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그리스인 조르바 28 추악한 무리
포플러 밑에서 벌어진 부활절 축제의 춤은 바야흐로 한창이었다. 춤을 이끄는 것은 스무 살쯤 된 키 크고 잘생긴 얼굴에 살결이 검은 청년이었다. 면도날이 가 닿은 적이라고는 없는 검은 솜털이 뺨을 뒤덮고 있었다. 셔츠를 열어젖힌 자리에 검은 피부가 드러나고 곱슬곱슬한 털이 수북했다. 고개를 벌떡 뒤로 젖히고 날개처럼 가벼운 두 다리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췄고, 이따금 어떤 아가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끊임없이 번뜩이는 눈의 흰자위가 해에 그은 얼굴빛과 어지러운 대조를 이뤘다.
그렇게 부활절 축제가 계속되고 있었다.
화자도 마을로 나가 그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다음은 그 축제의 현장에서 화자의 마음에 파고든 상념이다.
매순간 죽음은 죽어가고 생명은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삶과 같았다. 수천 년 동안 봄이 오면 신록이 우거진 나무 그늘에서 처녀 총각들이 모여 춤을 추었다. 포플러 밑에서, 전나무 밑에서, 떡갈나무 밑에서, 플라터너스 그리고 날씬한 종려수 그늘에서 그들은 정욕에 이글거리는 얼굴로 앞으로 또 수천 년을 계속 춤을 출 것이다. 얼굴을 바뀌고 허물어져 땅으로 들어가지만 다른 사람ㄷ글이 일어나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한다. 춤추는 이는 오직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는 천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갓 스물, 그는 불멸의 젊음이다.
갑자기 그 축제장이 조용해졌다.
늙은 성당지기 안드롤리오가 두 손을 뻗쳐 든 채 광장으로 달려 나왔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 이어진 대목이다.
“과부가, 과부가!” 숨이 차서 그는 외쳤다.
경관 마놀라카스가 춤의 대열에서 빠져나와 맨 먼저 그에게로 달려갔다. 광장에서는 아직 도금양과 월계수 장식이 펼쳐진 교회가 보였다. 머리 위로 피가 몰린 채 춤을 추던 사람들은 제자리에 섰고 늙은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라를 무릎 위에 놓은 파누리오는 사월장미를 귀 밑에서 뽑아 냄새를 맡았다.
“어디 있어, 안드롤리오?” 화가 치민 그들은 소리쳐 물었다. “어디 그 여자가 있느냐고?”
“교회 안에 그 계집이 막 들어왔어요. 레몬꽃을 한 아름 안고 말입니다.”
“가자, 그 여자를 잡아!” 앞장서 달리면서 경관이 소리쳤다.
바로 그때 검은 수건을 머리에 두른 과부가 교회문 계단 위에 나타났다.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더러운 년! 갈보년! 살인자!” 목소리들이 저마다 외쳤다. “뻔뻔스럽게 여기 나타나다니! 그년을 붙잡아, 그년이 마을을 창피하게 만들었어!”
몇 사람은 경관을 따라 교회로 뛰어가고 다른 사람들은 위에서 그녀에게 돌팔매질을 했다. 돌 한 개가 그녀의 어깨를 맞혔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앞으로 달렸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벌써 교회 입구에 가 닿았고 마놀라카스는 칼을 꺼냈다.
과부는 공포에 질린 짤막짤막한 비명을 내면서 뒷걸음질 쳤다.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리고 넘어지며 다시 피난처를 찾아 교회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입구에 마브란도니가 떡 버티고 서버린 다음이었다. 두 손으로 문 양쪽을 버티며 그는 길을 막았다.
과부는 왼쪽으로 껑충 뛰더니 성당 뜰에 있는 큰 노송나무를 붙들고 늘어졌다. 휙 돌 한 개가 날아가더니 그녀 머리를 맞히고 수건을 떨어뜨렸다. 머리가 풀리면서 우수수 흐트러져 어깨를 덮었다.
“예수님! 예수님의 이름으로!” 과부는 실편백나무를 꼭 붙들면서 소리를 질렀다.
마을의 젊은 여자들은 광장에 줄지어 늘어서서 흰 수건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벌어지는 광경을 열심히 쳐다보고, 늙은 여자들은 벽에 기대어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년 죽여! 그년 죽여!”
젊은 두 사내가 그녀를 밀쳐서 붙들었다. 검은 블라우스가 찢겨 나가면서 대리석처럼 흐ㅢ게 빛나는 두 유방이 드러났다. 머리 꼭대기에서 흐르는 피가 이마에서 볼로 그리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여자는 헐떡거렸다.
교회 입구에 그때까지 버티고 서 있던 마브란도니가 손을 들었다. 모두가 주춤했다.
“마놀라카스, 자네 사촌의 피가 자네에게 보굿를 외치고 있네.” 그는 굵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영혼에게 평화를 주게.”
나는 기어 올라갔던 담에서 뛰어내려 교회 쪽으로 달려갔다. 돌이 발에 걸리더니 내 몸은 그만 나동그라졌다.
바로 그때 시파카스가 내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굽히더니 고양이를 들어 올리듯 목에 건 스카프를 잡아당겨 나를 일으켜 세웠다.
“여기는 당신 같은 사람이 얼씬거릴 곳이 못 돼요.” 그는 말했다. “썩 꺼지시오.”
“시파카스, 자네는 그녀의 처지가 아무렇지도 않나?” 나는 물었다. “그녀를 불쌍히 여겨주게!”
야만의 산사나이는 내 얼굴에다 야유의 웃음을 퍼부었다.
“내가 여잔 줄 아시오? 불쌍히 여기라고 부탁하게. 나는 남자요.”
그 말을 하자마자 그는 교회 마당으로 들어갔다.
나도 바로 그의 뒤를 쫓아갔는데 숨미 막힐 것만 같았다. 그들은 이제 과부를 빙 둘러쌌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박해를 당하는 자의 목이 꼭 죈 숨소리만이 들렸다.
성호를 그은 마놀라카스는 한 발짝 앞으로 나가면서 단도를 치켜들었다. 벽에 기대 선 늙은 여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젊은 아가씨들은 수건을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렸다.
과부는 눈을 들었다. 머리 위에 칼을 보았다. 어린 암소 같은 소리가 목에서 새어나왔다. 실편백나무 밑동에 펄썩 쓰러진 그녀의 두 어깨 사이로 머리가 푹 파묻혔다. 치렁치렁한 머릿단이 딸을 덮었다. 통곡하는 그녀늬 목이 어스름한 빛에 번득였다.
“나는 하느님의 정의를 요구합니다.” 늙은 마브란도니 역시 성호를 그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렁찬 소리가 우리 등 뒤에서 들렸다.
“칼을 내려놔, 이 사람 백정아!”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마놀라카스는 머리를 들었다. 화가 난 조르바가 두 팔을 휘저으며 그의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닌가, 고함 소리가 터졌다.
“창피하지도 않아? 참 훌륭한 사나이들이시군! 온 마음이 달려들어 여자 하나를 죽이려고 법석이라니! 조심해요. 잘못하다가는 온 크레타 사람의 명예를 망쳐놓겠소!”
조르바가 뒤늦게 그 추악한 현장에 끼어들어, 귀 반쪽까지 물어뜯길 정도로 경관 마놀라카스와 거친 싸움 끝에, 일단 죽임을 당할 위기에 몰렸던 과부 소멜리나를 구해내기는 한다.
그러나 잠시였다.
곧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인을 미워하는 또 다른 그 마을 사람인 마브란도니가 달려들어 그녀의 머리채를 세 번 팔로 휘감아 쥐기가 무섭게 단칼에 그녀의 목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비겁하게도 군중심리에 편승해서 ‘정의’라는 구차스러운 명분을 내세워, 그 여인을 죽음으로 심판해버린 추악한 무리들이었다.
나도 그런 무리에 속해 있을 때가 있었다.
47년 전으로 거슬러, 군 복무의 마지막 단계인 병장 계급으로 승진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앞서 제대를 했던 선배 하나가 군 시절이 그립다면서, 울산 외곽의 연암마을에 자리 잡고 있던 우리 부대를 찾아왔었다.
그 사실을 안 고참 병장 하나가 나 같은 후배 병장들을 끌어 모아서 하는 말이 이랬다.
“절마 저거, 디질라꼬 여 왔나. 씨발 새끼! 지가 우리한테 우예 했노 말이다. 맨날 빠따만 쳐댔잖아! 안 그래? 저 씨발 새끼를 그냥 보내만 안 된다. 조 패서 보내자. 앞으로는 절대로 여기 얼씬 모하게 말이다.”
복수 심리의 부추김이었다.
사실 나는 부서가 다른 그 선배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매를 맞은 적이 없다.
그러니 그렇게 부추긴다 해서, 나와 상관없는 일에 부화뇌동해서 나설 필요도 없고 나서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에 한참을 더 함께 복무해야 하는 그 고참 병장으로부터 받게 될 또 다른 보복이 두려웠다.
결국 그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끝내 그 선배에게 주먹을 높이 치켜들고 마치 팰 듯 하는 치졸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비록 타격을 가하지는 않았지만, 내 든 그 주먹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보다가 슬금슬금 뒷걸음쳐 부대를 빠져나가던 그 선배의 모습이, 지금껏 내 삶의 부끄러운 이력으로 남아있다.
나를 부추겼던 그 고참 병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부산 출신의 그 선배 이름은 여태 잊지 못하고 있다.
너무 깊이 내 가슴에 새겨져서다.
그 새겨진 이름 석 자, 곧 이렇다.
‘백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