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통계

 
방문
20240723
38
20240724
44
20240725
42
20240726
28
20240727
15
가입
20240723
1
20240724
0
20240725
0
20240726
0
20240727
0
게시글
20240723
0
20240724
0
20240725
1
20240726
1
20240727
0
댓글
20240723
0
20240724
0
20240725
0
20240726
0
20240727
0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좋은 글 스크랩 전국시대 -요약정리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49 15.02.03 11: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전국 시대(戰國時代)는 기원전 403년부터 진(秦)이 중국 통일을 달성한 기원전 221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며, 그 시기의 이야기가 주로 《전국책(戰國策)》에서 보여지므로 전국시대라 불린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되었다. 한·위·조가 후(侯)라고 칭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극상을 의미한 것만이 아니고, 주왕이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 종법제(宗法制)를 무시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중요하다. 이윽고 강력한 제후는 왕을 칭하게 되어 이 때에 명실공이 주왕조의 권위가 떨어지고 봉건제도가 붕괴해 버린 것이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춘추시대 초에 140여 개국이었던 도시국가의 거의 모두가 이 때에는 7개 강대국의 어느 한 영토에 편입되어 버렸다. 처음 강력했던 나라는 위나라였으며 문후(文侯)·혜왕(惠王)은 널리 인재를 구하여 대규모 관개사업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지배한 지역을 군현화(郡縣化)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다음 제(齊)가 패권을 쥐었지만 얼마 안 있어 변경의 진(秦)·연(燕)이 강대해져서 비로소 진·초·연·제·한·위·조의 7웅이 할거하는 형세로 바뀌어졌다. 그 중 진은 효공(孝公) 때 상앙의 변법에 의하여 크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성과를 올려 다른 나라를 누를 수 있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소위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제창된 것도, 4군(君)의 활약이 있었던 것도 이 시기였다. 이윽고 6국이 진(秦)에 굴복하고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전국시대는 봉건제에 따르는 읍제국가가 해체되고 중앙집권적인 군현제에 의한 고대 통일국가가 형성되는 과도기에 해당한다. 전국시대가 되자, 사 계급 출신의 관료가 실제의 정치를 장악하게 되어, 그 최고 지위에 상(相)이 놓인다. 그 임무는 군주를 보좌하여 정치의 전반을 총리하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종래의 대부 등과는 달라서 세습은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군제(軍制)에 있어서도 이 때까지는 대부가 세습적으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임에 반하여 장군(將軍)이라는 직위가 신설되어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군주에 의해서 장군이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서주(西周)로부터 춘추시대에 걸쳐서는 정치·군사 양면에 있어서 대부가 세습적으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 반하여, 전국시대가 되자 정치·군사가 분리되고 저마다의 책임자가 필요에 따라서 군주에 의해서 임명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군주권(君主權)이 강화되는 한편, 능력에 따른 관료군(官僚軍)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진에서는 다른 나라의 출신자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료로 채용했다. 내정개혁을 단행한 상앙, 연횡설(連衡說)을 주장한 장의(張儀), 시황제의 승상이 된 여불위(呂不韋) 등이 모두 다 그러했다. 춘추 말기에 나온 공자(孔子)는 노(魯)의 고관이 되어 개혁에 실패한 후, 여러 나라의 군주에게 그 정치학설을 설(說)하고 다니면서 그 학설이 실현되도록 운동했다. 이것은 당시에 이미 하나하나의 나라를 초월하여 공통된 문화·사상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자기의 영지(領地)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었던 대부 계층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

또 철기(鐵器)의 보급에 따라 눈부신 발전을 보여주기 시작한 농업 생산력이 이 변동기의 자극을 받아 상공업의 발달을 재촉하면서 사회 경제의 여러 양상에 커다란 변혁을 초래한 시기였다. 국경을 초월한 대상인의 활발한 교류로 국경을 넘어 몇몇 나라에 판로를 가진 대상인들은 사치품을 판매하여 큰돈을 벌었다. 서민의 필수품인 철기나 소금 등을 제조·판매하는 대상업 수공업자들의 재산은 때로는 왕후(王侯)와도 필적한다고 일컬어졌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일일이 통관세(通關稅)를 필요로 하는 국경(國境)이라는 것은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것이며, 국경이 없는 중국의 통일을 이면에서 촉진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이와 같은 것은 대상인들이 전국을 유세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분립한 강국이 대립·항쟁하는 반면에 있어서는 문화, 경제의 면에서 이미 중국을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시키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춘추시대의 후반 이래, 청동기의 명문(銘文) 같은 장식성(裝飾性)이 강한 문자(文字)에는 지방색(地方色)이 엿보이지만, 평소에 죽간(竹簡) 등에 씌어진 문자에는 상당히 통일성이 엿보이는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철기의 보급과 생산력의 발달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사회의 일대 변혁 및 눈부신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은 이 시기에 있어서의 생산력의 현저한 발달이었다. 이 생산력의 발달 요인은 춘추시대에 시작된 우경(牛耕)의 보급과 전국시대에 보급된 철제농구의 사용이었다. 철제농구 이전의 농구는 거의가 석제나 목제였으며, 그것은 토질이 부드러운 황토지대에서의 경작에는 그런대로 쓸 수가 있지만 수목을 베어내고 새로 경지(耕地)를 일굴 때는 극히 비능률적인 농구였다. 이 곤란을 타개하며 개간을 용이하게 하고 심경(深耕)에 의한 토지의 생산력을 증대시켜 준 것이 철제농구이며, 그 사용을 계기로 농업은 놀랍게 진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춘추시대의 전반(기원전 6, 7세기경)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이때 제나라 동종(銅鐘)의 명문(銘文)에 ‘제철 노예 4천명’이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관영 제철사업은 꽤 대규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괭이, 삽, 가래 같은 농구의 주조는 전국시대에 들어와서 발달된 것 같다. 우경과 철기가 보급되어 생산이 부국강병의 근본으로 장려되자 이제까지 돌보지 않던 황무지까지 개척되며, 그로 인하여 관개용 수로나 제방을 쌓는 토목공사가 일어났는데, 이것도 또한 철기에 의지하게 되어 농업생산은 한층 더 발달을 촉진시키게 되었다.

 

 전국 칠웅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해 버리는 일은 그만큼 많지 않고, 또 멸망해도 부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갔다. 그 7개의 나라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른다.

 

------------------------------------------------------------------------------------------------

 

진(秦)

진(秦, 기원전 770년 ~ 기원전 221년 ~ 기원전 206년)는 중국의 왕조이다. 주나라, 춘추시대, 전국시대에 걸쳐 존재하였다.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기원전 206년에 멸망 했다. 왕실의 성은 영(?), 통일 시의 수도는 함양이었다. [셴양(함양)은 산시 성에 위치한 지급시로 관중평원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시안(장안)시와 약 25km 떨어져있다.]

이웃나라 진(晋)은 내부에서의 권력 싸움의 끝에 한(韓)·위(魏)·조(趙)의 삼국으로 갈라졌다. 이렇게 갈라진 삼국을 삼진(三晋)이라 부른다. 삼진 중 위나라가 전국 초기, 명군 문후에 의해 강하게 성장하였고, 진은 위에게 압박을 받고 영토를 빼앗긴다.

이 상황에 분개한 25대 군주 효공(孝公)은 넓게 인재를 구해 대세를 만회할 수 있는 방책을 찾았다. 이에 응한 자가 그 유명한 상앙(商?)이다. 상앙은 행정 제도의 개혁·십오제(什伍制)의 채용 등을 실시해, 진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로 다시 태어나게 했다. 이러한 상앙의 변법 운동에 의해 진은 철저한 법치주의 국가로 변모하였고, 국내의 생산력, 군사력을 높여 서서히 다른 육국을 압도하며 갔다. 효공은 기원전 350년, 도성을 함양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천하 경영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후, 효공의 아들 혜문왕(惠文王)은 강해진 국력을 기반으로 하여 기원전 324년에 왕을 칭한다. 기원전 316년에 혜문왕은 촉을 점령해, 이 땅의 개발을 실시하여 한층 더 생산력을 올려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게 되었고, 장강의 흐름을 따라 진격할 수 있게 되어 초를 압박할 수 있었고, 초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혜문왕은 모략가인 장의(張儀)를 등용하고, 초를 질질 끌어 돌려 전쟁으로 격파해, 초의 회왕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혜문왕은 위와 한의 왕들을 각각 마부와 배승으로 삼을 정도로 굴복시켰다. 하지만, 혜문왕의 아들 무왕의 시기에 그가 장의를 내쳐버리자 장의는 위에 망명, 이로 인한 한과의 격전 끝에 많은 군사를 잃었고, 혜문왕 자신은 갑자기 사고사하여, 후계자 싸움이 일어나 전력이 후퇴해 버린다.

이 시기 동쪽에서는 제나라가 신장하고 있어, 은나라의 후예인 송을 병합하는 등 주변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88년당시에는 제를 동제, 진을 서제라고 칭했다. 제나라가 곧바로 제호를 취소했으므로, 진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시기는 서쪽의 진나라, 동쪽의 제나라의 2강국 시대를 만들고 있었다.그러나 제나라는 연나라의 악의가 지휘하는 5개국 연합군에 의해 수도 임치가 함락. 망국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겪게 되었고,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 진나라는 강국의 위치를 굳건히 할 수 있었다.

혜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인 소양왕(昭襄王)의 시대에 재상 위염(魏?)과 백기 장군의 활약으로 진은 몇 번이나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소양왕을 즉위시킨 재상 위염의 권력이 너무 커진 것을 우려한 소양왕은 재상 위염을 숙청하고, 대신 범저(范雎)를 등용한다. 범저가 진언한 것은 유명한 원교근공책이다. "가까이에 있는 한·위를 거느리고, 먼 제나라와의 싸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이것으로는 승리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먼 토지가 되어, 지키는 것이 어려워져 버린다. 이것에 대해서 먼 제나라나 연나라와 동맹해 가까이의 한·위·조를 공격하면 가까이의 토지가 손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진의 영토로 집어 넣는 것이 용이해진다." 이것이 원교근공책이다. 이 진언에 감동한 소양왕은 이 진언을 채택하고, 범저를 재상으로 삼았다. 기원전 260년에는 백기가 조나라로 진격, 장평 전투를 통하여 조군을 격파, 조의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여 조나라의 예기를 꺾어버린다. 기원전 255년에 주나라를 멸해 그 영지를 접수하여 진의 위세는 한층 더 높아졌다.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제31대 왕인 영정이 모든 나라를 멸망하고 통일하여 황제(皇帝)의 위에 오르면서 중국 최초로 제국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조(趙)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북쪽엔 연나라와 붙어있고 남쪽에는 황하가 흐르고 있다.

호복(胡腹, 통소매와 바지)을 채용하였고, 중국에 처음 기마전술을 도입한 나라이기도 한다. 갑병 수십만과, 전차 천승, 말(馬) 만필을 낼 수 있었으나 기원전 228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유목왕이 사로잡혀 멸망한다.

이때 태자 대왕은 멀리 대나라로 쫓겨가 대나라의 왕 자리에 올랐으며 도읍인 한단(邯鄲)은 상공업의 대중심지였다.

 

위(魏)
위(魏,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5년)는 전국 시대의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진(晉)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왔다. 한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토지가 사방 일천 리에 달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가장 인구가 많았던 나라이다. 갑병 20만과 창두(蒼頭) 20만, 말 오천 필을 낼 수 있었다.

변법(變法) 운동의 선구자 이회, 관개사업에서의 서문표(西門豹)의 활약은 유명하다. 문후(文侯)가 이회를 등용하여 새로운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토지제도와 농업기술의 개혁을 단행하여 열국(列國) 중에서 최초로 부국강병의 길을 열었다. 이회는 또한 『법경(法經)』이라는 새로운 법률서를 만든 법률학자이기도 했다.

원래 주나라의 봉건제 밑에서는 정치는 덕(德)의 이념에 의해서 뒷받침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집권국가가 되자, 덕의 이념은 아무런 권위도 갖지 못하게 되고 힘에 의한 법술(法術)이 권위 있는 이념이 되었다.

즉, 그것은 현실적으로는 부국강병의 정책으로 나타나, 법률이 그 수단으로서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위나라는 전국 초기에 있어서의 이같은 새로운 이념의 연구와 실천의 중심지였다.

문후(文侯)의 인재 등용, 관개사업 추진에 의해 다른 6국에 앞질러 세력을 얻어, 위나라 수도 안읍(安邑)은 전국 초기의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225년 결국 진나라가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의 수공으로 수도 대량성이 침수당하면서 위나라는 진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된다.

 

한(韓)
한(韓,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30년)은 전국시대의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춘추오패의 하나인 진(晉)에서 분리된 나라이며, 위나라, 조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엿고 영토는 북쪽으로는 지금 중국의 허난 성, 서쪽으로는 지금의 후베이 성에 이르렀고 일천 리에 달했다고 했으며 갑병 수십만을 낼 수 있고, 무기가 뛰어났다. 그러나 기원전 239년 진나라의 장군 몽오의 공격으로 성 13곳을 빼앗겼고 곧이어 기원전 230년 다시 진나라의 대공세로 한왕 안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한나라를 멸망했다

 

제(齊)
제(齊,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221년)는 춘추시대의 춘추오패이자,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로, 근거지는 현재의 산둥 지방이다.

주(周)의 문왕(文王)이 나라를 건국할 때 재상 태공망(太公望)에게 봉토로 내린 땅으로 이후 제환공(齊桓公)시대에 관중(管仲)을 등용하여 패자(覇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제경공 때는 안영을 등용하였다.

기원전 386년 전화(田和)가 제강공을 폐하면서 제후의 성씨가 강(姜)성 여씨에서 규성 전(田)씨로 바뀌게 된다. 후에 위왕(威王)이 행정개혁을 행하여 국력을 증대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진(秦)과 중국을 양분하는 세력을 이루었다.

그 후도 계속해서 명석한 두뇌의 군주가 이어져 그 보호하에 수도 임치(臨淄)에서 직하(稷下)의 학(學)이 일어나 이 시기의 학문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결국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의 침공으로 폐왕 전건이 스스로 항복하면서 멸망하였다.

 

연(燕)
연(燕)은 중국 춘추 시대의 제후국이자 전국 시대의 전국 칠웅 가운데 하나이다. 강역은 동쪽으로 조선에 이르고, 남쪽으로 역수(易水)까지 영토가 이천여 리에 달했다. 수도는 계(?,지금의 북경,베이징. 연경으로 불리움)

군사력은 갑병 수십만과 전차 칠백 승, 말(馬) 육천 필을 낼 수 있었으나 기원전 222년 형가의 진시황 암살이 실패한 후 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초(楚)
초(중국어: 楚)는 현재의 후베이성(중국어: 湖北)인 장강(중국어: 長江) 중류 지역에서 일어난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의 나라이며, 춘추오패, 전국칠웅의 하나이다.

황하 문명을 대표하는 주나라에 대해 장강 문명을 대표하는 나라로 분류된다. 형(?) 또는 형초(?楚)로도 불린다.

주나라 초기의 작위(爵位)는 자작(子爵) 이었으나, 기원전 704년 무왕(武王)때에 이르러 스스로 왕을 칭하였은 전국시대 말인 기원전 223년 진(秦)에 의해 멸망 했다.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楚世家)에 따르면, 초나라는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전욱 고양(?頊 高陽)의 후손이 세운 나라다. 전욱(?頊)은 황제 헌원(黃帝 軒轅)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 전욱의 후손 중에 육종(陸終)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축융(祝融)의 동생이며 제곡 고신(帝? 高辛)때에 화정(火正 ; 고대 중국의 불을 맡은 벼슬)을 지낸 오회(吳回)의 아들이다. 육종(陸終)에게는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 막내인 계련(季連)이 있는데 성(姓)은 미(?)로 초나라 왕실의 선조이다. 주문왕(周文王)때에 계련(季連)의 후손중에 육웅(?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초나라 웅씨(熊氏)들의 시조이다.

죽웅(?熊)의 증손자 웅역(熊繹)에 이르러 주 성왕(周成王)은 주나라 건국시 문왕(文王)과 무왕(懋王)을 도운 공신들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논공행상을 할 때 웅역(熊繹)의 증조부(曾祖父)인 육웅(?熊)이 세운 공로로 웅역(熊繹)을 형만(荊蠻)의 땅에 자작(子爵)의 작위에 봉했으나 그 봉지는 남작(男爵)에 준해서 하사하고 미(?)라는 성을 내렸다. 웅역은 봉지의 도읍을 단양(丹陽)에 두었다.

주 이왕(周 夷王)때에 이르러 주왕실의 세력이 쇠약해지자 웅거(熊渠)는 군사를 일으켜 용(庸)과 양오(楊奧)에서 악(鄂)에 이르기까지의 땅을 정벌하여 초나라의 영토로 삼았다. 웅거는 이후 잠시 왕이라 참칭(僭稱)하다가 포악한 여왕(?王)이 즉위하자 정벌당하는 것이 두려워 왕이라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기원전 741년에 웅통(熊通)이 초 자작위에 올랐는데 그가 무왕(武王)이다. 기원전 704년 웅통은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복(?)땅을 개간하여 초나라 땅으로 삼았다.

기원전 690년 무왕의 뒤를 이은 문왕(文王)은 도성을 단양(丹陽)에서 영도(?都)로 옮겼고, 기원전 638년 등(鄧)나라를 정벌하여 멸하고 초나라 땅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637년 송양공(宋襄公)이 회맹을 하려고 제후들을 우(盂)에 소집을하자 성왕(成王)은 회맹장에 군사를 매복하여 송양공을 잡았다가 풀어 주었다. 기원전 631년 기나라(夔)가 조상인 축융(祝融)과 육웅(?熊)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멸망 시켰다. 그해 여름 성복(城?)에서 당진(唐晉)과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기원전 626년 태자(太子) 상신(商臣)이 왕이 자신을 폐하려 하자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목왕(穆王)이다.

기원전 614년 려(侶)가 목왕의 뒤를 이어 초왕이 되었는데 춘추오패 중의 한사람인 장왕(莊王)이다. 초나라는 이후 장강 이남의 지역을 호령하는 나라로서 맹위를 떨쳐 나갔으나 초왕 부추(負芻) 때에 이르러 기원전 224년 진나라(秦)에 장군 왕전의 공격으로 대장군 항연과 왕 부추가 사로잡히고 남은 세력들도 모두 기원전 223년 진나라의 장군 왕전의 아들 왕분과 몽염에게 항복하면서 멸망 하였다.

 

출처: 다음 위키백과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