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화하기 이를데 없는 연경의 거리 한 가운데 커다란 전각이 우뚝 솟아있는 이곳은 가혹한 관문을 통과한자에 한해서 공식적으로 애래이문에 정식입문이 허가되는 입문관(入門館)...
1년에 한번밖에 열리지않는 입문관으로 강호의 내노라하는 신진고수들이 속속 모여들고있었는데...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 촛점없이 먹을것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야수의 눈빛에
남루한 옷차림의 검사가 좌수검(左手劍)을 허리에 차고 입문관 근처 객점에 들어섰다.
"어서오십셔~! 무엇을 드릴까요?"
점소이가 달려와 그를 맞이하자 그는 쉬어버린 쇳소리로 한마디 내뱉는다.
"죽엽청과 오리구이를 주게."
주문을 받은 점소이는 주방으로 가면서 이상한 눈빛으로 그를 흘끔거린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입문관 지원자인것같은데 잘못 찾아온것이 아닌가? 명색이 천하제일문에 입문한다는자의 행색이 저게 뭔가? 애래이문에서는 무공실력뿐 아니라 밝고 맑은 심성과 그것이 외적으로 표현되는 옷차림, 용모에도 커다란 비중을 두거늘...저런놈은 투래시방 하급무사가 딱 어울리겠는데...애래이문이 천하제일문이다보니 가끔씩 저런 떨거지들도 입문하겠다고 날뛴단말이야...'
점소이는 홀로 키득거렸다. 그 순간,
객점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화려한 차림의 금의인(金衣人)한사람이 좌우에 호법을 대동하고 들어선다.
더구나 1년밖에 흐르지않은 이 시점에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애래이파 신진고수들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며 그 이름을 사해만방에 떨치는중이었는데...
와란토의 무공에 전혀 뒤지지않는다는 둘째 술로토가 나타난것이었다.
"되었네. 간단히 요기만 할것이니 합석이든 아니든 뭐가 그리 대수인가? 빈자리를 찾아보세."
술로토는 얼굴이 벌개친채 길길이 날뛰는 호법을 제지하며 자리를 찾더니 좌수검사의
맞은편 자리에 가서 앉는다.
"실례하겠소이다."
".........."
좌수검사는 술로토를 흘깃 바라보는가싶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다시 창밖을 묵묵히
응시할뿐이었다.
멋적어진 술로토는 좌수검사의 요리를 가져온 점소이에게 음식을 주문하였다.
"청채볶음과 마라우육, 그리고 소흥가반주(紹興加飯酒)를 주게나."
좌수검사는 앞에 놓여진 죽엽청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병째 들이키더니 오리다리를
주욱 찢어 씹으며 처음으로 입을 떼었다.
"보아하니 귀하신분같은데 역시 식사와 술도 귀한것만 드시는구료."
"네 이놈! 감히 이 분이 누구시라고 함부로 망발을.."
금의인 곁에 우뚝 서있던 호법이 발끈하여 일갈하자 금의인이 곧바로 손을들어 제지한다.
"그렇지 않소. 하늘아래 가장 고귀한 문파에 입문하려는 사람으로서 몸도 마음도 고귀하게하고자 하는 마음에 그런것이오. 무사께서도 내일 입문관으로 향하는분이시오?"
"그렇소이다."
좌수검의 사내는 순식간에 남은 죽엽청과 오리구이를 비우고있었다.
술로토는 묘한 웃음을 짓더니 다시 질문한다.
"실례가 되지않는다면 귀하의 출신사문을 물어도 되겠소이까?"
"사문이라고할 것도 없는 미천한 출신이외다. 남해 한 구석의 시애탈(始哀脫)파라고
들어보셨소?"
"오호...시애탈이라면...한자루 좌수검으로 성명절기를 이룬 문파가 아니오? 들어본적이 있소이다."
"후후...고귀하신 나리께서 시애탈파를 아시다니..."
술로토는 좌수검사의 사문이 시애탈파라는 사실에 우스운 감정이 들었다.
남해지방에서 약간의 이름을 떨치고있는 시애탈파...
그들의 검법이나 도법은 매우 직선적이고 단순명료한것으로 알고 있었다.
현재 무림의 세계는 가장 화려하고 현란한 초식을 바탕으로하는 애래이문파류의 무공이 득세를 하고있거늘 단 하나의 변초 또는 허초도 없이 오직 상대방의 목을 노린다는
시애탈파의 무공은 논의대상조차도 안되는것이다.
특히 이들은 절제된 예의범절이나 심후한 내공을 바탕으로하는 내가기공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채 그저 애래이문의 화려함과 현란함을 가식이라하여 무조건적으로 비판을 일삼는무리에 불과했으며 술로토를 비롯한 현 애래이문파들의 고수들은 자신들이 할 수 없는것에 대한 뒤틀린 심사에서 나오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좌수검사는 음식을 다 비우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술로토에게 묻는다.
"귀하의 야망의 끝은 어디요?"
난데없는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술로토는 빙그레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제일문 애래이문에 입성하여 무림의 안녕과 평화를 지키는데 일조하는것이..."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좌수검사가 그의 말을 자르며 일갈하였기 때문이었다.
"팔자 늘어진 똥개 하품하는 소리일랑 마시오. 무림인의 야망은 단 하나일수밖에 없소! 천하제일인! 천상천하유아독존의 경지에 올라 천하를 발밑에두고 경영하고자하는것 이외에는 전부 말장난에 불과하오!"
술로토는 좌수검사의 무례하고도 광오한 발언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귀하의 야망의 그릇은 실로 너무커서 저같은 범인(凡人)은 헤아리기가 심히 난감하구려."
"달도 차면 기우는 법. 애래이문은 더 이상 천하를 경영할 수 없을 것이오. 나는 그런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초라하기 이를데없는 행색의 좌수검사의 입에서 하늘아래 제일이라는 애래이문을 사정없이 능멸하는 말이 쏟아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귀하는 어찌하여 입문관에 들려고 하는것이오?"
"애래이문의 운명은 다했소. 그 현장을 직접 지켜보고 느끼고자 하는 것이오. 아마 나는 절대로 입문관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할 것이외다. 그들이 추구하는것과 나와는 너무나 다르거든...하지만 나중에...그리 멀지않는 미래에 나의 이름은 애래이문을 뒤덮는 엄청난것이 될 것이오!"
애래이문 입문관 행사에 초청받았던 주다수(主茶水)대협과 투래시방주 맥달일가(脈達一家), 그리고 애래이문주 본조비(本朝非)가 원탁에 앉아 용정차를 들고 있었다.
아까 낮에 벌어진 입문관에서의 당혹스러운일에 대해서는 서로가 서로의 입장을 아는지라 이심전심, 아무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을 깬것은 주다수였다.
"본조비 대인, 태상장로께서는 어찌 지내시오이까?"
"말이 태상장로이지,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지 도통 소식을 알수가 없습니다. 워낙 기이하신 분이라..."
그러자 투래시방주 맥달일가가 한마디 거드는데...
"헐헐헐! 태상장로께서는 몹시 바쁘실 것이외다! 태상장로를 따르는 수많은 여인들을
챙기시느라 몸이 열개라도 힘들것이오!"
이들이 말하는 태상장로는 애래이문의 시조이자 얼마전까지 애래이문주로서 위명을
떨치다가 홀연 본조비에게 장문인자리를 넘기고 자신은 태상장로로 물러나 천하를 주유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투리구루(毛投理究累)를 말함이다.
"하하하...워낙 풍류를 즐기시는 분이라서...덕분에 제가 이토록 바쁜자리에 앉아 고생을 하고있지요."
본조비는 맥달일가의 말이 일견 무례한듯 하였으나 워낙 나오는대로 내뱉는 위인인지라 웃음으로 넘길수밖에 없었다.
철혈신검 주다수는 용정차를 한모금 들더니 본조비에게 말한다.
"이번에도 귀문의 중요한 행사에 초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오. 그런데...본조비대인과 결말을 지을일이 있는것같소만..."
"음...그런것 같소이다. 주다수대협은 지금 라우두니수(羅雨頭泥水)파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듯 합니다만..."
라우두니수(羅雨頭泥水)파!
라우두니수파는 동영에 자리잡고있는 동영최강의 닌자조직으로서 분광신검 아키라
타카사키가 장문인으로있었다.
아키라 타카사키의 성명절기인 분광신검은 극쾌를 바탕으로하는 검법으로서 극쾌검법의 지존이자 천하에서 가장 빠른검을 구사한다는 배로구(培老九)파 장문인 잉배이(剩培以)의 뇌정검에 필적한다고 알려져있었는데 그들이 중원무림으로의 진출을 위해 얼마전 사신을 애래이문으로 보내어 자신들의 문파가 애래이문의 동영분타가 되는대신 휘하 닌자들의 중원진출을 허용해달라는뜻을 전해왔던 것이다.
변방이기는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곳인 동영의 절대강자가 이끄는 문파를 애래이문의 분타로 둘 수있다는 사실은 천하제일문이라 자부하는 애래이문으로서는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솔깃한 제안이었는데 정통문 또한 동영에 커다란 욕심을 내고있던때였다.
"그렇소이다. 라우두니수파는 당연히 정통문의 동영분타가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무공은 애래이문 보다는 정통문에 더욱 가깝기 때문이지요."
"글쎄요...주다수대협의 말씀에도 일리가 있지만 그들은 이미 애래이문의 휘하에 들어오고자 하는뜻을 전달해온것을 잘 아실텐데요."
"그렇지만 그들은 중원정세에 깜깜한 동영의 닌자무리들이오. 현재 애래이문의 위명이 가장 널리 알려진것때문에 일단 대화창구를 애래이문으로 개설한 것이외다. 본인이 라우두니수파의 아키라장문인을 친히 만나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도 그의뜻이 변하지 않는다면 할수없지만...적어도 그정도의 기회는 본문에 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본조비는 말없이 용정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투래시방주 맥달일가같은 위인은 거칠기는 하지만 다루기가 쉽다. 하지만 정통문은
예전부터 사사건건 애래이문에 시비를 걸거나 맛있는 먹이를 나누어먹자는 오만한 제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오고있다.
비록 애래이문이 현재의 천하제일문이기는 하지만 정통문의 빛나는 전통과 힘은 결코
무시할수가 없다.
따지고보면 애래이문 또한 정통문에서 파생된 신유파이지 않은가.
"본인 스스로 결정할일은 아닌듯하오. 장로회의를 거쳐야하는데 주다수대협의 뜻이
관철되도록 최대한 노력해보겠소이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아키라 장문인이 중원으로 건너오는것이 약 한달정도 남았지요?"
주다수와 본조비의 대화를 따분한 표정으로 듣고있던 맥달일가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분위기를 추스르는데...
"쿠하하하핫! 뭐 그런일 가지고 심각하게 고민들이시오? 그까짓 동영의 닌자무리들...거저 들어온다고해도 우리 투래시방은 사절이외다. 그저 무공이란 호쾌한맛에 모든것이 있거늘...암기따위를 주로 사용하면서 복면을 쓰고다니는 닌자무리들은 쓸데가 없어요~! 차는 맛있게 잘 마셨으니 술이나 거하게 한잔 합시다. 이렇게 천하3대고수가
한자리에 모이는것도 드문 일인데...그냥 이 밤을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쉽지 않소? 본조비 대인은 어서 향기로운 술과 산해진미, 그리고 천하절색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구루피(九蔞被)족 여인들을 조달해보시오. 헛헛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