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가정 새벽예배를 위한 가이드
1. 기간: 2022년 4월 11일(월)~16일(토)
2. 시간: 새벽 5:30~오전 9시 중 가정 형편에 맞게
3. 방법: 예배 매뉴얼을 따라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서
4. 목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더 나은 삶을 위한 길을 찾기 위하여
5. 예배 순서: 묵도 > 찬양 > 기도 > 성경읽기 > 합심기도 > 주기도로 마무리합니다.
6. 예배를 마친 후에는 문자나 카톡으로 결과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7. 고난주간 가정 새벽예배의 찬양과 성경 본문
11일 월
143 웬말인가 날 위하여
154 생명의 주여 면류관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 기도
12일 화
144 예수 나를 위하여
265 주 십자가를 지심으로
마태복음 26:47~68
예수님의 체포
13일 수
148 영화로운 주 예수의
285 주의 말씀 받은 그날
마태복음 26:69~75
베드로의 부인
14일 목
149 주 달려 죽은 십자가
85 구주를 생각만 해도
마태복음 27:1~26
빌라도의 심문
15일 금
150 갈보리산 위에
407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마태복음 27:27~56
십자가에 못 박힘
16일 토
151 만왕의 왕 내 주께서
439 십자가로 가까이
마태복음 27:57~66
예수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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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1 (Mon) 오전 5:24
4월 11일 월요일
고난주간 첫째날 묵상
마태복음 26:36~46 겟세마네 기도
겟세마네 기도는
내 뜻과 아버지 뜻 사이에서
갈등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시는 분도
내 뜻과 아버지 뜻 사이의
간격 때문에 힘들어 하셨습니다.
내 뜻은 무엇이고 아버지 뜻은 무엇일까요?
내가 바라는 것은 내 뜻이고
내가 바라지 않는 일은
때때로 아버지 뜻일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한 그 두 바람이
어그러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가 필요합니다.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승리한 후에
우리는 비로소
십자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하루를 보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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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2 (Tue)
고난주간 이튿날
성경 묵상 본문
마태복음 26:47~68
잡히시다(막 14:43-50; 눅 22:47-53; 요 18:3-12)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공회 앞에 서시다(막 14:53-65; 눅 22:54-55, 63-71; 요 18:13-14, 19-24)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성경 묵상>
고난주간 이튿날 묵상 성경의 본문은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보낸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아마 산헤드린의 핵심 임원들이었겠지요. 그들에게 보냄을 받은 군인들은 강도를 잡으러 오듯이 칼과 방망이를 들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그들에게 누가 체포대상인지를 미리 알려주겠다고 신호를 정해주었습니다.
갑작스러운 군인들의 습격에 제자들은 일전이라고 해야 하는가 하고 주먹을 쥐었을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옆에 있는 군인의 칼을 빼서 공격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칼을 거두라고 베드로를 만류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격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달아났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체포되셨고 그 밤에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미리 준비된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야간 즉결재판을 벌입니다. 하지만 거짓 증인들의 증언은 앞뒤가 맞지 않아 하나도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누군가 결정적인 증언을 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하는 발언을 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의 그 발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마태 24:1~2). 제자들과 가까운 누군가가 예수님의 발언을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은 더 결정적인 죄목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리 준비된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그리스도냐?’ 예수님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재판은 유죄판결로 끝이 났습니다.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형수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이후로 가장 먼저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다 내쫓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한 것은 당시의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성전을 다시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으로 회복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진실과 자비가 사라진 신앙을 지적하시면서 그것은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속은 부패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처럼 참된 신앙을 회복할 것을 권고하셨고 그들을 책망하시고 돌이키라고 비유를 들어가면서 일깨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듣지 않았으며 마침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대하여 먼저 사형선고를 하셨으며 그 메시지와 행동은 곧 자신의 사형선고로 이어졌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을 다시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려고 메시지를 전하시다가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행동하시다가 십자가로 나아가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빈 무덤을 본 교회는 그것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 세우시고 다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와 상속자로, 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시려고 가르치시고 행동하시고 죽음을 맞이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그 목적을 위하여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처음부터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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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리는 법
고난주간은 일종의 추도(追悼)의 기간이다. 추도는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이다. 고난주간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주님의 삶과 정신을 기린다.
하지만 멜 깁슨의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에서 두드러진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영화 전체를 삼켰듯이 고난주간에 우리가 예수님을 추도하는 내용도 예수님의 수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추도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고인의 삶과 정신이 아닐까? 아무리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고인이 어떤 정신과 뜻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기리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그의 삶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추도의 알맹이다.
예수님은 왜 죽임을 당하셨을까? 예수님은 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을까? 왜 죽음의 자리로 나아가셨을까? 이런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성급하게 신약성경 서신서의 몇 구절을 인용한다. 즉,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고 죽으셨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위의 질문에 대답한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생애와 죽음에 대하여 들려준다. 마태와 누가는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전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복음서를 읽으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에 대하여 알게 된다.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그리고 무엇을 꿈꾸셨는지, 예수님이 죽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사복음서를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서른살 때까지 고향 나사렛에서 사셨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사십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시고 갈릴리로 돌아와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시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여 그 근본 정신이 무엇이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라고 자기 백성을 일깨우는 일을 하셨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여러 형태로 담겨 있다. 특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장차 우리가 꿈꿀 수 있는 미래의 모습을 들려주셨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결국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 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이 작게 시작될지라도 마침내 온 세상에 충만한 나라가 될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자비와 공의가 가득하며 그 두 가지 정신을 실천한 사람들이 칭찬과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그 나라에서 쫓겨날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시편의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병든 사람을 돌보아 주고 외로운 사람의 친구가 되어준다.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면서 그 뜻을 따른다. 당연히 그들의 모임은 거룩한 처소가 되어 하나님도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함께 친밀하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율법이 완성된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셨으므로 불의와 거짓, 위선과 탐심에 찌든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했다. 예수님도 그들을 향하여 그 길에서 돌이키라고 여러 말로 일깨우려고 노력하셨다. 예수님은 일상에서 가르치시고 행동으로 보여주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중심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그 백성들을 일깨우고자 하셨다. 바로 그 일 때문에 예수님은 반대자들로부터 죽임을 당하셨다.
우리는 빛나는 삶을 살았던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 거리의 이름에 그들의 이름을 담는다. 퇴계로는 이황을 기리기 위해,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을 기념하고, 충무로는 이순신 장군을 기린다. 해군도 나라를 위해 충성하신 분들을 기리기 위해 함정 구축함과 잠수함의 이름을 지을 때 그분들의 이름을 사용한다. 광개토대왕함, 을지문덕함, 양만춘함, 충무공이순신함, 문무대왕함, 대조영함, 세종대왕함, 율곡이이함, 서애류성룡함은 구축함이다. 장보고함, 최무선함, 박위함, 손원일함, 정지함, 안중근함, 유관순함은 잠수함의 이름이다.
퇴계로나 을지로 또는 충무로를 거닐면서 이황이나 을지문덕,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월은 기억을 희미하게 하고 조상들의 정신마저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나 인간은 기억하고 기념하는 존재다. 그것을 통해서 과거로부터 배운 교훈을 현재에 적용하고 그런 방식으로 미래를 열어간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가노라면 우리는 거리명에 새긴 조상의 얼도 잊고 살기 십상이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우리는 십자가를 목에 걸고 십자가를 건물에 세우고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억하지 못한 채 살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절기가 필요하다. 절기는 시간의 길 위에 세워진 이정표다. 우리는 시간의 길을 여행하다가 그 이정표 앞에 멈추어 서서 우리의 방향을 다시 점검한다.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절기다.
어떤 이정표나 표지판은 오랜 세월 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서 희미해지기도 하고 심지어 기둥이 부러지거나 아예 방향 표지판이 틀어지기도 한다. 2천년 동안 한 자리에 서 있던 이정표라면 어떨까? 수많은 여행자들이 그 앞에서 머무르며 길을 찾았고 쉼을 통해 새 힘을 얻었다. 어떤 여행자는 표지판에 자신의 기념품을 걸기도 하고 낙서나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온 사람들은 그 표지판을 잘못 읽기도 한다. 우리 신앙 여정을 보여주는 절기 표지판도 오랜 세월을 지나왔으므로 수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한다. 그 첫번째 생각은 예수님의 정신과 뜻, 그리고 지향점과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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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보다 먼저 갈릴릴로 가리라
예수님은 성만찬을 끝내시고 제자들에게 장차 올 일을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날 밤에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셨습니다. 그들은 이런 위험 앞에서 주님을 버리고 떠날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장담하지만 결국 그들은 주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그들은 아직 그만한 믿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실망하거나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의 현재 상태를 아십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부활 후에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예고하셨습니다(마 26:32). 이 예고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달아난 후에 있을 일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장차 뿔뿔이 흩어지고 결국 갈릴리로 돌아갈 것을 아셨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의 고향입니다. 그들은 다시 본업을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사라졌고 희망도 없어졌습니다.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갈 곳은 그들의 고향뿐임을 예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서 기다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에 가서 제자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며 그들을 절망 가운데서 일으켜 새로운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게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배신과 귀향에 대하여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주님을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갈릴리로 돌아갈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다시 찾아서 부르시려고 갈릴리로 가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제자를 부르시고 세우시는 예수님의 자세이자 마음가짐입니다. 제자들의 영적 수준을 아시기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들이 있는 자리로 가서 그들을 만나시고 다시 불러 주님의 복음을 맡기실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세울 때 기억하고 따라야 할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