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④ 장흥군 안양면 기산(岐山) (대동보 2권p.439~660)
판서공파의 기산 입향조는 26세 백진(伯珍․1790~1866)이다. 간암공의 손자인 그가 할아버지 슬하에서 떠난 것은 호구지책을 위한 활로개척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25세(文良)대에 어려웠다는 대동보 면주(p386)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주(移住)의 보람은 있어서 후손들의 생활은 상당히 호전됐으나 일부 후손(28세 榮偵)은 다시 유치(有治) 송정(松亭)으로 옮기기도 했다.
□세거지 ⑤ 여수시 화정면 개도(蓋島) (대동보2권p.387~670)
여수의 외딴섬 개도와 위씨와의 인연은 태풍이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경상도 남해군수였던 동전(東峑)은 임무를 마치고 해로를 통해 관산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심한 바람으로 풍랑이 거세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인근에 있는 개도에 상륙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며칠 후 풍랑이 잠잠해졌다. 그러나 군수공은 안심할 수 없자 가족을 남겨둔 채 고향으로 떠났다. 이후 가족들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 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 24세 세인(世仁․1692~?)은 섬 생활에 적응하며 생활을 꾸려 오늘에 이른다.
□세거지 ⑥ 장흥군 장동면 율곡(栗谷) (대동보 2권p.393~750)
장흥군 장동면은 관산에서는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 곳에 둥지를 튼 주인공은 판서공의 둘째 아들 정양재공(靜養齋公)의 고손자인 사극(師克․1719~1793)이다. 그는 아버지(命禧)대까지 관산 와룡(臥龍)을 무대로 살았으나 밤실로 이사, 지금까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장흥군이 펴낸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장동에는 밤실 마을에 3가구, 우봉(牛峰)마을에 3가구, 삼정(三亭)마을에 2가구, 산동(山東)마을에 2가구 등 모두 10가구의 위씨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밤실 마을 일가들은 인근인 장평(長平)과 보성군 웅치(熊峙) 등지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세거지 ⑦ 장흥군 유치면 단산(丹山) (대동보 2권p.395~1024)
단산의 입향조는 26세 계은(溪隱) 부계(富溪) 사갑(師甲․1704~1756)이다. 공의 가계는 고조 22세 정양재(廷赫) 정혁(廷赫)·증조 청우당(淸友堂) 동익(東翼)·할아버지 운곡(雲谷) 세설(世卨)·아버지 잉여옹(剩餘翁) 명덕(命德)으로 이어진다. 유치 단산과의 인연은 장남 수옥(守玉, 1735년․乙卯~1761)이 그곳 남평문씨와 혼인하면서 입촌하게 된다.
동기야 어떻든 후손들은 왕성하게 번성했다. 종가는 대단한 부자로 고을 원님이 부임해서 맨 먼저 찾아가 부임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본향인 관산을 내왕하기 위해 별도로 말을 관리할 위마답(爲馬沓)을 두었을 정도이니 알만하다. 상당한 부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탐진강에 댐이 들어서면서 단산의 영화도 막을 내렸다. 그 좁은 고장에서 수백석의 수확을 올렸던 농경지와 한때 100가구가 살았던 마을은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인걸도 산천도 자취를 감춘 단산은 먼 역사 속에 잠겨있다.
□세거지 ⑧ 보성군 회천면 도강(道崗) (대동보 2권p.519~1024)
도강의 입향조는 행와(幸窩) 사급(師汲․1717~1776)이다. 그는 단산의 입향조 사갑(師甲)의 중제이다. 역시 집이 가난해 무남독녀 남평문씨와 혼인하면서 삶의 무대를 바꾼 경우다. 입촌 시기는 장남의 출생년인 1748년(英祖․戊辰) 전후로 보면 270년 전의 일이다. 후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살림이 여유롭지 못했다.
공의 아들 4명중 첫째 수약(守約)과 넷째인 수관(守寬)은 이웃인 웅치(熊峙)로, 셋째는 안양면 검단(劍丹)으로 2차 이주해 오늘에 이른다. 특히 종손을 비롯 28세 영흔(榮昕)의 후손들은 광주를 거쳐 대전에서 살고 있다. 한편 29세 의조(懿祚)의 후손들은 이리저리 이사하다 본향의 친척들과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알 수 없다.
□세거지 ⑨ 경북 예천군 다인면 마전(麻田) (대동보 2권p.546~954)
경북 예천에는 청계공파의 후손 이외에 판서공파의 후손도 있다. 입향조는 사갑(師甲)의 다섯째 동생인 사중(師中)의 아들 27세 인지당(仁智堂) 수징(守徵․1740~1795)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장흥군 장평면 여의동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아버지의 유택이 지금은 화운동(畵雲洞)에 모셔져 있지만 처음에는 여의동(如意洞)에 있다는 대동보 면주의 기록으로 보아 그렇다.
그러나 공의 유택은 '복거경상상주단밀장곡(卜居慶尙尙州丹密長谷)'이라고 적혀 있어 그가 예천의 보금자리를 개척한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상주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의 아들 28세 영운(榮運)이 예천군 다인면(多仁)으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장평에서 이주한 시기는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1760년대로 추정된다. 후손들은 이미 36세가 많은 것으로 보아 번성했음이 확실하다.
판서공파의 후손들의 세거지가 종파중 가장 여러 곳으로 나뉘어져 있군요.
호조판서공 후손들은 지난날 방촌, 초당•김제 월현•도청•기산, 여수 개도, 모산•용전(칠량), 율곡, 단산•당동•도강•예천 효갈 등이 주요 세거지 입니다.
타 종중에 비하면 본향 밖에서 거주한 사례가 많고, 산업화에 따른 후손들의 도시생활에 따라 후손 상호간 잘 몰라 소통이 되지 않다보니 판서공이 배향된 울산 충의사 등 중요 제향에 후손 참석이 없는 등 소통과 문사에 동참이 필요하여 재경지역 거주 후손들 중심으로 <판서공파발전협의회>를 구성 친목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유치면 단산마을에 대해 언급합니다. 계은공(휘 사갑)의 장자 휘 수옥(1735~ 1761)이 입향(入鄕)한 후 250여년 후손들이 거주하여 한때는 50호 이상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습니다. 또한 1850~1950년 간에는 본향(本鄕) 내 유림사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어 장흥부사에 임명(任命)되면 부임(赴任) 전(前)에 인사차 먼저 단산을 찾아갔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대 인물로는 농암공(휘 찬조, 1797~1870, 1859년 재장), 만포공(휘 필조, 1797 ~1875, 1869년 재장), 낙청헌공(휘 형권, 1819~ 1899, 1883년 재장), 담은공(휘 윤권, 1829~ 1906, 1891년 재장), 손암공(휘 준권, 1831~ 1900, 1893년 재장), 단계공(휘 계홍, 1838~ 1914, 1899년 재장), 단강공(휘 경규, 1887~ 1947, 1937년, 1946년 직원)등 6분께서 7번 장흥향교의 총 책임자인 지금의 전교(典校)를 각각 역임하였습니다. 또한 월곡공(휘 계채, 1849~ 1892)이 경남 단성현감 역임 등으로 단산의 문세(門勢)를 짐작케 합니다. 이 중 단강공은 1938(戊寅)년 신도비(神道碑, 방촌 유물관 앞에 위치) 근수(謹竪) 시 치성보조 하였습니다.
단산은 2006(丙戌)년에 정부의 주도로 전남 목포 등 서남권 9개 시‧군의 상수문제를 해결키 위해 장흥 댐이 준공되어 단산마을은 수몰(水沒)되었습니다. 선대의 대표적 유산물인 영귀정을 보존키 위해 장흥읍에서 유치면 신소재지로 가는 새로운 도로변 산자락인 유치면 송정리 산 90-9번지로 이전했습니다.
판서공파 세거지를 알기쉽고 세세하게 설명된글이네요.판서공파 후손들이 대한민국 방방곳곳에 흩어져 사시고 계시네요.
위 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님
시조공께서 한반도에 처음으로 뿌린 문화의 씨가 뿌리내려 줄기가 솟았습니다, 조선후기 존재공에 의해 잎이 나고 현대에 이르러 요람과 천년세고로 꽃피웠습니다. 이제는 젊은 청년들이 이를 본받아 위문의 역사를 위해 더욱 정진하여 풍성한 열매를 수확해야 겠습니다. 이 일의 중심에 백강 연구위원이 계십니다. 그 열정과 문중사랑 실천에 진심의 찬사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