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5일 금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디 양반 가문이었으나,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1836년 열여섯 살에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다음,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진쟈상(金家巷)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그를 한국에서 전교하는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 교회의 대표 성인으로 세웠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과거 대축일이었던 7월 5일에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리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뱀처럼 슬기롭게
아주 오래 전에 ‘정관장가’(貞觀長歌)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정치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라서 매일 늦은 시간까지 시간을 내서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방현령과 두여회는 태종을 보필하여 당 왕조를 굳건히 세우는 데 공을 세운 명재상들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방두(房杜)'라고 함께 부르기까지 합니다. 아직 개국 초기였던 당나라의 법규와 제도 대부분이 두 사람의 토의를 거쳐 마련되었다고 합니다. 당 태종의 치세가 '정관의 치'라고 불리며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태평성대로 꼽히게 된 데에는 두 사람의 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기 장점이 달라서 두여회는 결론을 내리는 데 과감하였고, 방현령은 계획을 세우는 데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모두단(房謀杜斷)이라는 말은 '방현령(房玄齡)의 지모와 두여회(杜如晦)의 결단력'이라는 뜻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특색과 장점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일을 잘 해결함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입니다.
지모와 계략이 아무리 뛰어나도 결단력이 없으면 어떤 일도 추진할 수 없습니다. 태종은 두 재상의 슬기로움과 과감한 결단력을 바탕으로 해서 정관의 치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모진 세상을 잘 살기 위해서는 슬기로워야 하고, 처세술도 좋고 대인관계도 좋고, 충서(忠恕)의 마음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주 특별한 말씀을 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10, 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는 것은 뱀이 상징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뱀은 영물(靈物)이었고 죽지 않는 영생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파라오의 왕관에도 뱀이 머리를 치켜든 상징을 새겨 넣었고 스리랑카에서는 부처님의 머리 위에도 코브라가 머리를 고추 세우고 있습니다. 뱀의 모양은 그림, 조각, 부적이나 호신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고대인들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뱀은 시체를 남기지 않고 겨울에 동면(冬眠)하고 봄에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죽지 않는 동물이라고 보았고 불멸의 영원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또한 풍요와 다산(多産)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파충류 중에서 가장 특수하게 진화한 동물인 뱀은 몸이 가늘고 길며, 다리·눈꺼풀·귓구멍 등이 없고 혀는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전 세계에 2,800여 종이나 서식하면서 독을 머금고, 위협적인 존재로 그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뱀은 좁은 체강(體腔)에 적응하여 내장기관이 좌우가 아니라 앞뒤로 떨어져 있으며, 왼쪽 폐는 거의 기능을 하지 않거나 퇴화되어 없어진 종이 많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여러 가지 부족한 체격 요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뱀이 오랜 역사를 거쳐 살 수 있는 것은 환경에 잘 적응하면서 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죽은 듯이 동면하는 것처럼 침묵할 줄도 알고, 들을 수 없으면서도 모든 것을 감지하고, 눈을 감을 줄도 모르면서 많은 것을 덮어줄 줄도 알고, 발도 없으면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할 줄도 알고, 맹독을 품고 있어서 적이나 먹이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독을 쏘지 않고, 허물을 벗으면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온몸으로 먹이를 졸라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라진 혀로 모든 것을 느끼면서도 다르게 표현할 줄도 알고, 비늘을 가지고 있으면서 매끄럽게 잘 헤쳐 나갈 줄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도망 갈 줄도 알고, 위기를 모면할 꾀도 있기 때문입니다. 뱀이 차가운 체온을 가졌지만 태양열로 자신을 데울 줄 아는 것처럼 너무 이성적이지 않고, 너무 감정적이지 않은 적절한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뱀이 기름기나 영양분을 저장했다가 동면을 견뎌내는 것처럼 미래를 위해 저축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게 세상 모든 것을 파악하고, 결단을 내릴 때는 과감하게 공격할 줄 알고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는 ‘방모두단’의 처세술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은 뱀과 같이 슬기로워지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기를 당부하셨을 것입니다.
내 능력만을 생각하고 정말 어리석게도 세상을 살았다면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고 이제 조금씩 성령의 은총에 기대서 슬기롭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가진 뱀이라고 하더라도 그 특성이 있습니다. 비둘기처럼 또 그런 순박함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세상을 슬기롭고 순박하게 산다면 하느님께서 어찌 그냥 버려두시겠습니까? 모든 것을 성령께서 인도 하신다는 데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냥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한 채 살 수는 없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