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고독이 어울리는 남자, 고독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외에도 창 2 : 18 - 25을 통하여 무궁무진한 보화를 캐낼 수 있다.
세 번째, 판단과 결정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
8절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담은 자기의 마음 한 구석의 허전함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몰랐다. 허전함의 이유를 알았다면 "나 고독하니까 참한 색시 하나 주십시오? 라고 요구할 성격이다. 하지만 무엇을 구해야 이 시린 마음 한 구석을 채울 수 있을지 알지 못하였다.
쌍쌍이 뛰노는 사슴을 보며 "참 보기 좋다"라는 마음에 "사슴아 같이 놀자"라고 다가가 동산을 뛰어다닌다. 하지만 밤만 되면 이 놈의 사슴이 아담을 따돌린다. 아담은 밤이 싫었다. 밤은 아담을 너무 슬프게 했다. 슬픔이 지나쳐 밤을 만든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모 코미디 프로에서 코미디언이 "난 밤이 무서버"라고 한 유행어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다 할아버지 아담의 흔적이다.
또 하나의 아담 흔적은 잠이다. 남자가 여자보다 잠이 많은 것은 외로운 밤을 빨리 보내기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던 아담의 습관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유난히 밤잠이 많다. 대신 여자들은 낮잠이 많다. 필자의 주장을 보면서 "근거 있는 이야기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줄 안다. 그 사람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너 바보 아니야?"
아담은 자기의 속앓이 이유를 정확히 진단할 수 없었다. 이 아담의 모습이 우리의 현실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듯이 행동한다. 허전함이 남자 친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쉽게 단정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친구들이 많다. 밤이 무서워서 밤에 여자를 사냥하러 나가는 남자가 많다. 이 말은 곧 날 꼬셔달라고 거리를 헤매이는 여자가 많다는 뜻이 된다. 피시 통신에 들어가 눈이 시뻘겋도록 통신하며 이성을 찾아다닌다. 님을 봐야 뽕을 딴다는 미팅 순례자도 있는가하면, 이성 주변에서만 빙빙 맴도는 잠자리파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부질없는 것이다. 아담이 "나에게도 짝을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어도 하나님 "아직 넌 홀로 있는 것이 좋아"라고 판단했다면 어떠한 열매도 거두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단정해서 말하고 싶다. 의도적으로 이성을 찾아다니는 것은 모두 자의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현재 상태 유지라는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이성을 찾아 나선다면, 그 만남은 종국에는 불행한 만남이 되고 말 것이 자명하다. 후에 차차 설명하겠지만 홀로 있음에 대한 가치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둘이라는 가치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가 곧 애인이 생길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하셨다. 그리고 그 판단은 곧 바로 짝을(돕는 배필) 만들어 주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 하나님의 신속함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판단하시고 해결 방안을 유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은 즉각적으로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필요가 채워지기까지 기다린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시간 개념의 차이 때문이다.
이런 우스개 이야기 있다.
한 지혜로운 청년이 하나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으시다면서요?
"그럼 물론이지"
그러면 1원이 10억 같고 10억이 1원 같겠군요?"
"그럼 물론이지"
"그러면 저 1원만 주세요" - 지 딴에 겸손하게 1원을 구하면 10억을 줄 것이라고 판단.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지혜로운 청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거 참 기특하기도 하지, 그래 하루만 기다려다오"
그래서 그 지혜로운 청년은 천년을 기다렸다고 한다.
우리의 기다림은 인간적인 시간 개념일 뿐이다. 이루어진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신 때임을 알아야 한다. 당신이 아직 결혼상대자를 만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눈에 아직은 보기에 좋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궁상떨지 말고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도록 노력함이 현명하다.
주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9기 10기를 애인도 없는 무능력자로 손가락질하지 말아야 한다. 애인 없는 모습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룰 수 있는 좋은 상태이기 때문에 여전히 솔로로 두시는 것이다. 9기를 아직 신랑 후보감으로 점찍지 않는 사람은 안목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아서 즉 능력 있는 자라는 뜻인데 이들을 외면하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너무 일찍 애인을 둔 사람. 15기 이하는 내 애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티도 내지 말 것이며, 손도 잡지 않음이 현명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모습이 그렇게 어린 나이일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20, 23살 나이에 이가 서 말이나 되는 꿰제제한 모습이라면 끝장 난 인생이 된 것임을 아는가? 여자나 남자 때문에 목숨을 걸지 않는 나이는 분명 하나님의 판단에 아직은 홀로 있음이 보기 좋은 나이임을 기억하고, 사슴과 즐겁게 뛰노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이 지혜 있는 자의 판단이라 생각된다.
하나님께서 홀로 있음이 보시기에 안 좋다라고 판단하실 때가 곧 애인이 생길 때임을 확신하고, 연장자는 자신 있게 살고, 연소자는 조심스럽게 살았으면 좋겠다.
넷, 하나님이 주시는 돕는 배필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20절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돕는 배필은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우선 아담 주위에서 돕는 배필이 없는가하고 살펴보셨다. 그리고 동물들을 아담에게 보내어 가장 마음에 드는 동물을 배필로 삼을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배려는 주위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짝은 어쩌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을 지 모른다. 바로 내 옆에서 "오박사 오뎅"을 개걸스럽게 먹는 형제가 내 평생 반려자가 될 수 있으며, 심한 공주병으로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밥맛"과 한 이불을 쓰게 될 수도 있다. 로마의 휴일이 생각나는 모 인애 전도사나. 사람을 웃겨 죽이는 잔인한? 모 대복 성인이 당신의 낭군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먼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다가온다.
일전에 어떤 수련회에 참석했던 적이 있다. 설악산 울산 바위를 등정하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어울려 함께 설악산에 오르던 중 내 눈에 자매의 힘겨움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매에게 다가가 베낭을 달라고 했다. 물론 이 때 나는 결혼한 지 5년이 된 유부남이었다(전혀 흑심이 없었다. 여보 믿어주오). 베낭을 메고 오르다보니 힘겨운 자매들이 속속 보였다.
함께 오르던 노총각 형제에게 "좀 자매들 베낭 좀 들어주지 그래. 결혼 상대자 만날 좋은 기회잖아?"
그러자 이 노총각 형제 왈. "에이 난 제들한테 관심 없어요"
그 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마음에 드는 자매를 움직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그 자매 주위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달려 있다. 당신의 작은 친철과 예절은 당신을 소문나게 해 줄 것이다."
내가 봐도 이 말은 명언 중에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내 주변 사람에게 멋있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만큼 더 많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같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중매 서겠는가? 당연히 소문 좋은 사람일 것이다. 또 소문 좋은 여자가 당신에게 접근했다 치자 뿌리치겠는가? 그렇지 않다. 일단 긍정적 호의를 보일 것이 분명하다.
플레이보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가까운 곳에 나의 배필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는 말이다. 기독 젊은이는 데이트와 관계없이 예절 갖춘 신사 숙녀가 되어야 한다.하나님께서 주변에 수 많은 배필을 데리고 왔는데 그 쪽에서 먼저 나를 싫다고 한다면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선 곳이 기회이다. 당신은 선택권의 능동성이 있기도 하지만 선택 당할 수 있는 수동성에도 노출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주어진 환경에서 정금같이 빛나는 자기를 다듬어 나가야 한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여유는 절차탁마(切磋琢磨)가 동반되는 준비와 함께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