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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행사계획 및 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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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과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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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 종중규약(현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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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사(대의원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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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대종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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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사(진사공파 안동공종중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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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사(파주종친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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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찬자료 : 고양⋅파주지역의 기계유씨 문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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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고양 관산동 선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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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양 관산동에 선영이 자리 잡게 된 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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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관산동 산 73-3 소재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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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산동 산 70-3 소재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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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파주 탄현 선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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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동공 후손의 파주세거, 정착 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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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안동공 후손의 묘역정화사업 추진내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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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안동공 묘역에 봉안된 선조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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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타 파주(탄현)지역 묘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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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행사계획 및 순서
1. 첫째 날(2013. 06. 01)
가. 제1부 행사(집결 및 2013년도 선조묘소 봉심)
■ 집결장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49-6 “모경재”
■ 접수시각 : 13시∼14시까지
■ 참배시각 : 15시∼17시까지
■ 참배진행 : 카페임원, 운영위원, 파주종친회
구 분 |
1차경안공 재실참배 |
2차안동공 묘역참배 |
집 례 |
유 원 재 |
유 원 재 |
초 헌 관 |
카페대의원회장 |
카페대의원회장 |
아 헌 관 |
대종회장 |
대종회장 |
종 헌 관 |
파주종친회장 |
안동공종중회장 |
좌∙우집사 |
유춘식⋅유병덕 |
유창배⋅유동재 |
독 축 |
유 중 근 |
유 병 필 |
* 현지여건과 상황에 따라 행사시간과 제관분정은 다소 변동될 수가 있음.
나. 제2부 행사(제4회 파주한마음대회)
■ 집결장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83-10 유일레져타운
■ 숙소배정 : 18:00 ∼ 18:50
■ 사 회 : 운영위원장
-19:00∼19:10 개회선언 및 경과보고(사 회)
-19:10∼19:15 감사패증정(대의원회장)
-19:15∼19:25 내빈소개(대의원회장)
-19:25∼19:30 종중규약낭독(카페지기)
-19:30∼19:35 대 회 사(대의원회장)
-19:35∼19:40 축 사(대종회장)
-19:40∼19:45 축 사(안동공종중회장)
-19:45∼19:50 환 영 사(파주종친회장)
-19:50∼20:00 연찬(기계유씨카페 대의원회장)
다. 제3부 행사(친교의 시간)
■ 사 회 : 운영위원장
- 20:10 ~ 21:00 석식
- 21:00 ~ 23:00 친교의 시간
2. 둘째 날(2011. 06. 02.)
- 07:00 ~ 08:30 조식
- 08:30 ~ 11:30 제3땅굴 및 도라산 전망대 등 안보견학
- 12:20 ~ 14:00 중식, 석별인사 및 귀가
- 경 과 보 고 -
2012년도 선조유적지 참배 및 제3회 한마음대회를 광양에서 2012. 06. 16∼17.까지 개최한 이래, 현재까지 기계유씨카페의 주요활동 경과에 대하여 보고합니다.
1. 순의 제556주년 사육신(諱 應孚)제향 참석
∎ 일 시 : 2012. 10. 09(토) 12:00~14:00
∎ 장 소 :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공원 내
∎ 참배인원 : 카페임원 등 24명(대종회 임원 포함)
2. 시남 유계 선생 유적비 유적지 참배
∎ 일 시 : 2012. 10. 20(토) 13:00~
∎ 장 소 :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리
∎ 주요행사 : 칠산서원 및 시남선조의 선친 예빈시 참봉공(휘 양증)등 묘소참배
∎ 참배인원 : 카페임원 등 10명
3. 충목공(諱 應孚) 추향제 참석
∎ 일 시 : 2012. 10. 25(목) 음력 09. 11.
∎ 장 소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소재, 충목단
∎ 참배인원 : 카페지기 등 11명
4. 2012년도 기계 시제 참석
∎ 일 시 : 2012. 11. 14(수)~15(목) 1박 2일
∎ 장 소 : 경북 포항시 북구 기계면 미현리 281-2 소재 부운재
∎ 주요행사 : 시조묘소 참배
∎ 참배인원 : 대의원회 회장 등 22명
5. 2012년도 대의원 총회 및 송년의 밤 시행
∎ 일 시 : 2012. 12. 29(토)~30(일) 1박2일
∎ 장 소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소재 수원 호스텔
∎ 주요안건 : 2012년도 사업계획(안) 심의 및 송년모임
∎ 참석인원 : 대의원회장 등 60여명
8. 2013년도 제1차 선조유적지 참배
∎ 일 시 : 2012. 03. 22(금) 11:00~
∎ 장 소 : 충남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 470번지
∎ 주요행사 : 청절사 제향 참석
∎ 참배인원 : 카페임원 등 10명
9. 2013년도 제2차 선조유적지 참배
∎ 일 시 : 2011. 03. 22(토). 16:00~
∎ 주요행사 : 당진시 면천 입향조 청풍당공 유적지 방문(내년 방문을 위한 현지답사)
∎ 참석인원 : 카페임원 등 5명
10. 2013년도 주요선조 및 각 파종중 춘향제 솔선 참여
∎ 일 시 : 카페에 공지한 일정
∎ 참석내역 : 군기시사공파조 춘향제(03.30), 충목공파조 한식제(04.05), 전서공파조 시제(04.07), 칠산서원(시남선생 독향) 제향(03.22), 선취처사 및 학생공파조 시제(03.24), 제주 입도조 묘제(04.28)
11. 2013년도 선조유적지 참배 및 제4회 파주한마음대회 진행 중
∎ 주요참배 : 경기 고양 관산리 선영 및 파주 탄현 선영
∎ 대회장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마장리 유일레저타운
∎ 주요행사 : 2013년도 파주 한마음대회개최로 숭조돈목 정착유도
∎ 참석인원 : 140 여명 예정. 끝.
2013. 06. 01.
기계유씨다음카페 운영위원회 위원장 유 원 재 謹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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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유씨종중규약(현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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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우리종인은 모두 아찬공 후손이 된 것을 명심하여 백세일실의 가까운 정을 다 같이 지킨다.
一. 우리종인은 종중의 질서를 존중한다. 항렬이 낮은 사람은 항렬이 높은 사람을 존경하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을 존경한다.
一. 우리종인은 규약의 규정을 준수하여 어기지 않는다.
一. 우리종인은 환난질병을 서로 돕는다.
一. 우리종인은 화평을 기본으로 삼는다. 본 규약 제정이전(1913년)의 일은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다.
一. 우리종인은 국가의 법률을 따른다.
一. 우리종인은 생산과 저축에 부지런히 힘쓰며 행복을 추구한다.
一. 우리종인은 공동사업을 경영하여 종중의 기본재산을 확립한다.
단기 4246년 음3월15일(서기 1913년 4월20일) 기계유씨 종중도유사 유 길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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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사(大會辭)
존경하는 ‘기계유씨(杞溪兪氏)카페’ 회원 및 가족여러분!
파주종친회 그리고 진사공파 안동공 종중회 종인(宗人)여러분,
전국각지에서 오신 일가여러분!
그리고 공사다망(公私多忙) 하신 중에서도 참석하여 주신 대종회 부회장님을 비롯한 사무처장님
등 모든 일가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이제 무더운 여름철이 시작되었고 농촌은 농번기로 한창 바쁜 계절이 되었습니다. 또한 도시생활
에서도 분주한 가운데 틈을 내어 ‘2013년도 선조유적지 참배 및 파주 한마음대회’를 개최(開催)하
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오늘 이 대회(大會)를 개최(開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파주
종친회 유재근 회장님, 진사공파 안동공중종회 회장님과 지역 일가님 여러분께 거듭 감사를 드립
니다.
오늘은 고양 관산 선영과 파주 탄현 선영에 모셔져 있는 선조님들의 묘소를 참배하였습니다. 고양
관산동의 경안공과 신계, 단성, 진사공 파조님과 후예 선조님 그리고 파주 탄현 선영을 봉심, 참배
하시면서 느끼신 점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우리가 선조유적지와 선영을 봉심하고 참배
하는 것은 선조님들의 뜻을 계승(繼承)하여 숭조상문(崇祖尙門)을 실천하고 종친 간 우애(友愛)가
두텁게 하려는 것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기계유씨로서 정체성(내가 누구인
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종인여러분!
현대는 개인주의(個人主義)가 팽배(彭排)하여 옛것을 망각(忘却)하는 실정에 있습니다. 인터넷의
급속(急速)한 발달로 요즘 젊은이들은 사이버 공간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합니다. 우리 기계유
씨카페는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숭조사상(崇祖思想)을 높이고 조상에 대한 뿌리공부를 할 수 있도
록 만든 공간입니다. 우리 카페가 개설된 지도 벌써 10여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카페는 전
국의 재실(齋室)과 선조묘소를 참배(參拜)하여 왔으며, 선조의 공적(功績)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하
는 등 명실상부한 대종회의 산하기관(傘下機關)으로서 꾸준한 성장(成長)을 하여 왔습니다.
오늘 선조유적지 참배를 통하여 소중한 뿌리를 알고 선조들의 사상(思想)을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셨으면 합니다. 항상 훌륭한 조상님들이 살아온 삶의 정신을 본받고 그분들의 사상을 되새겨 후
손으로서의 자부심(自負心)을 가졌으면 합니다. 오늘 파주 한마음대회는 그동안 온라인상에서 만
났던 종인(宗人)들이 얼굴을 맞대고 정(情)을 나누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전국 각지에서 오신 종인
들은 선조숭조정신(先祖崇祖精神)을 논(論)하고 일상에 대한 의견도 나누며, 종인들 간에 화합(和
合)하는 모임이 될 것으로 확신(確信)합니다. 또한 그동안 삶의 피로(疲勞)를 푸는 한마당잔치도 마
련하였습니다.
오늘은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일가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전국에서 오신 종인들이 가슴으로 가족(家族)의 정을 나누고 하나가 되는 순간(瞬
間)입니다. 많은 모임이 있지만 오늘 같은 한마음대회는 또 다른 의미(意味)를 갖고 있습니다. 시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만나서 한 가족으로서 한마음으로 화합하고 서로를 위하는 모임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카페의 선조유적지 참배와 한마음대회는 떠오르는 태양(太陽)과 같이 계속(繼續)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일가님들의 적극적(積極的)인 지원과 관심(觀心), 그리고 참여(參與)를 부탁드
립니다.
어려운 여건(與件) 가운데 오늘의 선조유적지 참배와 한마음대회를 위하여 열정(熱情)과 정성(精
誠)을 쏟아 준비하느라 수고하신 운영위원(運營委員)과 대의원(代議員) 그리고 파주종친회(坡州宗
親會) 특히 진사공파 안동공종중회 여러분께 그간의 노고(勞苦)에 재차 감사드리며 항상 성원(聲
援)을 보내주시는 대종회와 부운장학회 그리고 행사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찬조금품으로 지원해
주신 모든 일가님께 심심(深心)한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끝으로 오늘의 행사(行事)가 화려한 장
소는 아니지만, 즐거운 시간을 통하여 따뜻한 대화(對話)를 나누는 멋진 만남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후예들이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훌륭한 종인으로서 사회와 국가에 이바지하는
일가들로 성공(成功)하시기를 기원(祈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13. 06. 01.
杞溪兪氏카페代議員會 會長 兪 洪 根 謹拜
축 사(祝 辭)
오늘의 행사를 빛내기 위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함께 해주신 일가 여러분! 그리고 카페회장님과 회원여러분!
안녕들 하셨습니까?
오늘 개최되는 ‘2013년도 선조유적지(先祖遺跡地) 참배 및 제4회 파주한마음대회’를 진심으로 축하(祝賀)하오며 아름다운 모임이 되기를 기원(祈願)합니다.
이곳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2-3번지 일원과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 54번지 일대는 우리 기계유씨의 선조(先祖)들께서 잠들어 계신 유서 깊은 곳으로, 경안공(景安公) 예조판서 휘(諱) 여림(汝霖)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선대들의 유택이 모셔져 있어서 우리 문중의 성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또한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는 진사공파조이신 성균진사(成均進士) 증 의정부좌찬성(贈 議政府左贊成) 휘(諱) 함(涵) 공의 둘째 아들이신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대수(大脩) 공의 성지로 우리문중의 15개파 중 진사(進士)공파 일문이 자리한 유서 깊은 지역입니다. 뿐만 아니라 분단 대한민국의 최북단 지역으로 북으로 향하는 관문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유서 깊은 이 지역에서 카페회원을 중심으로 한 우리 일가들께서 한자리에 모여 선대(先代)를 숭모(崇慕)하고 화합(和合)을 추구하는 ‘한마음 대회’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 기계유씨카페는 문중의 예하기관으로 중요한 일과 많은 일들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오늘 이 모임도 바로 그 중의 하나입니다. 더욱더 새롭게 진화(進化)하여 우리 문중의 중추적 역할을 다 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를 함께 하고 계신 일가여러분!
이처럼 많은 일가들께서 함께 하시는 자리인 만큼 한분 한분의 협력(協力)과 겸양(謙讓)의 미덕(美德)을 발휘하여 주셔서 모처럼의 나들이가 더 큰 성과와 추억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이번 4차 ‘한마음 대회’를 준비하고 진행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카페 임원진 여러분과 또한 물심양면으로 협조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이 지역 일가 여러분께 마음속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함께 하신 여러분과 전국에 계신 일가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운을 바라며, 제4회 파주한마음대회의 모들 일정(日程)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를 기원(祈願)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 06. 01.
杞溪兪氏大宗會 會長 兪 在 殷 拜
축 사(祝 辭)
안녕하십니까? 進士公派 安東公 宗中會長 兪炳起입니다
山과 들에는 온통 푸르름에 萬物이 生動하는 晩春의 季節을 실감케 합니다.
이처럼 生動이 넘치고 和暢한 날에 우리 門中의 여러 일가여러분을 모시고 先祖遺蹟地 參拜 및 第4回 杞溪兪氏카페 한마음대회를 이곳 坡州에서 開催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고 榮光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公私間 바쁘신 데도 參席해주신 兪在殷 大宗會會長님과 兪洪根 카페會長님, 兪衡根 大宗會 事務處長님, 유성근 카페명예회장님, 그리고 全國 各地에서 參席해주신 宗人 여러분께 진심으로 感謝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번 先祖遺蹟地 參拜는 高陽市 官山洞에 위치한 慕景齋에서 禮曹判書 諱 汝字霖字이신 景安公의 參拜가 있었으며, 이어서 坡州市 炭縣面 金蠅里에 위치한 安東公 墓域에서 通政大夫 安東大都護府使 諱 大字脩字이신 安東公의 參拜가 있었습니다.
特히, 安東公이 모셔져 있는 安東公 墓域은 昨年 2012年 5月 12日 陰曆으로 閏 三月 二十二日에 安東公 宗中의 宿願事業으로 墓域을 造成하였습니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祖上의 幽宅을 安東公 墓所를 中心으로해서 墓域 內 한 곳으로 移窆하였습니다. 通政大夫 安東公의 參拜를 새롭게 造成된 墓域에서 省墓를 드리게 된 것을 安東公 宗中會長으로서 기쁘고 感謝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곳 유일레저타운은 高陽, 坡州地域에서 주위 景觀과 내부시설이 뛰어나 많은 觀光客과 旅行者들이 자주 찾는 곳이며, 각종 행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께서 오늘 지내시면서 다소 불편한 점이 있더라도 이해하시고 오늘 하루 모든 宗人들이 한데 어우러져 宗人間에 和合의 場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이번 行事를 契機로 百世一室의 우리 門中이 成長하고 發展하는데 큰 힘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내일은 安保施設을 見學하게 됩니다. 아무쪼록 유익한 시간이 되 시길 바라며, 오늘과 내일 行事 일정이 끝날 때까지 和氣靄靄한 가운데 서로가 더욱 돈독해지는 즐거운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參席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이 行事 準備를 위해 애써주신 執行部와 關係者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宗人 여러분의 健康과 家庭에 幸福이 항상 가득하시기를 祈願합니다.
感謝합니다.
2013년 06월 01일
杞溪兪氏 進士公派 安東公宗中會 會長 兪 炳 起 拜
환영사(歡迎辭)
여러분 반갑습니다. 파주종친회장 유재근입니다.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유월을 시작하는 첫날에 기계유씨 카페 제4회 선조유적지 참배 및 한마음대회 개최를 경축드리며 전국의 경향각지에서 이곳 파주를 방문하여주신 유재은 대종회장님을 비롯한 일가 여러분을 파주종친회원들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울러 오늘 이와 같은 행사가 있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유홍근 회장님을 비롯한 카페 회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기계유씨는 전국적으로 15만여명이 살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아 杞溪 兪자만 보아도 반갑고 끈끈한 혈육의 정을 느낄 수 있고 쉽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현대를 인터넷 세상이라고 하는데 우리 카페에는 6천4백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온라인상으로는 자주 만날 수 있지만 오늘과 같은 행사를 통하여 조상의 얼을 기리고 일가 간에 서로 얼굴을 맞대며 정을 나눌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파주종친회에서는 제1회 충주대회 부터 금년까지 해마다 연례행사로 참여하여 일가 간에 소통을 하고 친목을 돈독히 하는 좋은 기회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번 행사를 위하여 카페 집행부와 협력을 하여 행사장과 일정계획 등을 성의껏 준비하였으나 다소 불편하고 부족함이 있더라도 널리 이해하여 주시고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이러한 행사가 해마다 더욱 발전해서 우리 기계유씨가 명문혈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국가와 사회발전에 밑거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시 한 번 일가 여러분의 파주 방문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 06. 01.
杞溪兪氏坡州宗親會 會長 兪 在 根 拜
<硏鑽資料> 고양⋅파주지역과 기계유씨 문중
Ⅰ. 고양 관산동 불암산(佛巖山)선영
1. 관산동에 선영이 자리 잡게 된 배경에 대하여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불암산(佛巖山) 밑 두포동과 안골 일원을 문중에서 선산을 만들게 된 연유에는 여러 설이 있다. 부운보의 기록을 열람해 보면 그 중 파주목사를 역임하신 첨추공의 영향이 많았을 것이라는 하는 설이 있으며 그 주요 내용은 첨추공께서 파주목사를 역임하셨다면 그 아드님들은 당연히 선친을 따라 임지에서 자라면서 부모님을 봉양하였을 것이고 관심을 가지고 준비하였던 것이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이 관산동, 대자동 일원은 당시 종실(宗室 : 종친 즉 왕족)이었던 전주이씨와 권문세족이었던 안동김씨의 선산이 지금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두포동은 경주김씨가 많은 지역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연산군 시절에 사냥터로 이용하기 전까지(지금도 대자동에 금표기가 있다)는 조정에서 먼 지역임에 틀림없으나 한강 이남이나 임진강 이북보다는 가까운 곳이니 사대부가에서 관심을 갖던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 근거가 될 만한 자료를 부운보에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진복창의 몰락 따라 묻혀버린 관산리 진사공(諱 綸) 묘비의 비운
부운보 제32호(1996. 03. 05.) 전 대종회 회장 유영준
진사공(諱 綸)은 경안공(諱 女霖)의 넷째 아드님으로 경안공(諱 女霖) 묘하(墓下)에 계장되어 계시나 진사공(諱 綸)은 33세에 졸(卒)하였다. 딸만 세분 계시고 아들은 없었다. 숙민공(諱 絳)보다 세살 아래요 진사공(諱 綸) 보다 세 살 위인 진복창은 경안공(諱 女霖)을 스승처럼 생각하였고 숙민공(휘 강)과 진사공(諱 綸)과는 죽마시절부터 동문수학하며 친형제처럼 지낸 사이였다.
경안공(諱 女霖)이 말년 비인에 추방되었던 7년간에도 진복창은 세 번이나 경안공(諱 女霖)을 찾아뵈었다 한다. 또 그 사이 진복창은 중종 30년 22세 때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명성을 날렸다. 수년 뒤 경안공(諱 女霖)이 풀려서 재 등용되었으나 애석하게도 1년 만에 돌아가셨다. 처음 집안에서는 경안공(諱 女霖) 묘소를 비인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숙민공(諱 絳)이 진복창과 의논하여 서울 근방에 모시기로 했다. 마침내 경안공(諱 女霖)을 관산리에 모시게 되었는데 진복창이 동분서주하여 공이 컸다.
명종조에 진사공(諱 綸)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후사가 없어 경안공(諱 女霖) 묘하에 계장하게 되었는데 진사공(諱 綸) 부인 평창 이씨가 시숙(媤叔) 숙민공(諱 絳)에게 청하여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진복창에게 비문을 얻어 표석이라도 세웠으면 한이 없겠다 하여 숙민공(諱 絳)이 소원대로 진복창의 글을 얻어 표석을 세웠는데 비문에는 숙민공(諱 絳)과 진복창이 술을 놓고 울며 아우를 생각하는 애절한 사연이 담겨져 있었다. 그런데 명종시대에 윤원형의 세도로 횡포가 벌어지자 진복창은 윤원형의 심복이 되어 천하를 호령했고 숙민공(諱 絳)은 윤원형의 불의에 항거하여 박해를 받았다. 명종 말년에 윤원형과 진복창은 죽고 몰락한 뒤에 진복창의 글이 새겨진 진사공(諱 綸)의 표석은 비신(碑身)을 베어 묻어 버리고 40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대석(臺石)만 남아 있다.
※ 진복창(陳復昌, ? ∼ 1563) : 조선 중기 문인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본관 여양(驪陽). 자 수초(遂初). 풍덕(豊德) 출생. 구수담(具壽聃)의 문하생. 1535년(중종 30)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장원하여, 정자(正字)·전적(典籍)을 거쳐, 1543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어 부제학(副提學),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낸 뒤, 척신(戚臣)이며 세도가인 윤원형(尹元衡)의 심복으로서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때 대윤(大尹)에 속한 사림(士林)의 추방에 크게 활약하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 사관(史官)은 그를 ‘독사(毒蛇)’라고 기록하였다.
1550년 스승인 구수담의 충언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를 역적으로 몰아 사사(賜死)하게 하였다. 그의 눈 밖에 나면 집안의 어린아이까지 생명을 잃게 되므로 극적(極賊)이라는 혹평을 들었다. 대사헌을 거쳐 공조참판이 되었으나, 윤원형마저도 그를 “간교 ·음험한 위인”이라고 평하였는데, 결국 파직되어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었다. 그의 어머니까지도 행실이 방종하여 지탄받았다. 문장과 글씨에는 뛰어났으며, 작품에 《역대가(歷代歌)》 《만고가(萬古歌)》 등이 있다.
위 글에서 숙민공께서 윤원형의 불의에 항거하는 것에 대하여 장유(張維)가 비명(碑銘) 쓴 숙민공 신도비에 관련사항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본디 다른 장기(長技)가 없다. 그러나 조정에 몸담은 30년 동안 한 번도 권척(權戚)의 집안 뜰을 밟아 본 적이 없다.”하였다. 진복창(陳復昌)이 한창 위세를 떨칠 무렵, 공이 자기와 의견이 다른 것을 미워한 나머지 항상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였는데, 공이 끄떡도 하지 않고서 심지어는 시를 지어 풍자하기까지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일컬었다.
공이 재차 헌부의 장관이 되었을 때 마침 임백령(林百齡)의 시호(諡號)를 의논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이 일로 인하여 관직(館職)에 있는 청류(淸流)들 모두가 장차 죄를 얻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윤원형(尹元衡)이, 공이야말로 늘 을사(乙巳)의 당인(黨人) 편을 든다고 생각하고는, 공도 아울러 죄를 주자고 계청(啓請)한 결과 불측(不測)한 사태가 전개되려 하였는데, 명묘(明廟)가 그 진상을 환히 통촉해 준 덕분에 공이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러나 원형의 노여움이 풀어지지 않고 있었으므로 상이 이를 염려한 나머지 공을 외방으로 내보내 영북(嶺北)을 안찰(按察)하게 하면서 은혜롭게 물품을 하사하여 마음을 편케 해 주었다. 공은 일을 처리하는 솜씨가 노련하고 민첩하였으며 무략(武略)에도 아울러 통하였다. 그리하여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난 뒤로 남쪽 지방에 일이 많이 발생하게 되자, 조정에서 모두 공을 천거하여 영남을 안찰하게 하기도 하였다.
<註>여기서 감히 선조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는 두렵고 황공하지만 숙민공께서 윤원형 일파 중에서 그래도 같이 자라면서 동문수학한 진복창에 대한 연민의 정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봅니다.
경오년(1570, 선조 3)에 숙민공께서 돌아가시자 그 아드님이신 자산공파조(諱 泳)과 진사공파조(諱 涵)과 종자(從子)인 충목공(忠穆公) [휘 홍(諱 泓)]이 지문(志文)을 짓고 차유령 밑에 모셨으며, 당시 사간원 정언이셨던 안동공[(휘 대수(諱 大脩)]은 판서 숙민공 강(絳)의 손자로서 판서공의 상(喪)을 당해 양주 차유령(車踰嶺) 묘아래서 시묘살이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충목공파조이신 송당 선조님[휘 홍(諱 泓)]의 천묘(遷墓)기록을 살펴보면 충목공(諱 泓, 중종19년(1524년) 11월 25일 서울 반송방에서 출생하여 선조27년(1594) 12월 25일 황해 해주에서 享年 71세로 졸하시니, 관산동 선영에 모시었다가 광해조 4년(1612년) 임자 12월에 검단산 곤향에 삼합 이폄하였다.
숙종 이후 4조묘. 숙종. 영조. 정조. 철종에 걸쳐 치제와 사우 중수 그리고 열조대왕의 은포가 있었다. 유홍 신도비는 처음 인조20년(1642) 임오에 鄭斗卿의 찬명을 조문수 서(書)와 김광현 전(篆)으로 근수(謹修)하였던 바 구비박락으로 순조 13년(1813년) 계유에 장유(張維) 찬명(讚銘)을 유한지 서(書), 전(篆 : 전서체로 쓰다)으로 개수(改修)하였다. 또 사당(祠堂)은 처음 숙종20년(1694년) 갑술에 지었고 정조 22년(1798년) 무오에 왕명에 의하여 중수하였으며 그 후 수차에 걸쳐 개수(改修)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위 글에서 충목공께서도 처음에 관산동 선영에 모셔졌다가 퇴촌 후손들의 발의로 문중에서 결정하여 이폄하여 모셨던 것으로 관산동 선영을 성지(聖地)로 하고 각 파(各 派)의 세거지에 따라 소종중 별로 각 지역에 자리 잡게 된 연유가 어느 정도 규명되었다고 사료된다. 즉 자산공파는 남양주시 화도면 차산리로, 5개 파 중 2개 파조의 자손들이 옮겨가시고 나머지 3개 파조는 관산동에 모셨으나 자연스럽게 자손의 번창에 따라 세거지로 경안공의 손자항렬부터 경향각지로 분화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관산동 산 73-3 소재 묘역
1) 경안공 유여림 선생 묘, 신도비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5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3-3
이 묘는 관산동 가장동 삼거리에서 고양동으로 이어진 76번 도로로부터 약 30m 가량 들어가 위치한 두포동 마을에 남향으로 배 창령 성씨와 쌍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쌍분의 총 둘레는 각 8m이며 높이는 2.5m입니다. 묘 앞에는 장명등, 상석, 망주석,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 중 문인석은 조각 수법이 뛰어나고 안정감이 돋보이는 수작으로 여겨진다. 묘비는 원래 조선 중종 38년(1543) 8월에 건립되었으나 1935년 9월에 다시 세운 것으로 오석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폭 50㎝, 두께 20㎝, 높이가 120㎝입니다. 또 묘소 앞 100m 지점에 위치한 대리석 신도비는 선조 19년(1586)에 세운 것으로 이수와 기단을 갖추고 있습니다. 규모는 높이가 200㎝, 폭 90㎝, 두께 24㎝입니다. 비문은 홍언필(洪彦弼)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노직(盧稷)이 썼습니다. 현재 비신의 중간 부분은 크게 금이 가 있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글자를 판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비를 꽂은 대좌는 화강암 재질로 장방형이며 각 4면에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신은 대리석 재질로 아수와 연결되어 조각한 구조이며 전면 상부에는 ‘예조판서 경안’ 뒷면에는 ‘유공신도비명’ 이라 전자되어 있어요. 비신의 중앙부 우측 상부로부터 아래로 갈라져 30자 가량의 문자는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습니다. 이수는 앞부분에 두 마리의 용이 중앙을 향해 치솟은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입을 크게 벌린 채 발을 내밀고 있는 모양입니다. 날카로운 이빨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눈알 그리고 힘이 치솟는 듯한 세 개의 발가락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여림(1476~1538)은 조선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 자는 계옥(啓沃), 호는 정당(政堂), 신라대(新羅代) 아찬(阿飡) 삼재(三宰)공의 후손으로서 유집(兪輯)의 증손이며, 할아버지는 유해(兪解)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유기창(兪起昌)이며, 어머니는 능주 구씨로 훈련원 참군 안우(安愚)의 딸입니다.
연산군 4년(1498) 사마시에 합격, 150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직강을 거쳐 단양과 한산의 군수를 지냈습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27년에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1529년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2년 뒤인 1531년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어 서천군 이화동에 가서 다음해 정당대(政堂臺)를 짓고 날마다 낚시를 하고 지냈습니다. 1537년 김안로가 축출되자 예조 판서에 복직되었고 정적보복을 반대하여 더욱 민망을 얻었습니다. 시를 잘하여 남의 애송하는 바가 되었습니다. 충청남도 비인(庇仁)의 청절사(淸節祠)에 제향되었습니다. 저서로는 『정당유고』 3권이 있다. 시호는 경안(景安)입니다.
다음은 신도비에 적혀있는 내용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도구(道具)가 실제로 그때 어진 사람에게 맡겨졌다.
그런데 그 도구를 크게 쓰지 못했으니 때가 아직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성인(聖人) 임금과 좋은 때를 만났으니 어찌하여 오래 살게 하지 않았는고.
공이 좋은 벼슬에 올랐으니 한 번 소리치자 하늘까지 올라가는 듯하구나.
재주는 정승감으로 길렀으니 어찌 집에 두고 나라의 녹을 먹었겠는가.
많은 덕(德)과 거룩한 명망(名望)을 갖추었고 큰 도량(度量)과 많은 사람을 포용(包容)했구나.
계획은 크면서도 꾀와 역량(力量)은 깊고도 충실하였다.
이 일과 저 일을 계획하는 게 이치가 분명하여 사람들이 모두 복종(服從)했다.
칼을 휘두르는데 전혀 틈이 없어 대나무를 혀러 마디 쪼개 내려가는 것 같았다.
소인(小人)에게 배척받고서도 남쪽 바다 끝에 초연히 있었다.
머리는 희어지고 눈은 뿌옇게 어두워졌으니 어찌 자기 몸을 위해서냐.
상감의 명령이 빨리 오라고 부르시니 대궐(大闕)의 옥좌(玉座)가 환히 보이는구나.
봄 햇살 따뜻해 추위를 녹이니 온갖 물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구나.
예조 판서로 옮겨가니 옛날 맡았건 일이 다시 새롭고,
그 자리는 할 일도 많이 쌓여서 아침저녁으로 상감을 모시게 되었구나.
나라에서는 노성(老成)한 이를 존경하여 정승 자리가 빛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일 모두 허사가 되었으니 마치 꿈결같이 사라졌구나.
많은 보배를 다 사용하지 못했으니 선비들이 너무 안타까워했다.
이 집에 많은 경사(慶事) 계속 겹치고 난초와 계수나무가 향기롭고 향기로워라.
세운 업적이 대대로 전하니 후세(後世)에 잘될 것이 분명하다.
불암산 높은 곳에 산은 높고 물은 깊어,
비석(碑石)이 용(龍)의 머리같이 우뚝 솟았으니 그 덕음(德音)이 빛나고 빛나리.
[출처]유여림 선생 묘(1538) |작성자curatorsim
<景安公墓表>
太常1)曰, 公稟性淵洪, 智慮深遠. 外雖沖和, 而內實剛定. 榮辱過前, 憂喜不形, 接人以誠, 不事表襮. 居室澹然, 不近聲色. 當其履官規事, 務存大體, 隱然有古君子之風焉. 人服其量, 方以公輔2)期之, 遽爾卽世. 惜哉, 謹按諡法3),耆意大慮曰, 景. 寬裕和平曰, 安. 請諡之曰, 景安公.
嘉靖二十二年 癸卯八月十五日立, 公歿後三百九十七年乙亥九月九日改立(石物字沒, 在京後孫十三人合意, 而改竪之, 此致雄 ◦ 鎭哲◦ 炳儀之主力也, 廣州◦楊洲◦江華宗中, 亦有助云.)
<경안공 묘표>
태상시(太常寺)에서 “공의 타고난 성품은 깊고 넓으며, 슬기로운 생각은 깊고 원대하였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안으로는 진실로 굳세고 안정된 모습이었다. 영욕(榮辱)의 시대를 목전에 지나치면서 근심과 기쁨으로 형언하지 않았고, 대인관계는 정성으로 대하며 좋고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집에 거처할 때는 마음이 맑고 고요하여 노래와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 공무를 집행할 때 그 대체(大體)를 밝히기에 힘썼으면서도 은연중에 옛 군자(君子)의 풍모를 지녔다.
사람들은 그 도량에 감복하여 바야흐로 정승감으로 기대하였건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애석하도다! 삼가 시호를 짓는 법[諡法]을 살펴보니 원로다운 뜻이 크고 사려 깊어 ”경(景)“이라고 하고, 도량이 너그럽고 마음이 평화로워 ‘안(安)’이라 하여, 이에 시호(諡號)를 청하여 ‘경안공(景安公)’이라.”하다.
가정22년 계묘년(중종38년: 1543) 공께서 돌아가신지 397년째인 을해년(1935년) 9월 9일 고쳐 세우다.
(석물의 글자가 닳아 없어져 재경 후손 13인이 뜻을 합쳐 고쳐 세우게 되었다. 이 일은 치웅, 진철, 병의가 주력하였고, 광주, 양주, 강화 종중에서도 조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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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1. 태상시(太常寺) : 제사의 회의, 시호(諡號) 등을 관장하는 奉常寺(봉상시)를 말한다. 이 관청은 태조 원년에 창설하였고, 전사서(典祀署), 전의서(典儀署)라고도 한다. 관직으로는 정(正), 부정(副正), 첨정(僉正), 판관(判官), 주부(主簿), 직장(直長), 봉사(奉事), 부봉사(副奉事), 참봉(參奉)등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 주2. 공보(公輔):임금을 보필하며 정사를 잘 다스리는 정승,
▶ 주3. 시법(諡法) : 한 인물의 생존시의 행적(行蹟)을 대상으로 그 공덕(功德)에 대한 칭송과 아울러 존경의 뜻이 담겨 있는 영예로운 호를 국왕으로부터 받게 되는 제도를 말하며, 그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시법의 제도가 정하여진 것은 주(周)나라의 주공(周公)으로부터라 한다. 종친(宗親)과 문⋅무관(文.武官)중에서 정二품 이상의 실직(實職)을 지낸 사람이 죽으면 시호(諡號)를 주었는데, 뒤에는 범위가 확대되어 제학(提學)이나 유현(儒賢)·절신(節臣) 등은 정二품이 못되어도 시호(諡號)를 주었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절차는, 해당자의 자손이나 관계자들이 죽은 이의 행장(行狀)을 적은 시장(諡狀)을 예조(禮曹)에 제출하면 예조(禮曹)에서 이를 심의한 뒤 봉상사(奉常寺)를 거쳐 홍무관(弘文館)에 보내어 시호(諡號)를 정하게 된다. 시호(諡號)를 정하는 법으로는 『주공시법(周公諡法)』이니 『춘추시법(春秋諡法)』이니 하여 中國古代 이래의 시법(諡法)이 많이 적용되었던 듯하다.
주로 사용되어 온 글자로는 문(文), 정(貞), 공(恭), 양(襄), 정(靖), 양(良), 효(孝), 충(忠), 장(莊), 안(安), 경(景), 장(章), 무(武) 등 120자이다.
한자 한자마다 정의(定義)가 있어서 생전의 행적(行蹟)에 알맞는 글자를 조합하여 두자(字)로 만들고 시호(諡號)아래 『공(公)』자를 붙이어 부른다.
첫댓글 병수고문께서 지적하여주신 파주종친회장님의 성함을 수정하였습니다. 스크랩자료는 수정이 되지 않으므로 한마음대회방의 본문을 수정후 스크랩하다보니 본문의 순서가 뒤바뀌는등 잘못된 부분이 발생하였습니다. 말씀대로 원래 장문이라서 병갑부회장과 제가 인쇄가 임박한 시간에야 자료가 넘어오는 바람에 열심히 교정을 한다고 했슴에도 불고하고 그러한 사례가 발생되었슴에 사과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글은 원래 한마음대회방에 올렸던 것인데 일반회원들도 이 자료를 볼 수있게 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부득이 공지방에 스크랩하였던 것인데 그만 실수를 하였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꼼꼼히 읽어보았습니다. 한땀한땀 모두 정성어린 마음과 뜻이 보이는듯합니다. 바쁜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문중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모습이 참으로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감히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수고가 있으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