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학교에 5학년은 3반까지 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5학년 4반이라는 팻말이 붙은 교실에서 여덟 명의 아이들과 수업을 하였다. 4학년부터 6학년 까지 3개 학년이 섞여있는 학급에서 각자의 진도에 따라 특별하게 만들어진 교재를 가지고 개별학습을 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특수학급, 여러가지 원인으로 학습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모인 학급이다.
학교를 졸업한 지 22년 만에 교사임용고시를 거쳐 발령을 받고도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사직을 하였기에 기간제 교사의 자리가 내게는 각별히 소중했다.
언제나 소외된 자리로 밀려나 있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차올랐지만 한 달 남짓한 시간동안 복합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내아이 여덟 명을 어떻게 다루고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은 큰 난제였다. 경력이라고는 지극히 평균인 아들 둘을 키워 큰아이는 군대에 보내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교 졸업반에 이르게 한 것과 18년간 주일학교 유치부 교사를 한 것뿐이다.
대부분 지능이 낮고 주의력 장애와 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그들의 주의집중 시간은 길어야 10분이다. 무엇보다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는 일이지만 인격적 대우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친근감을 갖는 것은 학습성취 이상으로 힘든 과제다.
사람은 관심과 사랑으로 자기를 지켜보는 눈길이 있다는 것을 느끼면 함부로 살 수가 없다. 좋은 추억은 황폐해진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지 않은가. 그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의 요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다.
수업은 학습과 놀이, 생활지도와 치료를 겸할 수 있는 통합적인 과정으로 짰다. 매일 아침 짧고 쉬운 동시를 소리내어 읽고, 생활의 지혜가 담긴 수수께끼를 풀다가 다트와 주사위 놀이로 단위가 낮은 수의 더하기를 익힌다. 놀이를 통한 학습은 규칙과 질서를 지키는 것으로 시작하여 상대방을 배려하고 협동하면서 자기 통제력을 키우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가 있다.
종이비행기를 접어 비행기 날리기 대회를 하다보면 그들이 이미 물리적 이치를 터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의식주 생활을 익히기 위해서는 입을 것과, 먹을 것, 사는 데 필요한 물건들의 사진과 그림을 나누어 커다란 전지에 오려붙이기를 했는데 모두들 실물을 소유하는 것 이상으로 즐거워 하며 작업에 몰두하였다.
실패의 경험만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일에서든 성취감을 맛본다는 것은 다른 일을 시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아이들의 변화와 긍지로 우리반은 학교 안에서 가보고 싶은 교실, 신나는 교실로 소문이 났고, 수치심의 상징이었던 5학년4반 팻말 밑에는 이른 아침에 등교한 아이들이 교실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당당하게 서있었다.
조금 무리가 따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현장체험학습을 시도하였다. 박물관에 들러서 선사시대에서 삼국시대까지 관람을 하고 맘껏 떠들며 경복궁을 돌아다녔다. 신체적 건강과 지적, 정신적인 조건이 좀 나은 아이들이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기꺼이 도와주었다. 아이들은 연못에 둘러서서 사이좋게 잉어밥을 던져주고 서로의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나는 부지런히 그들의 자연스런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수백년동안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킨 고목 밑에 밝게 웃으며 서있는 21세기의 연약한 꿈나무들과 비둘기 모이를 주는 울보 훈이의 행복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중에 현장학습 보고자료로 한 아이씩 따로 만든 사진첩을 교장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이 아이들의 생애에 처음으로 가져보는 앨범일 겁니다.’하면서 거듭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35일간의 축제는 시상식과 시장놀이로 막을 내렸다. 서로가 다른 사람에게 줄 상장을 만들었다. 아이들은 상을 받는 것이나 주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며 특히 수여자가 되는 것은 즐거워 했다. 남의 흉허물을 들추어내기 바빴던 아이들이 기쁜 얼굴로 상장을 주고받았다.
그 중의 한 아이는 친구에게 주는 상장 외에 한 장을 더 만들어 내게 내밀었다.
‘위의 선생님은 공부를 잘 가르쳐주고 언제나 우리들을 감싸주었으므로 고마워하면서 이 상장을 드립니다.’
맞춤법은 틀리고 글씨는 삐뚤거렸지만 두 번 다시 받을 수 없는 소중한 상장이었다.
평소에 모아둔 상표로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시장놀이는 물건 고르랴, 계산하랴 교실 안이 즐거운 비명으로 가득했다.
아쉬움 속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교실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말자.그들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눈치를 보며 자꾸 물었다.
“우리들 만나러 다시 오실 거지요?”
“응, 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으므로 슬그머니 얼버무렸다.
아이들은 유사시를 위해 현장학습계획서에 써둔 나의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다. 큰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위탁모가 친부모나 양부모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보고싶다는 아이들에게 만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어 마음이 아팠다.
사랑에 굶주리고 낯선 것을 싫어하며 마음이 다치기 쉬운 특수아들에게 정은 적당히 주면서 공부를 잘 가르치는 일이란 피를 내지 않고 살을 베어내는 일과 무엇이 다르랴.
횟수가 거듭된다해도 아픔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변화를 보였던 아이들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매일 꾸중을 듣는다는 소식은 절망과 좌절감을 불러일으켰다.
한동안 뜸하더니 연초에 진이가 다시 전화를 했다. 졸업반인 그 아인 중학교에 진학을 해도 특수학급에 가야할 것이다. 나이에 비해 왜소하고 유난히 마음이 여리며 정이 많은 진이가 우람하게 자라나는 비장애인 친구들 사이에서 성장기를 잘 보내고 어른으로서 한 몫을 할 수 있을지, 다른 일곱 명의 아이들은 각박한 세상에 잘 적응하며 살 수 있을 지 적잖이 염려가 된다.
해가 바뀌고 나니 그 아이들이 더 보고싶다. 만난 지 3주일 정도가 지난 후부터 나를 ‘두목’으로 부르며 자기네 동아리의 일원으로 끼워주었던 여덟 명의 아이들. 그들의 지진하고, 연약하고, 불안정하고, 격렬하고, 일그러진 모습은 인생이 갖는 모든 문제를 말해주는 것이며 나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비록 의리없는 두목이지만 때때로 그 해맑은 얼굴들이 눈물나게 그립다.
교사로서 더 이상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다시는 선생이 되지 말고 그냥 5학년 4반으로 남으리라 다짐을 하지만, 꿈에서는 자꾸 아이들이 ‘선생님’하고 부르는 그 계단 밑의 교실로 서둘러 들어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