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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84
6월7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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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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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XvRoe43I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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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원불멸의 든든한 위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굳건히 우리 뒤를 받쳐주고 계십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코린토 2서를 통해 그는 자신이 온 몸으로 체험한 하느님 아버지를 ‘인자하신 위로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2코린토 1장 3~4절)
너나할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는,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필연적으로 쉼없이 방황하고 흔들리며, 상처입고 쓰러지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견뎌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누군가로부터의 따뜻한 위로의 말 한 마디, 격려와 사랑의 손길을 간절히 기대합니다. 가족이나 친구, 동료나 이웃들은 사실 그런 역할을 하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잘 아는 것 처럼, 인간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위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그토록 의지했던 그, 그 숱한 위로를 선물로 주었던 그도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와 비슷한 한 가련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도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며, 그도 나처럼 수시로 허물어지며, 언젠가 반드시 떠나갑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더 든든한 위로자, 더 영원한 위로자가 필요한데, 이런 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절대로 우리를 저버리지도 떠나가지도 않으시는 영원불멸의 든든한 위로자, 하느님 아버지께서 굳건히 우리 뒤를 받쳐주시니 말입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한없이 자애롭고 부드러운 모성적 위로자 성모님께서 다가갈 때 마다 폭포수 같은 위로를 건네주십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존재였지만,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성인성녀들께서 또 다른 위로자들로 줄지어 서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주변은 위로자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충만한 위로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가 또 다른 위로자가 되어, 온갖 환난을 겪고 있는 이웃들, 너무 외로워 속울음 울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서야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언제 가장 큰 위로를 받았던가 돌아봤습니다.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너무 괴로워 숨조차 쉬기 힘든 상황인데, 말로만 힘내, 조금만 참아, 기도할께, 하는 말들은 별로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무 말없이 자리를 지켜줄 때, 내 아픔에 깊이 공감해주고 고개를 끄덕여줄때, 그저 함께 힘겨운 길을 걸어줄 때, 참으로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가 나보다 더 크게 아파할 때, 누군가의 더 큰 고통을 통해, 내 고통이 조금이나마 완화되고 치유되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묵상해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숱한 고통 속에, 이런 저런 작은 죽음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말로만 위로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큰 위로 방법을 찾으셨는데, 우리보다 더 큰 고통, 더 큰 십자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애야, 많이 고통스럽니? 그렇다면 나를 한번 보거라. 내 고통은 네 고통보다 훨씬 크단다. 지금 지고 있는 십자가 결딜 수 없을만큼 무겁니? 그렇다면 나를 보거라. 내 십자가는 훨씨 더 무겁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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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lM_-F1YPS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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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원인을 없앤다고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오늘 복음은 ‘진복팔단’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행복에 관해 이야기한 수많은 스승이 있고 수많은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처럼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가 완전하지 않은 행복을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말씀해주시는 참 행복의 길인 진복팔단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완전한 행복의 길임을 믿을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에 관해 인간으로서 가장 완전한 단계까지 갔던 분이 부처가 된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왕자로서 모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엔 그 행복을 방해하는 것이 나의 욕망과 집착임을 알아내었습니다.
마를린 먼로가 다 가지고도 약물 과다복용으로 목숨을 잃었고 또 다 가졌다고 여겨지는 헤밍웨이도 자살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가지지 못해서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욕구가 너무 커서 불행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는 모든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닫고 그 집착의 원천인 자신을 비우면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마음 안에 있는 욕구를 버리는 이들은 집착에서 벗어나 하늘 나라의 행복을 누립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통의 원인이 자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더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고통의 원인임을 깨닫는다면 슬픔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탓이요!”를 하면 타인이나 상황에 대한 화가 줄어들고 온유하게 됩니다. 그러니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가 됩니다.
그런데 부처의 가르침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진복팔단은 뒤로도 몇 개가 더 이어집니다. 실상 고통의 원인인 자기 자신과 집착을 없앰으로 행복에 이르려 하는 방법은 한계가 있습니다. 어차피 ‘나’로 살아가는 이상 집착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어떤 분이 한 영화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제목은 모르겠습니다. 티베트에서 한 스님이 1년간 동굴에 갇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명상 수행을 하였습니다. 1년 뒤 다른 스님들이 동굴의 문을 열자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게 자란 명상상태의 한 남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그 스님들이 그를 들어 마차에 태우고 돌아갑니다. 하도 오래 그 자세로 있어 몸이 굳어있습니다. 절에 도착하여 그의 머리카락도 자르고 손톱도 잘라주며 몸을 주물러 펴 줍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명상상태에서 되돌아와 생명을 되찾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 결국 최초의 불교 수행법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에 생명이 돌아온 그 사람은 이내 들을 수 있게 되고 냄새를 맡게 되고 볼 수 있게 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한 여인의 방울 소리는 이내 욕망을 자극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더 많은 쾌락에 빠져듭니다. 극단적으로 자기를 끊을 줄 알았던 그 스님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욕망으로 빠져든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정확한 줄거리인지 모르겠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건 만약 누군가 살아있다면 욕망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괜히 그것을 이기겠다고 자기 힘만으로 노력하다가는 낭패만 봅니다. 이런 이유로 대승불교에서는 비우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비심, 즉 불성을 깨우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비우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양심을 일깨워 그 비워진 곳이 다른 욕구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로 말하면 사랑이요, 성령이 됩니다. 해적선에서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살아야 한다면 살면서도 다른 욕구를 지닌 존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을 의로움이라 합니다. 자기 욕망을 버리는 만큼 의로움으로 채우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는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역시 그 사랑을 받아들이려면 자기를 죽여 밀떡과 포도주처럼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함입니다. 그러므로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자기의 욕구를 버리려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본성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진복팔단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은 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입으면 하느님처럼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 자기를 봉헌하여 성체가 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바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가 다 자기 먼저 살겠다고 하는데 자신이 희생하면 모두가 배부르게 되므로 평화가 이룩됩니다. 이 때문에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박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행복과 반대로 나가는 그리스도를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지막에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진복팔단이 말하는 참 행복은 ‘군고구마’가 되는 삶입니다. 내가 죽고 타인에게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상 봉헌과 함께 우리의 양식과 음료가 되는 삶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에게 인사하러 가시는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당신 죽음이나 박해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엘리사벳에게 양식이 되기 위해 가시는 성모 마리아는 당신 태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계시기 때문에 최초의 성체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상황 속에서 마니피캇의 찬미를 통해 참 행복을 표현하십니다.
저는 나름대로 군고구마의 삶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에게 먹히려면 일단 구워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구워지기 위해 나를 봉헌했으니 나의 지상에서의 행복은 없습니다. 다만 먹힐 때 행복합니다. 누군가의 입맛을 당기고 배를 부르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한 삶으로의 초대에 응한다면 참 행복을 완전하게 아셨던 분이 지상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알려준 진복팔단만큼 완벽한 행복의 길잡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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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12: 참 행복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를 전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왜 산으로 올라가셔서 가르치셨는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바로 하느님께로 가기 위해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하라는 말씀이다. 사람들을 더 높은 곳, 하느님께로, 더 높은 삶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거룩한 가르침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이다. 오늘도 진리의 신비를 배우고자 하면 누구든지 교회라는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참 행복”에 대한 이 가르침은 “하느님 나라의 헌장”으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된 “하느님의 모상과 닮음”을 완성해 준다. 이제 창세 1,26-27의 거룩한 계획은 창세 2,7의 거룩한 숨으로 확인되었고, 성령과 함께 그리스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고 신세대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참 행복”을 위한 거룩한 강령은 오직 인간적 논리로는 단순히 혐오스럽고, 역설적이고, 아니 바보 같다. 현재 개념으로 혹은 현재 윤리로 “참 행복”을 읽으면, 그것들은 단지 “재수 없는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익과 성공 위주의 딱딱한 사회는 이들을 땅 위에서 없애버리려 한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 온유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해서 모든 벽을 허물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더욱이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비난받는 사람들, 내가 집에서, 길에서, 일터에서, 병원에서, 감옥에서, 태만에서, 실직에서, 퇴출에서 보는 사람들의 본보기며, 언어장애인, 걱정이 많은 사람,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 이들은 아무도 모임에서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직 이들만이 하느님 나라의 가운데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그들의 얼굴에 그들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완전하게”(마태 5,48) 하려고 그들과 고통당하신 주님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비슷한 “참 행복”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렇다. 단지 명령의 위치에서 전혀 비교하지 않으며,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이제 여기서 우리 대부분이 두 가지 의미로 다루어진다. 즉 은총을 받아들여서 이미 “행복한 사람”인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팔을 벌리고 그들 안에서 영광의 왕의 얼굴을 발견하면서(마태 25,31-46),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 이것이 인간들을 바라보는 복음의 주요한 선포이다.
참 행복의 삶을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복된,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 역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기고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삶이다. 참 행복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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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부모에게는 자녀의 성공이, 공부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성적이,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합격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승진과 높은 연봉이 행복의 지표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동의할 수 있으신가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내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생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신지요? 또한 예수님께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들이 받게 될 상은, 자녀를 뒷바라지하면서, 열심히 공부하고 시험을 준비하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서 얻고자 하는 것들과는 굉장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늘 나라가 나의 것이라고 행복한가요? 자비를 입어 행복한가요? 하느님을 뵐 것이라는 게 행복으로 다가오나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 불린다는 것이 나에게 행복감을 주나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이처럼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을 얻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제법 거리가 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이미 하늘 나라를 향하여 있지만, 우리의 시선은 우리를 둘러싼 주변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준으로만 바라보았던 세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시선 밖에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늘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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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행복>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3-12ㄴ)
1) “행복하여라.”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릴 것이다.”라는 뜻의 ‘축복 말씀’입니다. (여기서 ‘행복’이라는 말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 행복이 아닙니다. ‘참 행복 선언 말씀’은 행복해지는 방법을 말하는 행복론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생활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그 ‘복’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겪는 가난과 고통과 박해 등은 행복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의 원인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고난을 참고 견디는 인내와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그 ‘복’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좋은 예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최고의회 앞에서 물러 나왔다."(사도 5,41) 이 말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매질과 모욕을 참고 견딤으로써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매질과 모욕을 기뻐한 것은 아닙니다.)
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재물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입니다.(마태 6,24)
하느님만 충실하게 섬긴 사람들은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아 누릴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오해하기가 쉬운 번역입니다. 이 말은 원문 그대로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인은 몸은 가난해도 마음은 부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이 행복한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사도 4,34)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슬퍼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만 희망과 기쁨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세속적인 것에서 위로를 찾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격려만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온유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박해자들을 용서하셨던(루카 23,34) 예수님을 본받아서 자비와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들, 이리 떼 가운데에 있어도 양의 본성을 잃지 않는(마태 10,16) 사람들입니다. (비폭력으로 폭력을 이기는 사람들입니다.)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이 땅에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4)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을 말씀하신 다음에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6,36) 그래서 ‘자비로운 사람들’이라는 말을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에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5,48) 그 표현을 적용하면, ‘자비로운 사람들’은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려면 미움도 버려야 하고, 복수심도 버려야 하고,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께 자비와 용서를 간청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보시고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라고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바로 그런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한 1,51), 이 말씀은“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라는 말씀과 비슷합니다.
5)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은, 넓은 뜻으로 생각해서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 복음 선포 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복음 선포 활동은(선교활동은) 자기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모르고 있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는 일이고, ‘잃은 자녀들’을 아버지이신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라면, 즉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의로움 때문에 받는 박해’는 종교 박해인데, 만일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자기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박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박해는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면서 신앙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받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박해를 받는 것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표지가 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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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작년에 이어서 올해에도 캠핑을 다녀왔습니다. 작년까지 준비를 맡아왔던 신부님께서 새로이 참가하는 신부님께 진행을 맡겼습니다. 새로이 팀을 이끌어가는 신부님께 대한 걱정은 캠핑의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우선 식단이 새로워졌습니다. 첫날 저녁은 싱싱한 샐러드와 고기 그리고 마무리는 비빔 면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은 속이 활 풀리는 황태 해장국이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등대를 다녀왔습니다. 점심은 시원한 묵밥과 굴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녁은 수육과 장터국밥을 준비하였습니다. 오는 날 아침은 만둣국이었습니다. 캠핑을 간 것이 아니라 맛 집 여행을 다녀온 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캠핑을 준비했던 신부님은 최대한 간편하게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음식 준비 때문에 한 사람이 너무 고생하면 캠핑을 계속하기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가는 날 저녁은 식당에서 사서 갔습니다. 해가 짧아서 짐 정리하면 식사를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일어나는 사람이 각자가 먹었습니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주었습니다. 고기, 어묵탕, 부대찌개 같은 것을 준비하였습니다. 재료를 사서 끓이면 충분했습니다. 진행 신부님이 바뀌었어도 저의 일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의 일은 설거지입니다. 캠핑이 즐거운 것은 자연 속에서 신부님들과 친교를 나누는 것입니다. 또한 즐거운 것은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상의 삶이 감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단식할 때는 너무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의 위선과 가식을 비판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제시한 엄격한 신앙생활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하고, 세리의 집에서 먹고 마실 때는 예수님의 행동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이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의 ‘틀’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온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혈통, 계급, 능력, 재산, 신분에 의해서 정해진다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외부에서 찾으려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을 통해서 행복이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기도 하고, 이웃의 것을 빼앗기도 합니다. 행복은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란 풀잎 끝에 맺혀있는 이슬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 예수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에서 시작되는 행복은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시련과 고통이 다가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환난과 박해가 찾아와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행복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부족한 것들이 채워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행복은 작은 것에라도 만족할 때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전에 읽은 글이 있습니다. ‘행복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길과 같다.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길이 되는 것이다.’ 행복도 그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행복의 길이 우리 곁에 생겨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한 마음으로 살지 못하면 행복의 길도 금세 근심과 걱정의 잡풀이 자라나서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환난을 겪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나아갈 때에 그 힘을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바오로 사도는 환난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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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그래서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면서 가끔 저는 마치 25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요가와 기 수련을 통해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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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모습을 제시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정의를 뒤집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적 선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주십니다. 시편 저자들과 예언자들이 노래했던 행복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이들, 박해받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기에 행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가난과 고통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유와 위로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는 존재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고통받는 이들, 예수님으로부터 해방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메시아가 주실 정치적 해방과 육신의 치유를 갈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들,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아니고, 세상의 질곡으로부터 참다운 가치, 참다운 하느님의 나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참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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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 슬픔,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받음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곳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며,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까지 뿌리를 뻗은 만큼 수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으니 그들이 성취한 행복은 그만큼 가볍습니다.
이처럼 시편 1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 비추어 행복 선언을 다시금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내용은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뿌리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오는 가난, 슬픔,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냇가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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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참 행복’이 담고 있는 영성적 특징인 두 기둥에 대해 보고자 합니다. 곧 ‘존재론적 영성과 실천적 영성’, ‘됨’(being)의 영성과 ‘함’(doing)의 영성입니다. 전자는 우리를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요,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영성이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육화 될 때 비로소 영성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존재’가 변화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새로운 피조물로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변화된 존재로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존재의 변화를 토대로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존재가 새로워졌다면, 그 새로워진 존재로 살아가기 위한 양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곧 변화된 새로운 존재인 하느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창조세계인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론적 영성, 곧 ‘됨의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참 행복’에서는 어떤 윤리적 행위를 위한 실천덕목들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와 변화된 존재의 모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곧 인간의 외향적인 ‘행위’가 아닌, 내면의 ‘존재됨’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존재와 행위가 이 둘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의 양식에서 있어서 둘은 구분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그에 따른 보상으로 복이 주어진다는 논리가 아니라, 총체적 존재의 변화를 보여주며, 그것에 따른 영성생활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됨’의 영성은 존재의 변화를 일으키며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을 개선하거나 윤리적, 도덕적 행위를 촉발시키는 데 만족하지 않고, 우리의 전 존재에 획기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참 행복’은 존재론적 영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우리를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곧 존재 변화로서의 ‘참 행복’은 삶의 실천적이고 활동적인 측면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됨’의 영성은 ‘함’의 영성으로 육화하게 됩니다. 곧 존재의 영성은 실천적 삶의 영성으로 이어지고, 또 실천적 영성은 존재의 영성으로 맺어지는 과정으로 계속 순환, 반복하게 됩니다.
이를 ‘참 행복’에서는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로,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로, 그리고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채워짐,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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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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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5,3)
<참행복 선언!>
오늘부터 우리는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산상설교(5장~7장)를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참행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흔히 '진복팔단'이라고 하는데, 정확하게는 '아홉 개의 행복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그렇습니다. '참행복'은 잠시 지나가는 현세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와 죽음 저 너머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가난하다는 것'은, 갈망하는 것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채워져야 할 것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물질이나 명예나 권력이 아니라, '영적이고 하느님의 것'인, '하느님의 나라와 성령이 채워지지 않은 결핍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의 나라와 성령을 갈망하는 사람들!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된 사람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떨리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들! 하느님 안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세상의 부와 재산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됩시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부터, 참행복을 맛보면서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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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그리고 내일>
마태오 5,1-12 (참행복)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오늘 그리고 내일>
오늘이 있기에
내일을 바라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은
오늘 품은 내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바라기에
오늘을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내일은
내일 일군 오늘이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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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올해부터는 식복사 없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생 독신이어서 그런지 한 공간에 누구와 함께 있다는 것이 힘듭니다. 그래서 개인 사정으로 더 일할 수 없다는 식복사 자매님의 말에 흔쾌히 허락했고 대신할 분을 뽑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사제관이 지저분해지는 것입니다. 청소, 설거지, 빨래 등의 일을 미루다 보니 점점 사제관이 지저분한 것은 물론이고, 제 개인적으로도 불편해졌습니다. 다시 새롭게 식복사를 채용해야 할까 싶었습니다.
이런 갈등이 있었지만, 지금도 식복사 없이 혼자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집안일을 미루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현재까지 어떤 미룸 없이 잘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소도 미루지 않고 매일 하면 약간의 노력으로도 매우 깨끗합니다. 식사 후에 얼른 설거지하니, 식사의 어려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빨래도 미리미리 하니 어려움이 없습니다.
미리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미뤘을 때, 늘 후회가 따라왔습니다. 미뤘을 때 늘 힘들었고, 미뤘을 때 하지 못하는 것들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미뤄서는 안 될 일입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주님의 일 자체가 어렵고 힘든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미루지 않으면 주님의 일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게서 자유롭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만을 따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지금 이 순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행복을 위해 주님의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일은 진정한 행복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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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해도 돼.”>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17살 무렵까지 어떤 말을 가장 많이 들을까요? 평균적으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안 돼! 하지 마.”라는 부정적인 말이라고 합니다. 자그마치 15만 번 정도 듣는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와 반대의 말인 “그래, 해도 돼.”라는 말은 평균 몇 번이나 듣게 될까요? 5천 번 정도라고 합니다. 이는 한 번의 ‘그래’라는 긍정적인 말을 들을 때, 이미 서른 번의 ‘안 돼’라는 부정적인 말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아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말을 많이 들었느냐에 따라 긍정적인 사람과 부정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고 합니다.
종종 아동학대로 물의를 일으키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부정적인 모습으로 만드는 것으로, 아이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사는 이 세상까지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이들이 긍정적인 말을 많이 들을 수 있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행복하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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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참된 행복>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을 간절히 바라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의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하나가 채워지면 또 하나가 채워지길 원하여 결코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서 헤매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이 곧 행복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하느님을 뵈려고 애쓰고, 하느님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할 때가 행복의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그리하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과연 어느 사람으로 행복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세상에서의 막연한 기대를 접을 수 있고 이 세상에서의 고달픔과 시련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이 곡식 단 들고 올 때 춤추며 노래하리라” 했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지금 내 안에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행복을 어디서 찾습니까? 세상의 풍요 안에서 찾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결국은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차지한 사람은 비록 지금 세상의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 할지라도 모두를 얻은 사람입니다.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것이고 땅의 주인 역시 하느님 이십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잠시 관리하다가 마지막에 그대로 놓고 하느님께로 갑니다. 그렇다면 소유하려고 애쓰기보다 하느님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면 무엇 합니까? 내 것이 아닌 것을! 풍족하지만 결핍의 삶을 살아가는 불안한 현대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진실한 사랑입니다.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행한다면 행하는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소유, 지배, 사랑! 사랑 안에서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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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행복>
-성인聖人이 되는 것-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 그 둘레에, 그분의 천사가 진을 치고 구출해 주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
주옥같은 화답송 시편 34장 일부를 다시 나눴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인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밖에도 있습니다. 참으로 깨어 사는 사랑의 내적 혁명가가 진짜 성인입니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바 소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모두가 행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참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바라는 소원은 모두가 성인이 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 ‘구원의 꽃자리’ 시에서처럼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각자 고유의 제자리에서 자기 고유의 색깔, 모습, 크기, 향기를 지니고 꽃처럼 살아가는 평범한 성인입니다.
-“볼품없이 초라한 버려진 땅
자리 탓하지 않는다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내려다 보시면, 볼 수 있으면 행복이다
누가 알아 주든 말든, 보아 주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때되면 꽃처럼 활짝 피어나 주변을 환히 밝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구원의 꽃자리 천국이다”-
몇 번 인용했던 최근의 제 심경을 고백한 자작 애송시입니다. 이런 구원의 꽃자리를 사는 이들이 바로 비상한 깊이의 평범한 성인입니다. 주변에서 이런 영적도반처럼 느껴지는 평범한 성인들을 만날 때 참 반갑고 기쁩니다. 지난 토요판 한겨레 신문은 무려 3면에 걸쳐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참 독특한 성인같은 분(강수돌)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일부 인터뷰 내용을 소개합니다.
-움직이더라도 지금보다 ‘주변周邊’으로 가겠군요? 하하.
“그렇죠. 서울 내지 ‘중심中心’을 향하는 삶은 그 속에서 또 고지를 점령하려 하는데 그런 고지는 1%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내지 기득권이죠. 그런 것보다는 오히려 변방을 향하고 주변을 향하는 삶이 자기 개성과 색깔을 잘 드러내죠. 고 신영복 선생도 얘기했듯이 중심을 향하면 모두가 획일화되잖아요. 반대로 방향을 바꿔 주변을 향해 보세요. 그러면 각자 자기만의 삶이 열리고, 누구나 일류 인생을 살 수 있죠.”
-비주류, 소수자의 삶을 즐기기인가요?
“자기 삶을 즐기는 건 맞는데 스스로 소수자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주변인이 되어서 좋다가 아니라 주변이어서 좋고, 중심이 아니어서 좋다는 거죠. 그냥 나를 찾아가는 삶을 살아갈 뿐이죠.”
바로 구원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평범하나 실상은 비범한 성인입니다. 중심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내 몸담고 살아가는 오늘 지금 여기가 역설적으로 변방이자 중심입니다. 구원의 꽃자리를 사는 성인은 교회밖에도 교회 안에도 곳곳에 있습니다. 수술후 극심한 고통중인 자매의 글도 감동이었습니다.
“정형외과 수술중 가장 고통스럽고 아픈 수술이랍니다. 저도 상상외로 너무 아파서 체면 불구하고 엉엉 울었습니다. 아들도 따라 울고요. 눈에 보이는 살색은 완전히 잿빛으로 변해 있구요.---신부님 강론을 나누는 건 제게 은총이고 신부님 말씀처럼 치유의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낮과 밤을 지어내셨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좋은 빛과 향기나는 말씀에 힘을 얻고 조금이라도 치유에 변화가 있을테니 감사 찬미 영광을 올립니다. 신부님, 절대로 아프지 마시고 건강하셔야해요. 편히 주무세요.”
말 그대로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제자리를 견뎌내는, 버텨내는 성녀聖女같은 영적도반 자매에게 주님 쾌유의 은총을 청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참행복을 통해 누구나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참 대단합니다.
산상 설교중 오늘 참행복선언은 종파를 초월하여 참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 누구나 극찬하는 무한한 영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내용입니다. 끝없이 하늘로, 성인의 삶에로 활짝 열려 있는 초대장과도 같습니다. 평생 성인의 여정에 평생 과제로 삼아 추구할 가치가 충분한 내용입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구원의 꽃자리를 살게 하는 무한한 위로와 격려, 용기와 희망을 주는 복음중의 복음입니다. 참 대단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대로 참행복을 사셨던 예수님 삶의 반영이자 요약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성인이 되어 참행복을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세상 행복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동물적 차원에서 하느님 차원으로 인간을 업그레이드 시켜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성인답게 살 수 있는 최고의 처방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하느님을 닮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행복하여라, 1.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2.슬퍼하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3.온유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4.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행복하여라, 5.자비로운 사람들! 행복하여라, 6.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행복하여라, 7.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행복하여라, 8.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이를 일컬어 진복팔단이라 합니다. 말그대로 언제나 생명의 빛을 발하는 ‘늘 옛스러우면서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복음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구에게 이런 복음 말씀을 들을 수 있겠는지요. 참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만나기에, 하늘 나라를 차지하기에 결국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짜 행복의 환상속에서 불행하게 지내는 지요! 주님은 마지막으로 갖가지 사유로 고통중이거나 시련중인 이들에게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박해하며, 너희를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눈에 보이는 박해만이 아니라 주님 때문에 온갖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는 모든 의인들, 성인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으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모세의 ‘하지 마라’는 금령禁令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예수님의 참행복선언입니다. 모세의 십계명을 실천하면 발전도 없어 그냥 ‘좋은 신자’, ‘모범 신자’는 될 수 있겠지만 결코 성인은 될 수 없습니다. 하늘 나라로 활짝 열려있는 참 행복선언을 평생과제로 삼아 수행할 때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아 각자 고유의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위로의 하느님, 위로의 예수님, 위로의 성령님입니다. 참 행복선언을 통해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며 용기와 희망, 기쁨을 주신 위로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2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중에 무려 위로란 말마디가 10회 나옵니다. 말 그대로 위로의 하느님이요, ‘위로의 샘’에서 샘솟는 희망과 기쁨, 용기와 힘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 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얼마나 고무적인 위로의 하느님이십니까? 참으로 충고나 조언보다는 따뜻한 존중과 배려, 공감과 사랑, 위로와 격려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 위로의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어 참행복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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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가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불행하다 여기십니까?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마태 5,3-4)
복음에서는 "행복하여라!" 하시는 주님의 선포가 여덟 차례나 울려 퍼집니다. 이는 선포이면서 동시에 권고이고 명령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대상이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견지에서는 썩 행복할 것 같지 않은 사람들로 보입니다. 가난하고 슬프고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 받는 이들, 계산적이지 못하고 약삭빠르지 못하고 경쟁과 착취 구도에서 우위를 선점하지 못하는, 그저 약하고 착해 빠진 이들이 차례로 불리우니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복음적 행복이 세속적 행복과 꼭 일치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인간이 지닌 영과 육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적 충만 상태이기에 외적인 부유함, 쾌감, 명성, 권력의 조건만으로는 행복이 완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저 육신을 만족시키는 안정감과 우월감은 이기심을 활성화해서 진정한 행복에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1독서는 코린토2서의 시작 부분으로 "위로"의 말씀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2코린 3)
이것이 바로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의 형제들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까닭입니다. 사도가 전하는 하느님이 위로의 하느님이시며 고통과 시련의 풍랑 위를 항해하는 교회에 한없이 자비를 쏟아 주시는 인자한 분이시니까요.
그런데 편지 대목 안에는 "위로"라는 말씀만 있지 않고, "환난, 고난"이라는 말씀 또한 적잖이 등장합니다. 마치 고난과 위로가 한 세트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지요.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열쇠가 들어있습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나아갈 때 그 힘을 드러냅니다."(2코린 1,6)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서 고난과 위로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드러난 주님의 구원 업적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고난 없는 위로도 존재하지 않지요. 그 위로가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화답송)
시편작가는 복음이 선포하는 행복한 이들을 묶어서 한 마디로 노래합니다. 가난하고 슬프고 주리고 목마르며 박해받는 이들, 세상의 물질과 권력 싸움에 발은 담그지 않는 자비롭고 선하고 순수한 이들은 세속 깃발 아래가 아니라 위로의 하느님께 몸을 숨기는 이들이지요. 그들의 행복은 십자가와 부활을 몸소 겪으신 예수님의 행복과 일치하기에 그 무엇에도 이 행복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세상사가 때때로 퍽 고되고 버거우시지요? 어느 면은 좀 살 만한데 또 다른 면은 도무지 팍팍하기만 하니 과연 내가 행복한 건지 잘 모를 때도 종종 있겠고요. 세상의 파도를 헤쳐가다보면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고난과 시련이 없을 수 없는데, 그래도 우리를 견디게 하는 건 이 모두를 먼저 겪으신 주님이 당신 그늘로 우리를 숨겨 주시고 위로를 건네시기 때문일 겁니다.
십자가의 주님께서 한량없는 위로도 함께 가지고 오십니다. 주님께서 목소리를 높여 우리에게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니, 우리는 반드시 행복하고 또 행복해 질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 덕분에 행복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이 행복이 세상으로 훨훨 퍼져나가길 기원합니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온종일 이 주문을 외우며 행복감에 푹 젖어드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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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c2km0kvgbw&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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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 3)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이시다.
행복의 여정은
가난한 마음의
여정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찾는다.
목마름이
있기에
생수를 찾듯
하느님을 찾는다.
결핍과 가난이
오히려 행복의
시작이다.
사랑이
행복이다.
사랑할 때
우리는
행복하다.
우리의
마음안에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행복이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릴 수 있다.
행복은
예수님같이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가난한
관계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것들이
실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었다.
가난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우리의 마음이
깨어날 때
행복으로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행복은
하느님을 향한
삶의 목적이다.
이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행복은
그들의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이신
하느님께
집중한다.
행복은
하느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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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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