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최근에 찍은 도사국사 듣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 드립니다....
1. 22강 후삼국통일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공산전투에서 신숭겸을 죽이고 후백제가 크게 승리하면서
견훤은 그대로 경주로 가서 포석정에서 경애왕에게 자결하도록 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러면 순서가 공산전투->경애왕 죽음->고창전투->운주전투
이런 순이라고 말씀하신건데요...
저는 경애왕이 죽고 그 다음에 공산전투로 알고 있었거든요...그래서 인터넷 찾아봤는데 인터넷에 이렇게 나오는데
어떤게 맞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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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여러 호족들 중에서 양대세력으로 성장한 후백제의 견훤과 태조는 외교상 화친을 맺고 있었으나 양자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견훤은 그즈음 신라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927년 9월근암성(近盦城 또는 近巖城: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군)을 빼앗고, 이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공취한 뒤 경주로 군사를 밀고 갔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곧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하였다. 후백제군은 영천에서 신령-화산-호당-도동-임포-아화-건천-모량을 거쳐 경주로 진입하였다.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 경순왕)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이 때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정기(精騎) 5,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하였으며 태조도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이 전투를 시발로 두 나라의 대결은 매우 첨예화되었다. 따라서, 종래 표면상 유지된 양국간의 평화는 깨어지고 무력충돌이 심화되어, 후삼국사(後三國史) 전체를 통하여 보면 통일전쟁이 가속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산전투 [公山戰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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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강의 28강 37강에서 해동고승전이 두번 나오는데요...근데 강의하시면서 해동고승전 설명하시면서 최우 집권기라고 하셔서요...
근데 해동고승전이 1215년 최충헌 집권기 아닌가요?? 도사국사 책이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서 제가 공부하면서 바꿔 놨는데
강의하시면서도 최우 집권기라고 하셔서 좀 혼란스럽습니다...
이거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