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수비의 숨은 힘 - 울산 현대 박병규 | |
한국프로축구연맹 | 07.12.24 |
울산의 수비는 K-리그 14개 팀 중 최고로 꼽힌다. 울산은 올해 가진 40경기에서 허용한 골은 단 29골에 불과하다. 평균 실점은 0.72골이다. 이 기록은 서울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또한 최근 5년간 울산의 평균 실점은 1골을 넘어선 적이 없다. 그만큼 울산의 수비는 안정적이다.
울산의 수비가 강한 이유는 스리백 라인에서 찾을 수 있다. 유경렬, 박병규, 박동혁으로 이어진 스리백 라인은 강력한 대인방어와 안정된 조직력으로 K-리그 공격수들을 무력화시켰다. 2년 동안 호흡을 맞춘 이 스리백 라인은 준 국가대표급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K-리그 최정상급 수비 라인 중 하나다.
특히 가운데서 수비라인을 조율하는 박병규의 활약이 매우 크다. 침착성과 안정된 경기 운영이 돋보이는 박병규는 울산 수비 라인을 이끄는 리더이다. 박병규는 자신의 장점인 침착성과 경기 운영을 그라운드에서 십분 발휘하며, 울산의 수비를 좀 더 냉철하고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12월 20일 저녁 8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에서 박병규를 만났다. 박병규는 시즌이 끝난 뒤, 뜻하지 않는 부상을 당해, 휴가다운 휴가를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희망찬 마음을 가지고, 벌써부터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수비와 박병규와의 만남
어린 시절 박병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선수가 아니었다. 꾸준히 열심히 하며, 성실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였고, 일정한 수준의 기량을 유지하는 평범한 선수였다. 그래서 경험이라는 요소가 중요시되는 수비수는 그에가 가장 적합한 포지션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평범했습니다. 특출하게 잘하지도 않았고, 못하지도 않았죠. 보통 기량을 가진 평범한 선수였어요. 처음 접한 포지션은 골키퍼였어요. 골키퍼를 볼 사람이 없어서 했어요. 키가 커서도 아니고, 재능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골키퍼는 오래 하지 않았어요, 공식 경기 1경기 출전이 전부죠.
수비수는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수비가 제일 재미있었죠. 공격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포지션이 바로 수비수였어요. 특히 오프사이드 트랩을 잘 사용했어요. 친구들이 농담 삼아 '오프사이드 트랩 쓰기 대회가 있으면, 1등 하겠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어린 시절부터 오프사이드 트랩을 잘 사용했다고 말하는 박병규.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재 경기 운영 능력에서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박병규가 떠올랐고, '박병규는 타고난 수비수가 아닐까?' 라는 추측해보았다.
"공격수는 타고난 경우가 있어요. 하지만 타고난 수비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축구를 하면서 타고난 수비수를 본 적도 없고요. 수비수는 경력이 쌓이면서 실력이 늘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운동했어요. 지금도 그러한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노력도 많이 했죠. 열심히 뛰었고, 개인 훈련에 매진했습니다. 물론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가끔 과도할 정도로 많이 생각해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어요, 공격수가 저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공간을 내줄 때가 대표적인 예죠."
대표팀과 박병규와의 어긋난 만남
박병규는 부평고등학교 입학을 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부평고등학교 입학 후 수많은 우승 기록을 쌓으며,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청소년 대표팀에도 박병규의 이름을 새기게 되었고, 2000년 이란에서 열린 아시아 U-19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박병규와 대표팀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 대회에서 우리나라는 조 예선 탈락이라는 좋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박병규는 경기를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에서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러모로 좋지 않는 기억이 많은 대회였다.
"사실 충분히 조별예선을 통과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죠. 중국에게 졌었는데요. 42년 만에 졌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마지막 경기였던 이라크 전을 이겼으면 조별 예선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경기는 안 되더라고요. 저는 밖에서 보고 있었는데요. 골대 바로 앞에서도 골이 안 들어가더라고요. 결국 0대0으로 비겨서 떨어지고 말았죠."
박병규에게 2004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도 인연이 아니었다. 매번 부상이라는 악재가 그를 막았다. 결국 박병규는 3차 소집을 마지막으로 올림픽 대표팀과의 인연을 정리했다.
"올림픽 대표팀은 저와 인연이 아닌 것 같아요. 올림픽 대표팀에 소집하게 되면, 항상 부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연습 경기 두 차례 정도 뛴 게 전부죠. 그럼에도 불구하게 계속해서 올림픽 대표팀에 포함된 것에 감사하죠. 그리고 당시 올림픽 대표팀은 프로팀 선수 위주였어요. 대학생이었던 저로써는 주전 경쟁이 쉽지 않았죠."
ⓒ울산 현대
박병규는 울산 입단 후 더욱 안정적인 플레이를 펼쳤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쯤, 국가대표팀 감독이 교체될 때마다 박병규가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하지만 발표되는 국가대표 팀 명단에는 매번 박병규의 이름이 없었다.
"기대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 되더라고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국가대표에 대한 기대는 접었어요. 현재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처럼 열심히 운동하고, 꾸준히 경기에 출전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아요."
우승과 함께한 입단 첫 해
2005년 울산에 입단한 박병규는 입단 첫 해에 주전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였다. 같은 자리에 유상철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 김정남 감독도 박병규를 후보 선수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병규에게 뜻하지 않는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 첫 기회는 3월 16일 삼성 하우젠 컵 4라운드 포항과의 경기였다,
"입단 첫 해에 주전으로 뛸 가능성이 없었어요. 특히 (유)상철이 형이 제 자리인 중앙 수비수 자리를 차지했거든요. 자신감을 가져야 했는데요.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때, 주전 자리는 차지할 수 없었죠. 하지만 대표팀 차출과 부상이라는 변수가 있었어요. 운이 좋았죠. 국가대표팀 차출과 부상으로 (유)상철이 형과 (유)경렬이 형이 빠지면서, 저에게 경기 출장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데뷔전은 포항과의 경기였어요. 경기 전에 감독님께서 연고전이 더 떨렸다고 하시면서, 긴장하지 말고, 열심히 뛰라고 조언해주셨어요. 그 경기에서 감독님 믿음에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최선을 다하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정말 많이 뛰었죠. 사실 뛰면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김정남 감독은 박병규에 대해 "좋은 활약 펼치고 있다."며, "의외의 성과"라고 평했다. 좋은 평가였다. 이후 박병규는 경기 출장 기록을 꾸준히 늘려가며, 주목받는 신인 선수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시즌 중반 그에게 뜻하지 않는 경쟁자가 찾아왔다. 바로 수원의 수비를 책임지던 무사였다. 무사는 여름 이적 기간을 통해 수원에서 울산으로 배를 갈아탔다.
"무사가 온다는 소식에 긴장을 많이 했습니다. 무사는 수원에서 어느 정도 검증받은 선수잖아요. 반면 저는 아직 주전 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지 못한 신인 선수잖아요. '게임을 못 뛰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무사 입단 후 오른쪽 윙백과 중앙 수비수를 번갈아 뛰었어요. 제 자리는 오직 중앙 수비수인가 봐요. 어느 순간부터 중앙 수비수로 뛰기 시작했어요. 뛰면서 항상 '무사보다 잘 뛰어야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병규는 실력으로 무사라는 강력한 경쟁자를 떨쳐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떨쳐내지는 않았다. 그와 함께 뛰었던 울산의 모든 선수들이 그의 조력자였다.
"실수를 했을 때, 형들이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러주고,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력이 뛰어난 형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수를 했을 때, 커버를 잘 해주었어요.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예요.
당시 (김)정우와 (이)호가 앞에서 참 잘해주었어요. 미드필더 라인에서 잘 막아 주어서, 수비는 정리만 잘하면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편했죠."
2005년 울산은 인천의 강력한 도전을 뿌리치며, 9년 만에 K-리그를 우승했다. 2005년 입단해 주전으로 도약한 박병규에게는 의미 있는 우승이었다.
"운이 있었어요.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거두었던 전북 전도 그랬고, 역전승을 거둔 플레이오프 성남전도 그랬죠. 인천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 그렇게 크게 이길 줄 몰랐고요. 실력은 모두 비슷한 것 같아요. 운이 따르는 팀이 우승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포항도 운이 있었기 때문에, 우승한 것 같아요.
K-리그 우승은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신인 첫 해 주전으로 들어가서, 우승한 것은 큰 것 같아요. 만약 팀 성적이 좋지 않았다면, 주전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 "
새로운 도전 속에 맞은 2006년
2006 시즌을 앞두고 울산의 큰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은 중앙 미드필더의 조합이었다. 지난해 중앙 미드필더 진영을 책임진 김정우는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했고, 이호는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김정남 감독이 내세운 카드는 바로 박병규였다. 박병규는 리그 개막을 알리는 전북과의 슈퍼컵부터 수비형 미드필더를 출전하며, 변신을 꾀했다.
"슈퍼컵에서는 괜찮은 활약을 펼친 것 같아요. 하지만 가면 갈수록 체력 소비가 심해져, 힘이 들었어요. 결국 제 자리로 다시 돌아왔죠. 사실 다른 포지션으로 가면 어색해요. 중앙 수비수는 저에게 천직인가 봐요."
ⓒ울산 현대
중앙 수비수 자리를 되찾은 박병규는 변함없는 플레이를 선보였다. 안정적이었고, 기복도 없었다. 2년차 징크스라는 것도 찾을 수 없었다. 김정남 감독은 "승리의 숨은 주역"이라고 평하며. 변함없는 믿음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도 저만 잘하면 되었어요. 경기를 조율할 필요도 없었어요. (유)경렬이 형이나 (박)동혁이 형은 베테랑인데다가, 국가대표 경험도 있잖아요.
평범해서 2년차 징크스는 없었던 것 같아요. 만약 신인왕을 받았다면, 2년차 징크스를 경험했을 거예요. 저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이죠. (박)주영이 같은 경우도, 2년차에 기대치가 한 층 높아졌고, 그것에 부흥을 하지 못 했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은 것 같아요.
감독님 믿음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어요. '더 열심히 해서, 기대에 부흥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주문하시는 것도 항상 똑같아요. 볼을 잡으면 쉽게 차라는 말씀만 하세요. 좋은 곳으로 주려고 하지 말고, 쉽게 처리하고 하세요."
시즌 중반 이후 울산은 힘을 내기 시작했다. 특히 A3 챔피언컵과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이 대단했다. A3 챔피언컵에서 화끈한 공격력을 선보이며 우승을 차지했고. AFC 챔피언스 리그 8강전 알 사밥과의 경기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4강전에 안착했다.
"우리 팀은 외국 팀에게 강한 것 같아요. 우리 팀 전략이 잘 맞아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경기가 재미있었어요. 사실 그 때 수비는 크게 할 것이 없었습니다. 볼 잡아서, 공격수에게 연결하면, 공격수들은 골을 쉽게 넣었죠."
하지만 울산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울산은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 전북과의 경기에서 시련을 맞았다. 울산은 1차전에서 3대2의 역전승을 거두며, 결승전에 한 걸음 다가섰지만. 2차전에서 4대1의 패배를 기록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특히 전반전에 세트 피스 상황에서 연거푸 2골을 허용한 것이 컸다. 집중력 부족이 울산 수비진의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솔직히 100% 이길 줄 알았어요. 긴장을 늦추지 않았고, 자신감을 가지고 뛰었어요. 그런데 골을 너무 쉽게 먹혔어요. 전북은 세트 피스만 연습했다고 들었어요. 우리 팀이 그것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죠.
그리고 전북이 워낙 경기를 잘 했어요. (임)유환이가 3대1 상황에서 쐐기 골을 기가 막히게 넣잖아요. 그런 거 생각하면 축구는 정말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강자도 없었고, 약자도 없죠."
개인적인 목표를 다 이룬 2007년
2007 시즌을 앞두고 울산은 터키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전지훈련 기간 중 박병규에게 한 번의 호기가 찾아왔다. 바로 유럽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박병규는 터키 명문 베식타스의 러브콜을 받으며, 이적설이 나돌았다.
"이적설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그 때 상황이요. 부상으로 일주일 정도 쉬고, 운동을 며칠 하지 못 했어요. 그런 상황에서 연습 경기에 나섰고, 그 경기를 터키 구단 관계자 분들이 보러 왔어요. 그리고 측면 풀백을 봤었는데요. 플레이가 너무 안 좋았어요. 전체적으로 타이밍이 많지 않았죠. 사실 신경도 안 썼어요. 무덤덤했고, 큰 기대도 없었습니다."
박병규는 터키 이적설을 그저 한 번 스쳐가는 인연으로 여겼다. 울산에서 이뤄야 하는 것도 많았고, 그가 책임져야 하는 몫도 많았다. 울산 김정남 감독은 전지훈련 기간 동안 스리백에서 포백으로 전환했고, 박병규를 오른쪽 풀백으로 기용하며, 그의 활용가치를 높였다.
이에 박병규도 평소와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섰다. 찬스가 생길 때마다 전진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만족스러운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 덩달아 울산의 수비도 불안해졌다. 4월에 가진 성남과 대구 전에서 3골을 허용하며, 울산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비력이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오른쪽 풀백으로 기용해 주셨죠. 역시 어색해요. 저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았어요. 특히 공격을 하면 더욱 어색했죠. 공격할 때, 정말 정신도 없었어요.
지난 2년 동안 뛰면서 K-리그에서 3골을 먹힌 적이 거의 없어요. 하지만 올 4월에 연거푸 2번이나 3골을 허용했습니다. 울산답지 못한 모습이었죠. 대구 전에서 3골을 허용한 이후, 스리백으로 전환했어요. 저도 중앙 수비수로 되돌아 왔죠. 스리백에 팀 컬러에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울산의 변화는 대성공이었다. 수비는 안정을 되찾았고, 공격도 활발해졌다. 울산은 19경기 연속 무패 행진과 컵대회 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컵대회 결승전 서울과의 경기에서 울산의 수비는 대단했다. 90분 내내 서울의 맹공을 효과적으로 막았다. 울산의 강력한 수비벽에 막힌 서울은 김은중의 PK골에 만족해야 했다.
"서울 전은 힘들었고, 부담스러웠어요. 당시 서울은 대부분의 주전 선수들이 부상을 당해 1.5군으로 경기에 나왔어요. 반면 저희는 주전 선수 모두가 나왔고요. 이런 경우, 서울은 져도 손해 볼 게 없잖아요. 또한 서울의 홈 경기였고요. 다행이 2대1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듯이, 이겼어요. 우승을 해서 안도의 한숨을 돌렸죠."
울산은 6강 플레이오프에서 징크스에 웃고 울었다. 울산은 울산에서 6강 플레이오프 첫 상대로 대전을 만났다. 그동안 울산은 대전만 만나면 강해졌다. 특히 홈경기에서 2002년 이후 패배를 기록한 적이 없었다. 5연승을 달린 대전의 거침없는 상승세도 울산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울산은 효율적인 축구를 선보이며 2대0의 완승을 기록했다.
대전을 꺾은 울산의 다음 상대는 포항이었다. 울산은 포항 앞에서 번번이 무너졌다. 2006년 K-리그 최종전에서 포항에게 패하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놓쳤고, 올 시즌 무패 행진도 포항에게 패하며, 19경기로 마감해야 했다. 그래서 울산은 이번 기회를 통해 포항 징크스를 떨쳐내려고 했다. 하지만 포항은 이광재의 결승골로 울산을 무너뜨리며, 다시 한 번 징크스를 확인시켜 주었다.
"징크스 같은 게 무시 할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 팀은 대전만 만나면 강했잖아요. 아무리 대전이 페이스가 좋아도, 이길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 경기도 잘 맞아 떨어졌고요. 골도 쉽게 터트려서, 이길 수 있었죠.
반면 포항이 이상하게도 우리 팀 발목을 잡은 적이 많았어요. 이번에도 역시 그랬죠. 1대1 상황에서 이길 줄 알았어요. 결승골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요. 그래서 1대1 상황을 허락하게 되었죠. 정말 아쉬웠어요. 가장 후회되는 경기 중 하나예요."
울산은 K-리그 우승을 차지하지 못하며 아쉬운 한해를 보냈다. 하지만 박병규 본인에게 2007년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 한 해였다. 큰 부상 없이 38경기를 출장했고, 3시즌 만에 K-리그 통산 1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팀 목표가 우선이죠. 그래서 시즌 초반 세워둔 목표는 K-리그 우승이었어요. 하지만 우승하지 못해, 아쉬움이 큽니다. 개인적인 목표는 부상 없이 뛰면서, 주전 자리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꾸준히 뛰자.'가 목표였죠. K-리그 100경기 출전도 목표였어요. 올 시즌 돌이켜 보면 경기도 꾸준하게 나왔고, 100경기 출전도 플레이오프 경기를 통해 이루었죠."
박병규는 시즌이 끝난 뒤, 훈련 중 발목을 다쳤다. 프로 생활 후 가장 큰 부상을 당했다. 현재 재활 치료 중이다. 다행스럽게도 박병규는 내년 시즌을 준비하는 데 큰 지장이 없을 전망이다.
그래서 박병규는 내년 시즌에 대한 청사진도 조심스럽게 그려볼 수 있게 되었고, 구체적인 목표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내년 시즌 목표를 물어보며, 인터뷰를 끝마쳤다.
"지금 발목을 다쳤어요. 11월 중순에 운동하다가 발목이 삐었어요. 그래서 푹 쉬었죠. 12월 초부터 재활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깅도 못하고 있어요. 시즌이 끝난 뒤 다쳐서 그나마 다행이죠. 1월 3일에 팀 훈련에 합류해야 하는데요. 빨리 회복되면 전지훈련에 정상적으로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조급한 마음이 없지 않아 있어요. 3년 동안 주전으로 뛰었다고 하지만 주전 경쟁은 항상 있잖아요. 올해 좋은 신인 선수들도 들어왔는데요. 빨리 치료해서 다시 한 번 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죠. 그것이 축구 선수들이 가지는 당연한 목표잖아요. 내년에도 목표는 단 하나예요. 열심히 노력해서, 꾸준히 경기에 나서는 것입니다."
K-리그 명예기자 김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