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광렬 시인>>
<<구광렬 시인의 양력>>
* 1956년 출생. 동물을 유난히 좋아해 일찍이 파타고니아에서 목동생활을 하고 싶었던 청년 시절, 멕시코로 건너감
* 멕시코 국립대학교 중남미문학과에서 중남미 문학 전공(중남미문학박사).
* 1986년 멕시코 문예지《El Punto》에 시〈Quetzalco´atl〉등을 발표하고 멕시코 및 중남미 문단에 등단.
* 국내에선 현대문학에 〈들꽃〉을 발표하며 등단. UNAM 동인상, 멕시코문협 특별상, 스페인대사상 등을 수상.
* 스페인어 시집 : 『하늘보다 높은 땅(La tierra mas alta que el cielo)』 등.
* 시집 : 『텅 빈 거울(El espejo vac o)』, 『슬프다 할 뻔했다』,『나 기꺼이 막차를 놓치리』, 『불맛』 등.
* 멕시코문협특별상, 스페인대사상, 브라질 ALPAS-XXI 라틴시인상 등을 수상
* 현재 멕시코국립대학교 연구교수, 멕시코출판사 Eo´n 해외이사, La tinta seca 편집위원, Enfocarte 동인,
* <시와 반시> 편집위원, 울산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구광렬 시인의 시>>
건전 이발소 / 구광렬
머리를 깎는 동안 이발사는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딸이 농협에 취직했다, 휘발유보다 경유가
더 비싸지겠다, 보일러가 터졌다 하지만 이야기의
반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벽에 걸린 그림 때문이었다
어미개와 강아지 열 마리를 그리고 있는, 한 화가를
그린 그림 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캔버스 밖으로
발을 내밀어, 그림 속 화가에게 건네고 있었다
그림 속 그림의 강아지의 웃음, 그림 속 화가의 웃음,
그림 밖 내 웃음이 삐거덕거리지 않고 번져나갔다
그제야, 자신의 말을 건성으로 들었다는 걸 안 이발사,
웃었다
밖으로 나오니, 함박눈이 내렸다 건너 성당의 마리아상
속눈썹에까지 쌓일 기세였다 공원놀이터가 보이고,
빈 그네 위에 흰 눈이 쌓이고, 고요한 밤, 소시민을 위한
밤이 될 듯했다 단지, 머리카락을 잘랐을 뿐이건만
뇌수술을 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담벼락에 주차되어 있는 내 디젤 짚을 보는 순간,
20년 된 보일러가 떠오르고, 10년 째 취직 못하는
아들놈이 떠올랐다 그렇게 풍경은 그림이 되고 있었지만,
난 그림 밖에 있었다
정녕 그 그림을 그린 화가도 웃었을까 시동을 걸기도
전에, 그림 속 강아지 발이 그리웠다
고백과 고백사이/구광렬
누군가 기원전의 말 한 마리를 몰고 와선 그를 싣고 떠나 줬으면 했다 도무지 부활의 희망이나 의지를 보여주지 않던 그 성당의 예수상, 아니 예수.
기쁜 날에도 그를 보면 슬퍼졌다 복도를 지날 때면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이 하 애처로워 손발에 박힌 못이라고 빼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난, 그 성당을 오래 다녔다 술을 마시고 포커를 치는 예수보다 더 신 같던 사제 때문이다
쿠바산 시가를 빨다가 위스키가 담긴 콜라 병을 들이켜며 그가 한 말 : 죄는 물론이고 벌 또한 인간의 짓이다 신의 짓이 아니다 세 번씩이나 부인해 줄 베드로 같은 신자는 못 뒀지만 히든카드를 들여다보는 그의 쪽 째진 눈망울에선 차라리 부활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신부, 예수보다 먼저 세상을 떴고 지금까지 부활했다는 소식은 없다
그럼에도 난, 계속 성당을 다녔다 마리아보다 더 성모 같던 수녀 때문이다 '형제님, 형제님'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엔 내 어머니에 결핍됐던 살가움이 들어 있었다
내 나이 열아홉, 마침내 그녀를 사랑했다 검은 수녁복은 총천연색으로 보이고 달력엔 성당 가는 날이 유난히도 빨갛게 칠해졌다
하나 짝사랑이었다 그녀 , 나보다 예수, 아니 예수상을 더 사랑했다 날 보곤 웃었지만 그를 보곤 울었다
지금 난, 듬뿍 얹힌 휘핑크림 너머 그 성당을 바라본다 마당엔 여전히 석녀 마리아가 보이건만 복도엔 그가 있을까? 그 그림자 말이다 회랑 끝까지 죽 늘어지던 검은 뿌리 같던, 도굴된 시체를 세워 놓은 듯해 다시 어 주고 싶던
아니, 그 또한 신이었을 거다 신 없으면 기원후 인간이 신이 되려 드니까
혼자 있어도 함께 있는 느낌, 그래서 난 이곳을 즐겨 찾는다
그래, 그녀 또한 날 사랑했을지 모른다 에스프레소의 쌉싸래함과 녹아드는 생크림의 단맛이 어우러지고 있잖아
화분과 화분 사이/구광렬-
해 뜰 무렵엔 인도가 원산지인 벤자민이 한국의 춘란을 넘어 브라질이 원산지인 부겐빌레아의 꽃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해 질 무렵엔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떡깔고무나무가 중국의 관음죽을 넘어 부겐빌
레아, 춘란, 벤자민의 꽃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림자가 있는 낮에는 1.
그림자가 없는 밤에는 0.
그 사이를 지나다 보면
스위치가 있는 듯 연결과 단절을 느낀다
하지만 발 묶인 자의 희망, 그리움을 ‘이다’ '아니다'만으로 나타낼 순 없는 일, 무엇보다 지구의 대척점에 고
향을 둔 나무들이 같은 시각에 떠오르는 태양 앞에서 그들의 키만큼만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면, 잔인하다
벤자민, 부겐벨레아, 춘란, 떡깔고무나무, 관음죽, 사이사이 공용어는 손짓이다 서로를 향해 이파리를 뻗음으
로써 그림자 없는 밤에도 1, 연결을 넘어 연대를 꿈꾼다
기차가 산다/구광렬
몸속에 기차가 산다 갈비뼈를 지날 쯤, 철길건널목 앞 자전거처럼 무릎을 굽혀야만 한다 치익- 증기가 새나오고 부웅, 물렁뼈 사이로 기적이 울린다 행복을 눈치 채는 시간은 3초, 기차는 아홉, 난 쉰 셋. 라파스절벽 같은 귓바퀴를 돌 즈음 과연 옆 자리에 누가 탈까? 조마조마, 시절의 습관처럼 두 다리가 모아진다
비가 온다 눈이 올 계절에 내리는 비, 차창 밖 간판들을 더 슬프게 만든다 와들, 차창 안에서 떨고 있는 또 다른 나, 꼬마기차가 스물넷 침목을 채 건너기도 전, 명치서부터 덜커덩거린다
내일은 해가 뜰까? 새 한시, 견디지 못할 이명耳鳴에 커피 잔 속 녹지 않을 설탕 같은 재즈를 듣는다 캔사스 시티밴드, 여덟 시 반 시계종소리에 맞춰 짜안- 뮤지션으로 변신하던 그들이 복숭아 뼈 간이역쯤에서 오르고 있다 기차는 정차 시, 더 무겁다 이름 모를 종착역에 아침 해가 기다란 그림자 하나 만들 때까지 화통에다 땔감을 집어넣는다 칙칙폭폭, 골반이 조여진다
간(間) 21-우리 사이엔 유화 한 폭이 있어/구광렬
뉴요커 습성을 지닌 아인,
그림 저 편에서 펜네 파스타에 기네스를 기품 있게 마시고
자갈마당 습성의 난,
그림 뒤 켠에서 우적우적 돼지비계를 씹으며
양수가 덜 마른 머리를 셔츠 안으로 밀어 넣고
‘운명’의 첫 소절처럼 내리는 비,
‘당신의 할아버지도 마셨던 우유’ 광고판을 적시면
송아지 피부의 그 아인, 우아한 레이스가 굴곡져진
레스토랑 바보(babbo)의 처마 밑을 파고들고
피부가 쇠잔등보다 더 두터운 난,
알타미라동굴 같은 지하철역을 공벌레처럼 말려들고
바이올린, 첼로……
악기 모양의 구름들이 룸바로 뭉실대는 해거름,
번쩍이는 그 멜로디너머 미늘 맛을 못 본 고기처럼
상처도 없이 아파하는 내 사타구니 밑으로 캬캬캬,
빠져나오는 면도날 웃음.
악어의 눈물이라 불리는
아가미가 깨끗한 이들이 팔딱이는 포구에서 난,
끝내 강철판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이를 위해
미혼모의 젖꼭지를 씰룩대며 새 한 마리 그려 넣고
그 새,
어느 무명화가가 명품갤러리에 살포하는
허허롭고도 앙칼진 웃음을 터질듯, 룸바로 울어대고
불 맛/구광렬
어머닌 불 맛을 안다고 하셨다
불간이 잘 배어야 음식은 맛있는 법이라며
여린 불, 센 불
소금대신 불구멍으로 간을 맞추셨다
이 모두,
벼락에 구워진 들소의 안창살을 맛봤다던
네안데르탈인을 닮았었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음식은 갈수록 더 뜨거워져만 갔다
미각과 온각을 혼동하고 계시던 어머닌,
입천장이 훌러덩 벗겨지는 펄펄 끓는 곰국까지
싱겁다고 하셨다
그랬다, 그 즈음 당신 뱃속의 불길은
활활 요원(燎原)으로 번지고도 남음이 있었다
안방에서 속살 타는 냄새, 행랑까지 새나왔으며
습습한 날 그 냄샌, 낮은 개나리담장을 타고
삽작을 나섰다
그랬다, 그 즈음 어머닌
안동 간 고등어보다 더 짤 것 같았던
당신 속살마저 싱거워하셨다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오타 벵가를 기리며/구광렬
1.
난, 사람입니다
1904년 콩고 전쟁에서 아내와 애들을 잃고 미국으로 팔려와 관람객들에게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해왔다는 사실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원숭이우리에
갇혀있을 뿐입니다
백인아이들이 침을 발라 밀어 넣는 바나나조각, 치즈토막, 빵 부스러기들을 페인트 벗겨진 철망사이에서 빼내먹곤, 깨진 멜론만한 엉덩일 숨길 길 없어 둥근 우리 안을 뱅뱅 돌다 배설하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잠 역시 원숭이와 함께 자니 원숭이와 사람의 교미 장면을 특종 삼으려는 기자들이 암놈원숭이의 붉은 엉덩이를 수놈인 내가 수시로 탐내주길 바라지만, 그럴 순 없어요
원숭이보다 더 진화된 동물이어서? 죽은 아내가 떠올라서? 성욕이 없어서? 사방으로 트인 우리 때문에?
아닙니다 우린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후 난,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담배공장으로 옮겨집니다 사다리도 없이 높은 곳을 잘 오를 수 있었으니 50m가 넘는 굴뚝도 쉽게 청소할 거라 믿었겠죠
헤어지던 날, 오랑우탄도 침팬지도 한시도 내 품을 떠나지 않으려던 새끼 샤망도, 모두 울었습니다 동물우리가 통째로 쩡쩡거렸습니다
1916년 내 나이 30대 중반쯤, 굴뚝청소를 하고 받은 돈으로 권총 한 자루를 샀습니다 열대우림의 정글에서도, 열 평 남짓 원숭이우리 안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정글의 법칙을 콘크리트정글에서 느꼈습니다 이제, 복잡한 머리통에다 새끼손가락만으로도 당길 수 있는 참 간단하고 편리한 인류문명의 상징인 쇠붙이를 갖다 붙이겠습니다 곧 진화론이 실천적으로 입증되거나 최초로 자살하는 원숭이의 탄생이 기대되는 만큼 까만 손가락을 오므리기 전, 피그미식 종교의식을 성대히 치러야겠지요
우와우와……
빔보빔보…!!
2.
쾅!
뜻밖에도 자살이 아니네요
我가 我中他를 살해한 것이네요
아니,
我中他의 공격에 我가 정당방위 한 것이네요
아니,
총을 갖고 놀던 한 마리 침팬지가 총기사고를 낸 거네요
아니,
神에게 바쳐질 흑염소 한 마리가 도살됐을 뿐이네요
메르세데스 소사*/구광렬
1.
지구 반대편 구석에서 노래 한 줄로 깨달았습니다
구석은 세상을 향해 열려있건만 세상은
구석을 향해 닫혀있다는 걸
세상 힘든 것들 구석으로 몰리건만
묵묵히 구석은 그 어깨들을 받쳐준다는 걸
수평선에도 구석이 있고
그 면도날 같은 파도의 한 줄 구석에도
등짝을 곧게 펴는 고기들이 산다는 걸
갈대의 울부짖음을,
못에 박힌 빈 바가지의 달가닥거림을,
구석에서 태어난 바람은
입이 꽉 틀어 막힌 것들을 대신해 소릴 내 준다는 걸
그 바람 앞에선
작고 낮을수록 더 떳떳할 수 있다는 걸
2.
사람의 목구멍이
골짜기란 걸 알았습니다
물이 흐르고 새가 지저귀고
꽃이 피는
사람의 목소리가
바람이란 걸 알았습니다
물소리, 새소리, 꽃향기를
코, 귀에까지 실어다주는
사람들의 삶이
조각조각 퍼즐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한 조각만 빠트려도
문제를 풀 수 없는
아, 골짜기에서 바람이 불듯
사람의 목구멍에서
노래가 치솟음을 보았습니다
그 노래,
떨어져나간 퍼즐조각 같은
목숨들을 불러 모아
또 한 번 神의 얼굴로 풀어내는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 아르헨티나 출신의 저항가수, 2009년 10월 5일 타계.
유리의 바다/구광렬
1
반송우편처럼 돌아온 해변, 편지봉투 위의 스탬프 자국 같은 발자국들을 세본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아니 한 사람이 수없이 지나갔다 발자국들이 자살을 위해 벗어놓은 신발들처럼 가지런하다
2
사구(砂丘)엔 선명했던 눈물 자국들이 빛나고 늑골이 허옇게 파헤쳐진 수평선의 선분 조각들, 태생적으로 얕고 가벼운 죽음을 사랑했는지 손가락만 한 굵기와 깊이 속에서 삶의 증거들을 뿜어댄다
3
페달을 밟는다 새끼의 주검을 안고 암벽을 오르는 어미원숭이처럼 온몸을 굴려보지만 꿈속에서처럼 발이 묶인다 바큇살이 살점 떨어져나가는 소리를 낸다 무한동심원을 그리던 실루엣, 해변의 문양으로만 남는다
쨍그랑, 금이 간다 나의 바다, 유리의 바다
바오밥/구광렬
열대 아프리카의 나무가
온대의 내 가난한 정원에 뿌릴 내릴까 싶다가
신에 의해 최초로 만들어진 나무
수명이 오천 년이나 된다는 나무를 심는 일은
명주실 한 타래를 위해
끊어진 누에고치에 새삼 숨을 불어넣는 일과
깨져버린 꿈을 잇기 위해 삼가 눈을 감는 일
문드러져 사라져버린 지문을 다시 새기고
흐릿해진 손금에 새로이 먹을 먹이는 일
무엇보다 뵌 적 없는 조상에게
엄숙히 제를 드리는 일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잠자는 이마에 듣는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오늘 그 바오밥나무 씨앗을 묻기에 이른다
그 씨앗,
찬바람 불고 눈 내리면 동동 얼어붙겠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여름이 한 만 년쯤 될,
천 년 그 어느 끝자락 즈음
미이라 내장 속 과일 씨처럼 문득 싹을 틔워
다섯 장 흰 꽃잎 만국기처럼 흔들리고
죽은 쥐 모양의 열매 달랑, 고양이처럼 웃으면
가지보다 더 가지 닮은 나무의 뿌리는
지구별의 한복판을 뚫고 불쑥
반대편 이웃 정원의 나뭇가지로 솟아
남반구 북반구 대척점 사람들
모두 한나무에서 움튼 열매를 나누고
손자의 손자들은 집 한 채 크기 둥치에
대문보다 더 큰 구멍을 내
팔촌, 십이촌 한나무 한가족을 이룰 것이니
지난날, 강 저쪽을 망각해
도강의 꿈을 저버렸던 새 한 마리
뿌리보다 더 뿌리 같은 가지 위에 앉아
그 평화스러운 나눔을 지긋이 바라볼 때
그즈음
이 정원엔 눈이 내려도 좋을 것이다
씨앗을 쥐고 있던 내 손바닥, 화석이 되어도 좋을 것이다
탈의실/구광렬
점퍼를 벗다가 소매 하나를 남긴 채
멈춘다
TV 속 연쇄살인범이 모자를 눌러쓰고
마네킹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
셔츠의 단추를 풀다가
멈춘다
국회에서 난투극이 벌어지고
눈덩이가 벌겋게 된 여성 국회의원이
뛰쳐나온다
러닝셔츠를 벗으려다
멈춘다
농성하던 철거민들이 시체로 실려 나간다
바지를 내리려다
멈춘다
노숙자끼리 잠자리를 놓고 싸우다가
고참이 신참을 죽인다
팬티를 내리려다
멈춘다
여중생들이 집단으로 성매매를 한다
엄지에 구멍 난 양말을 벗으려다
멈춘다
내 차 기름인 경유가 두 배로 뛸 거란다
발가벗은 채
멈춘다
눈밭에서 외투를 껴입은 리포터가
외출을 자제하고, 차바퀴에 체인을 감으란다
들꽃/구광렬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되어라
이름 없어 좋아라
넓은 들녘에 지천으로 피어난
우리들 이름은 마냥 들꽃이어라
뉘 꽃을 나약하다 하였나
꺾어 보아라
꺾을수록 들판이 일어나니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는 없어도
가슴을 파헤치는 광기는 있다
들이 좋아 들에서 사노니 내버려 두어라
꽃이라 아니 불린들 어떠랴 어떠랴
주인 없어 좋아라
바람을 만나면 바람의 꽃이 되고
비를 만나면 비의 꽃이 이어라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주인 없어 좋아라
이름 없어 좋아라
까만 올리브/구광렬
사진작가 제임스 레이놀즈는
사행 집행 전
사행수들이 선택한 최후의 만찬을 찍었다
프렌치프라이와 치킨, 밀크셰이크 세트
바나나, 파인애플, 사과, 포도, 망고 세트
달걀과 쿠키,커피 한 잔 세트
콜라와 비스킷, 하겐다즈 아이스크림 한 통 세트
식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성냥과 담배 한 갑 세트
그중 눈길을 끄는 건
아직은 뺨이 빨간 어린 소녀들을 강간 살해한
로버트 빌이 선택한, 38구경 권총 알을 닮은
씨를 뺀 올리브 한 알
그 씨가 빠진 한 알로
저승에서 올리브나무를 싹 틔우려 했을까?
두 알이었다면 대장을 거쳐 항문으로
빠져나왔을까?
오렌지색 식판 중앙에 놓인 까만 올리브,
좀더 멀리 놓고 보니
그 한 알, 속이 꽉 찬 씨앗처럼 보인다
밀레의 「만종」속,
가난한 농부 부부의 손바닥 위, 밀알을 닮은
그다음 날 아침, 빌이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그 한 알, 식도를 타고
소장까지 밀려와선 뚝, 그 자리에 멈췄으면………
펌프와 젖꼭지-나 다니던 초등학교, 사창가에 있었다/구광렬
1
창근이네 집에는 누나들이 많았다 난 녀석의 친누나들이라 믿었고 그녀들, 더운 날에도 짙은 화장을 했다 마당 한가운
데 뽐뿌 물에 등목을 할 양이면 토종참외만 한 유방들이 덜렁거렸는데, 사이사이 돈을 다발로 끼워줘도 그 꼭지만은 못
빨게 했는지 팥알만 한 것들, 갓 잡은 암다랑어 속살보다 붉었다
어린애가 보기에도 어린애 같던 계집들. 비싼 울음을 싸게 파느니 싼 웃음을 비싸게 팔겠다는 듯, 사이사이 신음 아래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아껴놓은 눈물방울들, 세상이 양껏 울음 울 수 있을 방을 주고 열쇠를 줄 때까지 젖꼭지에 매달아 놓겠다는 듯, 봄비
맞은 앵두알처럼 뽐뿌 아래서만 반짝였다
2
그럼에도 창근이 아버진 서예가였다 색색거리는 소릴 듣고도 붓 흔들림이 없었다
마당에선 일 끝난 누나가 뽐뿌질을 하고, 어린 우린 안방기둥을 잡고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창근이 어
머닌 숱 빠진 사리빗자루를 들고선 ‘장사 망친다’ 후려치고…… 하지만 창근이 아버진 결코 떨리지 않는 손으로 한 획 한
획, 정성스레 그었다
술래잡기 끝나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온 난, 펌프 물속 그 젖꼭지들이 하 삼삼해, 밤새 엄니의 소 안창살보다 더 검은
젓꼭지를 눈으로 가져가다가, 뺨 싸대기를 얻어맞았다
비망록과 마그네슘/구광렬
1
펜대가 될 깃털 하나, 새 몸뚱이로부터 뽑혀 나올 때
날카롭게 벼려진 깃털 끝, 첫 번째 잉크방울을 머금을 때
첫 번째 잉크방울, 비망록 한 귀퉁이에 떨어질 때
망각은 시작된다 편리하고도 편안한 망각……
어느 날 저녁 난, 거리에 멈춰 섰다 망각을 위한 또 다른 기억을 위해
가시 박힌 나무그림자들,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새들, 사라져갈 이름들이 새겨진 서류들, 주유소에 나부끼는 절은 깃발
들, 시장 바닥 파란 꽁치의 눈알들, 자동차 꽁무니를 들이받고 공중으로 떠버린 폭주족의 Green 오토바이
내 마른 瞳孔에 윙크를 퍼부었지만 막막했다 할로윈 호박 속 랜턴처럼 난, 이빨만을 반짝였다
역시 어느 날 밤 비망록은 불편했다
2
깃털이 뽑힌 자리에 잉크방울보다 더 진한 핏방울이 고일 때
기억은 시작된다 아주 불온하고도 불편한, 하지만……
무작정 백과사전을 편 뒤 맨 윗줄 낱말로 詩를 써보기로 했다 일기예보에는 눈 올 거라 했지만 비 내렸고 맨 윗줄 단어
는 마그네슘이었다 사백 년 거슬러 올라 공고라(Luís de Góngora)를 만난 뒤에야 한 두 줄 긁적일 것 같았다
막막했다 마그네슘, 마그네슘…… 되뇌며 그날 저녁, 지하철에 올랐다
반주로 마신 5년 산 칠레 포도주가 품은 햇살부스러기가 그제야 입안에서 튀는지 혓바닥이 따끔거렸다 마그네슘!, 마
그네슘!을 외치며 무작정 뛰쳐나갔고 강남역 8번 출구 매가박스 쪽이었다
-시방, 날보고 욕하는 거제?
-그냥, 막네슘이라 했는데……
-것 봐, 막시발눔이라 하고 있잖아!
그릇된 일기예보를 한 통보관의 하루가 그럴까 마그네슘은 정말이지 독약 이름 같았다 사내는 내 멱살을 잡았다 난,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단지, 일기예보와 달리 비가 내릴 뿐이라고만 했다
하지만 하루는 24시간 아닌가 밤이 이슥해지자 비는 진눈깨비로, 진눈깨비는 눈송이로 바뀌고 마그네슘, 그 금속 맛
나는 낱말에서 그리움이 스며 나왔다
눈발 속에서 다시 마그네슘, 마그네슘을 외쳤고 눈송이들은 내 입에서 풀어져 나온 마그네슘분자들에 의해 부드럽게
녹아나갔다 놀라웠다 커피색 눈물과 보라색 웃음을 흘리는 B 여인, A 사내가 동숙서식 하는 그곳이 田園으로 바꿔지고
있었다
그날 밤, 젖은 가죽구두를 끌고 지친 입술로 방문을 열지 않아도 됐다 새벽까지 나이테가 문드러진 나무탁자 위에 녹차
한 잔 올려놓고 전원시 한 수 긁적일 수 있었으며, 기억은 편했고 비망록은 들칠 필요가 없었다
화장터 매점 김 씨/구광렬
새 울음을 노래라 말하는 이는
찬란한 아침, 행복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울음에도 농담(濃淡)이 있어 사람의 울음이 진하면
그 새 울음, 노래로 들리지 않을까?
오늘 자살한 친구 마누라 화장하는 날,
새 울음, 역시 노래로 들리는 것이다
하지만 금지곡을 부르는 듯, 허밍으로만 울음……
새가 운다고만 하는 이는 눈을 뜨면 서글픈 아침,
불행한 마음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람의 슬픔이 두텁고 깊다 보면
새 울음쯤이야, 킥킥 웃음으로 들리지 않을까?
아무래도 오늘, 팔공산 화장터 조문객들이 던져 주는
김밥 부스러기, 소주 안주를 먹기 위해
머릴 땅에다 박으며 흥얼거리는 새들은
웃음보를 틀어쥐고 있는 것이다
분골을 들고 나오는 상주들의 울음계곡에서
술 팔고 웃고,
담배 팔고 웃고,
사이다 팔고 웃고,
자기라도 웃어야 되지 않겠냐고,
웃는 게 직업병이 되어버렸다는 6미터 컨테이너 속
커다란 새 한 마리 빼곤,
온갖 새들이 웃음보를 참고 있는 것이다
금지곡을 부르는 듯, 허밍으로만 노래하는 것이다.
이슬잠(露宿)/구광렬
1
20년 전 오늘, 거의 전 재산을 사기당해 탕진하던 날.
고소장을 제출하고 경찰서를 빠져나오다가, 시장에서 빈대떡에 소주를, 팥죽 한 그릇에 막걸리를, 포장마차에서 기억도 안
나는 안주와 함께 기억 더 안 나는 술을 마셨다.
화장실 가느라, 지하철 마지막 편을 놓쳤다 주위를 살폈다 말로만 듣던 노숙자들이 기둥 하나씩을 차지한 채, 말똥거렸다
밖으로 나왔다
서울의 봄은 달력에만 있었고 내 주머니 속에는 동전만이 딸랑거렸다
코 시리고 뼈 시려, 정보지 몇 장을 들고선 내려왔다 그 사이 빈 자리라곤 출입구 쪽 기둥 몇 개뿐이었다
되도록 멀리 떨어졌다, 생각하는 곳에 자릴 잡았다 한 장 한 장 펴서 얼굴부터 발끝까지 덮었다
셔터 내려가는 소리 들리고…….
*
몇 시나 됐을까, 후두둑 소리에 잠이 깼다
어떤 치가 내 몸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한 손으론 그 끝을 털고, 또 다른 손으론 쇠망치를 흔들었다 슬그머니 정보지에 떨어
진 오줌을 털어낸 뒤, 뒷걸음질로 또 다른 기둥을 찾아 나섰다
화장실 쪽의 것. 냄새가 스멀거렸지만 따스한 기운도 새나왔다
새벽녘,
술 깨기 시작하고
정보지 아래, 그 부분에서 차오르는 힘.
민망스러워 얼굴을 뒤집어쓰고
숙여라, 제발 처지를 알고 숙여다오!
통사정했건만
금세 일어나는 불굴不屈!
그렇게, 이슬 닿지 않는 정보지 안쪽은 힘이 셌다
2
퇴계로, 을지로, 세종로…… 넓은 대로들이 한 장 수채화 속 막다른 골목처럼 보였다
비가 왔으면 했다
빗물에 물감이 빠져 종각, 광화문, 광교육교, 그 아래 낙지집 간판마저 흐물거렸으면 했다
구부려도, 부러지지 않을 철근들 죄다 빠지고, 빈 도화지인 양 풍경들, 찰랑거렸으면 했다 그렇게 막다름이 시작이었으면 했
다
*
비 내리지 않고, 구름 사이로 해 솟았다
빳빳해진 그림자를 모포 털듯 툭툭 터니, 지난 날 햇볕부스러기가 한 움큼이었다
미안했다
이 몸, 빛 받고 있음에 그림자 있음인데, 이 몸, 빛 발한다면 그림자, 그토록 끌려 다니진 않았을 텐데……
실과 바늘이 필요할 듯했다
해진 부분은 꿰매고, 늘어진 부분은 잘라내고, 구멍 난 부분은 덧대어야할 것 같았다
모두가 빚이었다
또 한 번 사슬에 감긴다면, 몸보단 그림자이고 싶었다
사막에서/구광렬
물이 보석인 사막에서 마지막 눈물을 위해
하아얀 손수건을 준비했다.
빗소리 듣듯 서로를 듣는다 했건만
이제 먹은 귀로
바람이 선인장에게 길을 묻는 열사에서
우린 서로 남남이 된다.
나의 귀는
더 이상 지난 노래를 듣지 않겠다
나의 눈은
더 이상 너의 부재를 읽지 않겠다.
아, 돌아올땐 길도 묻지 않겠다
한 마리 끈기 있는 낙타가 되어
수정 빛 눈물에 젖을 그 손수건으로
박쥐처럼 멀어버렸던 눈들을 가리우고
그저 봄볕에 성긴 눈발 사라지듯
아른아른 아지랑이 되어 사라지겠다.
한 방울, 두 방울
데이지 빛 색깔의 눈물방울들이
끝내 내 헐벗은 발등 위를 구르기 전에
겨울 그 어느 날 막차를 기다리며
주머니 쇠동전들을 만지작거리던
그때, 그 얼음꽃 같은 맨손들을
아, 點들이 되어라 뜨겁게 흔들겠다.
송광사 가는 길-말러의 교향곡 1번을 들으며/구광렬
1
무대 뒤에서 울려 퍼지는 트럼펫소리, 그 신비로운 서주(序奏)에 창 밖 가로수 잎맥들, 팽팽하네
쌀 튀밥 같은 이팝나무, 보릿고개 시절 눈으로만 삼키던 미미(美味),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날들,
저만치 매달려있네
트럼펫 팡파르, 차창에 내려앉는 꽃잎들, 27번 국도의 오르막은 한껏 축제 중이라네
못물이 넘실대는 논바닥이 부드럽고 스케르초와 부드러운 왈츠 덕에 차창풍경이 경쾌하네 오케
스트라와 팀파니가 하행 모티브를 강하게 주고받으니, 저 모퉁이를 돌면 곧장 풍성한 여름과 만나
겠네
2
현악기 하모닉스로 풍경이 술렁이네 흔들리며 밀려가는 농부들, 바이올린, 첼로, 트럼펫, 농기 대
신 악기를 들쳐멘 듯하구나 큰북을 이고 가는 양 저 노인네, 차를 세우고 손을 빌려주고 싶지만 저
세상 사람 같네 막 겨울이 야산 끝자락에 회색의 입술자국을 남겼네
뻐꾸기 노래하니 ‘울지 말고 노래를 불러라, 노래를 부르는 동안, 기쁨이 올 것이니’* 축제의 노
래, 고조되지만 애달프게 붉어져만 간 나의 계절, 차창 밖 나무둥치가 돼버린 난, 지난날 뿌리혹들
을 아파하네
3
주암호반도로를 달린다네 수면이 파르르 깨져있네 나무들이 호수 위로 찢겨져 내리누나 ‘보리수’
의 선율을 지닌 트리오, 팀파니의 리듬을 타고 저현이 어둡구나 차창 밖은 봄이건만, 차창 안은 겨
울이라네 룸미러에 성에가 끼고 마디마다 겨울이 쌓이네 창문을 내려보지만 날개 잘린 겨울은 쉬
빠져나가질 않는구나
논바닥, 깊게 패인 손금처럼 물속 검은 고랑이 출렁이네 여기저기 모가 꽂히면 저 고갯마루도 말
랑해지리라 거칠고 활기찬 스케르초와 유연하고 사랑스러운 트리오가 대비를 이루니, A장조의 렌
틀러에 오보에가 대선율에 얽히누나
4
d단조, 팀파니의 희미한 연타에 등장하는 더블베이스 선율, 뒤이어 등장하는 ‘카바레 풍’의 밴드
선율, 두 계절 간의 벽이라네
호수 끝 자락쯤, 떠나지 않은, 아니 떠날 수 없었던 철새 한 뭉텅이, 플라맹고 자세를 취하누나 ‘그
대 함께 언약한 내 사랑의 고향, 나 잊질 못하네, 그 아름다운 Annie Laurie를 위해서라면 나, 기꺼
이 목숨을 바치리라’**바이올린소리에 첼로가 묻혀버리고 4도 하행 음정이 저만치 들려오네
영화스크린 속의 봄, 관람객으로서 맞는 봄…… 꽃향기, 피 냄새, 밥 냄새, 아, 냄새도 맡지 못할
내 아버지의 겨울 속 내 어머니의 봄 풀어지는 바이올린에 ‘그녀의 밤색 눈동자’가 애처롭네 멀리
송광사 팻말이 보이고 조계산 끝자락이 막 눈에 들어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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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박자, 자유로운 소나타 형식인 포르티시모 총주에 깜짝 놀라네 기어봉을 움켜쥐어보지만 연
주자들의 손가락, 입술, 어깨, 지휘자의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온몸을 간질이고 문지르네
산이 통째로 차 안으로 밀려오네 계곡물이 스미고 칡덩굴이 핸들을 감아쥐네 차를 길섶 모퉁이에
세울 수밖에 없네
차창 밖 편백나무도, 배롱나무도, 여전히 옷고름을 물고 있는 송광사도 다들 예쁘기만 한데, 천
하의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곡을 붙였던 그가 괴로워하네 ‘대지가 노래한다’고 말한 그가 대지 위
에서 눈물을 보이네 안과 밖, 불이문(不二門)이건만 지금 후광 가득 문설주 아래 내 나이 또래인 그가……
* 멕시코 민요 「Cielito lindo」(내 예쁜 사랑)의 한 소절
** 스코틀랜드 민요 「Annie Laurie」(애니 로리)의 한 소절
굽은 나무가 더 좋은 이유/구광렬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아름답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높은 곳만 바라보지 않고
낮은 것을 살폈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내가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를 더 좋아 하는 이유는
곡선이 직선보다 더 부드럽기도 하지만
굽었다는 것은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이기 때문이다.
땅위에 뿌리를 두고 하늘을 기다리는 일이
어째 쉬운 일일까
비틀대며 살다보면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의 가치를 알게 되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땅 두 번 살피다 보면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굽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김치/구광렬
돌아가실 무렵 어머닌
김치에다 빵가루를 집어넣으셨다
맛보라고 웃으시며 한입 건네는
그녀의 쭈글쭈글한 흙색 손에는
결코 절여질 수 없었던 부추가 뫼 잔디처럼 파릇했고
반쯤 열린 관 뚜껑 같은 눈두덩엔
실핏줄이 가뭄처럼 끊겨 있었다
당신이 해주시는 음식을 아들이 제일 좋아한다고
굳게 믿고 계시던 어머니를 위해
난 빌었다
'혀야, 고춧가루란다 빵가루가 아니란다'
하지만 빵가루인지 내 혀인지 둘 중 하나는
잔인하도록 정직했다
평소 거짓말을 잘하던 내 입 역시
새삼 솔직했으며
순간 일그러진 내 초상은
설탕도 맵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갈라진 입술을
풍(風)이 찾아온 양 파르르 떨게 만들었다
마지막 김치였다
좋겠다/구광렬
지금 모니터에서 깜빡거리는 11포인트 이 신명조체 활자들은
훗날 시집(詩集) 속에서 부화되어, 스르륵 날았으면 좋겠다
예컨대 ‘가’ 자는 단양 고수동굴 근처에 산다는
내가 버렸던 그 크로마뇽녀의 쇄골을 스쳐가도 좋겠고
‘나’ 자는 파타고니아 고원의 산양 중 제일 망나니인
엘 카브론의 엉덩이에 차알싹 붙어도 좋겠다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다 멱살을 붙잡거나, 붙잡혀도 좋겠고
흰이마기러기 따라 시베리아로 날다가
깊고도 검은 바다에 후두둑 떨어져도 좋겠다
훗날 그 시집 다시 펼쳤을 때 글자들은 죄다 빠져버리고
듬성듬성 고둥딱지 같은 마침표들, 유유하다면 더
생선/구광렬
동굴 같은 입속으로 생선 토막 가져간다
생선의 살점이 나의 살점이 되면
피부에선 바다 냄새 피어나고
목에선 살점의 살점이었던
해초나 작은 고기들이 살랑거려
간지럼 잘 타는 난, 양수 속 태아처럼
꼬리뼈를 흔들며 또 물 없는 물을 방황하겠지만,
살점은 이동하는 것이다
어제 네 살점은
오늘 내 살점이 되고
오늘 내 살점은
내일, 도 다른 살점의 살점이 되니
먹은 만큼 먹힘으로써만 갚게 되는 빚
생선은 너덜너덜 걸레가 되면서까지
빌려준 적도 없는 그 빚을
한 입 두 입 나에게 갚고 있다
난, 젓가락으로 뻔뻔스레 대가리와 꽁지,
가시와 등뼈를 영수증으로 남기고
소금쟁이/구광렬
그를 만나기 전엔
그가 쟁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막연히 유전해오는 소금 부스러기를 이용해
마냥 물 위를 걷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피부보다 얇은 수면은 거울보다 단단했다
피보다 묽은 물의 단결력을 보여주려는 듯
밑을 받치고 있는 힘은 쉬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아편주사 바늘 같은 다리로 라스베이거스 마술사처럼
연신 수면을 찌르고 있었다
시퍼런 작두도 견뎌낼 것 같던 부드러운 물의 분자들,
소금기도 없는 그를 소금쟁이로 만들어버린 그 단단함으로
논두렁에서 깨금발로 검정 고무신 한 짝을 찾아 헤매던
내 물러빠진 두 다리를 사정없이 후려치었다
부의(賻儀)/구광렬
편지 봉투와 돈 봉투 크기 같음을 친구 놈 죽고서 안다 그 시절 우리 편지 대신 눅눅한 지폐를 밀어 넣는 내 손바닥이 그
크기 같음에 소스라친 것이다
마술 같은 인생이다 봉투를 여는 내 입김 여전히 뜨거운데 몰래 깊이 파인 손금의 손바닥은 싸늘한 네 입술 같은 지폐 몇
장을 애간장 태우던 지난 편지 대신 집어넣고 있다
무작정 마시고 돈 없어 시계 잡히던 그 옛날 막걸리 됫박값 종이돈이 오늘에사 답장도 못 받아볼 글 없고 끝없는 편지가
된다
돼지국밥을 먹으며/구광렬
왜, 이리 미안할까
술에 전 내 창자를 풀기 위해
네 창자를 씹는 일이.
전생엔 너도 빈창자를 채우기 위해
서울역 앞 무료 국밥집을 어슬렁거렸을지도.
국밥 국물의 온기가 스러져갈 즈음
을지로입구역 칼바람을 끝내 못 이겨
빳빳 송장이 돼버렸을지도.
아름다워라,
잡아먹히기 위해 게걸스러웠던 네 영혼,
네 배 속은 죽어서까지 꽉 차 있구나
도시는 사람들을 꿀꺽 삼키곤
순대처럼 게워놓지
도마 같은 지하철역은
푸욱 삶긴 이들을 쓰윽 썰어
반대편 출구 쪽으로 던져버리지
난 그중 3번 출구로 퇴출되었던 너에게
숟가락질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라
아니야, 난 내 전생을 씹고 있을 거야
난 전생에 네 먹이였던 서울식당들 잔반 속
한 가닥 비틀어진 콩나물, 물러터진 양파,
물기 빠진 숙주, 섬진강 모랫바닥을 파고들던
한 마리 재첩이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