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인>>
<<이영주 시인의 양력>>
* 1974년 10월 5일, 서울
*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졸업
* 2000년 <문학동네> '맹인' 등단
* 시집 : 『108번째 사내』 『언니에게』 『차가운 사탕들』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여름만 있는 계절에 네가 왔다』 등.
* 수상 : 2016년 미당 서정주 시회 문학상 수상
* 현재 '불편' 동인으로 활동 중임.
<<이영주 시인의 시>>
성인식/이영주
그때 저는 문 뒤에 있었어요.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었지요. 온몸을 뜨거운 피로 채우기 위해 물구나무를 섰던 우리 모두 아침이란 시간에 지쳐 있었고 보이지 않는 눈은 지붕 위에 놔두고 온 뒤, 신부님은 강론 시간 내내 죽은 자들의 눈빛을 설명했잖아요. 저는 오줌 줄기가 가느다랗게 새어 나오는 신부님의 다리에 얼굴을 묻고 싶었답니다. 모든 역사는 말하는 순간에 거짓이 되어 버리는 걸까요. 심장만 도려낸 어린 아이들을 피라미드 밑으로 던져 버렸다는 어떤 꼭대기도 저의 기원에는 다다르지 못할겁니다. 때로 어머니는 화석에서 꺼내지 못한 저의 심장에 대해 말하곤 했어요. 그때 그것을 꺼냈더라면, 너를 사막에 두고 오지는 않았을거야. 저는 어른이 될 때까지 차가운 유방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상하지요. 집으로 가는 골목에 들어서면 제 가슴 근처에서는 검은 손톱이 자라 났어요. 저는 점점 더 뾰족하고 두꺼운 몸을 가진 박쥐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역사를 들으러 성당 지하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들. 골목에서 서성거리던 아저씨들도 죽은 자의 손짓을 설명하느라 제 심장에 손을 넣고 입김을 불어 넣었던가 봅니다. 저는 많은 손을 가진 박쥐여자가 되었습니다.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성가는 아무렴 태어나기 이전의 목소리처럼 부드러웠고요. 기도 시간이 되면 종 속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울어대는 뚱뚱한 새들. 저는 까맣게 타오르는 손으로 제 유방에서 돋아난 수많은 손들을 잡았어요. 집으로 가는 골목을 낮게 날아 어린아이가 되고 싶은 아저씨들을 지나올 때마다 저는 어머니를 불렀답니다. 그때 어머니는 골목의 마지막 문 뒤에 있었어요. 박쥐처럼 새끼들에게 거꾸로 매달리는 법을 가르쳤지요.
저무는 사람/이영주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저무는 사람들. 생일은 미리 말해 주자. 젖은 바람 부는 계절에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자.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이 오랫동안 편지를 쓴다. 몸을 보니 여자였구나. 상점 주인은 창밖의 간판을 세다가 저무는 사람. 단 한 명의 노파도 없는 비 오는 골목으로 음악을 흘려보낸다.
지느러미를 감추고 들어와야 해.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림자를 보니 물고기구나. 상점에는 푸른 비늘이 가득 찬다. 그녀가 달력을 넘기는 동안 천장에서 물이 새고 있다. 노파를 보고 싶은 계절이야. 생일을 견디며 물고기들이 모서리에 지느러미를 비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린 비린내를 풍기는 물건들. 물고기인 줄 알았는데 장화를 벗고 보니 딱딱한 계단이구나. 그녀는 문 밖의 발들을 바라보다 밤늦도록 저문다.
고무장화를 신자. 태풍이 오기 전에 생일을 미리 말하자. 바람이 젖은 달력을 찢는다. 계단 밑, 붉은 웅덩이 속에 머리를 빡빡 민 노파가 잠들어 있다.
언니에게/이영주
겨울밤에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밖에서 안으로, 아무도 없는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차가운 칼날 같은 손잡이를 떼 낸다. 손잡이가 있으면 한 번쯤 돌려 보고 배꼽을 눌러 보고 기하학적으로 시선을 바꿔 볼 수 있을텐데. 어머니가 방바닥에 늘어놓은 축축한 냄새들.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버섯들이 있었는데, 잠에서 깨면 어머니는 버섯 머리를 과도로 똑똑 따고 있었다. 손잡이를 어디에 붙여야 할까. 너는 아래쪽에 서 있다. 몸속이 어두워질 때마다 울음을 터트리는 이상한 반동. 축축하게 썩어 들어가는 안쪽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어. 너는 봉긋하게 솟은 버섯 같은 자신의 심장에 손잡이를 대고 안쪽을 열어 본다. 거꾸로 자라나는 버섯들이 잠에서 깨어 어머니의 머리를 똑똑 따 내고 있다. 네가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바깥에 두고 온 손잡이를 어두워서 찾지 못할 때, 아무도 없는 안쪽이 버섯 모양으로 뒤집어질 때, 너는 성에 낀 202호 창문을 언니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첫사랑/이영주
부엌과 이어진 쪽문 옆에서 언니는 잠이 든다 저녁이면 맞은편 집 마당에서 펄럭이는 셔츠의 한쪽 소매를 만지던 언니. 동생은 더러워진 빨래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하늘을 날지 않는 새들은 동작을 멈출 줄 아는 도룡뇽 같아. 끝에 닿기 전에 한번쯤 정지하는 일 말야. 언니는 동물도감을 펼치고 도룡뇽 꼬리를 부엌칼로 잘라낸다. 쪽문을 드나들다 키가 큰 언니는 매일밤 흰 목을 구부린다. 건물 난간에 걸친 달이 몸속에 뼈를 세울 때마다 언니는 어깨가 아프다. 너를 찾아가도 될까? 이제 더 이상 손발이 자라지 않았으므로 언니는 밤마다 짐을 꾸린다. 오늘의 달은 구겨진 흰 셔츠처럼 마당에 떨어진다. 쪽문을 떠나기 위해 언니는 립스틱을 바르고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묵을 곳은 분화구밖에 없어. 달의 도면의 펼치고 언니는 분화구의 부드러운 구멍 안으로 도룡뇽처럼 기어간다. 몽상병에 걸린 동생은 방문을 잠그고 어른이 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헝가리 식당/이영주
헝가리 식당에 앉아 있다. 내 목을 만져보면서. 침묵에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런 기후는 맛없이 천천히 간다.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아름다운 철창 밑에 있다. 원래의 언어로 돌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있다 보면 감각은 끔찍해진다.
수염까지 붉게 물든 남자는 접시에 혀를 대고 있다. 오도카니 앉아서. 철창을 두드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동쪽에 있는 식당. 맛없는 내가 앉아서 오래된 폐허를 헤집으며 속을 파고 있을 때.
무섭고 겁이 날 때. 수염 달린 남자는 창문을 연다. 향수병에 걸린 감각은 바람 따라 흐른다. 웅웅웅 울림소리를 낸다. 동쪽은 은신처가 아니지. 수염 사이로 붉은 침이 뚝뚝 떨어진다.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다.
많이 다쳤을 때는 밥을 먹어야지. 그래야 기운을 내지. 이 식당에 오면 죽은 할머니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그럴 때면 나는 세상이 맛없게 천천히 간다고 생각했다.
침묵을 먹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슬픈 이야기도 죽지 않고 그릇 안에 담겨 있다.
교회에서/이영주
우리가 등밖에 없는 존재라면 온 존재를 쓸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왜 등을 쓸어내리면서 영혼의 앞 같은 것을 상상할까
등을 만지면 불씨가 모여 있는 것처럼 따뜻하다고 생각했어
너는 의자에 앉아 있다
구부린 채 도형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다
형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 때문에
등은 점점 더 깊어진다
이렇게 하면 붉은 동그라미밖에 남질 않는데
그렇다면 마음의 형식이라는 것이
네 등에 얼굴을 묻으면서 불처럼 타오르고
무너지는 네 안으로 들어가
흩어지는 영혼 앞부분으로 번져 가는데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알 수가 없어서 함께 불탄 것이겠지
누군가 내 등에 기름을 흘린다
몸을 구부리고 눈물을 흘리면 오래 묵은 기름 냄새가 난다
어른은 죽는다는 것이다
죽지 않으면 어른이 될 수 없겠지
이런 기도문을 쓰고
엎드린 채 기도를 하고 있는 등을 보면 쓸어 주고 싶다
이미 불타오르고 있으니 마음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추운 사람들이 모여 있다
서로를 모르지만 뒤를 보고 있다
숙련공/이영주
기계음이 퍼져나간다.
밤이면 더욱 먼 곳까지.
소년이 있다.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자라야 하는 괴물이라고
서로의 침과 피를 주고받는
밤의 빛.
공장은 문을 닫았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지. 어차피 기계는 멈추었고 머리를 뚫고 퍼져나가는 음악은 끝나지 않거든. 소년은 발밑에 엎드린 아픈 개를 보고 있다. 개는 힘차게 죽은 음악에 따라 떨고 있다. 우린 모두 갈 데가 없구나. 바퀴처럼 밑에서 굴러가기만 원했는데도. 아무리 굴러가도 절벽이지만. 그래도 벌벌 떨 수가 있었는데. 우리는 모두 멈추었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라이터를 켰다 껐다, 밤의 유일한 빛.
소년이
용접은 필요 없어서 가면도 벗어버렸지. 혹시 죽고 싶다면 이야기해. 개가 짖는다. 민얼굴로 웃으며 빛이 나는 밤에는 모든 것이 멈추니까. 폐공장은 부서진 담벼락이 많으니 머물기 좋지. 어둠과 구분되지 않는 창문 안에서 개와 소년이 춤을 추고 있다. 이렇게 굴러가보자. 기계음이 울고, 끝나지 않는다면 조금 더 자랄 수도 있을 거야. 검은 머리통을 뚫고 터지는 음악을 따라가보자. 개처럼 절벽에서 굴러떨어진다면
어둠 밖에 어른들이 모여 있다.
어른들은 늘 모여 있고
사람이 되려면 조금 더 죽어야 하는 괴물이라고
소년은 절벽에 홀로 남아 있다.
물고기가 된다는 것/이영주
학교를 가려고
시체가 떠내려 온 천변을 지날 때마다 나는
차가운 물속을 걷는 기분
한 떼의 사자(死者)들이 죽은 자를 놓치고
공중에 떠 있다
수업 시간이면
까마귀들은 유리창에 붙어
내 몸속을 들여다보았다
운동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오랫동안 늙은 개의 휜 다리를 만진다
언니들은 사자(死者) 같은 얼굴로
교문 뒤에 숨어 침을 뱉고 휘파람을 불었다
천변의 하류 쪽에 아버지는 집을 지었다
나는 매일 거슬러 오르느라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학교를 가려고
천변 밑에서 걸었다 발바닥에서
두꺼운 지느러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집들이/이영주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지만,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모두 창문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한다. 지붕에 걸
려 있는 구름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나는 커피를
내리고 슬리퍼를 신겨주지만 우리 집에 오는 불꽃 같은
사람들은 목조 주택을 태우고 구름 속에 연기처럼 섞여
들고 싶어 한다. 우리 집 안에는 죽음보다 따뜻한 향기가
있어. 나는 재만 남은 슬리퍼를 신발장에 보관한다. 모든
것이 부스러져 밑으로 떨어진다. 구름 안으로 스며들 수
있도록 나는 창문을 열어둔다. 바닥에 앉아 귀를 대본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 온 적이 없는데. 불
에 타고 남은 흔적을 모으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창문 밖
으로 퍼져나가는 재의 향기. 누군가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다. 왜 밖에 서 있을까. 나는 무형의 차를 데우고 아
무 것도 남지 않은 슬리퍼를 현관 앞에 놓아둔다.
종유석/이영주
동굴 안에 주저앉아
물처럼 번져가고 있다
돌이 자라난다
마음이 추락하는 동안
공기를 닦고 있는 검은 손
아무리 문질러도
이곳은 밝아지지 않는다
한밤
밤의 한가운데
떠나간 사람은 떠나가는 것에 의미가 있다
흰 돌
아무리 닦아도
너의 눈 속이 보이질 않아
나는 일생을
그저 닦아낸다는 것
남겨진 사람은
남겨진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돌처럼 자라고 있다
시각장애인과 시계 수리공/이영주
시계를 고쳐주고 돌아섭니다
그는 창고에서 울고 있습니다 자신이 묻혀 사는 목소리를 떠나려고
시간 밖에서 바닥에 동그라미만 그리고 있었습니다
너의 손은 매우 젊구나 가장 낯선 부분을 만지면서
때로 닫힌 눈을 생각할 때 그는 수수께끼라고 여겼습니다
철근을 붙잡고 이것은 수수께끼라고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삶은 어떤 시간입니까
돌아선 채 한 장소에 머물러 있습니다 손으로 볼 수 있는 시계를 쥐여주고
고대 슬라브 교회의 기도문에는 한숨이 있습니다 창고 문을 열고 소금과 감탄사, 머리카락과 눈물, 수염과 손가락 들을
모아놓은 죽은 목록을 들추어봅니다 모든 것은 명징하고 해독할 수 없는 양식만 남아 생활이 되었습니다 시계는 살아서
움직이고 이제 밖으로 가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가 사냥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눈물은 멈추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자신을 떠나려면
새로운 불행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그는 고마워서
내 손을 잡으며 젊은 자의 피부란 물고기 비늘처럼 비린 것
문을 열어두고 가렴 나는 내가 그렸던 동그라미는 아니겠지 언젠가는 공백이 되겠지 텅 빈 것이 되면 지금을 남겨두려고
가장 낯선 손을 놓고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불행일지 몰라 허공을 만지고 있습니다 침묵 한가운데에서 섬세하
게 시계를 만지고 있습니다
현기증을 앓는 고양이/이영주
내가 너무 멀어서 나는 벽 뒤로 돌아간다
내 문장은 벽 뒤에서 시작되고
나는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교환원처럼
너에게 끈질긴 인사를 한다
얼마나 울었으면 등 뒤를 깎아버렸을까
벼랑 속을 들여다보면 현기증이 난다
모든 죄는 눈빛에서 시작되었다
각자의 등짐 속에서 벼룩을 잡고 있는
그대의 울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누군가 비가 되지 못한 구름의 기억처럼
나를 자꾸만 부른다면
이 세상 밖으로 빨리 달리는 다리가 되고 싶은 밤
수화기를 들고 걷는다
네가 버리지 못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갈 자세로
외로운 자의 얼굴은 점점 길어진다
통곡이 쏟아지는 장마철에는
벽 뒤에 침묵을 새긴다 걷는다
등뼈가 젖는다
지붕 위로 흘러가는 방/이영주
한밤중에
지붕은 머리에
둥근 달을 이고
허공으로 걸어간다.
어릴 적
나를 업고
프라이팬에
노란 달을 부치던 어머니
비린 달을
게워내며
옥탑방이 지붕 위로 흘러간다.
박쥐우산을 가진 소년―장이지 시인에게/이영주
직선으로 생긴 구름에 대해 떠올릴 때 너는 울었다
아무런 무게도 없는 세계를 생각했다
박쥐우산을 펴들고 너는 공기 속을 걸었다
물방울들이 자꾸만 직선을 곡선으로 만든다, 누나
문턱에 한 발이 끼어 침묵에 빠진 새들
너는 새벽 내내 네 발의 모양을 바라본다
둥글게 휜 발가락 하나쯤 숨어 있어도 좋을 거야
고요한 세계에 머리를 누이고 잠들고 싶지만, 누나
새벽이면 자꾸만 한쪽 발이 길어진다
무릎에 고인 물들이 조금씩 빠져 나간다
너는 접히지 않는 우산을 가지고 방 안에서 날았다
누나, 내가 마르기 시작한 건 동그란 새의 등뼈를 만지면서부터
어두운 골목에서 몸의 중심으로 뻗어 있는 발가락을 세는 동안
네 주머니에서 떨어지던 깃털 하나를 줍는다
잠/이영주
문이 언제 열릴지 모르니 담요를 덮읍시다 담요가 좋아요 무수한 총격과 해일이 덮치고 간 후에도 담요를
우리는 어둠으로 밀려난 게 떼처럼 열심히 기었습니다 가도 가도 서로의 옆구리
새로운 폐허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요 우리는 서로의 뼈를 찾아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기차 안에서도 담요를 덮어요 낯선 도시에 내릴 때에는 담요를 두르고 눈빛을 숨겨야 합니다
이런 저녁에는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 긴 울음뼈 하나 세우고 갈지도 몰라
우리는 어둠 속에 남겨진 게 떼처럼 배를 뒤집었습니다 반군과 정부군은 알 수가 없지만
안쪽으로부터 싸움은 시작되고 있었어요 배를 까뒤집고 등으로 진창을 기어가는 우리 몸 속에서부터 차갑게 가라앉고 있
었습니다
방공호에서 담요를 나눠 덮고 우리는 바닥 밑에서 손을 잡습니다 자도 자도 잠의 바깥
모든 것이 무너져도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담요를 둘러쓰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이 허기 때문에
전기해파리/이영주
내 몸에서 가장 긴 부위는 팔
가장 아름답게 악행을 퍼트리는 것
두 팔을 천천히 휘저으며 나는 수족관으로 간다
해양 지도를 펼치면 두 팔이 늘어나는 느낌
그의 오래된 수족관에는 입 벌린 가면들이 모여 있다
물결 사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해파리의 얇고 긴 털
항해일지를 지우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끈끈한 혀끝에서 활자들이 번진다
몸 안에 독을 숨긴 채
바다의 심층에서 먼 나라의 심층까지 배달하는 마린보이
그는 마지막 항구로 돌아와 수족관에 잠긴다
나는 두 팔을 길게 뻗어 잠들지 못하는 그를 감싸 안는다
이 찰나의 떨림으로 숨겨진 악행을 나눠 갖자
해파리들이 몸을 대고 서로를 찌르고 있다
조금씩 일렁이는 가장 어두운 심층에서
우린 어린 시절이 달랐지만
투명한 촉수가 입안에서 꿈틀거린다
팔을 등 뒤에 붙이고
두 개의 그림자가 한 몸으로 수영을 한다
공중에서 사는 사람/이영주
우리는 원하지도 않는 깊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땅으로 내려갈 수가 없네요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싸우는 중입니다 지붕이 없는 골조물 위
에서 비가 오면 구름처럼 부어올랐습니다 살냄새, 땀냄새, 피 냄새
가족들은 밑에서 희미하게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덩어리를 핥고 싶어서 우리는 침을 흘
립니다
이 악취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공중을 떠도는 망령을 향하여 조금씩 옮겨 갑니다 냄새들이
뼈처럼 단단해집니다
상실감에 집중하면서 실패를 가장 실감나게 느끼면서 비가 올 때마다 노래를 불렀습니다 집
이란 지붕도 벽도 있어야 할 텐데요 오로지 서로의 안쪽만 들여다보며 처음 느끼는 감촉에 살
이 떨립니다 어쩌면
지구란 얇은 판자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내려가지 않으면 실족할 수밖에
없는 구멍 뚫린 곳
우리는 타오르지 않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너진 골조물에 벽을 세우는 유일한 방법
서서히 올라오는 저녁이 노래 바깥으로 흘러갑니다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우리는 냄새처
럼 이 공중에서 화석이 될까요
집이란 그런 것이지요 벽이 있고 사라지기 전에 냄새의 이름도 알 수 있는
우리는 울지 않습니다 그저 이마를 문지르고 머리뼈를 기대고 몸에서 몸으로 악취가 흘러가
기를 우리는 남겨두고 노래가 내려가 떨고 있는 두 손을 핥아주기를
미래안(未來眼)/이영주
크레타 섬에는 대리석과 염소와 죽은 왕들. 푸른 이마를 문지르며 노인이 옆 노인을 끌어안는 장면. 에게 해 절벽에서 우
주 원자론이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 밤이면 얼굴을 깎아 비석을 세우는 여러 개의 니코스 카잔차키스 술집. 잘린 토끼 머리
가 정육점 유리창에 매달려 귀를 길게 세운다. 죽는다는 건 홀로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는 것. 노인이 옆 노인의 목을 끌어안
고 염소처럼 운다. 따뜻한 언덕에서 지친 노년이 다른 노년을 배웅하는 것. 저녁이면 흔들리는 에게 해 물빛. 수학시간 옆자
리에서 동맥 끊기 놀이를 하던 내 첫사랑 소녀의 까맣고 푸른 동공 같은. 절벽에는 죽은 왕들의 비밀문자. 어린 왕은 진공 없
이 텅 빈 바다를 봤다고 썼지만 홀로 남은 시간에는 우주에 꽉 찬 숫자를 보고 운다. 크레타 섬 정육점 유리창에 붙어 토끼
이마에 툭 불거진 뼈 하나를 보는 저녁. 노인이 천천히 쓰러지는 옆 노인처럼 푸르고 푸르게 물이 드는.
오래전/이영주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병상 일기만 적고 있다. 아프지 않을 때는 더욱 깊게 적었다. 불타는
창문 아래서 너는 내게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고 써주었는데 그런 말은 즐겁고 발랄한 필체
여서 나는 집에 가고 싶어졌다. 붉은 옷을 입고 몸에 그려진 땡땡이를 파내고 있는 네가 창문
에 비치고 있었다. 형태는 사라졌고 재가 떨어졌다. 너는 지금 이 순간이 좋은 거니. 가끔 일
기에 적어야 할 말을 소리 내어 말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우유에 흠뻑 젖어 하얀 피
를 흘렸다. 모두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너는 붉은색 위에 붉은색을 겹쳐 입은 홍당무.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문 닫힌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어서
무서웠지. 서로를 바라보며 수프를 떠먹고 당근을 씹었지. 무겁고 지루하고 그저 그런 말들
이 떠다니는 이 도시가 좋아서 너는 사랑에 빠졌다. 휠체어를 끌고 다닐 때까지 우리는 이 병
든 도시에서 만나야 해. 나는 내 일기의 끝을 미리 적고 있었다. 작고 날카로운 칼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잠든 그녀를 너는 자꾸만 떠올렸다.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장식용 무기들을 사랑
하는 그녀를 너는 병든 천사라고 생각했다. 매일 밤 천사에 대한 꿈을 꾸지만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너는 링거를 꽂고 울었다. 땡땡이 무늬가 조금씩 떨어지고 머리에 매달린 푸른 잎이
창문 밖에서 흔들렸다. 불타는 이 도시에서 푸른 잎사귀가 떨어지다니. 나는 외국인들이구나
생각했다. 꿈같은 건 적어서는 안 된다. 나는 우유를 질질 흘렸다. 길고 가느다란 천사의 혀가
바닥을 핥고 있었다. 너는 혀를 사랑하고 부서지는 손가락으로 내 병상 일기를 대신 적고 있었
다.
문예창작/이영주
슬픔은 아름답지만 오로지 슬픔만이 아이덴티티가 되면 어린이가 됩니다 진실은
우리를 갈가리 찢어버리니까요 인간은 나약해요 사랑을 못 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걸요 나쁜 말 해도 되나요 너무 나쁜 말이어서 지옥 불에 던져질 수도 있지만요 너무
크고 징그러운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망령이 됩니다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사
람은 자기 마음을 모르죠 그를 사랑하면 모든 것이 갈려서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해
요 빛나는 관은 텅 비어 있고 마음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형벌을 받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 감각을 빨고 불행마저 훔치죠 차라리 사라
진 돌에 대한 것은 어때요? 너무 많은 것이 있어서 오히려 다행인가요 알아볼 수 없
을 때까지 아예 다 때려 박으면요 어차피 원본이란 없어요 허무한 인정투쟁만이 핵
심 우리 함께 오래 살아요, 라고 말해 주는 어린 천사는 나의 주인입니다 우리는 불
행중독에 빠져 있어요 왜 우리는 매번 이상한 맥락 속으로 빠져버리는 걸까요 왜 그
곳에는 슬픔의 그물에 조각난 덩어리들이 모여 있을까요 괴물 같은 어린이들이 오
줌을 싸고 있을까요 파헤쳐진 돌이 피를 흘리고 있을까요
백과 이/이영주
너의 편지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네가 끓여준 검은 물, 어둡고 따뜻해서 잠이 들었다.
편지가 젖었다. 너의 엄마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나는 네가 끓여놓은 검은 해변에
서 마음이 늙어갔다. 팔이 녹고 손이 녹았다. 이 바다는 왜 이렇게 뜨거운 거니. 너의 언
니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검은 바다 속에 잠기는 교회 안에서 요한계시록을 읽
었다고 너는 웃었다. 계속 읽었다고. 너무 많이 읽어서 멸망이 시시해졌다고. 그래서 시
를 썼다고. 부정성이 나의 독자야. 나는 녹아가며 너의 해석을 들었다. 바다 깊은 곳에서
검은 돌이 시를 썼다. 사라지지 않는 것도 있어. 복잡한 수명 주기를 가진 불가사리처럼
썼다. 위험한 생물은 왜 늘 화려하게 반짝일까. 나는 상자해파리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
다. 우리에게서 가장 빛나는 것이 굶주림이라면 너는 어떤 불행이 될까. 너는 뜨거운 바다
속에서 먹혀가는 나 대신 썼다. 나는 너의 유서를 읽을 수가 없다. 우리는 카페에서 빵을
나눠 먹었지. 너는 검은 돌처럼 먹먹했지. 나에게 긴 편지를 주었다. 심해에는 눈이 없는
생물들이 가득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답장을 할 수가 없었다.
귤/이영주
비 오는 오후에는 언니의 봉제 인형을 들고 걸었다. 푹 젖으니 인간처럼 보였다.
인형의 목이 덜렁거릴 때마다 언니를 생각했다. 언니, 너의 뇌는 끝도 없이 외롭지.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해. 일기 쓰기를 그만두었다. 언니는 가라앉는 배 안에 있었
다. 침대에 인형처럼 누워 있었다. 엄마는 병원 침대에서 언니를 낳았다. 양수의
시간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일. 그 위기를 어떻게 넘겼을까. 나는 길거리에 서서
입안 가득 귤을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과일즙에서 비린내가 났다. 귤은 그 섬의 특
산물이야. 언니는 창문을 열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영혼은 어디로 빠져나갈까. 배
안에 물이 차오를 때 언니는 내게 문자를 보냈다. 아, 아, 아…… 어린 나를 두고 섬
으로 가려던 언니는 괴혈병으로 입에서 피를 흘렸는데. 인형에는 이빨이 없구나.
봉제 공장 사거리에 서서 나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폭우가 쏟아졌다.
솜틀 공장/이영주
아버지는 베개를 만들었다. 심장 근처에 부드럽고 하얀 솜이 묻어 있었다. 구름을 끌고 온 자. 흰 뼈가
우수수 떨어졌다. 베개를 나르던 어머니는 자주 몽글몽글한 것들을 토해냈다. 허리를 굽히면 천변의 오
리처럼 약한 비명이 울렸다. 저녁이면 공장 안에서 천천히 작아지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로의 마음을
문질렀다. 깃털처럼 숨 막히는 간지러움을 나누었다. 깊은 통증인 줄 모르고 나는 매일 밤 베개를 베고
잠이 들었다. 몰래 돋아나는 젖은 깃을 쓰다듬었다. 악몽은 다정했고 공장 앞 천변에는 가끔 오래된 시
체가 떠올랐다. 나는 홀로 긴 잠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흰 뼈가 개천 바닥에서 굴러다
녔다. 아침이면 꿈보다 큰 베개가 내 안으로 배달되었다. 포장을 풀자 점점 부풀어 올랐다. 거대한 구름
이 진흙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구름의 꼬리를 밟으며 개천가를 걸었다. 피 묻은 깃털이 흩날렸다.
빈 노트/이영주
다 자란 소녀를 입양하는 것은 어떨까. 머리가 부서진 인형이 말을 한다. 검게 물든 레이스가 펄럭거린다. 입을 벌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있다. 글쎄. 팔이 부러진 인형이 팔짱을 끼다 말고 중얼거린다. 찢어진 퍼프소매 사이로 철사끈이 뻗어
나와 있다. 소녀란 다 자랄 수가 없는데. 자란 것이 없고 자랄 것이 없어서 소녀라고 부르지 않나. 머리가 부서지고 팔이
부러진 인형끼리 말을 한다. 내가 본 소녀들은. 버려진 상자 안에서 심각한 복화술이 이어진다. 그때 우리는 상자 밖에서
온전한 구체를 움직일 수 있었지만. 말을 할 때마다 어리통과 팔뚝에서 플라스틱 조각이 떨어진다. 소녀들은 우리를 입
양하면 이름을 붙여주곤 했었지. 기억나지? 이름이란 기억해야 이름인데. 머리가 부서진 인형의 눈썹이 조금씩 떨린다.
젠장. 반밖에 안 남은 머리통으로 뭘 기억하라는 거지. 상자 밖으로 뻗어나간 철사끈을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다. 왼쪽으
로 굽은 인형의 팔이 너덜너덜하다. 내가 한 팔로 너를 안을 수 있다면. 조금씩 부서지면서 옆으로 갈 수 있다면. 소녀들
이 골목에 모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울음을 참듯이 배에 힘을 주면 가능하지.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조용한 대화라니. 소녀들은 자라기를 멈출 때마다 이곳에 와서 인형처럼 말을 한다. 서로의 머리통을 만져주고
부러진 팔에 흰 붕대를 감아준다. 그런데 네 이름이 뭐였지. 소녀들이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산산조각이 난 구체관
절을 붙여본다. 자꾸만 떨어지는구나. 애초부터 우리는 자신을 입양해야만 했어. 태어나면서부터 그럴 기회가 없었지.
거울이 깨진 진열장 앞에서 소녀들은 말이 고인 깊숙한 내부를 들여다본다.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대화를 한다.
광화문 천막/이영주
천사가 원숭이처럼 떨어질 때 나는 나무를 껴안고 있었고 이 적막한 동물원은 무엇인가 생각했지.
물길이 점점 좁아지고 늙은 생물들은 엎드린 흔적들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자신의 눈물을 바닥에
흘렸는데. 이같은 얼굴을 하고 우는 것을 나는 천사라고 생각했는데. 원숭이들이 내 등짝을 계속
때렸지. 나무속이 텅텅 비었나. 오래 버티려면 다 버리고 간신히 있는 것. 아무리 배가 나와도 천사가
가벼운 이유지. 나는 혼잣말을 하다가 말을 버리면서 위로를 터득했는데. 동물원은 점점 더 무거워졌지.
진창 속에서 눈을 씻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겨울숲은 아무것도 없어서 신비로운 법인가. 나는 몰래
남들이 흘린 눈물 안에 손을 넣었지. 가장 투명한 물이란 깃털들이 떠다니는 표면.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가 생각했지. 나는 왜 이렇게 털이 없나. 홀쭉한 배를 부풀리며 가벼우면 날아갈 수 있다고 믿었지.
이 모순덩어리 원숭이 같은 자식! 동물원 문을 부수며 몽둥이를 휘두르는 날쌘 원숭이들이여. 핏빛으로
타오르는 내 등은 맛있게 구워지고 있었지. 이렇게 가벼워지는 거지. 겨울숲처럼 아무것도 없이 투명한
재만 남으면 이 우화의 끝은 어디인가.
여름의 애도/이영주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
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
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
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
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
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에 젖은 어머니의 발자국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이 다정한 악몽의 시간에 잠깐
쉬었다 갈게. 죽은 사람의 날개가 힘없이 부서집니다. 어머니의 등에서 흰 빛이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컹컹 웃기 시작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깃털이 흩어져
쓸려갑니다. 그 위로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베개/이영주
이 하수도에서 나는 나의 친구가 된 것일까. 교장 선생님이 자살한 개천가에서 거위들이 울었다.
철조망 밖에는 커다란 구름 굴뚝. 나는 하수도 밑에서 주운 맥고모자를 썼다.
구름이 몸을 굽혔을 때 거위들은 쩍쩍 부리를 벌렸다. 열을 맞춰 구름을 굴뚝 안으로 밀어 넣는
기계 울음소리. 왜 더 나은 자살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는 천변 끝에 집을 지었는데 매일매일 구름을 기계 안에 넣고 돌렸다. 잠들고 싶은 자들은
아버지의 베개를 사 갔다. 나는 밤새도록 눈을 부릅뜨고 몸을 굽혔다. 폈다. 뼈들이 덜그럭거릴 때마
다 도망쳐서 굴뚝까지 올라갔다. 어떤 울음소리를 내야 할지 생각했다.
저물녘이 되면 많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재촉했지만 기계 안에서 거위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깊은 잠을 위해 촉촉한 깃털을 넣어야 한다는 아버지. 나는 베개 라벨지 숫자를 세며 입술을
빨았다. 아무래도 더 좋게 죽은 자들의 기운은 수많은 잠이 흘러가는 하수도로 가야 한다.
솜틀 기계를 돌릴 때에는 모자를 썼다. 자살한 자들이 엎드린 개천에서 흰 깃털이 날아올랐다. 나는
내 손을 잡고 깃털을 밟으면서 아침마다 학교에 갔다. 뒤뚱거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