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나그네/정수자-
그녀는 비(非)의 나라 유민이자 난민이니
비몽사몽 비혼족(非婚族)에 비주류의 비정규족
난분분 비 속에 서면
비상이 필요하지
비상을 나눠먹듯 알코올들과 비약할 때
비로소 주류 문턱 발을 걸친 주민으로
난분분 빛 속에 서면
비애가 또 응시하지
응시하면 어둠길도 조금은 환해진다고
메마른 혀끝으로 굴려본 적 있었지
한번은 비장의 칼을
날리리라, 난분분
-또 비가 오면/이성복-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살 속으로 물이 들어가 몸이 불어나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微動)도 않으신다
빗물이 눈 속 깊은 곳을 적시고
귓속으로 들어가 무수한 물방울을 만들어도
사랑하는 어머니 미동(微動)도 않으신다
발밑 잡초가 키를 덮고 아카시아 뿌리가
입 속에 뻗어도 어머니, 뜨거운
어머니 입김 내게로 불어온다
창을 닫고 귀를 막아도 들리는 빗소리
사랑하는 어머니 비에 젖으신다
사랑하는 어머니 물에 잠기신다
-비의 칸타빌레/권정일-
노래하듯이 비가 내려와 안단테,
안단테 누워있던 우리가 파아랏 일어나
파란만장 빗금들 간을 보느라 긴 혀를 동글동글 말아 올려.
쫄깃 긴장하는 누수의 시간
젖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우리 사이사이를 운행하며 지금 가장 정직하게,
감동 없이 메말라가던 나무 집 지렁이 등을 점호하며
모두가 손을 놓고, 모호하게,깔깔깔, 젖어들어.
움푹한 곳에 어김없이 고이는 매지구름, 구름의 창문, 그림자의 파노라마, 풀, 풀피리
도란도란 수국을 피워.
뜨거운 발, 연초록 운동화가 꾹 눌러놓고 간 말랑말랑한 흉터
아직 우리의 발이어서 아픈
빗발의 시간을 흘러, 흘러 흘러가야 할 낮과 밤 안단테칸타빌레, 칸타빌레‥‥‥
-비 내리는 오후/서혜미-
회색빛 하늘 사이로
그리움을 조각한다.
뚝뚝 떨어지는
빗물
그대의 눈물
그대의 숨결
아직
그대는 내 마음에
조각되어
빗물로 흐르는데
찢어진 우산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물먹은 벤치
그대 기다리고
자생(自生)한
돼지감자 푸른 잎이
빗물 속에
그리움을 토해낸다.
-저지르는 비/신용목-
울음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기 위하여 슬픔은 눈물을 흘려보낸다
이렇게 깊다
내가 저지른 바다는
눈동자
그 수문 안에 사는 빨간 벌레여
불을 끄면
나를 떠난 내 그림자가 두루마리에서 풀리는 휴지처럼 흰 길을 끌고 가 물에 젖는 곳
불을 켜면
나를 떠난
내가 발목과 무릎과 허리로 잠기며 걸어가는 가슴께에서 빛의 뜰채에 걸려 던져지는 곳
창밖으로 손바닥을 편다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비가 와서
문을 열고 신을 벗고
비가 와서
투명한 아이들이 그네를 잡던 손으로 천장의 흰 나뭇가지에 빗소리를 매고
크레파스
아무렇게나 그어댄 스케치북을 창마다 끼우고
물안개 하얀 쌀뜨물로 받쳐
밥을 하고
바다를 불려 식탁에 앉힐 때
비가 오고
몸의 바닥을 바글바글 기어온 빨간 벌레들이 눈꺼풀 속에서 눈을 파먹고 있다
슬픔은 풍경의 전부를 사용한다
-비가 오는데/정 온-
누가 유리컵을 던지는가
투명한 유리 파편 톡톡 튀어오르네
따끔따끔 창에 부딪히네
우울하시다고,
그럼 진한 커피 한잔 내려
유리 파편 한 스푼
휘휘 저어보자고
깔깔하게 발리며 혀를 파고드는
날것의 비릿함
들뜬 벽지의 꽃무늬처럼
어쭙잖을 때
흰 접시 사정없이 날리던 당신
잘게 부서져
기억의 모서리가 눅눅하네
털어내지 못한 생, 습한 더께로 앉아 있네
손닿지 않는 가려움들
누가 지금 유리컵을 던지는가
-비 오는 날/벅순영-
속엣것 게워내듯
이틀째 토란대 같은 초록비를 쏟아내는 날
프릴 달린 오랜지색 우산을 쓰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팝나무 아래를 걷는다
방어동 주민자치센터 사거리, 동구당 열쇠집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실리카겔처럼 촉촉한 샹송이 흘러나온다
더 이상 사랑 여행은 떠날 수도 없다는
그의 목소리가 빗줄기처럼 발 아래로 떨어진다
LP판이 긁혔는지
나의 마음은 감옥과도 같다고 헤매도는 노랫말
흐르지 못하고 비에 젖는다
-비/최승호-
장맛비 억수같이 쏟아지고 천둥벼락 치는 밤, 숙직실로 개구리가 한 마리 찾아왔다. 비에 젖은 손님, 입이 큰 손님, 개구리
는 방으로 불쑥 뛰어들어와 한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슬금슬금 기어가 구석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 의젓한 좌선의 자
세, 개구리는 면벽으로 나는 뜬눈으로, 밤새도록 빗소리를 듣던 그 여름 허름한 숙직실.
진흙길 밟을까 연등불 앞에
머리를 풀어
진흙을 덮었다는 석가모니 전생 이야기
비 오니 생각난다
양재천 뚝방길 한 웅덩이, 흙탕물에 들어앉아 맹꽁이부처님들이 맹꽁 맹꽁, 제가 누군지도 모르고 울고 있다. 내가다가가
자 울음을 뚝 그친다. 그래, 나는 살생업을 떡 쌓듯이 해온 중생이다.
-비 오는 감옥/유종인-
잔디밭은 금줄이 둘러쳐져 있다
비가 내리면
잔디밭은 조금씩 허공을
끌어안고 있다
누군가 둘레 밭에서
목소리를 낮춘다
중얼거리고 있다
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어느 眼前이라고
이 빗속을 뚫고 달려오겠다는 거냐……
추억은 뛰쳐나오고 싶어
여자의 핸드폰 속에서 남자는
마지막 취기를 붙들고 운다
저 수만 갈래 빗줄기를 배려고
잔디밭은 부풀고 있다 부풀어
혼자 독해지고 있다 홀로
금줄을 치고
못 다 부른 不辛을 가만히
비워두고 있다
가둘 수 있었다면
이렇게 부를 수도 없었을 텐데
녹아내리는 빗속의 감옥, 잔디밭은
아직도 뒹굴 수 있다고
버리고 돌아와 누운 하늘
눈빛 가득 품을 수 있다고
어떻게든 비의 감옥을
뿌리 깊이 내려받고 있었다
-비/전성호-
비가 오면
나무들은 물고기가 된다
나무들 본향은 우주
빗방울에 온몸 미대야
똑바로 상승할 수 있지
빗방울을 거슬러
하늘로 솟는 나무들의 날개
버드나무 잎은 버들치 떼를 몰고
밤나무 잎은 정어리 새끼 떼를 몰고
오동나무 잎은 가오리 떼를 몰고, 몰고
비가 오면 모든 나무들
춤추는 물고기다
-여름비/정일근-
은현리 대숲이 비에 젖는다
책상 위에 놓아둔 잉크병에
녹색 잉크가 그득해진다
죽죽 죽죽죽 여름비는 내리고
비에 젖는 대나무들
몸의 마디가 다 보인다
사랑은 건너가는 것이다
나도 건너가지 못해
내 몸에 남은 마디가 있다
젖는 모든 것들
제 몸의 상처 감추지 못하는 날
만년필에 녹색 잉크를 채워 넣는다
오랫동안 보내지 못한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사람
푸른 첫줄 뜨겁게 적어놓고
내 마음 오래 피에 젖는다
-비/이성미-
담장과 담장 사이
넝쿨과 넝쿨 사이
그의 어깨와 그녀의 어깨 사이
뭐라 부를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지는 비
고개를 뒤로 꺾고 보는 날
첨탑 옆에는 무엇이 떠다니는지
전깃줄은 어디로 달려가는지
발가락이 젖어 알게 되는 날
아스팔트 길 어디가 꺼져 있는지
진흙 땅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동안 잠자코 있었지
창문 밑엔 버려진 자동차
양철 지붕 위엔 미루나무
안 가본 데로
비의 손가락을 따라다니는 날
물웅덩이 만이 잠시 기억할 뿐
사라지는 세계
-여름비/박이화-
호박잎처럼 크고 넓은 기다림 위로 투타다닥 빗방울 건너 뛰어오듯 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불볕 아래 시든 잎처럼 그
아래 지친 그늘처럼 맥없이 손목 떨구고 늘어졌던 내 그리움의 촉수들이 마침내 하나 둘 앞 다투어 눈떠 사방 꽃무늬 벽지처
럼 내 마음 안팎을 온통 분간 없이 휘감아 뻗고, 예고 없이 들이친 소낙비의 행렬에 또 한바탕 젖는 잎, 잎들 전선이 젖고 그
선을 타고 오는 그의 목소리 열대어처럼 미끈한 물비늘로 젖어와 어느새 내 몸은 출렁출렁 심해로 열리고
-가벼운 비/정푸른-
증발은 소멸과 다른 말
쓸쓸함이 가득한 당신의 등은 증발이다
돌아서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론가 숨는 것
햇빛이 쏟아지는 날에도 비가 내리는 등이 있다
당신의 등은 우기를 지나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태어나고 사라지는
물의 생애가 거기 모여 있다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는 쓸쓸함은 물이었다가
공기였다가 다시 물로
세상의 모든 파문을 이끈다
햇살 좋은 겨울 한낮
만져지는 입김의 육체, 몸 안에서 피어오르는 구름들
헐거운 생의 이야기가 날아오른다
증발이라는 말 속에는 비의 알갱이가 들어있다 둥글게 말리는 당신의 등처럼
곡절이 딸려 올라간다
-비 오는 날의 독백/허후남-
슬픔 많은 사람들
사연 한가지씩 떼어내서
하늘에다 묻어 두면
헝클어져
다 풀어내지 못한 사연들
그만 비되어 내린다
젖은 몸 마르는거야
잠시라지만
손바닥만한 가슴 하나
쉽사리 마르지 않더라
그대를 떠나 보내고
눈치 채이지 않게
한참을 달려와 뒤돌아보면
언제나 떠나주지 않고 서성이는
이름 하나
당신의 베갯머리에
무수히 쏟아져 함께 누웠어야 할
나의 말들이
오늘은 차마 비되어 내리는가
-비/박연준-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누가 노를 젓고 있다
배도 없고, 빗물도 쉬이 쓸려 내려가는데
아스팔트를 탁, 탁 두드리며
누가 노를 젓고 있다
딱딱한 도시의 바다가 눈을 감는다
-휘어지는 비/신영배-
비의 고요한 한가운데
물울
어디쯤일까
한 발자국을 떼어놓고 안과 밖을
살피던 여자는 몰아치는 비에
우산을 앞으로 하고 둥글게 몸을
말았다 안간힘으로 거센 비의
옆구리를 밀었다
-비 온 뒤 아침 햇살/유승도-
나뭇잎 씻어줄래
투명하도록 푸르게 씻어줄래
푸른빛 타오르게 불태울래
벌들의 몸에도 붙어 반짝이며 날아갈래
죽은 나무에도 척 붙어 쓰다듬을래
바위에도 내려앉을래
거름 더미에도 내려앉을래
눈부시게 만들래
노란 꽃처럼 한 송이 노란 꽃처럼
세상을 그렇게 만들래
[돌샘 이길옥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