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작가님께서주신글]
존경하는 금아 피천득 선생님
선생님은 마음이 천사 같은 분이었습니다.
금아(琴兒)는 피리를 부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아이라는 뜻입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이 지어 준 호(號)랍니다.
우리들은 선생님을 대학에서는 선생님으로, 학교 밖에서는 시인으로 불렀습니다.
선생님의 방
책상위에는 동서양 대가들의 사진이 가지런히 놓여있습니다. 옆에 장미송이도 있었습니다.
영화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해밍웨이, 오드리 햅번의 사진도 여러 장 있었습니다.
고결한 영혼의 대가들과 교감을 나누는 모습이었습니다.
소녀 인형도 있었습니다. 고명딸 서영이가 가지고 놀던 것이라고 합니다.
딸이 시집을 가자, 외로움을 달래려고, ‘난영’이란 이름을 붙여 수양딸로 삼았다고 합니다.
인형에게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도 빗겨준답니다.
밤에 편히 잠 잘 수 있게, 인형에게 안대를 채워줍니다.
그리고 조석으로 인사말을 나눈다고 하시면서 껄껄 웃었습니다. 선생의 웃음 속에 잠시 외로움이 스쳐지나갑니다.
이웃이 소란스러울까 벽에 걸지 못하고, 바닥에 놓은 액자가 여러 개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딸 피서영
중학교 다닐 때 성적이 우수해서 스카우트가 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기여고가 아닌 이화여고를 다녔습니다.
큐리 부인 같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미국의 보스톤 대학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인 이휘소 박사 아래서 양자물리학을 전공했습니다.
선생의 문학세계
선생의 수필(隨筆)은 주로 다섯 장 내외의 간결하고 함축성 있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짧은 음률(韻律)의 탁월한 은유법(隱喩法)을 구사했습니다.
선생의 수필이 돋보이는 것은, 시적인 운율과, 비유, 절제, 함축, 그리고 미적인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수필(隨筆)
수필은 심오한 지성(知性)의 문학이 아닙니다, 그저 수필가(隨筆家)가 쓴 단순한 글입니다.
수필은 비둘기 빛이고 때로는 진주 빛입니다.
수필은 향기로운 차(茶)와 같아, 은은한 향기가 오래 동안 머뭅니다.
수필은 마음이 산책(散策)하는 길입니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기와 여운(餘韻)이 들어있습니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입니다. 그래서 클라이맥스가 없습니다.
수필이란 제목의 수필
수필(隨筆)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淸楚)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女人)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있는 한 청자연적은, 꽃잎들이 가지런히 달려있는데, 꽃잎 하나가 옆으로 꼬부라져있습니다.
그 연적은 어울리는 균형(均衡)에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破格)입니다. 그것이 수필의 본질입니다.
선생은 서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강의했습니다. 나는 교양과목으로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2B?
졸업시험을 앞둔 마지막 강의였습니다. 선생께서 뜬금없이 연필을 꺼냈습니다. 미술 소묘에 사용하는 2B 연필이었습니다. 그리고 빙긋이 웃으시면서 종강을 선언했습니다.
항상 의문을 주시는 선생님인데. 웃음은 무엇일까요?
세익스피어 희곡 햄릿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을 ‘영어’로 쓰라는 것이, 시험문제였습니다.
주인공 햄릿의 유명한 대사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인데. 2B 연필로 대신한 선생님다운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4,19와 5,16으로 학생들이 교정 밖으로 뛰쳐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행여 못 쓰는 제자가 있을까봐 암시를 준 자상한 선생님, 그러니 유급한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담장이 잎 새
트웰브 일레븐 텐! 참 대단한 천재야 천재! 그 사람을 만나 술이나 마시며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암호 같은 이 세 마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선생 입만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은 온통 잿빛, 찬바람이 불고 진눈개비가 내린다. 창백한 소녀가 병원 쇠 침대에 누워있다. 밤이 두렵다.
오 헨리(O Henry)의 마지막 잎 새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죽음을 향해 남은 시간을 3초전, 2초전, 1초전, 얼마나 두려울까요? 단순히 숫자 몇 개를 배열했는데도 마음은 점점 초조해집니다.
스토리를 단 세 마디로 압축해서 긴장을 극대화한, 오 헨리의 작품에 대해, 선생이 찬탄할 만합니다.
좋은 강의는 오래도록 여운이 남습니다.
‘경을 칠 놈, 지가 잘났으면 얼마나 잘 났어’ ???
선생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몇 마디 중얼거리셨습니다.
우리들은 말똥말똥 눈을 뜨고 다음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춘향이 옥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고 있는데, 당장 꺼내 올 일이지! 혹여 그 사이에 무슨 변고(變故)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자신의 위용(威容)을 과시하기 위해, 며칠씩이나 옥(獄)에 가둬놓은 놈이 어디 사람이냐?
그리고 태연히 텍스트를 폈습니다.
별 의미 없는 짤막한 몇 마디가 잠을 깨워, 강의 내용이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멀쩡한 사람을 죽일 놈으로 만들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지루하지 않고 다음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선생님은 세익스피어를, 장왕록 교수는 펄 벅을, 후일 박남식 교수는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를 강의했습니다.
나의 애장 도서
이은상, 노산시문선(鷺山詩文選),
피천득, 금아시문선(琴兒詩文選),
양주동, 무애시문선(无涯詩文選),
변영로, 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
대학교수 수필집, 서제여적(書齊餘滴)
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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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IQPbyKBhjN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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