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설악산행,
단풍은 가을비에 젖고...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감정을 이끄는 동기는 계절마다 다르다.
봄엔 들뜬 마음으로 떠나되, 가을에는 적요한 마음으로 떠난다.
낙엽지고 스산한 바람불 때 마음으로 떠나는 느낌이
연둣빛 새싹 돋고, 봄꽃 필 때 떠나는 마음과 같을 수 없다.
자연히 떠남의 방식도 달라진다.
가을에 떠나는 여행은 부지런함 대신에 여유를,
북적거림 대신에 한적함을 품게 된다.
많은 곳을 찾기 보다는 잠시 머무를 수 있는 한두 군데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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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동안 근교산을 찾다가 외유를 한답시고 어제 밤 단숨에 설악으로 달려왔다.
양양에서 숙박을 한 후 새벽같이 일어나서 한계령을 넘으니 잔뜩 찌푸린 날씨다.
서쪽 하늘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긴 가뭄 끝에 하필이면 내가 산행하는 날 비가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다.
그러나 이 또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인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하다.
차량 2대를 날머리인 남교리에 세워 두고 아침 8시 이곳 장수대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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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아한 산공기가 코끝에 와 닿는다.
아름드리 키 큰 나무들은 호위를 하듯 산객들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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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부시시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잘 정돈된 등산로는 계곡을 따라 이어진다.
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시장끼를 느끼게 하는 저 바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 속에 묻은 때도 씻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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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폭포를 지척에 두고 뒤돌아 본 가리봉 능선은 잔뜩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다.
당신은 살면서 어쩌다 한 번씩 저 산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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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폭포를 애워싸고 있는 천길 단애.
설악은 이미 가을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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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3대 폭포(금강산 구룡폭포, 개성 박연폭포) 중 하나인 설악산 대승폭포(낙차 높이 88m)다.
그러나 긴 가뭄 끝에 흐르는 물이 적어 그만 절벽이 되었다.
이른바 '비오면 폭포'가 이런 모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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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어느새 예쁜 오색 옷으로 갈아 입었다.
단풍이 밤 사이에 더 든 것을 보면서 시간시간들의 흘러감을 눈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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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세월의 이야기를 품고 있기에 속이 텅 비었을까?
영화로웠던 시절이 갔다고 해서 삶의 이유도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니다.
고목은 오도 가도 못하는 망설임으로 서성이지만 마음은 늘 먼산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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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길은 몸만 옮겨놓지 않는다.
몸이 가는대로 마음이 간다.
몸과 마음이 함께 가면 그 길은 길이 아니라 이미 도(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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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령이다.
이곳에서 북으로 내려가면 백담사가 있는 흑선동계곡이고,
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대청봉 방향 귀때기청봉으로 향한다.
한 차례씩 차가운 공기는 골바람을 타고 짙은 안개를 몰고 올라 온다.
처음부터 이산가족이 된 후미조가 오래도록 기다려도 도착하지를 않는다.
전화조차 불통지역이라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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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진 일행을 극적으로 조우하여 안산을 향해 오른다.
산은 올라갈수록 욕심을 버리라 한다.
그래서 우린 산행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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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으로 오르는 길목이다. 애당초 계획은 이 금줄(禁線)을 넘어 가는 것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금단의 열매처럼 '출입금지'라는 유혹의 손길은 달콤하다.
그러나 이곳에서 안산을 과감히 포기하고 오른쪽 방향으로 발길을 돌린다.
짙은 안개로 인해 안산 건너 장쾌한 가리봉 마루금을 조망하지 못한다는 아쉬운 이유도 있거나와,
일행 중 한 사람이 실족사고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만큼
빠른 시간 안에 하산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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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 수록 살갗에 닿는 공기가 차다.
해발 1300m의 잎새 다 떨군 이곳 숲 속은 벌써 늦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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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 되면 자작나무는 지금까지 입었던 흰 옷을 스스로 벗는다.
얼마 전 TV 예능프로를 본 적인 있었는데,
아이와 진행자가 함께 며칠 간을 즐겁게 지내다가 헤어지면서 '아저씨 가지말라'고 아이가 울었다.
못내 아쉬운 작별을 하면서 어른도 눈시울을 적시면서 "사람의 진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어서"라고
자신의 흘린 눈물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주는 마음을 꾸밈없이 받아들이고, 사랑을 표현하는 아이들에게 '진심'이란 단어보다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마음을 얼마큼 줘야 내가 상처받지 않을지를 먼저 생각하는
어른들의 '계산된 진심'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린 언제 상대방에게 마음을 보였는지, 그리고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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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고인물이 단풍의 고향였을까? 아니면 무덤이었을까?
빛으로 타오르던 단풍이 낙엽되어 물 위에 떨어져 머문다.
지난 여름의 화려했던 마지막 생애가 물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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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산모통이를 돌지 못한 햇빛들이 거미줄 같은 나무뿌리에 걸려 그림자로 쓰러진다.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것, 최선을 다하여 땀을 흘린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우리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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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돌계단 길이 끝나고 한참을 걸으니 계곡이 제법 넓어졌다.
계류를 건너는 다리도 예전에는 없었는데 정비된 산길과 함께 군데군데 생겼다.
좋은 현상인지, 나쁜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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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청명하고 강은 순수하다.
깊어가는 가을, 산 속에서 사람들은 시간을 붙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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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도, 살아있는 이끼도 산의 일부다.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누구에겐 흘러간 옛이야기지만 이들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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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본격적인 십이선녀탕계곡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에 씻긴 하얀 암반은 차라리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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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산길을 걷다보면 풀과 나무들이 비켜서며 길을 내준다.
산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처럼 그들이 거기 있음이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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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선녀탕 상단의 원형으로 형성된 소(沼),
동그란 형태로 마치 이태리 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목욕탕 같다.
과연 절대자인 조물주의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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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탕 상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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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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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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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탕 아래 무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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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류를 가로 지르는 다리를 여러 차례 건넌다.
산길을 걸으며 일상의 버거운 삶을 한 쪽에 잠시 내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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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박제영
가을에는 홀로 길을 떠나야 하리
정한 약속 없어도 좋으니
정한 사람 없어도 좋으니
홀로 빈 길을 떠나야 하리
가을은 홀로 푸른 허공
홀로 붉은 고갯길
가을은 홀로 깊은 호수
혼자 걷는 순례의 계절
걷다가 홀로이 걷다가
사람을 지우고 그림자를 지우고
마침내 텅 빈, 맨몸의 순례자여
가을에는 홀로 외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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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을 엿본다.
죽지 않으려고, 이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려고 나무뿌리는 바위를 가로질러 먼 곳의 흙을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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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도 다 떨구고 빈 몸으로 서있는 나무.
욕심을 버린 나무는 하늘도 마음을 내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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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산홍엽! 온통 붉은 단풍의 잔치다.
산 사면과 골짜기로 찾아 드는 사람들의 마음도 다 붉게 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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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산을 태울 듯한 단풍이 눈 감은데까지 따라 온다.
깊어가는 가을 자락은 붉게 물들어 가는데 오후 햇살은 구름 뒤로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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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참고 있던 하늘이 드디어 불편한 심기를 들어낸다.
우의를 꺼내 입고 배낭에 커버도 씌운다.
산 전체를 온통 태울 듯이 활활 타오르던 단풍도 속절없이 비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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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은 잎의 죽음이다.
보는 인간들의 눈에는 꽃처럼 화려하지만 생성이 아니고 소멸이다.
전쟁없는 평화가 존재할 수 없듯이 죽음없는 생존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행복을 갈구하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불안정한 것인가?
드디어 남교리 날머리가 저만치 보인다.
왜 나는 그렇게 산에 매료됐을까?
시지프스처럼 내려서기 위해 산을 올라가고, 올라서기 위해 또 산을 내려간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터질 듯하게 힘든 오르막도 있지만
그 뒤에는 항상 숨을 고를 수 있는 평지도, 쉬면서 걸을 수 있는 내리막도 있다는 것을...
그 반복이 바로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을 어슴프레 짐작할 수 있었다.
산은 곧 내 인생의 스승이다.
첫댓글 덕분에...고운 단풍, 잔잔한 음악과 함께 가을을 만끽했습니다. *^^*
산에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인데...저넘 계단 쫌 제발 사람 보폭에 맞게 높이도 무릎팍도사 않되도록 낮게는 못만드는지...이러니 산꾼들이 계단 옆을 걷는데 말입니다...더분에 설악단풍을 구경하는 호사를 누리는군요..^J^*
가을을 불태워 없애버릴 것 같은 단풍에 잠시 잠겨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곱디 곱게 담아내신 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속에 한껏 매료되어
쉬이 설악에서 발길을 못돌렸을듯 합니다
정성가득한 산행기 잘감상하고 갑니다
단풍만큼 고운산행기 잘보고 갑니다 ^^
아름다운 설악의 단풍에 마음만 설악으로 달려가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비오는 가을 조용한 음악과 함께 멋진 글을 읽으면서 너무 멋진 외로운 가을을 느끼고 갑니다.
성악의 가을은 쓸쓸함에서 오는 은은한 감정이 묻어나는 산이 아닌가 싶네요.^^ 설악의 가을 구경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