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과거와 현재의 그 사이에서 ---> 우연하지 못한 만남 [1]
푸른 하늘. 인간이 생겨나기도 전에, 펼쳐져 있던 푸른 하늘은 회색빛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 푸르디 푸른 하늘의 한 부분을 메우고 있는 하얀 구름이 천천히 하늘을 수놓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아아...
불어오는 후덥지근한 바람. 그것은 이제 곧 여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자연의 의지였다.
어제부터였을까? 내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것은...
이미 수업은 시작되었건만,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말은 귀에도 들려오지 않았다. 쩝.. 이러면 안 되는 데..
딩--동--댕--동--.
4교시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흐음.. 점심시간인가..
하아.. 별로 배도 고프지 않지만..
난 책상 왼쪽에 달린 내 가방에서 작은 도시락 통을 꺼내려고 허리를 굽혔다.
지금 우리 학교는 급식을 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사흘 전인가? 급식을 먹은 아이들이 대부분 가벼운 식중독 증세를 보이는 바람에, 위생 검사인가를 하다가, 걸려버린 것이다. 나는 당연히 괜찮았다. 훗.. 세균으로 뒤범벅이 된 몬스터들도 잡아먹은 나다. 그 정도쯤이야.
에.. 그런데... 도시락이 어딨지?.... 이런 젠장... 안 갖고 온 모양이네.. 아닌데, 분명히 챙겼는... 응? 그러고 보니.. 희빈이가 다 들고 갔었네..
겨우 그걸 생각해낸 나는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요즘 왜 이렇게 멍한 건지.. 쯥..
"윤창훈."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교실 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도시락을 든 희빈이가 서있었다.
에? 희빈이? 웬일이지? 요즘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통 말을 안 걸어오던 녀석이... 아, 도시락 갖다 주려고 온 건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교실문을 향해 다가섰다. 아이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 신경은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녀석들도 우리 집에서 희빈이가 하숙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얼라리? 내 도시락 통이 아닌데..?..
갑작스럽게 나를 향해 불쑥 내미는 도시락을 바라보며,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나 먹으라는 거야?"
끄덕.
예, 예...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준다는 데 먹어야지.
일주일 전인가? 그 때, 갑작스럽게 생각난 한 여인 덕분에, 난 그녀와 서먹서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게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거부했다고나 할까?
도시락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순간 느낀 엄청난 시선들.
뭐, 뭐야?
"우우.... 희빈이가 직접 만든 도시락..."
"우리도 좀 줘.."
"우우우...."
이, 이것들... 좀비냐?
"우왓, 맛있다~!!"
"얼굴도 예쁘고, 요리도 잘 하고.. 짜식, 넌 복 받은 놈이야."
.... 흐음.. 솔직히 말해서 희빈이가 그렇게 예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걸..
희빈이는 그렇게 아름답게 생기지는 않았다. 그냥 피부 하얗고, 꽤 예쁘게 생겼다고 느낄 뿐이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가 없는 희빈이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직시했다면, 그 남자는 그날부터 희빈이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뭐랄까.. 그래, 마치 마약에 중독된 것 같다고나 할까? 처음에는 그저 그렇던 희빈이를 점점 예쁘게 생각되는 것이다.
뭐, 지금까지 옆에서 희빈이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반응으로 내린 결론이기는 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흠.. 그런데 왜 저 녀석들이 저렇게 도시락에 달려드느냐고 한다면.. 그거야 물론 맛있는 요리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희빈이가 만든 요리는 그 맛에 있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그 빈약한 재료로 만들어내는, 이 천상의 맛.. 음... 맛있다..
"나도 한 입~!!"
"아앗, 나도!!"
"우오오옷!!!"
꿀꺽.. 얼라리? 벌써 다 먹었네?.. 하아..
한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17, 8세쯤 되었을까? 갸 름한 얼굴선을 지닌 그 여인은, 자신의 웨이브진 검은 머릿카락을 오른손으로 쓸어넘겼다.
성형 수술의 경험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갈 정도 아름답게 생겼지만, 가늘게 뜨여진 두 눈과 입꼬리가 올라가 비웃는 것 같은 모습이 그 아름다움을 깎아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입이 열리고, 꽤 아름다운 음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날보고 협조를 해달라, 그런 소리야?!"
"그래."
그녀의 말에 대답한 남자. 예의 비웃음을 띄우고 있는 여자와 동갑, 혹은 그 이상일 것 같았다. 꽤 잘생긴 얼굴이라서 여자 여럿 울리고 다녔을 것 같았지만, 그 역시도 약간 아쉽게 차갑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호오~, 웬일이셔? 평소때는 잘난 척 못해서 안달이 나신 분께서 내게 직접 그런 부탁까지 하다니..?.."
엄청나게 비꼬는 말투로 남자에게 말을 한 여자는 더 들을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한 사실은 동생이 자신을 명백하게 무시한다는 것과 더불어 약간의 굴욕감을 진민한에게 전해주었다.
꿈틀거리는 미간을 엄지와 검지로 누르며, 진민한은 간신히 목소리를 떨지 않고 동생을 향해 말했다.
".... 도와주지 않을 테냐?"
"내가 왜? 왜 그래야하는데?"
"진유리."
"내가 도와주겠다면 언제나 거절했잖아, 안 그래? 그런데 이제 와서 도와 달라?... 훗, 싫어.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구."
유리는 그렇게 말을 맺고는 방을 나서려고 했다. 언제나 잘난 척 하던 오빠를 조금이라도 골탕 먹여주고 싶기도 했다는 것이 그의 부탁을 거절한 가장 큰 이유였지만, 또 언젠가 자신에게 부탁을 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오빠는 자신의 결정을 바꿀 정도로 융통성 있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흠.. 어쩌면 창훈이 그 녀석은 동시에 갖추기 힘든 두 가지를 모두 갖춘 녀석일지도 모르는데.."
멈칫.
방을 나서려던 그녀의 몸이 굳은 듯이 멈췄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유리. 그런 그녀의 입가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방,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아.. 아무것도 아니다. 혼잣말이니까."
"뭐라고 그랬냐니까?!"
신경질을 부리면서 외치는 유리. 그런 그녀를 보면서, 그녀의 오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감정적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두 가지를 갖췄다고.."
"그거 말고, 그 전에!"
"아아, 윤창훈.. 이라고 그랬는데, 왜 그러냐?"
순간 진민한은 섬뜩함을 느꼈다. 자신의 동생이 무섭도록 인상 쓰는 것을 보며 언제 저런 적이 있었나, 하고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빠득.. 좋아, 오빠. 받아들이지. 하지만 그전에, 그 녀석의 능력을 알고 싶어."
"..... 왜 갑자기 맘이 변한 건데?"
흠칫.
순간 유리는 동요했다. 그녀는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당신...우리 오빠 아니지?! 그렇지?!"
"저기.. 유리야?.."
"우리 오빠라고 우기려고 하지 마!! 절대로 우리 오빠일리가 없어! 우리 오빠는 그렇게 날카롭고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는 게 불가능하단 말이야!"
휘청.....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진 진민한은 자리에 쓰러질 뻔했다. 하지만 그는 엄청난 의지로 자신의 몸을 지탱했고, 그 결과 대지와 키스할 기회를 놓치는 아주 안타까운(?) 일을 저질렀다.
"뭐, 뭐야? 그 어이없다는 눈빛은?!"
"하아..."
"왠 한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