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관한 시모음 65)
새 봄 /기영석
엄마가 다니는 밭두렁
아빠가 다니는 논두렁에도
새싹들이 실눈 뜨고
날 보라며 슬쩍 윙크한다
성질 급한 뒷산 홍매화가 꽃 피우고
산소 주변 할미꽃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여 임처럼 반겨준다
들녘에는 이름 모를 작은 노란 풀꽃이
즐겁게 봄 노래 부르고
실 개천가 윤기 흐르는 버들강아지
살랑살랑 춤을 추니
박새도 장단 마쳐 날갯짓한다
나비와 꿀벌은 꽃밭에서 데이트를 즐기며
서로 포옹하며 사랑 노래 불러주고
푸른 하늘 뭉게구름은
들녘에서 새봄을 바라보며 박수를 보낸다.
浪人(낭인) 의 봄 /김소월
휘둘리 산을 넘고 굽어진 물을 건너
푸른 풀 붉은 꽃에 길 걷기 시름이어
잎 누런 시닥나무 철 이른 푸른 버들
해 벌써 석양인데 불숫는 바람이어
골짜기 이는 연기 메 틈에 잠기는데
산모루 도는 손의 슬지는 그림자여
산길가 외론주막 어이그 쓸쓸한데
먼저 든 짐장사의 곤한 말 한 소리여
지는 해 그림자니 오늘은 어디까지
어둔 뒤 아무데나 가다가 묵을네라
풀숲에 물김뜨고 달빛에 새 놀래는
고운 봄 야반에도 내 사람 생각이어 !
여름 같은 봄이 온다 /김 완
담양 관방천변 ‘진우네 국수집’에
손님들 넘쳐 앉을 자리가 없다
‘옛날진미국수집’은 텅 비어 있는데
아무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을 어쩌고 중얼거리며
우리가 앞장서 빈 국숫집으로 들어간다
강물에 봄 햇살 튀어 눈이 부시다
햇살 비추는 바깥 마루에 자리를 잡자
할 일 없어 진우네 가게를 힐끔거리던
총각이 서둘러 우리를 맞는다
반팔차림 총각의 팔에 새겨진 문신
‘Don`t stop dreaming'
멸치 국물국수, 열무 비빔국수
삶은 달걀 서너 개 오른 개다리소반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막걸리 한 사발씩 돌린다
누구도 부럽지 않은 점심
왁자지껄 웃음소리에 은근하게
한낮 관방천의 공기가 달아오른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느닷없이 여름 같은 봄이 온다
봄이 오는 길목에 /이상아
아이들이 놀고 있습니다
봄의 탄생을 위하여
수난을 겪는 나뭇가지
가지마다 신음이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며 살아나는데
아이들이 그네를 매고 있습니다
입덧과 환경에 메마른 가지에
하얀 천을 조각조각 이은
매듭 그네가 걸리고 있습니다
대림동 길가, 버스 정류장
누가 먼저 그네에 오를 것인지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습니다
봄은 항아리 속에서 /김명희(惠園)
꽃샘 바람에 잠시
뜰에 숨어 버린 봄
개나리 꽃은 그녀의
항아리 속에서
봄의 밀사임을
자랑하고 있다.
발자욱도 없이
머지 않아 비닐봉지 속으로
사라져 갈 봄은
아직 물줄기 속에서 침묵하고
그녀는
커튼 사이로 빠져 나가는
노란 빛깔에
방부제를 붓는다.
봄이 오는 소리 /김남주
어느덧
땅 끝 마을에 파릇 파릇
수줍게 새잎이 열리고
타 탁
꽃 망울 벌어지는 소리
천상의 화음인가.
감미롭기만 하다.
나른한 오후
여인의 볼륨있는 맵시가
더 할듯 없이 편안해 보이고
물씬 이어지는 봄 이야기가
그렇게도 정겹기만 하다.
벌써
봄날같은 행복에 묻혀
여린가슴 파르릇
봄 꽃은 그리 떨고 있지만
아직도 불어오는
저 매서운 칼 바람
그 떨림들 조차 위태로와도
봄은 그렇게 그렇게도 여물어간다.
봄은 그렇게 피어나고 /조서연
고운 꽃 아무리 봐도
우리임 보는 즐거움은 아니라네
꽃도 벌과 나비가 있어
추운 겨울 견디고 피어나듯이
시들어가는 내 마음 꽃도
님의 눈길에 방긋방긋 피어날진대
피어오르는 고운 봄날이
임 없는 날 조롱하듯 얄밉구나
어머니 그리운 봄날 /세영 박광호
젖을 문 아이의 순결한 얼굴 빛
엄마의 숨결과 맥박을 느끼며
살포시 잠든 아이의 모습은
사랑과 평화의 상징이다.
나도 한때는 그러했으리라
남자가
숭고한 모정을 깊이 알기엔 한계가 있겠으나
분명,
자신을 불태워 자식을 길러낸
촛불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그 모정도 까마득 잊은 채
살아온 한평생은 누구를 위한 삶이었는지,
무심했던 그 세월에 당신은 떠나시고
한세월 뒤로한 무거운 어깨위로
꽃잎 지는 이 봄날
회한의 눈물 실어본다.
어느 봄날의 설렘 /심의표
봄을 달리는 차창 밖 아지랑이
아른아른 흔들리고
의자에 기대앉은 여인의 가슴이 흔들리고
마음마저 흔들린다.
너울거리는 들꽃들
아름다운 꽃향기 가슴가득 품고 서서
보내는 흥건한 꽃눈 짓에
나비의 정절이 흔들리고
봄바람의 수런거림에
뻐꾸기 노래가 흔들리고
결 고운 햇살 깔고 앉은 화심
잔잔한 사랑의 꽃물결 되어 흔들린다.
봄 /엄정옥
저승의 어머니 이승의 아궁이에 불 지피시네
긴 치마자락 펼치고 앉아
찬 잿더미 위에 낙엽을 모아 불 붙이시네
이승의 아궁이가 환해지네
나무들 몸 비틀어 타오르고
가물가물 더운 김 오르네
허공의 가마솥에 시간이 익었네
수많은 잎들이 돋아나네
후둑후둑 꽃들이 피어나네
꼬물거리는 벌레들
노래를 흩뿌리는 새들
주는 대로 받아먹고 주린 배를 채우네
긴 햇빛 부지깽이 종일 아궁이를 들쑤시네
봄 /이능표
유리창 밖은 봄이다.
새들은 날아오르고
나무들은 잎사귀를 내민다.
십 리 밖 강물 속에서
물고기들이 물고기들의 삶을 살듯
새들은 새들의 삶을 산다.
나무들은 나무들의 삶을 산다.
말 걸지 말자.
물고기들은 강물에
새들은 하늘에
나무들은 숲속에
나는 유리창 안에 있다.
말 걸지 말자, 말 걸지 말자.
느린 듯 더딘 듯
불쑥 왔다 울컥 가는 봄.
봄길에서 /김경숙
이런 복병 쯤이야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여린 입술 달싹이지만
마알간 눈자위에 이슬 맺혀
잠시 제자리를 잃고 흔들리던 눈빛
개울물 소리에 얼어붙은 가슴 녹인다
오랫도록 품었던 화두,
긴 터널 뚫고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간다
앞다투어 한 생을 노래할 꽃잎들
휘모리 장단에 맞춰
여민 옷깃 펄럭이며
봄길에 스러져 눕는다
그래, 이 빛이야
봄빛에 마비된 이성,
과속방지턱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잡는다
이런 복병 쯤이야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여린 입술 달싹이지만
마알간 눈자위에 이슬 맺혀
잠시 제자리를 잃고 흔들리던 눈빛
개울물 소리에 얼어붙은 가슴 녹인다
오랫도록 품었던 화두,
긴 터널 뚫고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간다
앞다투어 한 생을 노래할 꽃잎들
휘모리 장단에 맞춰
여민 옷깃 펄럭이며
봄길에 스러져 눕는다
그래, 이 빛이야
봄빛에 마비된 이성,
과속방지턱 앞에서
급브레이크를 잡는다
봄이 오면 향기를 먹으면서 /정세일
봄이 오면 고소한 고소를
향기 나게 심으면 좋겠소
고소하게 향기가 나면
고소 옆에 파래 빛이 나는 상추를
심으면 좋겠소 그래서 봄을 먹는 날
봄이 오면 집 마당에 들 마루를 놓으면
더욱 좋겠소
봄이 오면 소쿠리에 고소와 상추를
깊은 우리 집 물맛이 시원한
샘물에 흔들어 씻어서
손을 흔들며 물을 뿌리면서 보리쌀이 반이나 들어있는
식은 밥을 약간은 구수한 냄새가 온 동네에 싸도는
우리 집 된장으로 쌈을 싸서 먹어도 좋겠소
그런날 친구가 찾아오면 더욱 좋겠소
내가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파래 빛이 나는 봄 상추에 고소를 넣어서
향긋하게 인생을 먹는 모습을 같이
친구와 함께 느껴보아도 좋겠소
입맛이 더욱 다시면
여래해 묵은 고추장을 퍼다가
박으로 만든 바가지에
할머니가 고소하게 짜두신
들기름을 넣어서 손으로 버무려서 비빈다면
투박하고 입맛이 변하지 않는
우리 집 놋그릇에 나누어 먹어도 맛이 좋겠소
봄을 기다린다 /김민지
겨우내 동면(冬眠)에 들어섰던
나무들에 새싹을 틔우려는 듯
갈증을 내며 봄을 기다린다
식어버린 가슴과
냉랭해진 사랑도
봄이 오기만 기다린다
봄이 오면 얼어붙은
세상의 모든 만물(萬物)이
스러지듯 녹아내릴 것이다
봄이 오면 온기를 되찾은
세상의 모든 자연(自然)이
일어나 기지개를 켤 것이다
봄을 기다리던 사람들의 가슴에도
뜨거운 정열(情熱)로
사랑의 불이 활활 타오를 것이다
봄풀 짙어가는 날에 /박종영
어느 봄풀 짙어가는 날의
고향 밭둑 길에
민들레, 냉이, 별꽃, 새록새록 땅심 얻어
초록 웃음 피워 올리고,
풀섶에 반짝이는 이슬 꽃
앳되고 찬란한 첫사랑의 웃음기로
먹먹한 가슴에
화끈한 불을 지핀다
불타거라 오래,
끄지 않으려니 이토록 설레는 봄날에야
어찌 흥겨운 시간을
누구에게 나누어 가지랴?
봄이 오는 강변에서, /박목철
봄바람이
강변 더러 잠 깨라 한다.
살랑대는 잔물결
머뭇대는 겨울의 귓가에 대고
소곤대듯
늦기 전에 떠나야지,
언제나 제자리
훌쩍 떠날 겨울이 부러운
강변 갈대
누렇게 색바랜 몸 흔들며
나는 색(色)이요, 너는 공(空)이니
탄식(嘆息) 소리,
후다닥 날개짓 물새 한 마리
봄이 오는 강변에 적막(寂寞)을 깬다.
봄날은 행복하다 /이성호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봄날은 누구에게나 행복한 날이 많다.
우선 따뜻한 볕 기운을 받아
사람이나 나무나 모두 기쁨으로 넘쳐나고
흐르는 물소리
새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열어 놓는다.
소리도 한결 음이 맑아지고 둥글어진다.
사람마다 제각기 갖고 있는
잣대로 금을 그어 계산하지 않고
다양한 모습
다양한 표정
다양한 삶의 격의 현장이 송두리째
소리나 빛깔처럼 널려 있다가
한꺼번에 걸어 나오는 봄날
얻어 듣는 고마움과
얻어 보는 즐거움의
순서를 가리지 않고
자리하는 크기
하나같이 기쁨의 무게가 되어 걸어 나온다.
살아 있는 보람 누구에게나 나눠 가질 수 있는
행복의 무게
봄날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