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장리 : 평창읍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는 북면 지역으로, 평창강 옆 벌판에 있다고 해서 ‘개장’이라고 불렀다. ‘계장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고길리 : 마을이 골짜기를 따라 길게 형성되어 있어서 ‘곡길’이라고 불렀으나, 유전, 후덕, 백암을 통폐합하여 ‘고길리’라고 했다. ◆ 노론리 : 본래는 북면 지역으로 ‘뇌룬’이라 했다. 거릿말, 재를 통합하여 노론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뇌운리 : 본래는 북면 지역으로 ‘뇌운’이라 했다. 어둔, 아계, 굴아우, 직동, 흑강을 통합하여 ‘뇌운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다수리 : 평창읍의 북쪽에 있으며, 벌판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본래는 북면 지역으로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多壽’라고 했으나, 나중에는 평창강 가 이 마을 중에서 물이 가장 많다고 ‘多水’라 했다고 한다. 뒷말, 방축매기, 산제당을 병합하여 ‘다수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대상리 : 평창읍의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대얏골 위쪽이 된다고 해서 ‘웃대야골’ 이라고 한다. 노궐동, 안정동, 능암동, 구룡동을 병합하여 ‘대상리’라고 했다. ◆ 대하리 : 평창읍의 남서쪽 평창강 주변에 있는 마을로, 대얏골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아래대야골’이라고 한다. ‘연봉정’, ‘가정동’, ‘삼정동’, ‘사천’, ‘북변’을 병합하여 ‘대하리’라고 했다. ◆ 도돈리 : 굽이굽이 에돌아 흐르는 평창강이 퇴적 지형을 만들어 놓아 ‘도둔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당시 들둔, 조둔과 함께 난을 피할 수 있는 삼둔지라 하여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다고 한다. ‘도둔리’가 한자로 바뀌면서 ‘도돈리’가 되었다. ◆ 마지리 : 평창읍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연못에서 말이 났다고 해서 ‘마지리’라고 불렀다 한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마지나루가 있었으나 도돈교가 가설되면서 사라졌다. 진도, 녹골, 고산곡, 시동, 월래동, 아파실, 대곡을 병합하여 ‘마지리’가 되었다. ◆ 상리 : 읍내에서 동쪽 평창교를 지나 위치한 마을. 읍내 지역인 방내를 기준으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성황당 마을을 합하여 ‘상리’라 한다. ◆ 약수리 : 조선시대 때 보안도에 속한 약수역이 있던 역촌 마을로, 마을 어귀에 약수가 흘러 생긴 이름이다. ‘안구렁’과 함께 ‘약수리’라고 해 평창읍에 편 입했다. ◆ 여만리 : 평창읍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 때부터 양곡이 많이 나던 곡창지대로, 평창강 가에서 생산되는 곡식이 만 명이 먹고도 남는다고 ‘여만 리’라 했다. 갯뒤, 구마니를 병합하여 ‘여만리’로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용항리 : 평창읍의 북쪽 강변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북면 지역으로, 남쪽의 산이 용의 목처럼 생겼고 용당이 있다고 해서 ‘미루목’ 도는 ‘용항’이라 하였 다. 섶다리를 병합하여 ‘용항리’로 부르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원당리 : 평창읍의 서북쪽 백덕산 중턱에 있는 북부 지역에서도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북면 지역으로, 원당사라는 절이 있어 ‘원당’이라고 불렀다. 사동, 직동, 유곡을 병합하여 ‘원당리’로 부르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고려 때 원나라의 원군이 나라에 침입하여 싸움에 패하고 도주하다 이 산골에 들어와 숨었다고 한다. ◆ 유동리 : 본래는 남면지역으로 ‘버들골’이라고 했다. 마을의 형국이 앵무새가 버드나무 가지에 집을 짓는 ‘앵소유지’형으로 명당에 들었으나 안말, 점말을 통폐합하여 유동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응암리 : 평창읍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을 비롯해 관리와 백성들이 마을 앞 절벽에 난 굴로 피난할 때 매와 함께 피난 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뒤다미’를 병합, 평창읍에 편입했다. ◆ 이곡리 : 본래 북면 지역으로, ‘구르니’, ‘구론’이라고 했고, 마을의 형세가 귀처럼 생겼다고 해서 귀골이라고 했다. ◆ 임하리 : 본래 북면 지역으로, 뒷산에 숲이 우거지고 많았으므로 ‘수패’라고 했다. ‘임하리’라 하여 평창읍에 편입했다. ◆ 입탄리 : 평창읍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 남면 지역으로, 사방 높은 산이 둘러 있는 골짜기의 마을이라고 해서 ‘들뚜니’라 하였다. 새모기, 솟골원, 아침골을 병합하여 ‘입탄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조동리 : 고길리와 노론리 사이에 있다. 마을의 형세가 딱따구리가 날아들어 나무를 쪼아대는 ‘비조탁목지형’이어서 ‘새골’이라고 했으나, 도화덕, 탑상골, 산제골을 합쳐 조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조둔리 : 본래는 남면지역으로 서쪽 약수리를 지나 북서족에 있는 마을이다. 새가 둥지를 튼 형국이어서 ‘조둔’ 또는 ‘조뚜니’라 하였으나 ‘조둔리’라고 했다. ◆ 종부리 : 읍내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마을을 이루는 구리마산의 산세가 ‘종 모양의 언덕’ 형태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는 남면 지역이었으나, 음지촌, 양지촌, 이포, 삼방을 통합하여 종부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주진리 : 평창읍의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본래 북면 지역으로, 나루터가 두 곳이 되어 ‘두나루’라 한 것이 변해 ‘주나루’라 하였다. 장암동, 한천동, 부동을 병합하여 ‘주진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주진교가 놓이기 전까지 하촌 배터거리에서 강 건너가지 사람과 우마차 등을 실어 날랐다고 한다. 방림면 쪽으로 넘어가는 길 옆의 산계곡을 따라 남쪽에서 북쪽으로 고인돌 9기가 줄을 지어 자리잡고 있다. 고인돌 주변으로 농경지가 있고, 그 일대에서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 중리 : ‘방내’ 한 가운데가 되므로 장터거리, 관문거리, 불근당, 포교당 등을 통합하여 ‘중리’가 되었다. ◆ 지동리 : 본래는 ‘못골’이라고 부르던 마을이다. 옛날 마을에 있는 연못이 한 해에 세 번만 넘치면 그 해에는 대풍이 든다고 하는 얘기기 전해내려 온다. ◆ 천동리 : 본래는 남면지역으로 옛날부터 땅에서 맑은 물이 솟아 ‘샘골’, ‘생골’로 불렀다. 조선시대 중종 때부터는 ‘정동’으로 부르기도 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나면서부터 ‘천동’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 천변리 : 읍내 남쪽에 있는 사천강 주변 마을로 평창장이 설 무렵 주막이 들어서서 장을 오가던 사람들로 붐비던 곳이다. 냇가에 마을이 있다고 해서 ‘냇가’ 또는 ‘천변’이라고 했다. ◆ 하리 : 방내 아래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라고 해서 향교촌, 아랫들을 통합하여 ‘하리’라 했다. ◆ 하일리 : 평창읍의 북서쪽에 있는 서출동류수 형태의 마을이다. 본래 북면 지역으로, 하씨가 살았다고 해서 ‘하일’이라고 불렀다. 주좌리, 송봉내, 하수청을 병합하여 ‘하일리’로 부르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 행동리 : 본래 북면 지역으로, 살구가 많은 마을이라고 해서 ‘살구실’ 또는 ‘행동’이라 하였다. 강가골, 김가골을 병합하여 ‘행동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 했다. 어구말의 느티나무 수령이 300년이 훨씬 넘은 것으로 보아 마을 역사가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후평리 : 본래 북면 지역으로, 평창 뒤쪽 들판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뒷들이’라 하였다. 서편이, 시루목을 병합하여 ‘후평리’라 하고 평창읍에 편입했다. <출처; 인터넷. 저자; 무기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