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의 한계 / 김애련
날이 갈수록 냄비 태우는 횟수가 늘어난다. 한 살을 더 먹는다는 것이 연륜을 쌓는 것인지 기억력이 소진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올해도 시간은 거침없이 달려가고 나는 시간에 떠밀려 간다. 아니면 내가 시간을 데리고 여행을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 여자가 미소를 띄우고 지나간다. 나도 같이 미소를 보냈지만 어디서 봤을까? 누굴까 생각이 나지 않는다. 사람 몸에서 얼굴만은 자기가 직접 볼 수 없다. 상대방의 단점은 잘 보면서 자기의 단점은 잘 보지 못한다. 신은 인간을 만들면서 서로를 바라보면서 웃음과 기쁨을 찿아라 한건가, 아니면 단점을 찾고서 배려하라는 것일까? 서로 상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생각의 깊이는 어디쯤일까? 머리는 얼마나 많은 용량을 저장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기억은 사라져 가지만 머리는 계속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저장한다. 오늘도 저장할 것이 너무 많다. 차곡차곡 쌓아서 필요할 때마다 꺼내지 못하고 자꾸 쌓여만 가니 머리를 비울 수가 없다. 그냥 흐르는 세월 따라 비워 갈 뿐이다. 세월을 이길 수는 없지만 잘 견딜 수는 있을 것 같다. 나이 또한 안 먹을 수는 없지만 잘 조절하면 잘 익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수명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지만 두뇌는 따라가지 못한다. 기억은 상실되고 몸은 자꾸 암담하기만 하다. 맑은 정신으로 가고 싶은데 기억이 따라오지 못하니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웰빙>, <웰에이징>, <웰다잉>으로 살아가고 있다.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이 앞선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논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은 계획과 연습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생에는 연습이 없다. 젊어서부터 시간, 금전, 친구를 관리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노년을 잘 보낼 것이다.
미래에 웃는 나를 만들려면 현재를 잘 살아야된다. 나비는 꽃과 꿀을 보며 나는 것이 아니라 봄바람에 나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도 돈이 전부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더욱 아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지만 조금 부족한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 비우라고 하는 선현의 말을 따라 잘 비우도록 할 것이다.
일주일만 있으면 슬관절 수술을 하러 동의대 병원에 예약을 해놓았다. 그동안 이럭저럭 다리를 잘 쓰고 다녔는데 몆 년 전부터 퇴행성관절염이 생겨서 걸을 때마다 통증이 온다. 친구들은 왜 다리가 그런냐고 하면서 걱정 겸 비아냥 거리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자존감이 사라진다.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나서 검사를 하고 수술날짜를 잡았다. 막상 날짜를 잡고 보니 걱정이 앞선다. 괜히 마음이 편치 않다. 평소 용감하던 성질은 어디를 가고 약한 마음만 드는지 그런 내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갑자기 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는 일어설 때마다 ‘아이구 다리야’ 하시면서도 아흔네 살까지 사셨다. 그런 어머니를 한 번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어른들은 나이가 들면 응당 저려러니 하고 넘어갔다.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우리 여섯 남매를 키우시고 뒷바라지하느라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아흔넷까지 고통을 안고 살았셨는데 다리 한번 주물어 드리지 못했다. 못난 딸이 자신의 다리가 아픈 것을 겪어 보고 나서야 어머니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흘러 가버린 세월 앞에 통곡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냐 만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온 가슴이 먹먹해 온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스텐 밥그릇에 밥을 담아 아랫목에 묻어두고 따뜻한 밥을 챙겨 주시던 어머니, 아들딸 걱정에 조금만 늦게 오면 항상 대문 밖에서 우리를 기다려 주시던 어머니, 지극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나는 한 번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주지 못한 것 같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머니의 사랑을 알았으니 참으로 불효막심한 딸이다.
지금 이렇게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도 어머니 세대들이 잘 닦아 놓은 덕분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고마움도 모르고 살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고생하여 만들어 놓은 편리에 길들어져 작은 고통도 참지 못하는 허약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모든 것에 풍족한 시대에 살면서 조그만 일에도 불만투성이로 살아간다.
당신들은 오로지 자식들을 위하여 살았다. 먹고 싶은 것 다 먹지 못하고 어른들 봉양하랴 여섯 일곱 되는 자식들 배 곪지 않으려고 허리띠 졸라매며 절약, 절약하며 살았다. 그러한 당신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더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 헤매지만 지금은 제사마저 거부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인구절벽이다. 세계에서 애를 제일 적게 낳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정녕 이렇게 산다면 우리나라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자기 편하게 살기 위하여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는다.
가족끼리 오손도손하게 살아가던 그런 날이 다시 올까? 지식 정보 사회가 되면서 결혼 출산 직업도 능력사회로 변하였다. 형제도 없고 딸 아들 구분 없고 오히려 딸을 더 좋아하고 이제는 사촌도 없다. 조금 더 가면 부모 자식도 없다. 후손을 번식하라고 부부를 만들었는데 반려동물들 하고 살아라고 만들진 않았다. 여름에 개를 유모차에 태우고 손 선풍기를 개한테 틀어서 길을 가는 것을 보았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부모가 앞에 가면 뒤에서 선풍기를 틀고 가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인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건만 이제 반려견이 사람을 앞서고 있다. 인간성이 어디까지 추락할지, 우리가 스스로 추락시키고 있으니 누구한테 원망할 수 없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우리가 과거를 잊고 살지만 어떤 충격을 받으면 기억은 우리의 밑바닥을 흔들어 놓는다. 현세대는 방향을 잃은 세대다. 도덕도, 윤리도, 법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