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
* 시간을 아끼며 사십시오
1849년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28세에 사회주의 혁명 단체에 가입한 죄로 사형을 언도받고 영하 50도가 넘는 추운 겨울날 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운데에 묶인 그를 포함해 세 명이 기둥에 묶였는데 그에게 최후의 5분이 남았습니다. 그 5분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2분은 같이 묶인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하는 데 쓰고 2분은 지금까지 살아온 생을 정리하는 데 쓰고 1분은 하늘과 땅을 바라보고 산과 들판을 둘러보는데 쓰자고 생각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두 사형수와 작별인사를 하고 가족을 생각했는데 2분이 흘렀습니다. 이제 3분이 남았습니다. 그때 “이제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하고 생각하자 앞이 캄캄했습니다. 지난 28년이란 긴 세월을 아껴 쓰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살 수 있다면 인생을 가치 있게 쓸 것 같았지만 이제는 살 길이 없었습니다. 총에 탄환을 장전하는 금속성이 나자 너무 절망해서 3분을 생각대로 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바로 그때 극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병사가 멀리서 손수건을 흔들며 황제의 특사 령을 가지고 달려온 것입니다. 간신히 사형을 면한 후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사형 순간에 느낀 시간의 소중함을 결코 잊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스스로 이렇게 물으며 살았습니다. “이 5분을 어떻게 쓸까?” 늘 그런 유사한 질문을 품고 사십시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까?”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처지에 연연해하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멋진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과거나 현재의 영화로 자만해도 안 됩니다. 사람의 영화는 잠깐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가 소중한 이유는 후대를 위한 씨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후대를 위한 선한 영향력과 열매를 남기려면 시간을 소중하게 써야 합니다.
시간을 잘 쓸 때 인생도 잘 쓰임 받습니다. 학력과 능력보다 시간을 잘 쓰는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목적 없이 아무렇게나 살지 마십시오. 특히 성도가 아무렇게 살면 예수님은 욕을 먹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지 일컫지 말라는 계명은 망령되이 일컬어지도록 하지 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도록 시간을 잘 사용하십시오. 세월을 아낀다는 헬라어 ‘엑사고라조’는 ‘세월을 잘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은사와 소유를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입니다.
* 쓰임 받는 삶을 사는 길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쓰십시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고민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알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뜻과 감정과 처지로 하나님의 뜻을 변형시키기에 어렵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실상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여성은 명절 때마다 시댁 문제로 고민하며 인내에 한계를 느끼고 목사님을 찾아 하소연했습니다. “목사님! 이래도 참아야 합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목사가 그 고민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답은 뻔합니다. 그 뻔한 답대로 사는 것이 복입니다.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사용합니까? 시간을 잘 써서 쓰임 받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 기쁘고 즐겁게 사십시오.
어느 날, 금식을 영성 과시의 수단으로 삼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십니다(33절).” 그 말은 먹고 마시는 일이 좋지 않은 것이라는 뉘앙스가 담긴 말입니다. 그러나 금식기도가 영성을 드러내는 과시 수단이 되면 더 안 좋게 됩니다. 예수님은 경건을 과시하는 금식을 엄히 경계하셨고 먹고 마시는 것 자체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눅5: 34-3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신랑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을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것으로 비유하시면서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을 옹호하셨습니다.
유대인의 혼인잔치는 대개 일주일간 열립니다. 그때는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서 금식일과 겹쳐도 금식하지 않고 혼인잔치가 끝난 후에 금식했습니다. 그처럼 신랑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는 잔치 상황에는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순간이기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지만 신랑을 빼앗기면 자발적으로 금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비유는 금식은 자발적으로 해야 한다는 교훈과 먹고 마시면서 기쁘고 즐겁게 사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교훈을 줍니다.
기쁘고 즐겁게 사십시오. 그러나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이 무조건 낙관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절한 비관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지나친 비관과 지나친 낙관입니다. 무조건 비관에 빠지는 비관주의자도 되지 말고, 무조건 낙관에 빠지는 낙관주의자도 되지 마십시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비관과 낙관을 다 필요한 줄 알고 지혜롭게 활용하십시오. 건강한 낙관은 “사람도 날 수 있다”고 하며 비행체를 만들게 하고 건강한 비관은 “사람이 날다가 죽을 수 있다.”고 하며 낙하산을 만들게 합니다.
비관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어떻게 할 수 없어. 끝났어. 그렇게 해서 무슨 변화가 있겠어.”라고 하는 자포자기식의 비관주의가 나쁜 것이지 최악의 상황을 예견해 시나리오를 짜는 적절한 비관은 인생 리스크 관리에 도움이 됩니다. 낙관 자체가 좋은 세상이나 좋은 인생을 만들지 않습니다. 예전에 ‘행복전도사’란 명칭으로 TV에 숱하게 강연했던 사람이 자살했었습니다. 그는 비관적인 삶을 낙관적인 삶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비관해도 비관주의자가 되지 말고 낙관해도 낙관주의자가 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내일과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미래의 안 좋게 될 상황도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은 언뜻 보면 비관 같지만 비관주의는 아닙니다. 비관주의란 미래의 안 좋은 상황을 예견하고 그냥 주저앉는 습성입니다. 반대로 미래가 좋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좋은 미래를 만들려고 최선의 땀을 흘리는 건전한 낙관은 필요하지만 미래가 좋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낙관주의는 비관주의만큼 나쁜 것입니다.
대책도 없이 낙관하는 낙관주의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비관주의는 옆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낙관주의는 옆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비관주의는 너무 이타적이고 낙관주의는 너무 이기적입니다. 일할 때 전진만 생각하고 안 좋은 돌발 상황이나 리스크를 무시하니까 낙관주의는 큰 성공도 가져다주지만 실패나 실수나 비효율성이 많고 공감능력도 약화시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나 업무관계에서는 비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너무 슬픈 처지에 있으면 현실을 낙관하며 스스로 주문을 걸 필요도 있습니다. “이 정도면 나는 괜찮다. 사지가 멀쩡하고 성격도 좋은 편이다. 감사할 것이 많다.” 그렇게 낙관적인 주문을 걸지 않으면 우울증에 걸려 미칠 것 같고 불안한 생각과 걱정에 빠져들면 끝도 없이 저하되고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낙관하면서도 힘써 대비해야 합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은 대책 없는 낙관주의자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일 측면에서는 비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대책을 세워 일하고 전체적인 삶 측면에서는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기쁘고 즐겁게 살라는 말은 무조건 잘 될 것이라고 하면서 안일하게 사는 잘못된 낙관론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난관에 부딪쳐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변화된 세상을 꿈꾸며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건강한 낙관론을 가지는 것입니다.
무조건 좋게 보는 것이 다 좋지는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은 안 좋다고 해야 합니다. 비판 능력도 없다면 힘 있는 자의 무조건적인 지배를 당하기 쉽고 거짓말과 거짓 뉴스에 속기도 쉽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공동체의 질서에 순종할 줄 아는 기본자세 하에서 건전한 비판의식도 가지십시오. 매사에 비관적이어도 안 되고 매사에 낙관적이어도 안 됩니다. 무조건적인 긍정주의나 낙관주의는 오히려 건전한 사회발전과 인생발전을 막습니다.
인생에서 슬픔과 상처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슬픔과 상처에 빠져들지 않고 인생 자체를 비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슬픔과 상처가 커도 기쁨과 즐거움을 잃지 말고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그 사실을 믿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대책도 세우고 땀도 흘리고 준비하며 나아가면 내적인 마음의 기쁨과 즐거움이 외적인 삶의 기쁨과 즐거움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처럼 슬픔과 서러움을 넘어서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거룩한 모험과 도전으로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하십시오.
2) 잘못된 과거를 버리십시오.
눅5 : 36절 말씀을 보십시오.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도 버리고 또한 옷을 빨 때 축소된 새 옷 조각이 낡은 옷을 잡아당겨 뜯음으로 낡은 옷도 버립니다. 이 비유에서 새 옷 조각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낡은 옷은 율법적인 교훈을 상징합니다. 즉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율법주의에 한정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눅5:37-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오래 써서 주름이 생기고 탄력성을 잃은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으면 새 포도주의 발효로 생기는 가스로 인해 낡은 가죽 부대가 부식되어 터집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의 가르침을 상징하고 낡은 가죽 부대는 율법적인 교훈을 상징합니다. 이 비유도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율법주의에 담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습니까? 형식적인 금식은 영성의 지표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주시고 더 나아가 잘못된 과거를 잘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도 주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과 섭섭했던 일을 잘 잊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남을 섭섭하게 하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내가 섭섭함을 잘 느끼는 것도 주의해야 합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잘 정리하지 못해 섭섭함과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면 미래는 어두워집니다. 자신이 어두운 과거를 파묻지 않으면 어두운 과거가 자신을 파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옛날에 풍족한 가정에서 살지 못했기에 비교적 풍족하게 살았던 친척들에게 작은 일로 섭섭함을 잘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섭섭한 감정은 대개 돈 문제와 비교 문제로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깊이 믿으면서부터 가족과 친척이나 친구나 지인으로부터 받는 섭섭한 느낌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비교의식이 극복되고 남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거나 혜택을 받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니까 섭섭한 일이 거의 생기지 않은 것입니다.
다른 형제가 나보다 잘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가족 중에 나는 소외되어도 다른 가족들이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가족문제로 섭섭할 일이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관계를 하면서 섭섭한 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음 안에서 크게 생각하면 섭섭함을 크게 줄일 수 있고 섭섭한 일이 있어도 잘 잊으면 그 과거의 섭섭함이 현재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습니다. 그것도 구원의 믿음이 주는 능력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다 보면 소외 문제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사려 깊게 행동하려고 해도 때로는 어떤 사람의 언행이 남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처와 섭섭함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부족한 모습들이 인간의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상처의 기억을 믿음 안에서 잘 요리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 중에 처음부터 끝까지 악마 같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한 인간관계에서 섭섭한 일보다 고마운 일들이 사실상 훨씬 많고 좋은 기억들이 훨씬 많습니다. 그 기억들을 품고 섭섭하게 느껴지는 일들을 삭제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으로부터 섭섭한 일을 당해도 섭섭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섭섭한 기억과 느낌을 금방 털어버리거나 잊으면 그 섭섭함이 인생의 행복과 축복에 거의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섭섭한 과거의 일을 오래 기억하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고마웠던 과거의 일을 금방 잊어버리면 마음의 상처가 커지면서 자신을 통해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런 피해 본능을 버리고 생각을 바꾸십시오. 자신이 피해자였을 때도 많지만 가해자였을 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용서의 능력이 커지면서 평안도 넘치게 됩니다. 그런 평안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좋은 일은 잘 기억하고 나쁜 일은 잘 잊기를 원하십니다.
3) 새로운 일을 기대하십시오.
눅5: 39절 말씀을 보십시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묵은 것이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묵은 것에 집착하면 새 것을 원하지 않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전통주의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를 내세워 예수님이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새로운 약속과 새로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말씀도 맞고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도 맞는 측면이 있지만 너무 묵은 것만 좋아하고 고수하면 새로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발전도 더디게 됩니다. 묵은 것도 존중하면서 새 것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좋은 것을 고수하고 계승시키는 ‘닫힌 마음’과 새로운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이 다 필요합니다. 쉽게 말하면 보수적인 마음과 진보적인 마음이 다 필요합니다. 좋은 것이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궁극적인 축복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십시오.
인생은 때때로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의 약속을 믿으며 사십시오. 과거를 잘 잊으려면 결단이 필요하지만 내일의 풍성한 약속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전의 경험과 이미지만 믿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으십시오. 그 약속을 믿고 찬란한 내일의 비전을 세우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도 때로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그 실패까지도 멋지게 활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길을 열어 주시고 결국 약속하신 대로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은 참고만 하십시오. 과거의 안 좋았던 경험을 믿으면 의심 많은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과거의 좋았던 경험은 더 좋게 될 내일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시키십시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희망찬 내일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복된 내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행복입니다.
기도해도 시험에 빠지고 몸을 불사르도록 봉사하고 헌신해도 시험에 빠질 수 있지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잘 시험에 빠지지 않습니다. 가장 복된 삶 중의 하나는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하나님은 늘 새로운 일을 행하려고 하십니다. 그 일의 결과는 형통함과 풍성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자신을 통해 이뤄지도록 기대하고 힘쓰십시오.
글 : 이 한규 목사 (분당 샛별교회)
첫댓글
'학력과 능력보다 시간을 잘 쓰는 지혜가 더 중요합니다.
시간을 잘 쓸 때 인생도 잘 쓰임 받습니다.'
'세월을 아낀다 =엑사고라죠(헬라어) = 세월을 잘 사용한다.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은사와 소유를 잘 사용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 세월을 아끼는 삶이다.'
'인생은 때때로 광야와 같고 사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