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의 죄된 마음은 맹세를 위한 여지가 있기를 요구한다.
제101문: 그렇지만 경건한 태도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도 됩니까?
답: 그렇습니다. 정부가 국민에게 맹세를 요구할 때에, 혹은 맹세해야할 필요가 요청될 때에,신뢰와 진리가 유지되고 촉진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맹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맹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과 신약에서 성도들이 맹세를 정당하게 사용했던 것입니다.
제102 문: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로 맹세해도 됩니까?
답: 안 됩니다. 올바른 맹세는 하나님만이 마음을 아시므로 진실한지 증인이 되어주셔서 내가 거짓으로 맹세한다면 나를 징벌하실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그러한 영예를 받기에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본 교리문답이 십계명을 다루면서, 한 주일에 한 계명씩 다루는데, 제3계명만은 예외입니다. 열 가지 계명 가운데 제3계명은 두 주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분명히 본 교리문답이 기록될 때의 상황 때문일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이전 교회는 부패한 가르침을 회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여기에 성현 숭배(the adoration of saints)도 들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람은 성현들에게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맹세할 때에도 성현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종교개혁은 이 행습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개혁자들은 “성현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를 더 이상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가르치기 위해서, 본 주의 날 제102문답을 넣어 제3계명을 다루었습니다. “성자들이나 다른 피조물로 맹세해도 됩니까?”
그러나 오직 로마 가톨릭 교회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가르쳤던 오류들을 바로잡기 위해서 본 주의 날을 작성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 당대에 재세례파라는 집단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전혀 맹세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재세례파의 사상은 이렇습니다. “성령님이 부어지셨다. 그래서 우리는 새롭게 되었다. 우리가 새롭게 되어 실제적으로 죄를 초월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스도인인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신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의 예(Yes)가 분명히 예(Yes)이며, 나의 아니오(No)가 아닐 것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입니다. 따라서 이 재세례파는 마태복음 5장 34절에서 주님의 말씀을 “절대로 맹세하지 말라"로 읽습니다. 37절을 “너희의 예는 예로 너희의 아니다는 아니다가 되게 하라”로, 그리고 그들은 다음과 같이 확신했습니다. 주님은 맹세하는 것을 완전하게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문답이 본 교리문답 제3계명의 토론에서 요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건하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도 안 됩니까?” 선조들은 한 주일에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3계명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다루었습니다.
우리는 본 교리문답이 기록된 뒤에 약 400년 뒤에 살고 있습니다. 맹세라는 주제는 보통은 토론꺼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본 교리문답에서 관심있게 살펴보게 된 점에 감사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형제자매들이여! 그 이유는 우리 주변의 이웃과의 더불어 살면서 매일 말해야 하고 우리 생각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된 마음으로 말하고 듣는 사람도 죄된 마음을 가지고 듣습니다. 이것이 의사소통에 실패하고, 속임과 배신과 혼란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맹세를 해야하는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사실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실이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뢰할만한 평판을 계발하고 배양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주 맹세할 필요가 없도록 말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설교를 요약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죄된 마음이 맹세를 위한 여지가 있기를 요구한다.
1. 우리는 누구로 맹세할 수 있는가?
2. 왜 맹세해도 되는가?
1. 누구로 우리가 맹세해도 되는가?
보통은 일상 대화에서, 서로 간 하는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피터(Peter)가 죠니(Johnny)에게 말합니다. 죠니는 재빨리 피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여부를 결정합니다. 그러나 피터가 의도적으로 죠니를 속이거나 사기(欺)치려 한다면, 죠니는 배신감을 느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죠니를 신뢰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피터가 죠니의 신뢰를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또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의 부침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속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파악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언제 그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언제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속아 봤다면, 속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익히게 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우리는 반드시 속이도록 내버려둘 수 없는 상황들이 있고, 우리가 하는 말이 믿을만해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막중한 공직을 맡게 되면, 여러분은 공익을 위해 여러분의 직위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질문을 받게 됩니다. 대중은 여러분의 대답에 대해 믿을 만하다는 것을 확신하기를 바라며, 그래서 예하고 답했을 때 그것이 진실한 것인지 높은 권세에 호소하라고 합니다.
법정에서 다른 사람의 죄를 고소할 때는 여러분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진리를 말할 것이며, 진실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인지 질문을 받습니다. 고소당한 사람, 법체계, 전 사회는 여러분이 진실을 말할 것인지 확신(assurance)을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실제로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고 증명하기 위해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하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혹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살았다고 가정해봅시다. 이웃에게 당나귀를 빌려주었는데, 그만 사라져버렸습니다. 여러분은 책임을 경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웃에게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이웃 사이에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맹세를 사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22:11). 여러분의 말(words) 이외에 더 높은 권위에 호소함으로 추가적인 확신(assurance)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요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상 상황에서 우리는 피차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람의 마음이 기만적이고, 본질적으로 믿을만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특정한 상황에, 사람은 물론 하나님께서도, 단순한 답이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확신을 요구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인정된 행습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히6:16)
질문은 이렇습니다. 호소하는 더 “높은”자는 누구입니까? 주 하나님께서 이 논제에 대해서 명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분명한 명을 내리셨습니다.
네 하나님 야웨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신6:13).
그리고
네 하나님 야웨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신 10:20).
실제로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오직 너희 하나님 야웨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 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수23:7).
다음과 같은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이나 몰렉이나 다곤으로 맹세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실상 주 하나님으로 맹세하는 것은 주님을 섬기는데 본질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오늘날 언어로 말하자면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합니다. 알라(다른 이방신의 이름으로)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은 주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듭니다. 왜 하나님께서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하십니까? 왜 바알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는 안 됩니까? 성 니콜라스의 이름으로 맹세해서는 안 됩니까? 나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됩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질문과 마주합니다. 앞 계명과 관련해서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주이시며, 다른 모든 것들은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유일하신분이십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에 있는 모든 것까지도 다 아십니다. 그분이 마음을 지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피조물이나 아래 땅에 있는 피조물 그 무엇도 하나님처럼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합니다. 실제로 잠언 21장에서 왕의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은 왕의 마음에 아무렇게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이런 생각을 왕에게 집어넣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구체적인 행동을 하도록 생각을 넣으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1절; 참고.사10:6-12). 이것은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한 말과 같습니다.
야웨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니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야웨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나이다(1-4절).
여러분은 제가 말이나 행동으로 여러분에게 말할 때에만, 내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를 괴롭히는 것이 뭔가를 분명한 말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손톱을 깨문다든지 등등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도 뭔가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것으로든(구두로든 몸짓으로든)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제 생각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이익이 된다면 나는 생각을 감출 수 있으며 마음의 은밀한 것이 드러나지 않게 말하거나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생의 파산됨과 죄됨의 일부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진짜 생각과 의향을 다른 사람에게 숨기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는 단 한 가지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내 마음을 지으신 분이 내 생각을 모르시겠습니까? 요한이 예수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라”(요2:25)고 말할 수 있었다면, 그리고 마태가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마9:4)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지금에 승천하셔서 높아지신 그리스도가 오늘 당신 백성의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훨씬 더 잘 아시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인용하는 것이 유익할 것 같습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3; 참고. 잠15:11;시44:21)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이 표현을 주목하십시오. 쉽게 영어로 표현하자면, 여러분과 저,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숨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배우자, 자녀, 장로에게 여러 일들을 숨겨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감추려고 할지라도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만물이- 우리 마음과 깊은 생각조차도-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내가 입고 있는 옷도 나의 얼굴을 가리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의 은밀한 것이나 내 의도를 그분의 시야에서 숨길 수 없습니다.
내 말이 내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일치한다는 확신을 주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누구에게 호소해야 실제로 내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말했다는 것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 대답은 대단히 분명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내 마음의 깊은 것을 재신다면, 게다가 하나님만이 내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아신다면, 내가 진실만을 말한다는 것을 중거할 수 있는 그분에게만 호소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삽니다. 알라나 성 베드로에게 호소하거나 심지어 내 어머니나 내 양심에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을 심히 불쾌하게 만듭니다.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므로 오로지 하나님께만 호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그렇다면 그런 사실이 맹세가 실제로 무엇인지를 설명해줍니다. 맹세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한 바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내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과 말을 비교해주실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제102문답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합법적인 맹세는 오직 마음을 아시고 진실을 입증하시며 만일 내가 거짓되게 맹세를 한다면 징벌하시는 하나님만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 만일 내가 하나님께 나의 증인이 되어주실 것을 요청하고서 내가 한 말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마음에 있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형제자매들이여! 주님께서 레위기 19장에서 “거짓으로 내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이라고 요약하시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레19:12)이라고 했습니다. 제3계명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야웨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야웨께서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라." 내가 한 말과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는 것이 서로 일치하는지를 하나님께서 살펴보시기를 요청하면서 공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한 말이 진실하지 않다면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욕하는 것이며,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명성이 이런 속임이나 사기로 무시당할 때 대단히 질투하시고 분노하십니다. 내가 속인 것을 상대가 알았는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더럽혀진 당신의 이름의 영예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확실히 일어서실 것입니다. 다시 제3계명의 말씀으로 표현하자면 “야웨께서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않으실 것이라.”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떨어지기 전에 오직 회개해야 합니다.
2. 왜 우리가 맹세해도 되는가?
자 지금까지는 맹세를 해야 하는 명분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출애굽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성실함에 대해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맹세를 사용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나 얼핏 읽어보면, 주님께서 우리가 맹세를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리도록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4~500년 전 재세례파의 주장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기에 우리의 말은 분명히 신뢰 할 만하게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재세례파에 의하면, 마태복음 5장의 예수님의 말씀은“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결단코 맹세치 말라" (34절; 참고. 약5:12)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이여! 주님께서 자기 백성이 더 이상 어떤 맹세도 사용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 진짜로 맞습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청중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 논증을 보면 예수님이 맹세를 완전히 부인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전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같은 장에서,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거나 무효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성취하러 오셨다고 하십니다(17절). 자 율법과 선지자는 실제로 맹세를 사용하라고 명했습니다. 출애굽기 22:11절의 명령을 기억하십시오. 게다가 이사야 45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셨습니다(23절; 참고, 시편110;렘42;12:16). 우리가 실제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서에서 명하신 바와 반대로 명령하셨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시는 동안 자신을 맹세 아래 두셨습니다. 그분은 맹세를 불법적인 일로 반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대제사장이 재판 시에 예수님께 했던 말을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게 말하라.”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던 대로라”(마26:63) 고 응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맹세를 사용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자신의 사도적인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서, 바울은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 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1:23; 참고, 롬1:9;고후11:31; 1:20; 빌 1:18) 라고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하늘의 천사가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로" 맹세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 만일 예수님이 결단코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면, 스스로 어기신 것이며, 바울도 마찬가지이고, 하늘의 천사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경청하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니라." (마5:34f) 왜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과 예루살렘을 언급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당대 유대인들이 맹세를 바르지 않게 사용하는 악한 관습을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자기의 말이 진실하다고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서도 속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일 성전의 금으로 맹세한다면 네가 정직하며 네가 말한 바를 지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마23:16).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단으로 맹세하면서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재단에 놓은 희생 제물로 맹세한다면 약속한 것을 지켜야 했습니다 (18절).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만일 너희가 하나님이 주신 맹세를 남용할 것이면, 맹세를 아예 하지 말라. 너희는 하늘로부터 온 이 선물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유대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전혀 맹세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형제자매들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이 여전히 악하기에, 그리고 우리가 하는 말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고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을 듣고 있는 사람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듣고 있는 말이 사실인지를 경계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셨지만 완전하게 새롭게 하신 것이 아니어서 변함없이 진실한 생각과 의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십니다. 심지어는 압박이 있을 때 그리고 기로에 놓이게 되는 순간에도 늘 진실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분은 내 말을 듣는 사람이 나의 말을 빈정거릴 수도 있음도 아십니다. 그런 마찰과 불신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맹세를 주셨습니다. 맹세는 이 파산된 세상에서 삶을 더 가능하도록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맹세라는 이 선물로, 피터는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털어놓도록 격려 받고, 조니는 피터가 실제로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믿도록 격려 받았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방식대로, 당신의 때에 온갖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맹세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회중이여! 동시에 이 선물을 가볍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말이 진실임을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일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난처하게 하는 뭔가가 그 안에 있습니다. 난처한 점이란 맹세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이며, 진실하지 않는 것을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재세례파의 요지는 분명히 우리가 말하는 모습에서 성령께서 새롭게 하신 열매가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차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도 진심입니다. 우리 주변 세상은 알아야 합니다. "저 그리스도인들은 진실을 말한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힘든 현실은 다릅니다. 맹세할 필요가 여전히 있습니다. 죄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로서 맹세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선물을 아껴야 합니다. 오직 "정부가 국민에게 맹세를 요구할 때에, 혹은 맹세해야할 필요가 있을 때에, 신뢰와 진리가 유지되고 촉진되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날을 고대합니다. 이것은 약속입니다. 제3계명을 거스른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서 언젠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분은 이 땅의 모든 죄를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악한 것을 말하는 경향으로부터도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이웃의 신실함을 의심하는 욕구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자유케 하실 것입니다. 그분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하는 말은 완전히 진실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를 완전하게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래서 이미 지금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과업은 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아멘.
[이 설교문은 Cl. Bouwman 목사님이 호주 켈름스콧 자유개혁교회에서 2000년 3월 19일 주일 오후에 전달한 설교를 번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