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찾는 사람(겨울전에 너는 어서 오라) (딤후4:9-22)
디모데 후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의 생애의 제일 마지막으로 기록한 서신입니다. 본래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4권을 말하는데 사실은 디모데 후서도 옥중에서 기록한 것이지만 목회적인 내용이라 디모데 전서, 디도서와 함께 목회서신으로 구분합니다. 옥중서신을 기록했을 때에 바울 사도는 처음 로마감옥에 구속당했다가, 석방된 후 스페인 전도를 했고 그리스와 소아시아를 방문하며 전도 여행하는 중 다시 체포되어 로마로 호송 당해 투옥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는 총 4장입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장인 4장의 마지막 부분을 오늘 우리는 본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청년의 때, 그의 이름이 사울 때에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후 그는 4-50년간 이방인의 사도로 목숨을 내어놓고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뜨거운 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의 평생에 마지막 남기는 말씀으로 정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교회의 목회자로, 설교자로, 전도자로, 치리자로, 선교사로 뜨겁게 역사한 사도 바울. 그가 마지막 주신 말씀 속에서 오늘의 우리의 자세를 찾고자 합니다. 누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 일꾼인가? 언제 사형집행을 당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주신 그의 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와 교회에 적합하지 못한 자를 본문은 말해줍니다.
(1)데마같은 사람. 10절에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합니다. 데마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세 곳이 있습니다. 빌레몬서 24절에서 데마는 바울 사도의 동역자로 나타나 있습니다.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같은 옥중서신인 골로새서 4:14에는 이름만 나와있고 데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는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사도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합니다. 즉 동역자인 데마와, 이름뿐인 데마, 그리고 이 세상을 사랑한 도망자로서의 데마로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에 영적인 타락의 역사가 쓰여져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동역자는 도망자로 변해 갔으며 명예의 칭호는 치욕의 이름으로 변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를 버렸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에게 주어질 것은 지옥 형벌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바울 사도의 동역자였습니다. 동역자란 같이 일한다는 뜻입니다. 같이 사역한다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의 충실한 조수로서 힘쓴 훌륭한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름만 가진 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존경하는 스승이 극난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세상을 사랑하여" 도망쳐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신 귀한 성직을 가진 여러분! 믿음을 버린 자들은 처음부터 교회가 갑자기 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예배에 지각없이 열심히 잘 참석하던 분이 어느 사이엔지 저녁예배시간을 모르고 수요일은 더구나 기억조차 못하고...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한 두 번 빠지다 보면 주일날 예배시간도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소홀하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교회에서 멀어집니다. 주의 종이 멀어집니다. 충성이 부족하게 되어 시작은 잘했으나 마지막이 좋지 않습니다. 봉사를 열심히 하던 분이 기도를 그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까? 에베소서 4:12은 대답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먼저 믿은 분들은, 직분을 받은 분들은 뒤에 믿은 분들에게 믿음의 바른 지도를 해야 합니다. 봉사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바로 세우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어떤 분은 직분을 받기 전에는 충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 생활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직분을 받고 나서는 조금씩 조금씩 멀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험을 주십니다. 사랑의 매로 징계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깨달으면 좋은데, 깨닫지를 못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문제가 해결되지를 않습니다. 이런 자를 보고 주님은 요한계시록 2:4에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지만 세상 습관을 끊지 못하고 숨어서 계속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이런 분은 신앙생활에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합니다. 한 번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면 전혀 새로운 생활태도가 주어져야 합니다. 옛 것은 버려야 합니다. 세상 것은 버려야 합니다. 안락함과 안일을, 명예와 부에 대한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거기에 영생이 있습니다. 주와 같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상을 사랑하면 안됩니까? 요한1서 2:15이하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충성의 부족입니다. 불신자로 돌아갔습니다.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주인공들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데마의 실패 두 번째는 그의 잘못된 목표에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2:1이하는 이렇게 신앙생활의 목표를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신앙생활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2000년의 기독교 역사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신앙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 합니다. 데마는 처음에는 기쁜 마음으로 바울 사도를 따랐을 것입니다. 그의 설교, 그의 능력, 그의 학문, 그의 지도력, 스승으로 모시기에 충분한 사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감옥에 구속되었습니다. 언제 사형이 집행될런지 모르는 형편에 처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 4:6에는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고 했습니다. 데마가 볼 때 인간적인 측면에서 스승으로서 바울 사도를 더 바라볼 것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본 것이 아니오 바울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감옥에 구속되어 있으니 별 수 없구나 하고 도망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명예욕으로 직분을 받으면 제 2의 데마가 됩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 목회자를 따르다 낭패를 당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우리나라의 거대한 교회들의 신도들) 목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 예 화 ) 어떤 젊은 재상이 나이많은 임금님에 청을 했습니다. "임금님 어떻게하면 제가 아무런 실수 없이 임금님을 잘 뫼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임금님은 그 젊은 재상에게 컵을 하나 가지고 오게 해서 그 컵에 기름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컵을 손에 들고 한시간 동안 시내를 한 바퀴 둘러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만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큰 벌이 내릴 줄 알라고 했습니다. 이 재상은 말 한 마디 했다가 혼이 났습니다. 충성하려다가 큰 시험을 당한 것입니다. 그 젊은 재상은 기름이 담긴 컵을 들고 벌벌 떨면서 조심조심 시내를 한 바퀴 둘러서 왔습니다. 물론 그 재상 뒤에는 창 칼을 든 병사들이 따랐습니다. 임금님은 그 재상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앞에 무엇이 보였는가?" "기름 컵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골목에 서있는 여자들이 보이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길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가?" "사람들도 보지 못했습니다." "술집을 보았나?"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것이네. 자네에게 맡겨진 책임과 사명만 쳐다보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야 하네"라고 임금님은 말했습니다.
청년 여러분! 여러분 앞에 무엇이 보입니까? 예수님만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계속 말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목표가 정확해야 합니다. 뚜렷해야 합니다. 올림픽에 성공한 선수들을 보십시오. 오직 목표를 향한 피나는 노력과 땀이 그들에게 금메달을 안겨 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세상이 매혹적으로 보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세상사람들의 가치관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의 낭비도 많고 시간의 낭비가 많고 정신적으로 흩어지게 되어 주님의 일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군병입니다. 다른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한 영적인 전투와 사역에 골몰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절제합시다. 자를 건 자르고 억제할 것은 억제합시다.[물질의 낭비, 오락성의 것들(영화, 볼링 등등)]
(2)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있어서는 안될 인물 14-15절에 보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이어서 나옵니다.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14-15). 구리 장색이란 구리로 무늬를 새겨 우상을 만드는 직업을 말합니다. 구리 장색의 직업을 가진 알렉산더는 주의 종인 바울을 많이 괴롭혔다고 했습니다. 특히 그의 말을 대적했다고 15절에 말합니다. 대적했다는 말은 고소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교회의 적은 두 부분에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자가 교회를 향하여 대적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교회를 몰라서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혹의 영에 홀린 교회 내의 적입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 같은 인물입니다. 알렉산더는 사도행전 19장에서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났던 폭동의 주모자였습니다. 교회내의 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살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동역자 바울을 대적한 사람입니다. 교회내의 적은 미혹의 영의 장난입니다. 이를 모르면 교회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대적하면 주께서 갚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기를 거부하고 도망자가 된 데마와 같은 존재, 하나님을 버리고 아데미라는 우상을 섬기며 구리장색을 팔기 위한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과 동역자인 바울을 대적하는 알렉산더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해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내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누군가 내 마음을 맞춰 주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진정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분의 마음에 꼭 드는 그러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에 필요한 일꾼입니까? 첫째로 11절에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누가 같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고 합니다. 나는 물론 바울 사도를 말합니다. 그가 지금 감옥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데마가 이 세상을 사랑하여 도망했는데도 누가는 70세 된 노사도 옆에서 언제 사형이 집행 될런지 모르는 급박한 형편속에서, 자기에게 손해가 되었으면 되었지 이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누가는 바울의 최후 여행에 동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바울 사도가 체포되어 로마로 가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도 바울사도와 함께 누가는 동행했던 것입니다. 체포된 죄수가 로마로 재판 보내질 때는 도중에 2명의 노예를 동행시키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로마의 감옥으로 바울과 동행하기 위해 자신을 바울의 종으로 등록했던 것입니다. 누가는 바울과 떨어져 있느니보다는 오히려 바울의 노예로서 있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 4:14에 "사랑받는 의원 누가"라고 그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원인 누가는 꼭 필요한 협조자였습니다. 주경학자들의 설명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바울은 그의 육체에 그를 괴롭히는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안질이라고 하지만, 어떤이는 간질이라고도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설교하다가 간질로 그만 쓰러졌던 것 같습니다. 그때 갈라디아교인들은 그를 업신여기지도 않고 도리어 바울을 영접하되 하나님의 천사와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갈라디아서 4:14에 말합니다. 이러한 바울을 시중하며 그의 고통을 덜어주어 바울로 하여금 계속해서 일할 수 있도록 동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설교자도 전도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봉사로 봉헌한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치유하는 기술을 주셨고 누가는 그 기술을 보람있게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일을 충실스럽게 했던 것입니다. 빌레몬서 24절에 보면 바울은 그를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누가는 자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누가는 다재 다능한 인격자였습니다. 의사였고 역사가였고 문학자, 전도자, 여행가, 또한 성령의 은사와 기도에 열중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기록한 누가 복음이나 사도행전 같은 장편의 기록을 남겼으면서도 오직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씀을 충실히 전하고 자신의 말을 한마디도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무언의 실천자! 이런 일꾼을 하나님 나라와 교회는 필요로 합니다. 찬송가 347장 가사에 보면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우리가 주를 섬김은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 화) 이성봉목사님이 6.25사변 당시 공산당에게 잡혀 심문당할 때 "예수는 왜 믿소?"라는 공산군의 물음에 "천당가기에 믿소." "천당 가보았소?" "천당본점은 안보았지만 천당지점은 가보았소" "거기가 어디요?" "예배당이요, 은행본점이 있으니 지점이 있듯이 천당본점이 있기에 지점인 교회가 있는 것이요." 해서 풀려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천당지점입니다. 천당지점인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훌륭하게 성장시키는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9절과 21절에 "너는 어서 내게 오라 겨울 전에 너는 어서오라"고 말합니다. 이는 추워지기 전에 내게 오라는 말씀인 반면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인생의 겨울을 느끼면서 죽기 전에 믿음의 아들을 만나고 싶은 소망을 말한 것입니다. 저에게도 누가와 같은 디모데와 같은 동력자가 있었으면 합니다. 힘써 함께 동력하면서 무슨일에선가 필요할 때 그 상황이 힘들고 어려울 지라고 언제든지 함께 해 주며 필요할 때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그러한 동력자가 필요합니다. 나의 마음을 충분히 먼저 해아려서 도와주는 그런 동력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명령하는 말씀에 늘 순종하면서 죽도록 충성하는 그런 동력자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동력자를 찾고 있습니다. 저는 수년간 다니면서 그러한 동력자를 몇몇을 보았습니다. 이 영광교회 안에서 그러한 동력자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몇몇을 더 찾기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몇몇이가 있습니다. 그들이 일어서서 진정한 동력자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다면 그 손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크게 성장해 갈 것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인생은 겨울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병마의 겨울, 죽음의 겨울, 실패의 겨울, 가정에도 겨울이 올 때가 있습니다. 특히 죽음의 겨울은 예측할수가 없습니다. 젊다고, 건강하다고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27:1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음의 겨울이 오기 전에 성실하게, 열심히, 있는 힘을 다하여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주어진 직분을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력서보다 하나님 교회의 이력서가 더 많이 기록되시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