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만난 대마도 여행
안규수
꽃들을 다시 만난 건 꼭 1년 만이었다. 산자락 구들방 창문 너머 여린 가지에서 며칠 전 새끼손톱만 한 붉은 매화 한 송이가 눈에 띄더니, 홍매 청매 할 것 없이 어느새 줄줄이 예전의 그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자리에서 다시 피어 있는 꽃이 영롱하고 현란하다.
고향 뒷산 고샅길 옆 평평한 둔덕에는 내 가족무덤이 따스한 햇볕을 한가득 받으며 무척 평화롭고 다정하게 옹기종기 봄날을 맞이하고 있다. 다시 찾아온 봄날은 따사롭고 고즈넉했다. 가신 분들의 삶이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봄날의 풍경이 가슴 시리도록 일깨우고 있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두 가지 현실이 나를 맞이한다. 그 하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다른 하나는 오늘 하루만큼 내가 또 ‘죽어갈’ 것이라는 점이다. 나로서는 살아가야 한다는 쪽에 무게를 두면 번잡함이 없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하지만 내가 죽어간다는 쪽에 초점을 맞추면 마음이 번잡해진다.
은퇴 후 어느새 16년째에 접어들었지만 나는 스스로 백수라고 여겨 본 적이 없다. 백수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 말은 자기가 삶의 주인공이라는 주체성이 빠져 있다. 삶에 백수란 없다. 공수, 즉 빈손이라는 말은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다. 나는 이제 공수 16단이다. 날이 갈수록 내 삶의 ‘사라짐’과 ‘마감’에 점점 더 관심이 커지는 걸 느낀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게 정처 없이 흘러간다.
아득히 먼 옛날, 60여 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하신 마지막 말씀이 귓전을 맴돌며 사무친다.
“왜 이리 가는 길이 힘드냐!”
형 뒤에 앉아 울고 있는 나를 실오라기 같은 목소리로 부르시더니 내 손을 잡으셨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시는 눈빛을 보고 나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16살 어린 나를 두고 가시는 길이 얼마나 힘드셨는지 이 나이 되니 알 것 같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삶은 격동의 시대에 역동적이었으며 치열했다. 여순 사건에 벌교를 점령한 반군은 제일 먼저 한 일이 지주, 군인 경찰 가족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지주로 지목받아 벌교 남초등학교 교정에서 인민 재판을 받았다. 그때 유행어가 ‘손가락 총’이었다. 일렬로 세워 놓고 지나가면서 손가락으로 지목받으면 그대로 끌려 나가 소화다리에서 처형되는 와중에 작은 매형의 기지로 아버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전의 나를 둘러싼 온갖 삶의 푸닥거리들이 마침내 끝장날 때까지, 삶의 흐름과 가닥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질주해 왔다. 이제야 나는, 산다는 것이 오로지 오늘 하루를 사는 일인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인생은 날마다 흘러가는 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에 겨우 눈을 뜨고 지각생처럼 우물쭈물 두리번거리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노인 삼반三反 이란 이야기가 있다. 밤에 잠이 없고 낮잠을 좋아하고, 가까운 곳은 못 보면서 먼 곳을 보며, 손주는 몹시 아끼나 자식과는 소원한 걸 말한다. 엊그제 일은 까맣게 생각이 안 나도 몇십 년 전 일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팔랑팔랑하던 젊은 시절은 늘 기쁘고 좋았는데 나이 들자 스쳐 가는 바람에도 공연히 눈물이 난다. 이는 고장나고 녹슬었다는 증거다. 시계는 작위적으로 되돌리려 들면 원망과 서운함만 쌓인다. 내려놓아야 가벼워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삶은 결국에는 ‘사라지는’ 일이다. 몸이 떠나는 일이다. 바로 한 달 전 찻집에서 만난 친구도 먼 길 떠나고, 어릴 적 함께 들로 산으로 헤매던 동무들도 머나먼 길 떠나가고 없다. 오직 ‘나’ 하나 남았다. 인간에게 단 한 사람 예외 없이 적용되는 이 이치에 대해 어이없게도 모두 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인공지능이 제아무리 진화를 거듭한다 해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단연코 불가능하다. 이것은 삶의 영원한 수수께끼다. 나는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어디로 사라질 것인지 삶의 ‘마지막’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떠난 뒤 맞이할 상황’을 아등바등 상상하면서, 자기가 각색한 위안을 합리화하거나 두려움과 불안 속에 허우적거릴 뿐이다.
처음에는 내 인생의 종주 배낭을 그럴싸한 온갖 물건으로 가득 채워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배낭 속 잡동사니들을 버려야 했다. 자연스러움이 좋고, 원래 모양을 왜곡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가미하거나 탈색하지 않은 이런 일들이 진솔한 삶이란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내가 거처하는 작은 방 들어오는 입구에 작은 거울이 걸려 있다. 거울 바로 옆에 윤동주의 <서시>를 붙여 놓았다. 아침마다 세수를 마치고 나의 해묵은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거울 옆 그 윤동주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아침마다 그 시를 읽는다. 나의 시선은 언제나 맨 끝에서 두 번째 줄에 멈춘다.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나는 췌장에 붙어 있는 담도에 이상이 있어 지난달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병원에서 8일간 입원해 있으면서 최신 의료 기구로 별별 검사를 다 받았다. 결과는 수술받아야 하고 날짜도 잡혔다. 한 달여 여유가 있어서 꼭 만나야 할 사람, 내가 즐겨 찾는 여러 곳을 두루 다녀왔다.
마지막으로 며칠 전 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일본 대마도를 간다기에 따라나섰다. 사실 가기 전에 수없이 망설였지만, 막상 함께한 일박이일이 너무 소중한 시간이어서 마음속에서 배어 나오는 감동이나 느낌이 살아서 지금도 내 속에서 꿈틀거린다.
나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첫댓글 벌써 여행 후기를 쓰셨군요.
요즘 선생님의 내면 풍경을 알 것 같습니다.
충분히 다시 일어서실 것을 믿습니다.
어제 밤 일찍 잠든 탓에 새벽에 일어나 쓴 글입니다.
담담히 살려고 해도 주어진 환경이 날 붙잡고 놔주질 않습니다.
저도 인간인지라....넓으신 아량으로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선생님, 한밤중에 일어나 이 글을 대하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인생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달이 묻어나는 명문입니다.
선생님, 힘내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요즘 시편 23편을 외우고 있어요.
주님이 다시 일으켜 주실 줄 확신합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게하시는 분,
전능자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기도로 응원합니다. 안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기도 큰 힘이 될 줄 믿습니다.
안규수 선생님의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한 편의 글에서 안규수 선생님이 살아오신 인생 이야기가 진솔하면서도 무게감 있게 그려져 있어 읽을 때마다 생각이 깊어집니다. 건강 회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변변치 못한 글 읽어 주시고 좋은 평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반드시 다시 일어나 열심으로 글을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