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애불에서 각박한 경사의 오르막길을 한 굽이 오르면 가섭산(해발 710m) 동남쪽 자락에 안긴
미타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미타사는 이 땅에 아주 흔한 절 이름의 하나로 서울에만 보문동(普門洞), 옥수동(玉水洞), 개
화동(開花洞)에 오래된 미타사가 있다. 미타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뜻하며, 아미타불의 절
이 바로 미타사가 된다.
음성 미타사는 옛 절터에 지어진 것으로 조계종(曹溪宗) 소속의 비구니 수행도량이다. 미타사
란
이름은 1964년 창건 이후에 붙여진 것으로 옛 이름은 유룡사(有龍寺)라고 하나 확실한 것
은 없다.
630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은 없으며, 876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고, 1370
년에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중창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심히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하지만
경내에 고려 후기 석불이, 경내 밑에 고려 중기 마애불이 있고, 절터에서 고려 때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파편, 금동불상 등이 출토되고 있어 적어도
고려 초~중기에 문을 연 것은 확
실하다.
1584년에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절을 중건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36년 병자
호란 때 각성(覺性)이 의병 3천으로 청나라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의 소망에 따라 절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허나 1724년(또는 1723년) 화재로 파괴되면서 오랫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이후 마애불만 속세에 드러낸 채, 간신히 터만 남아있다가 19세기에 비산리에 살던 만석꾼 경
주최씨가 '나를 좀 꺼내줘' 외치는 불상 꿈을 꾸고 땅을 파서 석불을 발견했다. 그것이 인연
이 되어
경주최씨는 아들을 얻었고, 그 소문이 퍼지면서 석불은 동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다.
허나 불상의 적당한 거처를 만들진 못하고 김치광처럼 앞가림을 하거나 토굴을 만들어 봉안했
으며, 경주최씨 일가에서 계속 불상을 관리했다.
1964년 인근 충주에 사는 어느 무당이 석불을 가져가려고 인부를 동원했으나 불상이 이상하게
도
너무 무거워서 하루 동안 겨우 지장대불 밑에 있는 비산소류지 밖에 가지 못했다. 그 소식
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죄다 몰려가 무당을 쫓아내고 불상을 되찾았는데,
이상하게도 불상이
가벼워져 금방 제자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예산 수덕사(修德寺)에 있던 비구니 명안은 음성에 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
곳 절터의 존재와 무당 사건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안내로 절터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석
불 관리인인 경주최씨 일가 최봉락은 그에게 석불을 모시며 이곳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일단 땅 주인이 절터에 지은
원두막을 대충 손질하여 머물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명안에게 머물 곳과 먹을 거리를 지원해주었고, 같이 절을 짓기로 의견을 모았
다. 하여 명안과 마을 사람들은 '미타사 창건 기성회'를 조직하여 가가호호 돈을 모으고, 일
일이
공사 자재를 짊어지며 집을 지어 1965년 4월, 8칸의 법당과 산신각이 지어졌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미타사의 시작으로 다른 절과 달리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 절을 지은 점
이 특이하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석불을 수호신으로 무척 애지중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
당이 석불을 몰래 빼돌리려는 사건까지 터졌으니 더욱 그렇다. 하여 이곳에 온 명안에게 석불
봉안을 부탁하고 절까지 지어준 것이며,
석불과 운 덕분에 수덕사 비구니의 일원이었던 명안
은 자기 이름으로 절을 운영하게 되었다.
1965년 절 창건 당시 고려시대 기와조각과 분청사기, 백자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1973년에
는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이 나왔고, 1976년에는 대형 맷돌이 나오기도 하
여 옛
절의 위엄을 어느 정도 가늠하게 해준다.
1979년에는 법당인 극락전과 삼성각을 세웠고, 1980년에 선방과 3층석탑을 세웠으며, 납골당
사업에도 손을 뻗쳐 2001년에 추모공원과 지장대불, 구생범종루 등을 만드는 등, 나날이
사세
를 확장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절을 꾸리게 된 명안 이정화(李貞和)는 2006년에 입적했는데, 다비식
(茶毘式)을
하자 연꽃 봉오리 모양의 사리가 나왔다. 현재는 그의 제자인 희원이 주지로 있다.
경내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삼성각과 약사전, 선방 등 6~7동 정도의 건물이 있으며, 절
입구에 지장대불과 관련 건물, 복지시설인 밝은언덕노인요양원 등이 있다. 소장 문화유산으로
는 지방문화재인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지금의 절을 있게 해준 석조여래좌상, 대형 맷돌 등
이 전하고 있으며, 고색의 내음은 채 익지도 못했지만 첩첩한 산자락에 묻힌 산사(山寺)로 경
내가 정갈하고 깔끔하다. |
돌담길을 지나면 경내의 중심인 극락전(極樂殿)이 나온다. 극락전 뜨락에는 특이하게도 6각형
을
띈 날씬한 모습의 3층석탑이 서 있는데, 탑의 이름이 무려 '대광명세존진신사리탑'으로 그
이름
그대로 부처의 사리를 머금고 있다.
탑에 봉안된 사리는 인도의 네루 수상이 영국 대영박물관에서 찾아온 것으로 미얀마 만다래힐
사원에 전달했다. 만다래힐 주지승은 이중 3과를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인 일타에게
주었고, 일타는 다시 미타사에 기증했다. 이에 미타사는 1992년 사리를 봉안할 탑을 만들어
봉안함으로서 부처의 사리를 보유한 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탑의 구조는 바닥돌을 깔고 그 위에 2중의 기단을 얹혔으며, 4기의 석사자를 모서리에 두어 3
층
탑신을 지탱한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는 보륜(寶輪) 등을 갖추며 탑의 아름다움을 더한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피부가 하얗고 탱탱하지만 100~200년에 시간이 지나면 20세기 후반
을 대표하는 석탑의
하나로 크게 다뤄질지도 모른다. |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9년에 새로 지었다. 지붕이 건물의 무려
⅔를 차지할 정도로 너무 육중한 탓에 건물이 꽤 커 보이며, 내부에는 1965년에 조성된 석가
여래상과 아미타여래좌상,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절의 창건주인 명안(이정화)의 영정이 봉
안되어 있다.
극락전 자리에는 원래 오래된 돌배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무를 베려고
연장질을 하면 사람들이 계속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통에 나무에 귀신이 있는 것으로 여겨 아
무도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았다. 이에 미타사 주지 명안은 우리가 나무를 처리할테니 연장을
빌려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청했으나 빌려주는 사람까지 해를 입을까봐 아무도 호응하지
않
았다.
하여 명안은 나무에 제를 지내 절을 지키는 옹호신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고, 연장을 빌려 나
무를 건드리니 글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한다. 20세기 한복판에 옛날에나 있을 법한 일이 있
었다니 정말 고개가 갸우뚱할 따름이다. |
극락전 우측에 자리한 약사전은 동방정토(東方淨土)의 주인인 약사여래(藥師如來)의 보금자리
로 절터에서 나온 석불을 약사여래로 삼아 봉안하고 있다.
1724년(1723년) 절이 화재로 붕괴되자 그 충격으로 머리와 양손을 잃은 채, 지옥보다 더 어두
컴컴한 땅속에 갇혀 기나긴 외로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에 비산리에 사는 경주최
씨의
꿈속에 나타나 꺼내달라고 애원하면서 그의 의해 비로소 다시 속세로 나오게 된다.
당시 경주최씨는
마을의 부호(富戶)였으나 불상을 관리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그냥 노천
에 김치광처럼 덮개를 씌우거나 토굴을 파서 봉안을 했고, 그 후손인 최봉락이 비구니 명안에
게 이 절터와 석불을
보여주면서 석불을 모시고 살 것을 권해 지금의 미타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라진 양손과 머리는 1964년에 새로 만들어 끼었으며,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점이 약
사여래로 여겨져 약사전을 짓고 그 건물의 주인으로 삼았다. 석불 높이는 90cm, 어깨폭 50cm
이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기로 여겨져 절 밑에 있는 마애여래입상 다음으로 오래된
존재이다.
석불의 머리와 손은 새로 했기 때문에 세월의 고된 때로 자욱한 기존 부분과 확연히 색깔 차
이가 난다. 하얀 얼굴에는 미소가 환하게 번져 있고, 몸에 걸친 통견(通肩)은 마치 겨울에 조
성된
듯 매우 두꺼워 보인다. 그리고 아랫도리는 너무 작게 표현되어 윗도리와 아랫도리의 균
형이 지나치게 떨어진다.
이렇게 미타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다시 속세로 나왔다. 솔직히 경내 밑에 자리한 마애불이
땡겨서 이곳에 온 것이지 미타사 자체에 반응이 있어서 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늙은 절터에
다시 세웠다 한들, 지금의 미타사는 분명 새 절이기 때문이다.
마애불의 인도로 찾아온 미타사. 거기에
겨울 제국이 폭풍처럼 선사한 눈이 천하를 순백으로
채색하면서 산사의 그윽한 설경까지 이리 챙기니 속세에서 오염되고 상처받은 안구와 마음이
싹 정화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하여 한겨울 음성 나들이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 미타사 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 874-2 (소이로61번길164 ☎ 043-872-0522)
* 미타사 홈페이지는 이곳을
흔쾌히 클릭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