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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돌과 비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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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문학관* 스크랩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외 / 황지우
동산 추천 0 조회 46 09.07.16 11:2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이정한 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들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각기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나는 너다 126 / 황지우

 



나는 사막을 건너 왔다, 누란이여.
아, 모래 바람이 가리고 간 그 옛날의 강이여.
얼굴을 가린 여인들이 강가에서 울부짖는구나.
독수리 밥이 되기 위해 끌려 가는 지아비, 지새끼들.
무엇을 지켰고, 이제 무엇이 남았는지.
흙으로 빚은 성곽, 다시 흙이 되어
내 손바닥에 서까래 한 줌.
잃어버린 나라, 누란을 지나
나는 사막을 건너간다.
나는 이미 보아버렸으므로
낙타야, 어서 가자.
바람이, 비단 같다, 길을 모두 지워놨구나.

 

 

 

 

 

 

 

 

Untitled

 

 

 

 

거룩한 저녁 나무 / 황지우


       -김용택 시백(詩伯)에게

 

 


치마로 생밤을 받는 신부처럼,
아니, 급식소로 가는 사람들처럼,
맨 처음인 듯, 아니 맨 마지막인 듯
그렇게 저녁을 받는 나무가 저만치 있습니다
兄이 저 혼자 저무는 섬진강 쪽으로 천천히
그림자를 늘리는 나무 앞에 서 있을 때
옛 안기부 건물 앞 어느 왕릉의 나무에게
전, 슬리퍼를 끌며 갑니다 ; 그 저녁 나무,
눈 지긋하게 감고 뭔갈 꾸욱 참고 있는 자의 표정을
하고 있대요, 형, 그거 알아요
아, 저게 <거룩하다>는 형용사구나
누군가 떠준 밥을 식반에 들고 있는 사람처럼, 혹은
신부처럼 生을 부끄러워할 때
거룩한 저녁 나무는 이 세상에 저 혼자 있다는 거 땜에
갑자기 울고 싶어지는 사람들을 위해 서 있습니다
형이나 저나, 이제 우리, 시간을 느끼는 나이에 든 거죠
이젠 남을 위해 살 나이다,고 자꾸 되뇌기만 하고
이렇듯 하루가 저만큼 나를 우회해서 지나가버리는군요
어두워지는 하늘에 헌혈하는 사람처럼 팔을 내민
저녁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저는 지금 이 시간 교실 밖
강물소리 듣는 형의 멍멍한 귀를 잠시 빌려가겠습니다
그 강에 제 슬리퍼 한 짝, 멀리 던지고 싶소

 

 

 

 

 

 

 

 

Sahara

 

 

 

옛 집 / 황지우


산수동(山水洞) 옛집엘 가보았더니 철로도 없어지고 옛 그 집에 약국이

어서 있었다. 거기에 웬 원숭이가 있어 철창 사이로 손을 넣어 한참
을 같이 놀았다. 갓난아이같이 볼그레한 원숭이 손바닥에도 손금이
제 운명을 그려놓았다는 게 신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으로 돌아와, 그날 밤부터 온몸이 가렵기 시작했다. 겨드랑이며
배때기며 낯짝이며 득득 긁어대고 있자니, 도반이 다가와, 웬 잔나

가 들어앉았냐며 문을 밖에서 잠가버린다. 내 귀를 뚫고 1940년대

기차가 침을 퇴퇴, 뱉으며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Camel caravan pause

 

  

                           

출가하는 새 /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 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나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

 

 

 

 

 

 

 

Untitled

 

 

 

 

거대한 거울 / 황지우

 

 

한점 죄(罪)없는

가을 하늘을 보노라면

거대한 거울,

이다:

이번 생의 온갖 비밀을 빼돌려

내가 귀순(歸順)하고 싶은 나라:

그렇지만 그 나라는

모든 것을 되돌릴 뿐

아무도 받아주지는 않는다


대낮에 별자리가 돌고 있는

현기증나는 거울

 

 

 

 

 

 

 

Nun, Monastery Zica, Serbia

 

  

 

재앙스런 사랑 / 황지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生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體溫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러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The Village of Kajuraho, India

 

 

 

 

거룩한 식사 /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넣어 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풀어진 뒷머리를 보라.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Manampatrana

 

 

 

 뼈아픈 후회 / 황지우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을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고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Tritiva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황지우

 

 

 

初經을 막 시작한 딸 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리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버리고 싶은 생 ;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자의 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Old lover at the cemetery

 

 

 

 
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 황지우

 

 

나,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Fianarantsoa

 

 


 

발작 /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Camels in Eufrat river

 

 

 


 일 포스티노 /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 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EuroWindow.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 황지우

 

 

내가 지도교수와 암스테르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커피 솝 왈츠의 큰 통유리문 저쪽에서 당신이

빛을 등에 지고서 천천히 印畵되고 있었다.

내가 들어온 세계에 당신이 처음으로 나타난 거였다.

그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니었지만,

암스테르담은 어떤 이에겐 소원을 뜻한다.

구청 직원이 서류를 들고 北歐風 건물을 지나간 것이나

가로수 그림자가 그물 친 담벼락, 그 푸른 投網 밑으로

당신이 지나갔던 것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단지 시간일 뿐이지만 디지털 시계 옆에서

음악이 다른 시간을 뽑아내는 것처럼,

당신이 지나간 뒤 물살을 만드는 어떤 그물에 걸려

나는 한참 동안 당신을 따라가다 왔다.

세계에 다른 시간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은

어느 축선에서 만난다 믿고 나는 돌아왔던 거다.

지도교수는 마그리트의 파이프에 다시 불을 넣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당신은 홍대 앞을 지나갔다.

암스테르담을 부르면 소원이 이뤄졌을지도 모른다.

마그리트 씨가 빨고 있던 파이프 연기가

세계를 못 빠져나가고 있을 때

램브란트 미술관 앞, 늙은 개가 허리를 쭉 늘여뜨리면서

시간성을 연장한다. 권태를 잡아당기는 기지개;

술집으로 가는 다리 위에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그친 음악처럼.

 

 

 

 

 

 

 

 san rock art... 2000yrs old

 

  

 

 소나무에 대한 예배 /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잇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에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Rest after a long day at the fish market in Yangon Burma.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Girls at a mountain village

 

 



몹쓸 동경(憧憬) / 황지우

 

 

 

그대의 편지를 읽기 위해 다가간 창은 지복이 세상에

잠깐 새어들어오는 틈새; 영혼의 인화지 같은 것이 저 혼자

환하게 빛난다. 컴퓨터, 담뱃갑, 안경, 접어둔 畵集 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고, 천장에서, 방금 읽은 편지가 내려왔다.

이데올로기가 사라지니까 열광은 앳된 사랑 하나; 그 흔해빠진

짜증스런 어떤 운명이 미리서 기다리고 있던 다리를

그대가 절뚝거리면서 걸어올 게 뭔가.

이번 生에는 속하고 싶지 않다는 듯, 모든 도로의 길들

맨 끝으로 뒷걸음질치면서 천천히 나에게 오고 있는

그러나 설렘이 없는 그 어떤 삶도

나는 수락할 수 없었으므로 매일, 베란다 앞에 멀어져가는

다도해가 있다. 따가운 喉頭音을 남겨두고 나가는 배; 그대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하여 그대를 지나쳐왔다. 격정 시대를

뚫고 나온 나에게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지루한 것이었다.

맞은편 여관 네온에 비추인 그대 속눈썹 그늘에 맺힌 것은

수은의 회한이었던가? "괴롭고 달콤한 에로스"

신열은 이 나이에도 있다. 혼자 걸린 독감처럼,

목 부은 사랑이 다시 오려 할 때 나는 몸서리 쳤지만,

이미 山城을 덮으면서 넓어져가는 저 범람이 그러하듯

지금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대는,

이삿짐 트럭 뒤에 떨궈진 생을 두려워하지는 않는지.

신화와 뽕짝 사이 사랑은 영원한 동어 반복일지라도

트럭집 거울에 스치는 세계를 볼 일이다.

황혼의 물 속에서 삐걱거리는 베키오 石橋를

그대가 울면서 건너갔을지라도

대성당 앞에서, 돌의 거대한 음악 앞에서

나는 온갖 대의와 죄를 후련하게 잊어버렸다.

나는 그대 앞의 시계를 보면서 불침번을 선다.

그대 떠나고 없는 마을의 놀이터 그네에 앉아

새벽까지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

동경은 나의 소명받은 병이었다. 지구 위에 저혼자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쓴 그대 편지를 두번째 읽는다. 

 

 

 

 

 

 

 

 

Untitled

 

  

 

시에게 / 황지우

 

 

한때

시에 피가 돌고,

피가 끓던 시절이 있었지;

그땐 내가 시에 촌충처럼 빌붙고

피를 빨고 앙상해질 때까지 시를

학대하면서도, 딴에는 시가 나를 붙들고 놔주질 않아

세상 살기가 폭폭하다고만 투덜거렸던 거라.

이젠 시에게 돌려주고 싶어.

피를 갚고

환한 화색을 찾아주고

모시고 섬겨야 할 터인데

언젠가 목포의 없어진 섬 앞, 김현 선생 문학비

세워두고 오던 날이었던가?

영암 월출산 백운동 골짜기에

천연 동백숲이 한 壯觀을 보여주는디

이따아만한(나는 두 팔을 동그랗게 만들어 보인다) 고목이

허공에 정지시켜놓았던 꽃들을 고스란히

땅 우에, 제 슬하 둘레에 내려놓았드라고!

産달이 가까운 여자후배 하나가

뚱게뚱게 걸어서 만삭의 손으로

그 동백꽃 주우러 다가가는 순간의 시를

나는 아직까지 못 찾고 있어.

상하지 않고도 피가 도는 그 온전한 시를......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Consuelo & Juanito

 

  

 

신 벗고 들어가는 그 곳 / 황지우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린 독신녀,

그곳에 가보면 틀림없이 베란다에

그녀의 신이 단정하게 놓여 있다

한강에 뛰어든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시멘트 바닥이든 시커먼 물이든

왜 사람들은 뛰어들기 전에

자신이 신었던 것을 가지런하게 놓고 갈까?

댓돌 위에 신발을 짝 맞게 정돈하고 방에 들어가,

임산부도 아이 낳으러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정돈하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뛰어내린 곳에 있는 신발은

생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것은 영원히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다만 그 방향 이쪽에 그녀가 기른 熱帶魚들이

수족관에서 물거품을 뻐끔거리듯

한번의 삶이 있을 따름이다

 

돌아보라, 얼마나 많은 잘못 든 길들이 있었는가

가서는 안 되었던 곳,

가고 싶었지만 끝내 들지 못했던 곳들;

말을 듣지 않는, 혼자 사는 애인 집 앞에서 서성이다

침침한 밤길을 돌아오던 날들처럼

헛된 것만을 밟은 신발을 벗고

돌아보면,생을'쇼부'칠수 있는 기회는 꼭 이번만은 아니다

 

 

 

 

 

 

 

 

Wase Market near Dali (China)

 

 
 
두고 온 것들 / 황지우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서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만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좀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점 배달시키랴?

 

 

 

 

 

 

 

Loner

 

  


 
제주 바닷가를 걸어간 발자욱 / 황지우

 

 

 

 

 

요즘엔 신문을 봐도 무슨 천문학자나 고고학자의

새로운 발견 같은, 그런 기사만 눈여겨보게 되대이.

南제주 대정 바닷가에서 5만년 전 舊石器人 발자국을

발견했다는 일면 톱기사를 식탁에서 읽다가

김치 썰던 주방용 가위로 스크랩 해두었어;

그때 한 인간이 빠르게 내 옆을 스쳐 지나가더라고,

어디 먹을 거 없나...... 하는 그런 필사적인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돌칼 들고 5만년 전의 바람 속으로 들어가는데

내가 맡은 바다냄새를 킁킁거리며 그 근처에서

풀을 뜯던 말들이 고개를 돌려 일제히 이쪽을 넘보는 거야

5만년 후의, 유리 깔린 내 식탁으을......

5만년 뒤 헌 쓰리빠 같은 발자국 화석을 눌러놓은 몸이,

그 한 몸이 다음 몸을 무수히 복제하여 나에 이른

이 냄새, 수저를 들어올리는 손의 이 공기에 대한 느낌;

아, 그 맣은 새들이 내 발자국 주위로 성가시게 내려앉고

아, 살아야 해, 살아야 해!하면서

실은 나는 얼마나 많이 이미 살었등고!

게으르게 밥알 씹다가 뒤집어본 스크랩 뒷면,

전두환씨 아들의 괴자금 170억 사건;

나는 식어버린 된장국물을 후루룩 마셨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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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우 시인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 입선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전통시와는 달리 기호, 만화,사진, 다양한 서체등을 사용하여

시 형태를 파괴함으로써 풍자시의 새로운 지평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음. 

학고재 화랑에서 조각전을 여는 등 전방의 예술가로 활동

수상 :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백석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  

 

 

 

 

 

 

황지우 시인은 1952년 전남 해남군 북평면 배다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기서 빈농의 3남으로 출생했다고 되어 있다.

시인이 그리는 마음의 고향은 완도군에 부속된 조그만 ‘솔섬’ 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묻혀 있는 솔섬은 그의 정신적, 육체적인 뿌리

이기도 하다. 섬에서의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공동체의 장점이 남아

있는 곳이지만, 실제로는 빚과 가난에 쪼들리는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겪은 양대 공포, 그것은 굶주림과 고문이었다.”

는 발언은 이러한 그의 성장환경을 표현한 것일 터이다.

고향에 대한 그의 기억은 <연혁(沿革)>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네 살 때 광주로 이사한 그는 1959년 광주 중앙국민학교에 입학하고,

2학년이던 1960년 학교에 가는 길에 우연히 4?19혁명 시위대를 만나

그 대열을 따르게 된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나이에 겪은 혁명의 체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게 되는데 그것을 시로 쓴 것이 <1960년 4월

19일, 20일, 21일, 광주>이다.

1965년 광주서중에 입학하고, 1968년에 광주일고에 입학한다. 1971년

재수를 하기 위해 광주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다음 해인 1972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에 입학한다. <활엽수림에서>라는 시를 보면,

그는 대학 시절에 이성복, 김도연, 김정환, 진형준 등과 교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학 2학년 때인 1973년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학내 시위 건으로 구속되었다가 군에 입대한다. 1976년 제대 후 복학과

재적, 재입학 등을 반복하여 서울대 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을 졸업한다.

1977년에 결혼, 1980년에 <연혁>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되면서

등단했고, <문학과 지성>에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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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16 13:23

    첫댓글 유신과 5.18을 거치는 암울한 시대에도 황지우 같은 전교조 출신 작가들이 있어 답답하고 암울한 심사를 맑게 걸러주고 그들의 시로 시름을 달래왔으나 이제는 그들조차 좌빨로 몰아붙이는 북풍정치로 더 어두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심히 우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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