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되실려나 모르겠네요. 제가 가진 자료인데 정리는 못해드리고 올리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강한 몸, 강한 마음, 강한 두뇌의 사람으로!
그녀의 이름은 유관순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 17세의 젊음으로 옥중에서 숨진 - 신념의 소녀이다.
이미 24년 전이지만 나는 고교생의 대표에게 이 소녀의 일을 조금 말한 적이 있다.(1966년 1월 6일) - 이 소녀가 살았던 시대. 그 때는 일본의 비도적인 식민지 지배의 시대였다. 문화의 대은인인 한국에, 일본은 은혜를 갚기는커녕 약탈과 압제로 보답했다.
그러한 가운데 그녀의 부친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금이야말로 나라의 새싹인 아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켜 나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몇 명의 동지와 함께 학교를 세웠다.
소녀의 부친은 스스로의 신념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털어서 학교를 운영했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자인 일본인에게 견디지 못하고, 교육사업은 막혀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일본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해
병마저 들었다. 그녀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진지한 자세를, 어린 눈동자에 새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괴롭힌 일본의 횡포함에 대한 분노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 것이다.
정말 강한 인격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한 마음, 괴로움을 도약대로 해서 단련된다. 무엇이든 순조로우며, 아무런 고생도 없이는, 위대한 인물. 인생이 이루어 질 리가 없다.
노고속에만이 향상이 있다. 스스로 자진해서 고생한다. 거기에 진정한 교육도 있다. 자립의 인격도 만들어져 간다. 안일과 응석은 자기 자신을 좀먹을 뿐이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이야기한 소련의 작가이며 대통령회 의원인 아이토마토프씨도, 아홉살 때 아버지가 도리에 어긋난 권력에 의해 살해 당하고 만다. 그는 자신이 휴머니즘, 인간주의를 위해 본격적으로 싸우게 된 것은, 그런 아버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하고 계셨다.
이윽고 소녀 유관순은 어느 부인의 추천에 의해 서울의 명문 여학교 이화학당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여성도 사회를 위해 활동해야 한다」라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이기도 했다.
고향을 떠나 혼자만의 기숙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지방에서 막 올라온 그녀는 학교 공부의 수준이 높아서 처음에는 상당히 고생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녀는 타고난 강한 참을성과 근성을 발휘하여 노력을 계속해서, 눈에 띄게 실력을 길러 나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자기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이어받아 사랑하는 조국을 구하는 것이다 - 라는 커다란 희망과 목적관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친구들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아름다운 처녀였다.
식비를 낼 수 없는 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식사를 살짝 나누어 준 적도 있었다. 또 밤에 만두를 파는 아르바이트 친구가 있으면 모두가 조금씩 돈을 내어 가서 사오기도 했다. 어느 때는 기숙사의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에 벽을 넘어 밖으로 나가다가 들켜 선생님께 꾸중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명랑하게 그 친구를 계속 도왔다.
또한 그녀는 독서를 계속했다. 언제나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잔다르크의 전기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자신도 또한 조국을 위해서 청춘을 바치자. 소녀는 마음에 깊이 정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해야 할 그녀의 신념이 깊어져 갔다.
1919년 3월 1일. 민중에 의한 조국 독립운동의 행동이 개시되었다. 그녀도 이 투쟁에 몸을 던졌다.
그것은 폭력을 쓰지 않는 평화적인 데모행진 등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권력은 총검으로써 피의 탄압을 가했다. 그녀의 친구들도 몇 명이나 체포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
그 이후 소녀는 휴교령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 운동의 추진역으로서 활약했다.
음력 3월 1일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대해 또 다시 일본의 헌병대는 무차별한 발포를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살해되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잔혹한 고문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녀는 「독립만세!」라고 계속 외치며 사람들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재판에서도 “죄를 인정하라” 는 협박에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녀는 「내가 “자신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이 무슨 죄가 된다는 것인가? 오히려 죄를 받아야 할 것은 강제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당신들이다!」라고 긍지 높게 단언했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조국의 행복을 위해 싸우는데 무엇이 나쁜가” 라고 대항했던 것이다 영원한 정의에 의해 재판 받았던 것은 재판장 쪽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2년에 이르는 옥중생활을 보냈다. 최후까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 마디도 약한 말을 하지 않았다. 한번도 구국의 불꽃을 꺼지게 하지 않았다. 만세를 부를 때마다 고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 외쳤다. 그리고 1920년 10월 1일. 「독립만세!」라고 외치면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짧은 생애였다. 선열한 청춘이었다.
그 너무나도 씩씩한 청춘의 발걸음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불은 널리 번져 이윽고 25년 후에 독립인 「광복」의 날을 맞이했다. 권력은 그녀의 육체를 죽였다. 그러나 정신마저 죽일 수는 없었다.
나는 이러한 불굴의 신념의 사람을 키우고 싶다.
이 소녀 유관순과 같이 생명을 걸고 권위와 싸우는 사람. 다른 사람을 지키는 사람만이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따위는 “진짜”에서 보면 환영 같은 것이다.
간사이 창가학원 제 9회 건강제 1990 10. 20
한편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리는 항일운동의 여성투사 유관순(1904 ~20). 대단히 저명하고 위대한 사람이다. 그녀는 무도한 일본당국의 투옥에도 그리고 잔학하기 짝이 없는 고문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립만세!” 라고 외치면 순사했던 것이다.
16세의 젊음으로 장절한 옥사를 했다. 그녀는 옥중의 동지가 약한 소리를 내면 질타하고 격려를 계속했다. “어째서 한숨 따위를 쉬는가! 고문 받는 게 힘들다고 해도 악역(惡逆)에 대해 침묵하고 간과하는 것보다는 쉽지 않는가! 단호히 싸워 가자!”
역사에 새겨진 피눈물이 떨어지는 이 강함. 이 정의. 이 신념.
그녀에 비한다면 제군들은 너무도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 창가순교의 사자왕 마키구치 선생님은 대박해 속에서도 언제나 단언하고 계셨다.
“나의 족적 뒤에 반드시 청년들이 잇따라 이어갑니다”
마키구치 선생님에게는 도다 선생님이 뒤를 이었다. 도다 선생님에게는 내가 뒤을 이었다.
내게는 수백명의 제군이 있다. 제군이 뒤를 이을 것을 믿고 싶다!”(큰 박수)
제군은 아시아와 세계의 청년, 특히 한국의 청년과 더욱더 깊고 강하게 연대하면서 단호하게 이 사자(師子)의 길을 이어주기를 바란다.
청년부 전국간부회 1998. 1. 18
한국이 눈부신 성장을 이룬 것은 어째서인가.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병 등 나쁜 일에도, 승리 등 좋은 일에도, 전부 원인이 있다.
「원인은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 이 자세가 중요하다.
한국발전의 원인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우뚝 솟은 싸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벗은 닛켄종의 악려에게 괴롭힘 당한다거나, 온갖 고생을 해 오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다」「다른 사람에게 좌우되지 않는다」이 각오의 신심으로 전진해 오셨다. 그 신심에 무량한 복덕이 쌓여 왔던 것이다.
「한민족 독립운동의 아버지」라고 칭송되는 안창호(1878 ~ 1937년). 마키구치 선생님과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그는 일본의 비열한 침략과 끝까지 싸운 위대한 투사이다.
그는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투옥되셨다.
무슨 일이 있든 “어중간한 관용은 무책임하다” 라고, 타협하지 않고 악과의 투쟁을 관철했다.
악과의 투쟁에 어중간함은 있을 수 없다. 도중에 그만 두어서는 놀이이다. 쓰러지든가 쓰러뜨리든가 - 악을 쓰러뜨릴 때까지 철저히 싸우는 이외에 승리는 없다.
그에 대해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일본의 폭거와 투쟁 또 투쟁. 그러한 속에서 「왜 우리들에게는 인물이 없는가?」라는 소리가 높았다.
“더 우수한 인물이 있으면 이길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모두가 고뇌하고 고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우리들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인물이 없다고 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되려고 공부하고 수양하지 않는 것인가」
환경이 아니다. 자신이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할 뿐이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이 싸워가면 된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된다.
자기자신이 엄연히 하고 있는 한, 희망이 있고, 향상이 있고, 승리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 뒤에는 한 사람 또 한 사람, 두 사람 그리고 세 사람으로 이어져 간다.
상황에 일희일우 하며 불평한다. 이것은 상승 장군의 삶이 아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든 유쾌하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좌우되지 않고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히 막히지 않는다. 반드시 거기에서 승리의 길을 열어 보인다. 신심이란 무량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제 82회 본부간부회 1994. 11.12
그대 이름은 윤동주
아시는 바와 같이 나는 이번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한일의 우호. 그것은 내가 오랫동안 계속 간직해 온 바램이다.
일본은 전쟁 전 한반도,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온갖 포학한 짓을 다해 온 역사가 있다. 일본이 범한 잘못에 대해서 - 나는 도다 선생님으로부터 몇 번씩이나 이야기를 들었다. 아울러 소년시절, 아버지와 큰형님으로 부터도 반복해서 들었던 것이다.
메이지 말 또한 다이쇼의 초기였던가, 아버지는 징병 되어 현재 한국의 서울(당시, 일본의 지배하에서는 경성이라고 불리고 있었다)에서 2년간 체재하셨다. 큰형님도 병사로서 중국에 건너가는 체험을 하셨다.
아버지와 큰형님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인간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분이셨다. 자주 “일본은 가혹하다. 저 횡포함. 오만함. 같은 인간끼리가 아닌가. 이런 것은 절대로 잘못된 일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나는 소학교 5학년 정도였을까. 그렇지만 두 분의 전쟁에 대한 노여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분노를 나는 소년의 혼에 깊이 새겼다.
- 불법자(佛法者)로서 오늘날까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달려 온 나의 행동의 원점은 당연히 도다 선생님이시다. 은사께 배운 평화관과 세계관이 근본에 있다. 아울러 아버지와 큰형님의 이런 평화에 대한 염원이 커다란 도약대로 되어 온 것도 틀림이 없다.
권력과 싸우는 시인
나의 큰형님은 종전의 해인 1945년 버마에서 전사하셨다.
향년 29세. 매우 소중한 청춘의 날들을 전장에서 보낸 형님이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1945년 2월.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한 사람의 청년시인이 있다.
그 청년의 이름은 윤동주. -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릿쿄대학에서 배운 후에 도시샤대학 재학중에 ‘치안유지법’ 위반의 용의로 체포된다.
전시중,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이 체포되신 것도 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구 ‘형법’ 의 ‘불경죄’ 를 문제로 삼은 것이었다. 평화를 원하는 사람, 사람들의 행복을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 없애 버리려고 획책한다. 선의의 사람, 정의의 사람이 서면, 유린(蹂躪)하려고 덤벼든다 -. 그런 권력의 마성(魔性)의 작용은 항상 변하는 일이 없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일본에 공부하러 온 학생을 소중히 하기는커녕, 비정하게 체포하여 옥사 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광기의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 그것은 온갖 횡포를 다한, 가혹한 것이었다.
그 커다란 희생이 된 한국. - 조국의 독립운동에 관계되었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어 그는 체포되어 버린다. 폭풍우 같은 권력의 유린. - 그 폭풍우에 몸을 돌보지 않으며, 이 젊은 시인은 영예 높은 청춘의 혼의 노래를 계속 불렀다.
일본이 뺏으려고 한, 사랑하는 조국의 언어로 조국의 문자 - 한글로, 주옥과 같은 아름다운 청춘의 시를 목숨을 걸고 남겼다. 조국에 ‘아름다운 아침’ 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고 바라고 싸웠다.
2년간에 걸친 옥중생활에서는 잔혹한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일본의 항복에 의한 해방의 날(8월 15일)을 보지 못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어떤 처사를 받더라도 죽음의 순간까지 희망을 계속 갖고 싸워 나가는 정신 - 이것이 진실 된 청춘의 혼이다. 더군다나 광선유포라고 하는 가장 숭고한 사명에 사는 청년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에 겁낼 필요가 있겠는가. 광포에 있어서의 고난은 모두가 청춘의 훈장이고 혼의 영예이다. 허영을 부리고, 허풍과 잔재주를 부리며 언제까지나 마음을 정할 수 없는 청년이 어떻게 진실 된 인생을 살수가 있겠는가.
세계는 지금 ‘민주’ 와 ‘인간’의 시대로 향하고 있지만 아직도 수많은 난문을 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 속에 있어서 묘법을 수지한 여러분이야말로 시대의 새벽을 알리고 세계에 인간주의의 ‘새로운 아침’ 을 만들어 가는 사명의 사람이다. 그것을 깊이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대박수)
우러러 보아라 혼의 승리의 창공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께
시인 윤동주는 탄압 때문에 생전에는 한 권의 시집도 낼 수 없었다. 일본의 관헌에 압수당하여 어둠 속에 묻혀 버린 시도 있었다고 추측된다. 그는 완전히 무명인 채로 그의 생애를 마칠 것을 강요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1백 편 남짓한 시는 지금 조국의 청년들에게 사랑 받아 선열(鮮烈)한 혼의 공명(共鳴)을 계속 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번역되어 윤동주 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서 출판되었다.
그가 일본에 유학하기 전에 배운 연세대학의 캠퍼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진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그가 이 언덕을 산책하면서 노래한 주옥과 같은 시는 암흑기의 민족문학 최후의 등불로서, 민족의 마음을 울리고 그 메아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함께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는다” 라고.
하늘과 바람과 별 - 그 영원한 자연과 우주와 함께 남을 청춘의 연소. 제군도 또한 아니, 시인 윤동주 이상으로 ‘불멸의 청춘’ 의 혼백을 역사에 새겨 나가는 전사이기를 바란다.(대박수)
또 그가 16세 때에 쓴 ‘생과 사’ 라는 제목의 시는 말하자면, ‘생과 사의 싸움의 노래’ 로 되어 있다. 세간의 사람들은 향락의 노래에 춤추고 있다. 유흥이나 술이나 연애에 들떠 부나 명성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생은 항상 ‘사의 서곡’ 을 노래하고 있다 라고. 그리고 사람들은 ‘생의 노래’가 끝나는 공포를 응시하지 않고,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다고. 이것이 그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그와 같은 것은 일찍이 토인비 박사도 말씀하고 계셨다. 키신저 박사와의 대화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언제 죽는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되도록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문득 정신이 들어 생각하는 것이다 “아아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다”라고.
그는 젊어서 ‘생(生)과 사(死)’ 를 응시했다. 제군은 젊어서 ‘생사의 이법(二法)’ 의 근원의 대법(大法)에 연을 맺었다. 생사를 관철하는 절대적인 ‘인과의 법’ - 그것을 완전하게 설한 것이 묘법이다.
그러므로 묘법을 근본으로 한 우리들의 일념과 행동은 결코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대우주와 일체인 내 생명에 새겨져 무량의 복덕으로서 영원히 빛난다.
다시없는 청춘인 지금, 대정법을 수지하고 광선유포에 나아가는 제군은, 말하자면 '생사의 이법'의 달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라고 진심으로 찬탄하고 싶다.(대박수)
‘법’ 의 위대함은 ‘사람’ 이 증명
스승을 구하는 마음
또, 그는 ‘서시’ 속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라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 - 대우주와도 이어진 마음.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 모든 사람들을 또 초목마저도 포용해 가는 자애의 마음으로 이 사명의 인생을 살아 나간다 -
두 번 다시없는 청춘이다. 인생이다. 청춘의 대공에, 젊은 생명의 대지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혼의 역사를, 제군은 자기답게 새겨두기 바란다.
나도 청춘시대부터 그런 인생을, 신심을, 역사를 걸어 왔다. 오늘은, 폭풍이 지난 후의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아무쪼록 제군은 이 창공을 우러러 보는 마음으로 긍지 높은 나의 신념의 길을 당당하게 나와 함께 또 나의 뒤를 이어 나아가 주실 것을,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대박수)
더욱이 감옥에서 고독한 죽음을 맞은 이 청년시인은, 일찍이 서울 시대에 “우리들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스승이 있다면 ...” 하고 스승을 구하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부모 자식의 연은 깊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사제의 연대는 그것 이상으로 깊고 강한 것이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스승을 구하는 마음은 참으로 존귀하고, 스승을 얻은 기쁨은 참으로 크다. 또한
‘스승이 없는 사람은 신용할 수 없다’ 라고 할 정도로, 스승을 갖는다는 것은 중대한 일인 것이다.
예술이든 스포츠든 어떤 분야에 있어서나 ‘사제’ 의 관계는 엄하고도 따뜻하다. 하물며 인생의 근본사인 ‘신앙’ 의 세계, ‘광선유포’ 라는 지고한 대목적에 일어선 ‘사제’가 얼마나 준엄하며 자애에 가득찬 것인가.
내가 무고한 죄로 옥중의 몸이 되었던 것은 29세(1957년). 윤 청년과 거의 같은 나이이다. 오사카의 참의원 보궐선거에 관련해, 선거위반의 혐의를 받았었다. 물론 사실무근의 용의이며, 그 후 (1962년) 재판에서도 무죄가 증명된 것은 아시는 대로이다.
내가 붙잡힌 몸이 되었을 때, 도다 선생님은 청년부를 모아서, 나를 구해내려고 해 주셨다. 선생님은 학회를 탄압하려고 하는 부당한 검거·조사라는 것을 간파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불법은 승부’이며, 광포를 방해하려는 자에게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 사회에 있어서나 각자의 생활상에서나 승부의 엄한 현실을 똑똑히 보고 불법자로서 승리의 증거를 나타내 가는 곳에 광포의 전진이 있다. 그러므로 횡포한 권력자와는 단호하게 싸울 수밖에 없다. 청년부여 일어서라 라는 선생님의 마음이셨다. 이번에는 자신이 15년이나 투옥되는 위험을 알면서도, 한 사람의 사랑하는 제자를 구하기 위해 싸우려고 하셨던 것이다.(대박수) 나는 은사의 이 깊은 마음을 절대로 잊을 수 없다. 아니 가슴 속 깊이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다.
제자를 생각하는 스승의 마음은 제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것이다. 제자에게 있어서 그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 이상의 불행은 없다. 또 스승의 깊은 마음을 모르는 제자가, 자기 쪽이 훌륭하다고 믿어 배신, 반역해 가는 것도, 유감스럽지만 세상의 상사이다.
나는 도다 선생님이라는 희유(稀有)한 대지도자를 스승으로 삼고 철저하게 훈련 받았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 이상의 영예는 없다.
젊은 날에 인생의 스승과 만나, 진실한 인간의 연마를 받는다는 것은, 청춘의 최고의 영예이다. 이 인생의 진수를 알 수 있다면, 부나 명성 따위의 겉치레에 미혹되는 일도 없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무쪼록 제군은 학회정신의 정수인 이 길을 관철해 나가기 바란다.(대박수)
제2회 전국 남자청년부간부회 1990년 09월 일
한국의 청년시인
이전에도 말하였지만,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에 맞서 그 횡폭한 탄압과 단호히 끝까지 싸운 한국의 시인으로 ‘윤동주’ (1917∼1945)라는 청년이 있다.
그는 일본에서 특고(特高) 경찰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무엇하나 확실하게 조사 받은 것도 없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규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다.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청춘시대 - 그것은 사랑하는 조국을 빼앗기고, 가족과 존경하는 사람들이 학대 받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는 나날이었다. 그는 남보다 갑절, 마음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남보다 더 분개한 생각을 했다. 오만한 악, 교만한 사악을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청년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일본이 빼앗으려고 한 사랑하는 조국의 언어로 조국의 아름다운, 인간의 진실을 드높이 계속 노래하며 죽어갔다. (SGI회장은 윤동주에 대해 1990년 9월의 한국 첫 방문 직후, 제2회 전국 남자청년부간부회 스피치에서 이야기했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그는 20세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가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 내일도 ...
까치는 한국에서는 길조(吉鳥)라고 한다.
아무튼 제군의 ‘청춘의 길’ 도 나날이 항상 새롭고, 언제나 생기에 가득 넘치는 것이기 바란다.
우리들이 나아가는 길은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바꾸어 가는 ‘환희의 길’ 이며 ‘위대한 변혁을 향한 길’ 이다. 우리 생명엔 ‘언제나 새로운 길’ 이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된다 - 이것이 불법이다. 신심이다. 창가정신이다.(대박수)
청년부간부회, 도시마·분쿄·다이토 합동총회 1992년 12월 일
한민족은 강합니다. 예로부터 수많은 침략을 받으면서 항상 외적(外敵)에 승리하고, 이민족의 압박을 물리쳐왔습니다. 몽고 침입 때도 당시의 고려인들은 저항을 계속하여 전 국토가 점령하에 들어간 적은 없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몽고의 일본침공이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은인(恩人)의 나라입니다.
5천 년의 한국사에서 일본의 식민지지배의 시대(1910 -1945년)인 36년간만이 이민족(異民族)이 지배한 예외적인 시기였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도 영웅적인 저항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강인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유라시아대륙 전체를 보아도 달리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강함’이 의상의 연면(連綿)한 전통에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숨겨진 진실
- 지금도 일부 일본인 중에는 ‘강한 일본이, 약한 조선인’ 등의 차별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당치도 않은 잘못이군요.
SGI회장: 일본의 제국주의자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상이 유리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모두에게 심어서 “그러니까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만 평화도 지킬 수 있고 생활도 좋아지는 것이다”라고 선전하며 자신들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한반도의 영광의 역사와 문화를 숨기고 ‘거짓’을 내외에 계속 퍼뜨렸던 것입니다. 실제로는, 예를 들면 일본문화가 한반도의 은혜에 의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벼농사, 청동기, 철기, 토목·관개(灌漑)기술, 한자. 그리고 ‘불교’와 함께 뛰어난 회화, 조각, 음악, 무용, 건축기술도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에게 배운 것입니다.
미소(味 (된장))도 한국어
SGI회장: 이 의상 하나만 보아도 (나라현 아스카촌(奈良縣 明日香村)의) ‘다카마쓰총 고분(高松塚 古墳)’의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옷과 똑같습니다. 고구려의 귀인이 매장되어 있었다는 설도 있는데 어쨌든 깊은 관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원래 나라의 ‘나라’란 ‘국(國)’이라든가 ‘궁전’ ‘왕’을 의미하는 고대 한국어라고 합니다. ‘아스카’도 그렇다고 하는 설이 있습니다. ‘가스가(春日)’(봄날)도, ‘하코네(箱根)’도, ‘(무사시노(武藏野)의) 무사시’ 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한이 없을 정도로 각지에 한반도의 문화의 발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맛’의 전형(典型)이라고 하는 ‘미소(된장)’도 한국어입니다.(이것은 광사원(廣辭苑 사전))에도 명기되어 있다)
‘모멘’(木綿(목면))도 무로마치(室町) 시대, 한반도의 ‘목면’을 수입하고 나서 넓혀진 것입니다.
- 가장 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것 중에 ‘한반도의 문화’가 얼굴을 내밀고 있군요.
SGI회장: 고대(古代)도 근대(近代)도, 일본은 내셔널리즘(민족주의)이 강해지자 ‘한국(조선) 숨기기’를 했습니다. (정사(正史)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서술방식도 그러했고, 정확해야 할 학교 교과서도 국책(國策)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싸운 선사(先師)
SGI회장: 이 전통의상은 여러 가지 색이 사용됩니다. 그 중에서도 백색이 가장 선호된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백의(白衣) 민족’이라고 불릴 정도로 ‘흰색’이 애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인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한반도에서 추진하면서 한국적인 것은 전부 적대시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여성의 하얀 치마 저고리에 경찰이 먹물을 물들이며 다니는 비도(非道)까지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 밖에, 폭거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짐승같은 행위는 도저히 필설로 다 할 수 없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군대에 끌려가 서울에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자주 “일본은 지독하다. 저 횡포함, 오만함. 그런 일은 절대로 옳지 않다”라고 말했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일본 군국주의와 싸우다, 마키구치(牧口) 선생님도 도다(戶田) 선생님도 감옥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 선사의 마음을 엄연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행동도 계승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 대해서는 때때로 ‘이야기’를 계속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