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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의 기원은 490년 아테네와 페르시아 간의 전투에서 비롯된다. 아테네 동북쪽에 위치한 마라톤 들판에서 아테네의 밀리티아데스(Militiades) 장군이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이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서 필립피데스(Philippides)가 마라톤 벌판에서 아테네까지 약 40㎞를 쉬지 않고 달려갔다. 필립피데스는 장거리를 종주한 뒤 “우리가 승리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기뻐하라.”라고 외치고 죽고 말았다.
근대올림픽 부활 당시 소르본대학의 언어학자 이셀 브레얼 교수가 이러한 고사(故事)를 쿠베르탱 남작에게 말한 데서 마라톤은 올림픽 경기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인 아테네대회 때부터 마라톤경주가 실시되었다.
필립피데스가 달린 거리는 뒷날 실측해 보니 36.75㎞였다. 그러나 올림픽 개최지의 형편에 따라 경주거리가 40㎞를 전후로 하여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대회가 개최되기 전에 거리를 통일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대회 때의 코스인 42.195㎞를 정식거리로 채택하게 되었다.
이처럼 마라톤경주는 근대올림픽과 함께 성장, 발전해 왔고, 현재는 보스톤·뉴욕·동경·후쿠오카·런던·북경·몬트리올·시드니·서울 등의 국제마라톤대회가 실시되고, 세계육상경기선수권대회 및 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오늘날에는 변형된 방식으로 마라톤경주를 실시하기도 하는데, 경주자의 연령에 따라 경주거리를 단축해서 실시하는 경우나, 거북이마라톤대회·철인마라톤대회 등이 그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실시된 마라톤경기의 효시는 1919년 발족된 조선체육협회가 1920년 용산 신연병장에서 개최한 경성(京城)일주 마라톤(25㎞)이다. 이 경기에서 최홍석(崔洪錫)이 2시간 11분 27초로 우승하였다.
이어 같은 해에 경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1921년 4월에는 제5회 극동대회 파견을 위한 예선대회로서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여 10마일 단축마라톤경기가 열렸고, 1923년 6월에는 경성일보사 주최의 경인역전마라톤대회 등이 계속하여 열리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 마라톤은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그 뒤 1929년에는 일본 간사이대학(關西大學) 주최 제5회 한성역전마라톤대회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출전하여 일본팀들을 물리치고 우승하였을 뿐 아니라 3연승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우승은 일제하의 우리민족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으로, 우연하게도 일제통치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도입된 마라톤이 민족의 설움을 달래는 실마리가 되어 주었다.
1931년 2월에는 고려육상경기회(高麗陸上競技會) 주최로 제1회 경성∼영등포 간의 왕복마라톤대회가 열려 김은배(金恩培)가 1시간 22분 5초로 우승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신궁대회(朝鮮神宮大會)에서도 김은배가 2시간 26분 12초로 당시의 세계기록을 깨뜨리면서 우승을 차지하여 우리의 마라톤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에서는 김은배가 2시간 37분 28초로 6위, 권태하(權泰夏)가 2시간 42분 52초로 9위에 입상함으로써 일제하의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에서도 마라톤은 계속 발전하여 세계제패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었다.
드디어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손기정(孫基禎)이 2시간 29분 19초 2라는 올림픽대회 신기록으로 우승하였고, 남승룡(南昇龍)이 2시간 31분 42초 2로 3위를 하여 한국 마라톤이 세계제패의 꿈을 실현하면서 세계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손기정의 승리는 우리 민족에게 애국과 단결을 더 한층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 베를린대회 때의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버린 사진을 ≪동아일보≫ 호외와 ≪조선일보≫ 사설에 게재하여 일본은 신문폐간과 체육단체의 해체 등으로 탄압하였다.
광복 후 1945년 9월 23일에는 조선육상연맹(朝鮮陸上聯盟)이 조직, 발족되었고, 1947년 4월 제51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최초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한 서윤복(徐潤福)이 2시간 25분 39초로 우승하여 세계에 한국 마라톤의 건재함을 재인식시켜 주었다.
이어 1950년 제54회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도 함기용(咸基鎔)이 2시간 32분 39초로 우승하였고, 송길윤(宋吉允)이 2위, 최윤칠(崔輪七)이 3위를 차지하여 한국마라톤의 탁월성을 다시 한 번 세계만방에 과시하였다.
1952년 제15회 헬싱키올림픽대회에서는 최윤칠이 2시간 26분 36초로 4위를 하였고, 1956년 제16회 멜버른올림픽대회에서는 이창훈(李昌勳)이 2시간 28분 45초로 4위를 하였다. 1958년 5월 제3회 동경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이창훈이 우승하여 우리 나라의 마라톤은 계속하여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뒤 한국마라톤은 침체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도 1982년 제9회 뉴델리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양곤이 우승하고, 1983년 해밀턴국제마라톤대회에서 이홍열·김종윤이 1·2위를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세계기록과는 상당한 차이가 났을 뿐 아니라 1974년 3월 제45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문흥주가 세운 2시간 16분 15초의 한국 기록에도 못 미치는 부진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마라톤 중흥을 위한 노력에 힘써 1984년 3월 제55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1·2위를 한 이홍열·채홍락이 각각 2시간 14분 59초, 2시간 15분 16초를 기록하면서 마침내 문흥주가 수립한 한국 기록을 돌파하였다. 또한 1986년 3월 제37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는 유재성이 2시간 14분 6초로 다시 한국 신기록을 수립하여 10년간 정체되었던 한국 마라톤에 중흥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유재성의 기록은 1985년 포르투갈의 로페스(Carlos Lopez)가 기록한 2시간 7분 12초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기록갱신에 많은 노력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1987년 제5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이종희가 2시간 12분 21초로 한국 기록을 세우며 세계기록과의 격차를 줄여 나갔다. 이어 김완기가 1990년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11분 34초로, 1991년에는 2시간 11분 2초로 두 번의 한국 최고기록을 세우며 한국 마라톤의 희망과 용기를 주기 시작하였다.
그 뒤에 황영조(黃永祚)가 1992년 벳부 오이타 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8분 47초로 우승하며 한국 최고기록을 수립하였다. 황영조는 2시간 10분 이내의 기록갱신자로 1억 원의 포상금을 받고 세계적인 선수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1992년 바로셀로나올림픽대회에서 황영조는 2시간 13분 29초로 일본의 모리시다와 치열한 선두 다툼을 하면서 메인스타디움에 1위로 골인하였다. 우리 나라는 손기정 이후 다시 한번 올림픽우승의 영광을 얻게되며 황영조는 ‘마라톤 영웅’이라는 호칭도 붙게 되었다.
김재룡은 이 대회에서 2시간 15분 1초로 10위를 하였다. 그리고 김재룡은 1993년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9분 43초로 2위를 하여, 1950년 함기용이래 처음으로 이 대회에서 입상하였다.
1994년 김완기가 2시간 8분 34초로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자, 황영조는 1994년 보스톤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8분 9초로 5위를 하면서 또 한 번의 한국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그 뒤에 1996년 황영조는 히로시마아시아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에서는 이봉주(李鳳柱)가 남아프리카의 투가니와 라아스트까지 각축전을 벌이다 은메달을 획득하고, 1998년 로테르담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7분 44초 2위를 하면서 한국 최고기록을 수립한다.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서도 우승하여 우리 나라는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 3연패를 이룩하였다.
현재 세계 기록은 1998년 브라질의 다코스타가 세운 2시간 6분 5초이고, 세계기록과는 멀게만 느껴졌던 우리 선수들은 이봉주가 얼마남지 않은 세계 기록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모든 선수들은 기록 단축을 시키기 위하여 전력질주하고 있다.
여자 마라톤은 1981년 임은주가 3시간 16초로 기록되어 있고, 1983년 임은주는 해밀턴국제마라톤대회에서 2시간 39분 51초로 한국 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였다. 그러나 여자마라톤은 선수 층이 빈약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1987년 제2회 월드컵마라톤대회에서 김미경이 2시간 32분 40초로 5위를 하면서 한국 기록을 6분 이상 앞당겼다. 이 때(1987년) 세계랭킹 41위로 주목을 받으며 여자마라톤은 곧 2시간 30분 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하였다.
그러나 선수층이 낮은 여자마라톤은 1996년 오미자가 2시간 30분 9초로 9년이 세월이 흘러 한국 최고기록을 세웠다. 그 뒤에 권은주가 1997년 조선일보마라톤에서 2시간 26분 12초의 좋은 기록으로 한국 최고기록을 수립하며 세계랭킹(1997년) 7위로 여자마라톤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현재 남자 마라톤 세계 기록은 케냐의 엘리우드 킵초게가 2018년 9월 16일 베를린 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 01분 39초이다. 여자 마라톤 세계 기록은 영국의 폴라 래드클리프가 2003년 4월 13일 런던 마라톤에서 세운 2시간 15분 25초이다. 마라톤은 세계 기록이 단축되면서 레이스 배분도 예전의 완주로부터 지구력 위주에서 현재는 스피드업(Speed up)이라는 형태를 취하여 초지구력과 스피드를 함께 지니고 있지 않으면 승자가 되지 못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운동 개요
2010년 현재 우리나라 마라톤 동호인 수는 약 200만 명으로 추정되며,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대회만도 80여 개나 된다. 달리기 열풍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아마추어 마라토너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마라톤이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는 반면에 자칫 잘못하면 생명을 위협하는 불상사도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체력수준에 맞게 달리는 것이 중요하다. 마라톤 대회는 5km, 10km, 하프 마라톤, 30km 대회 등 풀코스 마라톤 이하의 대회가 많이 있으므로 자신의 주력이나 체력, 훈련량에 따라 마라톤을 즐기고 대회를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초보 마라토너들은 최소 1년 이상 꾸준히 연습한 후 풀코스에 도전하는 것이 좋다.
운동 순서
1. 시선은 약 20m 전방을 자연스럽게 바라보고, 머리는 편안한 자세가 좋다.
2. 어깨와 팔목에 힘을 최대한 빼고, 팔이 L자가 되게 굽힌 다음 자신의 양 엄지손가락이 앞가슴을 스치지 않도록 붙여 최대한 크게 뒤로 쳐준다.
3. 허리는 본인이 서 있을 때는 일자로 서 있지만, 달릴 때는 상체가 약 5° 정도 숙이도록 한다.
4. 골반에 중심을 둔 채, 보폭은 허벅지를 이동시킨다는 느낌으로 무릎을 약간씩 들어주며 달린다.
5. 공중에 뜰 때는 발목에 힘을 빼고, 착지할 때는 발뒤축을 앞으로 뻗는다. 뒤꿈치가 착지됨과 동시에 발바닥을 굴려서 발가락 쪽으로 튕겨주면 허리와 골반, 착지된 발의 무릎 오금이 펴지면서 앞으로 나가게 된다.
6. 호흡법으로서 많은 양의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입과 코(7:3)로 동시에 호흡하는 것이 유리하다. 초보자들은 왼발, 오른발의 두 스텝을 내디딜 때 들이마시고, 그 다음 왼발, 오른발의 두 스텝을 내디딜 때 내쉬는 two & two 호흡법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러나 속도가 빨라지거나 마라톤 후반부에서는 더욱 많은 양의 산소를 섭취해야 하므로 이때에는 일대일 호흡법을 사용해야 한다.
동아일보 주최로 1931년부터 시작된 우리 나라 마라톤 대회의 효시. 당시는 경성역(京城驛 : 지금의 서울역)∼영등포역 간의 약 20㎞ 구간에서 거행하기 시작했다. 제3회 대회부터는 경성역∼망우리로 코스를 변경. 제1회 우승자 김은배(金恩培)는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 제3회 대회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은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한민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1940년 10회를 마지막으로 대회개최가 중단되었던 것이 1954년 부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64년 제35회부터 42.195㎞의 정식 풀 코스(경인 가도)에서 경기를 거행했다. 그 첫 우승자는 이창훈(李昌薰)으로 기록은 2시간 27분 13초. 1970년 41회 대회부터는 의정부 왕복 코스로 바꾸었고 이때부터 일본인 선수를 초청하는 것을 시작으로 국제 대회의 성격을 띠었다. 1982년에는 '서울 국제 마라톤'과 병합, 제53회 대회를 가졌다. 이때부터 '동아 국제 마라톤'으로 개칭. 1994년 3월 경주 코스에서 거행된 제65회 대회에서의 김완기(金完基)의 2시간 08분 34초는 이 대회 최고 기록이다.
마라톤(문화어: 마라손, 마라쏜, 영어: marathon)은 육상 경기의 한 종목으로, 42.195 km (26마일과 385야드)의 거리를 달리는 도로 경주이다. 마라톤은 일반적으로 포장된 도로, 즉 아스팔트 도로에서 개최된다. 현재 마라톤 강국은 케냐와 에티오피아이며 (대한민국은 금메달 2개 획득), 이 중 에티오피아는 올림픽에서 금메달도 여러 개 딴 실질적 마라톤 강국이다. 2012년에는 우간다 선수가 케냐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따기도 하였다.
마라톤은 1921년까지 완주 거리가 공식적으로 표준화되지 않았지만 1896년 개최된 최초의 근대 올림픽 종목 중 하나이다. 마라톤 대회 규모에 따라 수만 명의 참가자가 있을 수 있고, 매년 800개 이상의 마라톤이 전세계에서 열리지만, 대다수의 경쟁자들은 아마추어 운동선수들이다.[1]
유래
1896년 올림픽 마라톤.
마라톤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북동쪽 약 30Km 떨어져 위치한 지역 이름으로서, 이 곳에서 기원전 490년에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에서 아테네의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뛰어가 전한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기리는 뜻에서 1896년에 올림픽에 채택된 육상 경기 종목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역사 6, 106-107)에 따르면 기원전 490년 아테네가 페르시아군이 마라톤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파견하였으며 페이디피데스는 약 200Km의 거리를 이틀에 걸쳐 돌주하였다고 한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 원군을 파병하는데 동의 하였으나 스파르타의 전통에 따라 만월에 출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도움없이 몇몇 동맹도시의 도움으로 마라톤 평야에서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여기서 헤로도토스는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승전 소식을 아테네에 전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마치 전설처럼 퍼져 있는 마라톤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는 후대에 지어낸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마라톤 전투와 관련된 일화로 페이디피데스가 스파르타로 질주하던 중 팬(판)신이 나타나 아테네의 건투를 약속했다고 하며, 이를 기리기 위해 아테네에서는 횃불 들고 달리기를 해마다 열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마라톤 전투에서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예국인 이란은 마라톤을 금기하고 있다. 때문에 올림픽과 아시아 경기대회 등 세계대회에서 마라톤 종목에 출전한 선수는 단 1명도 없었으며 자국의 도시인 테헤란에서 열린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이 아예 제외되었고한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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