포구의 밤풍경이 비로소 다 맞추어지기까지 보름이 걸렸다
다시 물이 온다 얼마나 많은 섬을 훑고 돌아다녔는지 철벅철벅 오는 걸음이 느리고 무겁다
오래전 너는 내게 맞물렸던 한 조각, 폭풍우 같은 시절이 지날 때 너는 훌훌 뭍을 떠나 섬이
되 숨었다 섬과 섬을 기웃거리며 다녀도 보일 듯 말 듯 한 하얀 종아리, 수많은 섬들 중에
익숙한 네 무릎도 볼 줄 모르는 나는 너를 이해하는데만 반생이 걸렸다
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조금씩 낡아간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찾았을 때는 헐렁해진 거리
를 힘들어 할지도 모르는 일
시간을 뒤엎어 다시 끼워 맞추면
그때는 네가 보일까, 텅 빈 해안선
둥글게 굽은 옆구리에
억지로 제 몸을 들이미는 달빛,
49일*/허영숙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다녀갔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와서
잠시 나를 들여다보고
마당의 맨드라미 씨앗을 한 줌 받아 환하고 눈부신 길목을 돌아갔다 그날 밤,
숙모의 꿈에도 다녀갔다고 했다
평생 쌀물 일던 아침을 놓지 못해 칠일
서늘하게 혼자 늙어 갈 빈집에서
산꿩 울음만 듣고 풋감은 저 혼자 어떻게 익나 하고 다시 칠일
한 목숨 다 저문 후에도
사람들이 부르는 당신의 이름에 귀 기울이며
딱 그 이름만큼으로 울고 그 이름으로
일곱 날을 다시 일곱 번을 살다가
먼 바깥으로 맨드라미 씨앗을 쥐고 걸어갔다
비로소 완전히 가신 거라며
숙모는 밥도 먹지 않으며 울었고 나는,
버드나무가 있는 물가에 앉아 하늘을 보았다
피안에 들기 전에 머문다는
마흔아홉 날
그곳의 입구가 어디쯤인지 남은 사람들은 끝내 알지 못하고
숙모도 다시 수저를 들 것 이지만
하늘 저 어디쯤을 열면 맨드라미 까만 씨앗이 쏟아질까
나는 ,
버드나무 가지를 힘껏 당겨보았다
*49재 : 칠칠재(7.7,七七齋)라고도 불리는 사십구재는 사후 49일 만에 치르는 제사의례
굴참나무 그대/허영숙
죽은 자를 방부제로 닦아가며 불멸의 사랑을 지켜가는 누군가가 이 지상에 있다는데 나는 오늘 일
몰이 보이는 구릉 어디쯤 한 사람 심어놓고 왔네 그가 자주 밟던 땅 밑으로 길을 내고 꽃분 같은 뼛
가루 뿌린 자리에 어린 굴참나무 한 그루 심어 두었네 하관하는 뿌리에 진혼의 말 동여매는 것도 잊
지 않았네 저 굴참나무 자라서 가지마다 무성하게 흔들리면 그 사람 손짓으로 읽어주겠네 햇살이 잎
잎을 들추며 사그락거리면 내 귓전에 두는 푸른 목소리라 여기고 해 지도록 수런수런 농담을 나누겠
네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잎으로 내게 떨어져 닿으면 처음 입김 닿던 시절처럼 목덜미 수줍게 붉어지
겠네 굴참나무 그늘 아래서 잠들다 깨면 꿈속인 듯 그대 품속인 듯 하겠네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허영숙
준비도 없이 사랑니는
어둑한 기슭, 저 안쪽에
아름답지만 불편한 이름으로 심어졌다
오래 그것을 혀로 핥았다
나의 일부가 되었으나
다른 뼈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끔 통증이 되었다
앓다가 기어코 사랑니를 빼고 온 날 밤
세포들이 빈자리로 몰려갔다
뼈 하나를 잃은 남은 뼈들이 서로 뒤틀리고
잇몸은 억지로 정을 뗀 사람처럼 부어올랐다
몸에서 내가 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뼈가
가장 오래 나를 허물고 있다
안쪽에 남겨진 실밥을 혀로 핥아 본다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나비그림에 쓰다/허영숙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
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
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
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蛺蝶圖” 에서 인용
모란꽃살문/허영숙
봄을 함께 거느리던 붉은 모란, 아주 오래 소식 없어 먼 바깥에서 잘 피고 있겠거니 여긴 그 모란, 절집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시간의 풍상을 맞는 동안 꽃의 단청은 버렸으나
얇은 창호지 한 장 사이에 두고 바람과 햇살을 걸러 들여 낯빛이 고고하다
모란의 손을 잡고 한창 피었을 때 가졌던 지란지교의 날을 들추는데 꽃술 안쪽의 청명한 세계가 따뜻하게 건너온다. 버려서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새로운 꽃말을 새기고 있는 모란, 창호지 너머 *어간으로 내린 모란의 뿌리는 깊고도 단단하다
평생 결가부좌로 여기에 피어있을 모란을 나는 붉은 꽃으로만 읽으려 하고 모란은 내 외진 기슭까지 읽으니 아직 세속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해 내게는 너무 낯선 모란,
절집을 나서는 등 뒤에서 잿빛 소맷자락 사이 희고 여린 손으로 합장하는 모란, 그만 마음이 소슬하여 세 걸음 가다 돌아봐도 모란, 돌계단 아래서 또 돌아봐도 모란,
꽃물 져도 모란은 아직 모란,
내게는 평생 붉을 모란,
고수들/허영숙
몇몇 사람들이 사린 줄을 지고 물목을 노려본다
성급한 사람은 몇 번 던지다 말고 비늘만 묻은 투망을 지고 다른 물목을 찾아 떠나고
태생이 게으른 천칭자리인 나는
배꽃이 지펴 논 그늘에 앉아 봄볕에 물린 자리를 식히고 있다
오랜 기다림도 고수들의 목록이어서 적막을 견디며 물밑을 읽는 사람이
망 가득 날 것들을 잡을 수 있으나 마음의 재촉이 깊어 오래 숨죽이는 노려봄에는 고요하게 가담할 수 없으므로
시집 귀퉁이로 근질거리는 팔뚝을 긁으며 논다
다행히 올가미를 비켜 갔다고 안도하며 깃드는 물고기나 기다리며
고수들의 진지 그 아래 물목에 통발 하나 걸쳐두고,
나비그림에 쓰다/허영숙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粉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정약용의 시 “題?蝶圖” 에서 인용
바코드/허영숙
A4용지 한 장의 분량으로
간단한 자기소개서와 이력을 제출하라 한다
마흔 해의 낮과 밤을
그 간격에서 생겨 난 만 갈래의 길을
한 장에 어떻게 다 말할 수 있나
초등학교 졸업이 언제였더라 손가락으로 꼽다가
먹다 만 새우깡 겉봉에 찍힌 바코드를 본다
저 굵고 가느다란 세로 줄에 기록 된 것은
출고 일자 혹은
여기로 오기까지의 경로 표시에 불과할 뿐
봉지 안의 분말로 남은 새우의 길에 대해
등 굽은 파랑의 날들에 대해 모두 말 할 수 없다
어느 겨울 날,
찬물에 돌미나리를 씻으며 울고 싶었던 이유가
시린 손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 줄에 다 적을 수 없듯
오래 더듬어야 읽을 수 있는 길
그 위에서 버려진 신발이 몇 켤레였는지
밟아온 길을 일으켜 세워 바코드를 만든다
고음으로 내질렀던 푸른 날의 한 때를
세로로 긋다가 올려다 본 하늘
정오의 햇살이 내 몸의 바코드를 환하게 읽고 간다
동백 피다/허영숙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집에는 내가 즐겨듣는 노래가 있지 노래가 나오던 문을 열고 들어서면 해마다 바람이
그려놓은 악보들이 마당에 두껍게 쌓여 있지 바랭이, 개망초의 전주곡이 끝난 자리에 이름 모를 풀꽃들이
스스로 지닌 음계를 타고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피었다 지고 도돌이표를 따라 한 무리의 별들이 쏟
아져 내리며 합창을 들려주기도 하지
나만 아는 그 집에는 오래 전 당신이 부르던 노래가 있었지 노래가 흘러나오던 입술을 열고 들어서면 잡풀만
무성한 마당, 저음 또는 고음이 가진 당신과 나의 불안한 옥타브를 베어버린 킬링필드, 그 들판에 우리의
노래는 이미 죽고 남은 몇 음절의 노래가 미완으로 남아 있지 달빛만 조명처럼 출렁이었다 사라지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오래도록 당신의 노래를 기다리고 있던 겨울 날
집과 집의 경계를 깔고 앉아 당신의 지문이 묻은 악보를 뒤적이는데 성성 날리는 눈발이 피날레를 예고하더니
담벼락 밑에 서 있던 늙은 가수 하나가 목울대를 세우고 붉은 노래를 낭창낭창 부르기 시작했지 그 틈을 타고
오래 가두어둔 한 음절을 기침이 쏟아지도록 따라 불렀지 눈발 속에 당신이 붉게 붉게 피고 있었지
섬 속의 섬/허영숙
배수가 안된 옥상에 빗물 호수가 생겨났다
호수에 사각형의 하늘이 잠겨있다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한 무리의 새떼들이
대열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지나간다
호수는 섬 하나 품고 있다
누군가를 오래 안았으나 이제
절룩거리는 다리를 가진 낡은 의자
구부러진 안테나가 있는 구형 텔레비젼
뭔가 길렀던 흔적이 남은 스티로폴 흙 상자들
끈끈한 지문이 닿아
폐기물 딱지 한 장에 쉽게 보낼 수 없는 것들은
모두 옥상으로 간다
옥상은 낡거나 고장 난 것들이 모여 있는 또 다른 섬
호수 중앙에 물 그림자로 펄럭이는
맞은편 치매병원의 입간판이 보인다
소견서 한 장을 내밀고
늙은 노모를 고독한 섬에 내려놓고
-어머니 낡았으니 이제 여기에 두고 갈게요-
불편한 뒷모습을 서둘러 정돈하고 가는
한 사내도 보인다
낡고 고장난 의자 하나가 병원 창가에 오래도록 놓여있다
파도의 방/허영숙
누구의 손짓에 저 물길 열리고 닫히나
무창포에 와서 누운 밤
물때를 만난 파도가
서로의 산실로 돌아가는 소리 들린다
만난 적 없는 듯 등 돌려가는 마디마다
어떤 울음이 빼곡하기에 걸음이 저토록 질척거리는가
멀어진 틈의 간격을 메우며
비릿한 물 내를 품고 뜨는 섬
질펀한 그곳에 한 무더기의 별들이
여기가 다시 무덤인 줄 모르고 몸 던져온다
수면에 뜬 아사달의 무늬를 쫒아
물속으로 뛰어 든 아사녀의 그림자가
이루지 못한 것을 찾아 그믐달 속에 서성이는 밤
서로를 떠나서는 그곳이 감옥인 듯싶었는지
이른 새벽 흰빛을 끌고 달려오는
물소리, 물소리
서로의 내밀한 몸속으로 혀끝을 밀어 넣으면
물결 너머 또 물결이 붉은 아침을
저 먼 물금 위에 뜨겁게 띄우겠다
*무창포- 충남 보령 소재. 한달에 두 차례 그믐 사리 때 바다가 열리는 곳
꽃싸움/허영숙
느티나무 그늘을 펴놓고
할머니 여럿 둘러앉아 꽃싸움을 한다
선이 된 바람이 꽃잎 몇 장 바닥에 깐다
손끝에서 매화가 피고 모란이 피고 국화가 피고
새가 울고 달이 뜨니 창포도 한 꽃대 밀어 올린다
거듭 나는 열두 달
주름의 행간으로 스민 생의 사계가 저곳에 있다
꽃등만 보고도 꽃말을 맞추는 나이
패를 들켜도 두려울 것이 없다
빛날 광(光)에 목숨 걸지 않아
단풍든 시절이 한참 지난 저 싸움엔 패자도 없다
꽃 필 때마다 웃음도 그늘로 거느리고 있는
느티나무 심판관
꽃값을 대신 읽어줘서 하늘하늘 즐겁다
꽃잎끼리 부딪칠 때마다
씨방에서 터지는 꽃 웃음
다시 꽃을 볼 수 있을까
조심스레 마지막 꽃잎을 꺼내는 손끝에 바람도 긴장한다
꺼내놓을 패가 없어 뒤집을 것도 없지만
눈부시게 피던 시절을 지금 저 손끝에 거느리고 있어
봄날이 아니더라도 화투花鬪의 시절엔
꽃 지는 법이 없다
푸른 기와/허영숙
우체부가 바람을 던져 놓고 가도
아무도 내다보지 않는 집
밤이면 고양이들이 푸른 눈빛을 켜드는
오래된 빈집에
언제부터 들어와 살았나
낡은 전선줄을 타고
지붕을 새로 올리는 담쟁이
땡볕이 매미 울음을 고음으로 달구는 한낮에도
풋내 나는 곡선을 하늘하늘 쌓아올리는
저 푸른 노동
질통을 지고 남의 집 지붕을 올리던 가장家長이
끙끙 신열을 앓으며 뒤척일 때
얼핏 들여다 본 어깨의
멍자국 같은,
저녁의 앙금/허영숙
산사의 종소리가 노을을 밀어올리면
저녁의 아래에 든 꽃들은
*산화락 산화락 눕고, 사람들은
팽팽했던 시간의 무릎을 접어 바닥에 가부좌를 튼다
하루가 남기고 간 어둠
생의 입자를 물고 흔들리든 것이 가라앉아 이룬
저 묵직한 고요
가라앉는다는 것은
이토록 고요하고 이슥할 때 이루어진다
시간이 버릴 것과 남길 것을 선명하게 갈라놓고 난 후에
비로소 바닥에 닿는 것이다
쇳물의 붉은 혼이 쏟아질 만큼
아프게 떨며 소리를 멀리 보낸 종(鐘)일수록
제 몸 가라앉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처럼
너도 저녁이 오고 한참 뒤에야 가라앉았다
저녁의 등뼈를 짚고
쏙독새가 기억의 늑골 근처에 와서 울어도
꽃잎 몇 장 떨어져 어둠에 포개졌을 뿐
이미 쏟아내고 없는 격렬의 시절
그 아래 굳어 버린 너를 무엇으로도 흔들지 못한다
바닥에 압화가 되고 있는 꽃잎이,
모든 윤곽을 지우며 낮게 번지는
이 저녁이
아무런 아픔 없이 혼자 가라앉았겠는가 하고
바닥에 이르른 것들에게 물으면
별들이 내 눈속에 축축한 지층을 이루며
울컥울컥 가라앉는 것이다
*산화락(散花落)ㅡ꽃을 뿌리며 불덕을 찬탄함
나무의 필법/허영숙\
끝물 이파리 모두 떨어져 나간 나무는
y로 총총 엮인 거꾸로 선 싸리비
구름 몇 점 떨어진 하늘을 쓸어낼 듯 서있다
등에 수많은 y를 업고 있는 나무
저것의 힘으로 잎은 피었다 진다
y에 다시 y를 업느라 휘어진 채
허공을 키우고 있는 가지의 획을 읽다가
빈 집 같은 내 등을 읽는다
맨 처음 내가 기댄 곳은 어머니의 등이다
어머니는 등 기울여 나를 업어 키웠고
등이 휘도록 지게를 업은 아버지 덕분에
나도 필 수 있었다
기울여야 업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y의 필법
평평한 내 등에도 누군가
배꽃 같은 슬픔을 기대어 온 적 있다
휘면 무너질까 등 돌린 적 있다
그때 나를 기울여 업어주었더라면
기억의 근처에 옹이를 지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무의 일생은 기대오는 가지를 업고
잎을 피워내다 가는 것
앓다가 터득한 나무의 필법을 따라 쓰는데
등에 누가 업힌다
막 눈 뜨기 시작하는 생장점
y의 순(筍 )이 온 몸에 번지고 있다
반얀나무/허영숙
당신은 내게 가지로 자라길 원했으나
나는 기꺼이 뿌리가 되어 당신을 받들기로 한다
가지의 사원
수십 수천그루의 나무가 이루고 있는 반얀나무 숲
그러나 그건 멀리서 봤을 때의 이야기
가지가 뿌리가 되고 뿌리가 가지가 되는
오랜 숲의 역사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시작은 오직 한 그루
하나의 뿌리에서 오래고 긴 말의 매듭이 풀린다
맨 처음 시작이었던 큰 둥치가 무너지지 않도록
공중에 뿌리를 두고 아래로 가지를 내리는 나무
그 나무 죽은 자리는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반얀나무
한 그루가 내린 사랑이 저토록 넓고 견고하다면
누구도 저 사랑에 대해 더 깊이 은유하지 못한다
수천 갈래의 가지를 내려 받치고 싶은
오직 한 그루, 당신
굴참나무 그대/허영숙
죽은 자를 방부제로 닦아가며 불멸의 사랑을 지켜가는 누군가가 이 지상에 있다는데 나는 오늘 일
몰이 보이는 구릉 어디쯤 한 사람 심어놓고 왔네 그가 자주 밟던 땅 밑으로 길을 내고 꽃분 같은 뼛
가루 뿌린 자리에 어린 굴참나무 한 그루 심어 두었네 하관하는 뿌리에 진혼의 말 동여매는 것도 잊
지 않았네 저 굴참나무 자라서 가지마다 무성하게 흔들리면 그 사람 손짓으로 읽어주겠네 햇살이 잎
잎을 들추며 사그락거리면 내 귓전에 두는 푸른 목소리라 여기고 해 지도록 수런수런 농담을 나누겠
네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잎으로 내게 떨어져 닿으면 처음 입김 닿던 시절처럼 목덜미 수줍게 붉어지
겠네 굴참나무 그늘 아래서 잠들다 깨면 꿈속인 듯 그대 품속인 듯 하겠네
이별에 관한 어떤 습관/허영숙
준비도 없이 사랑니는
어둑한 기슭, 저 안쪽에
아름답지만 불편한 이름으로 심어졌다
오래 그것을 혀로 핥았다
나의 일부가 되었으나
다른 뼈처럼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가끔 통증이 되었다
앓다가 기어코 사랑니를 빼고 온 날 밤
세포들이 빈자리로 몰려갔다
뼈 하나를 잃은 남은 뼈들이 서로 뒤틀리고
잇몸은 억지로 정을 뗀 사람처럼 부어올랐다
몸에서 내가 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뼈가
가장 오래 나를 허물고 있다
안쪽에 남겨진 실밥을 혀로 핥아 본다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저물녘 억새밭에 가다/허영숙
억새밭에 쪼그리고 앉으면
허공으로 난 빽빽한 길 위에 선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이 지워지는 저물녘에는
무수한 저 길도 서러워져서 온 몸을 흔든다
잔광 속으로 하얗게 번지는 울음
흔들릴수록 울음은 더 멀리 번져나가서
저물녘을 예감한 모든 억새가
어둠을 머리끝까지 쓰고 운다
울음으로 들썩이는 들녘
시들어가는 볕에 서 본 적 없는
마디 푸른 것들은 다 듣지 못하는 저 소리
저물어 간 모든 것들은 갈피마다 울음을 품고 있다
저녁에는 사람이 낸 길도 저물어서
슬픔이 서리서리 얹힌 시절을 불러낸다
먼데서부터 빈 대궁을 채우며 오는 기억
그속에는 이제 그만 저물자는 당신의 말에
발목을 접질리며 돌아오던 저녁이 있다
대궁 속에 흥건하게 차오르던 울음을
이불 밑에서 하얗게 흘려보낸 시절이 있다
푸른 길이 아득히 저물어 갈 때
멀리 간만큼 되돌아와야 하는 길은 더 멀고 아파서
어둠은 사람의 발자국부터 천천히 지우며 온다
눈 내리는 날/허영숙
어디 있니? 명징하던 푸른 잎의 노래들은, 누구니? 빈 가지에 세간을 들여놓는
낯선 얼굴들은,
눈이 내리고 지상의 모든 것들은 어느새 하얗게 부풀었다.
풀들의 지번은 지워지고 모든 사물들은 틈도 없이 한 획으로 섞이고 있다.
그렇다면 주소도 없이 외곽으로 외곽으로 밀려나는
저 가벼운 낱말들은 오늘 밤 어디에서 몸을 누일까
맨 처음 길을 내듯 획을 허물며 걷는다.
발자국이 패인 자리마다 그리운 이름의 활자들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멀리 굽은 길 끝에 행장을 꾸려 떠나는 눈 맑은 사람,
수많은 말이 분분하게 흩날리며 불러도 내 목소리만 담는 귀를 가진 사람,
너의 이름은 차가운 발목을 지나 무릎까지 깊어진다. 오늘 밤에는 야윈 달이 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