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말을 유언이라 하죠? 그런데 유언하고 죽는 사람들이 많지 않대요. 그리고 유언하는 사람도 두 부류입니다. 한 부류는 평상시에 마음에 담은 말은 후손에게 계속합니다. ‘나 죽으면, 화장해. 논은 누가 가져.’ 등등 또 한 부류는 미리 변호사 불러 공증을 받아서 정확하게 서류로 작성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류셨을까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변호사 불러서 받아 적으라 하셨어요? 아니죠. 평소의 설교 중에 예수님의 유언이 묻어 있죠. 그래서 예수님의 유언은 평상시에 하셨던 말인데, 예수님이 반복적으로 하신 아주 중요한 말들이 있어요. 예수님의 유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이것을 예수님의 3대 유언이라 합니다.
첫 번째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되게 해주십시오.’ 두 번째는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셔라.’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7절에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이 무려 일곱 번 반복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 가운데 똑같은 이야기를 일곱 번 반복한 곳이 여기뿐입니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예수님이 그렇게 반복하셨을까요? 세 번째 유언은 오늘 복음에 나온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여라.’ 선교사가 되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모두 미셔너리(Missionary, 선교사)가 되라는 겁니다.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은 싸끄라멘또(Sacramento, 성체성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가 되라는 것은 우니따스(unitas, 일치)를 의미합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의 순서는 없지만, 분명히 순서는 있습니다. 1번과 2번의 유언을 우리가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3번 유언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 유언이 이뤄지지 않으면, 첫 번째 두 번째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자꾸 나와야,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일 수 있고,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세 유언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의무요, 동시에 권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유언에 우선시되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 전교하는 것은 거룩한 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이 지금 이 세 가지 유언 가운데 제일 약한 게 세 번째예요. 여러분들 가운데 혹시 세례받고 나서 다른 사람을 교회로 이끌어서 여러분의 기도로 세례 시킨 사람, 혹은 현재 진행 중이신 분 손 들라고 하면, 몇 프로나 될까요? 손을 안 드는 분이 드는 분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오늘은 민족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와요. 올 한해는 코로나 때문이라고 핑계 댈 수도 있지만, 세례받은 햇수가 50년이라면 십일조 하셔야죠. 한 사람이라도 천국으로 이끌어야죠?
전체적으로 우리 신자들이 전교에 약합니다. 이 전교를 못 하는 이유가 뭐냐? 확신이 없고 체험이 없기에, 전교하는데 항상 소극적이에요. 그러면, 뭐에 대한 확신이고, 뭐에 대한 체험입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약하고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어요.
한국 신자에게 구원받았냐고 물으면 10명 중 7~8명은 잘 모른다고 해요. 혹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합니다. 노력은 무슨 노력입니까? 구원이 내 노력으로 되는 건가요? 구원은 우리 공로를 갖고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성사 때 물과 성령으로 구원을 받았잖아요? 그것도 모자라 견진 때 성령 칠은의 갑옷을 입고 살아가는데, 왜 공로를 쌓는 것인가? 구원이라는 목표를 위해 공로를 쌓는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구원 못 받아요. 올라가다 떨어지고, 올라가다 떨어지고. 공로를 쌓는 이유는 나 같은 죄인 구원해 주심에 기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니라 아주 중요합니다. 가끔 교리 선생이나, 신부, 수녀도 가르칠 때, ‘열심히 해, 그래야 공로 쌓고 구원받아.’ 합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왜 자꾸 구원받으라 합니까? 물론 구원의 문안으로는 들어와 있지만, 예수님께서 계신 안방까지 가려면 길은 멀지요.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 세례받았다.’가 ‘나 천국 갔다.’라는 말은 아니지요. 하지만 구원의 문 안에 들어와 있는 것과 담밖에서 서성거리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구원의 확실성, 여러분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드십니까? 개신교 다니는 교우들은 부흥회 한 번만 갔다 오면 전교하러 나갑니다. 부흥회 한번 다녀오면, 시어머니 끌고 나와요. ‘어머니,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으러 가요.’ 왜 그럴까?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생겼기 때문에 그래요. 나를 구해 주신 그 좋은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죠. 지하철이나 정류장 등지에 가면 성경 들고 ‘예수님 믿으세요.’ 그러죠? 우리는 그런 사람 보면 ‘꼭 저렇게 믿어야 해? '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 사람들이 부러워요. 내가 신부지만, 성서 들고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서 예수 믿으라고 소리치라면 못할 것 같아요.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할 자격 없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못 하는 것 그 사람이 하고 있거든요, 예수님이 세상 끝날 때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했기에, 그 유언 지키려 애쓰는 거예요. 내가 못 하니, 그것이 시기 질투로 바뀌고 비판으로 보게 되죠. 물론 도가 지나친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앞뒤에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란 판을 매달고 다니죠.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예수님이 가슴속에 심어준 양심대로 성당 나가는 사람보다, 개신교 신자보다 훨씬 더 이쁘게 사는 사람들도 많아요. 소위 익명의 크리스천들이 많아요. 세례는 비록 받지 않았어도, 삶 자체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전부 세례 안 받았다고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잔인무도한 사람입니까? 명동 성당에 가면 꼭 그 간판을 걸고 다니는 사람이 있죠. 하느님께 잔인무도한 사람입니까 불교 신자들이 보면 얼마나 상처를 받겠습니까? ‘나 착하게 살았는데,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는 거야?’ 아니지요, 그렇게 도에 지나치고 말도 안 되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는 예수님을 알리지 않고는 못 배깁니다. 배추 파는 할머니도 장사하면서 전교하려도 애씁니다. 젊은 엄마가 아가 안고 있으면, ‘아유, 참 이쁘네, 새댁 어디 살아?’ 하면서 ‘우리 목사님 새로 오셨는데,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몰라. 내가 수요일에 갈 텐데 같이 갈래?’ 이게 시작이 되는 것이죠. 호떡 굽는 아저씨도 호떡 하나 뒤집고, 옆에 기름이 잔뜩 묻은 성서 읽어요. 왜? 내가 알아야 전교한다.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씀하셨죠? 2 독서에서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얼마나 깊이 있게 나왔습니까? 구원의 확신을 가질 때는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됩니다. 전교도 적극적으로 되고, 전례에 임하는 자세도 적극적으로 되고, 순명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봉헌도 적극적으로 할 수 있고, 봉사도 적극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순도가 떨어지면, 구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헷갈립니다. ‘어휴, 나 같은 인간이 무슨 구원을 받아.’ 이것은 순도가 0(zero)입니다. 불순물이 있는 대로 섞여서, 이것이 금인지 쇳덩어리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손에 끼고 있는 반지가 금반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수 금반지가 아니죠. 14K, 18K, 24K.
피정을 갔다 온 어느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성질을 부리더래요. ‘내가 가기 싫다 했지? 원, 신부님이 남사스러워서.’ 그래서 며느리가 뭐라 그러셨는지 물었대요. 할머니가 ‘자꾸 신부님이 소꼭지를 사지 말고 젖꼭지를 사라고 해.’ 너무 궁금한 며느리가 수녀님께 전화를 걸이 여쭈었어요. ‘수녀님, 어머님이 피정 다녀오시더니 역정을 내시면서, 피정 신부님이 자꾸 소꼭지를 사지 말고 젖꼭지를 사라고 하셨다던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요?’ 수녀님이 ‘그런 이야기하신 적 없는데 이상하군요.’ 하며 메모했던 것을 읽어 보셨대요. 그리고, ‘아하, 이 말은 잘못 알아들으신 것 같아요.’ 하면서 하신 말씀이 ‘피정 지도 신부님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고 소극적으로 살지 말고 적극적으로 살라 하셨거든요.’ 여기 계신 할머니 가운데, 집에 가시어 김웅열 신부님이 젖꼭지 사랬다 하지 않겠죠? 구원에 대한 확신의 순도가 떨어지면, 세례받고 60년 70년이 될 때까지, 자기 피붙이에게도 하느님 믿으라는 말을 못 합니다.
아마 내가 언젠가 이야기한 적 있을 거예요. 한 사무실에서 이십 년 동안 얼굴을 마주 보고 일을 하던 상관이, 자기 책상에는 십자가도 있고, 레지오 교본도 있었대요. 앞의 부하 직원은 20년간, 말 한마디면 못 이기는 척 끌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대요. ‘여보게, 나랑 성당 가세’ 그 말 나오기를 이십 년을 기다렸는데, 한 번도 그 말을 안 하더래요. 그래서 성질나서 내 발로 교리 반에 나왔다고 하는 사람을 난 봤어요. 그 사람의 입교 동기는 ‘성질나서’ 였습니다. 여러분들 주변에는 여러분들이 관심 갖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하면 얼마든지 올 수 있는 분들이 많아요. ‘가고 싶어도, 관심은 있어도,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누군가 조금만 잡아주면 좋을 텐데 천주교 신자가 내 주변에는 없네.’ 하시는 분들 많아요.
천주교 신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몰라, 왜? 생전 말을 안 하니까. 또 밥 먹을 때도 기도하는 것 본 적도 없어. 그런데 알고 보니, 어릴 때부터 천주교 신자고, 성당에서도 엄청 열심히 일해. 그 긴 세월을 같이 지냈는데, 천주교 신자 티를 내지 않아.
이방인들 입에서 ‘당신은 천주교 신자티가 안 나’하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모독하는 말입니다. 창피한 말입니다. 믿는 자들은 멀리서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합니다. 사제들은 사제들의 향기가 풍겨서 지나가는 사람도 로만 칼라를 안 해도, ‘저분은 좀 우리와는 다르게 사는 분이야.’ 해야 합니다. 천주교 신자인지도 몰랐다고 하는 것은 직무 태만, 엉터리로 사는 신자들입니다. 절대 그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이 거의 제로이기 때문에 전교를 못 합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복음 전파하는데 첫 번째 단추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에 대한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장로 오래 하시다 천주교로 개종하신 분이 일 년을 살아 보시고 느낀 것을 이야기하신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에는 개신교는 꿈도 꾸어보지 못한 진짜 보물들이 많아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것도 많이 보았어요. 천주교 신자들은 보편적으로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큰 기쁨을 못 느끼는 것 같아요. 레지오에 들어갔는데 끝나면 꼭 2차 가는데, 저는 술을 못해서 그 자리가 참 부담스러워요. 그런데 가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요. 고백성사 보기 귀찮아서 주일을 지킨대요.’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사제들은 직업인이 되어버려요. 사제는 직업이 아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체험은 영적으로 항상 신선하게 만듭니다. 사제들도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얼굴이 경직되어 있고, 그 사제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치유되지 않습니다. 구마도 일어나지 않아요. 성령이 충만한 사제들의 말씀 한마디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끌어 올 수 있는 힘이 있어요.
저는 한평생 턱관절이 닳도록 선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말씀 선포를 하고 살았습니다. 죽어서 주님 앞에 가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배티 성지 만들었어요. 감곡 성지 만들었어요.’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니지요. ‘죽을힘을 다해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꾀부리지 않고, 매일매일 충실하게 복음을 준비하고 선포했습니다.’ 저는 그거 하나 이야기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삽니다.
평신도들도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세례 때 받았던 사제직, 왕직, 예언직을 다 잊어버립니다. 평신도의 제일 중요한 역할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사는 것입니다. 사제직의 목표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요, 봉사 받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봉사 받기만 원하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 꾸며 놓은 자리에 앉아서 즐기고 비판하기만 합니다.
그리스도 예언직의 목적은 전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의 체험이 없으면 전교하지 못하죠.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판국에 누구를 전교하는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왕직의 목표는 영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왕은 자유롭습니다. 얽매이지 않습니다. 종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노예들은 도망가지 못하게 혁대를 다 풀립니다. 그리스도 왕직을 산다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내적이 자유입니다. 또 때로는 물질로부터도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전교에 뒤떨어지는 이유는 확신과 체험이 부족하다. 무엇에 대한 확신이요? 구원에 대한 확신. 이 좋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것을 내 남편에게도 알려야 하고, 며느리에게도 알려야 하고, 방방곡곡에 알려야 합니다. ‘나 그 전이랑 다르지? 얼굴도 참 밝아졌지? 나 사는 것이 기뻐.’ 그런데 내 얼굴이 어둡고, 쭈그렁 망태기고, 썩어들어가면, 누가 나를 보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인정하겠습니까?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한 체험이 없으면 사제건 평신도건 절대 전교 못 합니다. 왜? 기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만 우거지상을 하고 전교 못 해요. 절대로 전교 못 합니다 기쁨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지 않으면 전교를 해도 힘이 없습니다.
오늘은 민족 복음화 주일입니다. 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것 아닙니까?’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2 독서에서는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내가 말주변이 없으면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책을 사서 주든지, 하다못해 신문을 구독해서 주든지, 아니면 유튜브라도 알려주세요. ‘아무개 신부님 이름 쳐봐. 굉장히 많이 나와.’ 그것 몰라서 못 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 알려주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까? 듣든 안 듣든 한 번 보내줘 봐야지요.
‘오늘 이 그물에 가득 채워와야지.’ 하면서 낚시하는 낚시꾼은 없어요. 어떨 때는 밤을 대도 피라미 한 마리 안 물릴 때도 있어요. 그래도 낚시꾼은 밑밥을 만들어서 그다음 날 또 옵니다.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
행여라도 여러분 주변에 ‘이런, 죽어 보니 정말 천국, 지옥, 연옥이 있네. 나랑 가까운 사람 중에 천주교 신자 있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 전교했으면 이렇게 불편하게 주님 앞에 서지 않았을 텐데’ 하며 여러분을 원망하지 않게끔 노력하십시오,
‘예수님, 제가 오십 넘어서 세례받았는데, 예수님을 알게 해준 분이 참 지극정성이었어요. 제가 감화받아서 세례받았습니다. 받고 나서 행복하게 살다 왔습니다. 저를 전교하신 그분을 칭찬해 주세요.’라는 이야기를 듣도록 합시다. 아멘
♣2020년 연중 제29주일(10/18)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
첫댓글 아멘🙏 감사드립니다~~..!!!
아 멘, 신부님, 강론말씀감사드립니다, ~~~
주님 감사드립니다.선교 할수 있는 지혜의 영을 허락해 주소서.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아멘~~
ㅎ 하루도 신부님강론말씀 듣지않으면 궁금해서 몽살겠습니다.~ㅎㅎㅎ
저희들이 믿게된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
모든 주님의 자녀들에게 전하는것을
소명으로 알고 살겠습니다.
불교신자도 그들이 몰라서 그렇지
주님의 자녀지요.
전하려면 제가 변화되어 거룩한 기쁨의
길로 걸어가야 겠어요. 아멘!
훗날 주님 앞에 섰을때 '나는 너를 모른다'라는
말씀 안 들으려면 저의 삶의 모습들도
점검해야 겠어요.
구원의 문안으로는 들어왔지만
신부님 말씀처럼 안방까지 가는길은
저 자신을 꺽어야 하는 일이예요.
그 변화로 주변을 주님의
자녀들로 채우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는 말씀 붙들고
받은 소명을 다하기를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제 입에 그 힘을 싣어 주실것을
믿습니다. 아멘!
찬미 예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