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와 호나우도에 대한 저의 글에 달린 리플을 보니 제 나이와 축구시청이 의심된다는 글이 있는 것 같아 요즘 한국축구의 분위기에 맟추어 과거를 회상할 겸, 그리고 저의 축구편력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증명할 겸(절대로 퍼올 수 없는 내용일 겁니다. 제가 직접 운동장 가서 혹은 티비로 본 경기들이니까요) 79년과 81년 사이, 그러니까 제가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다닐때 직면해 있던 한국축구의 상황을 주로 최순호와 정해원이란 플레이어를 중심으로 언급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79년의 시련 - 올림픽 지역예선 탈락 "공포의 말레이시아 징크스"
78년은 우리나라가 오석재(한국프로리그 초창기 강팀인 할렐루야의 스트라이커였다)라는 포스트 김재한을 주무기로 아시안게임의 축구에서 예의 그 유명한 북한과의 접전끝에 무승부로 공동우승하는 소기의 성과를 올린 해였다. 또한 77년에 "다리하나만 믿고 갑니다"던 차범근이 서독의 다름슈타트 팀에서 차곡차곡 내공을 연마중이라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던 때였다. 이듬해인 79년이 되자 차범근은 1부리그 분데스리가의 프랑크푸르트 - 지금이야 2부리그에서도 허덕이고 있지만 당시에는 휄첸바인, 그라보브스키, 니켈 그리고 오스트리아 대표 페차이 등 서독의 74년 우승의 주역들이 다수 포진한 명문팀이었다. - 에서 12골인가를 기록하면서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었던 때였다. 2차대전이 끝난지 몇십년이 지났다지만 여전히 독일인 특유의 우월주의가 알게모르게 존재하던 그 때 서독 최고권위의 축구잡지인 키커지 표지가 차범근으로 도배될 정도였었다. 당시의 분데스리가는 명실공히 세계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리그였으며 라리가나 세리에는 분데스리가에 비하면 다소 수준이 처지는 리그라고 봐야 했었다.
당시만해도 지금과 같이 국적을 초월한 선수들의 자유로운 이동이 그리 활발하지는 않았으며 사실상 70년대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서독축구가 거의 무적함대의 위상을 누렸듯이 리그도 분데스리가가 유럽최고 아니 세계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리그였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축구의 엘도라도에서 우리의 차범근이, 아니 차붐이 연일 날라당긴다는 소식은 어린 나의 마음을 마냥 뿌듯하게 하곤 했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 심야에 분데스리가의 주요경기 - 주로 차범근이 출전한 경기를 녹화한 엠비씨의 프로그램이 대단한 인기를 누렸으며 이에 대항하여 케이비에스에서는 프리미어리그의 몇몇 경기를 주로 조춘제씨나 최선 그리고 최명곤 전 한양공고 감독의 해설로 해줬는데 차범근 경기에 비하면 그리 인기는 없었다. 아무튼 나는 여기서 당시 분데스리가를 주름잡던 흐루베시, 클라우스 피셔, 한지 뮬러, 브라이트너, 루메니게, 회네스, 델 하이에 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의 플레이에 한껏 매료되어 있었으며 우리의 차범근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주 들떠있었다. 언젠가는 바이에른 뮌헨과 프랑크푸르트가 뮌헨 올림픽 경기장에서 붙었는데 한 6대0인가로 뮌헨이 앞서면서 운동장이 떠나갈듯한 합창소리가 들리다가 차범근의 전광석화같은 두 골이 터지자 일순간 쥐죽은듯 조용해졌던 게 지금도 기억난다.
그러던 어느날 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지역 예선전이 벌어졌다. 내 기억에는 당시 한국은 박상인, 박성화 그리고 허정무가 주축이 된 팀이었고 감독은 작고한 장경환씨가 맡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한국축구는 잘 알다시피 당시 이상하게도 말레이시아만 만나면, 그것도 중요한 고비에서 심심찮게 발목을 잡히는 말레이시아 징크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미 김정남, 김호가 이끌던 시대에 그 유명한 헤딩골 한방에 고개를 떨구었던 사건에서 부터 비롯하여, 예를 들면 말레이사아 자국에서 열리는 메르데카배 대회에서는 한국이 홈팀 말레이시아와 붙어도 3-4골의 여유있는 골차로 승리하는데 왠일인지 올림픽이나 월드컵 예선전의 길목에서 만나면 지독한 징크스에 시달리곤 했던 것이다.
아무튼 당시에 쿠알라룸푸르의 경기장은 한마디로 수영장 이었다. 언뜻 흑백티비화면으로 봐도 공이 제대로 날아가지도 않는 수중전이었으며 골키퍼가 몇걸음 옮기다 미끄러지는 등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한국팀은 나름대로 잘 싸웠었다. 특히 허정무가 드리블 돌파에 이은 대포알 강슛을 여러차례 날리는 등 선전했으나 당시 말레이시아의 초일급 골키퍼 아르무강(팔이 기형적으로 긴게 꼭 침팬지 같은 늘어진 팔이었다.)의 불가사의한 선방에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발빠른 핫산 알리의 기습적 돌파에 뚫려 한골을 잃더니 급기야는 두 골을 더 헌납하고 0대3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고 말았다.(그 중 한 골은 자살골이었는데 충분히 여유있게 콘트롤 할 수 있는 볼이었으나 달려들던 수비수 김홍주가 워낙 X같은 운동장땜에 미끄려져서 발에 공을 맞고 그대로 빨려들어감)
말레이시아의 수비수 소친온의 툭툭 공을 여유있게 차는 차분한 게임운영이 참으로 얄밉게 느껴지는 경기였으며 그 다음날 신문들은 일제히 대문짝 만하게 한국축구의 추락을 질타하고 선수들의 썩어빠진 정신상태를 비난하는 기사로 도배되었다. 일부러 말레이시아 측이 경기시작전부터 소방차를 동원하여 물을 뿌렸다는 이야기가 유력하게 나돌았던 뒤숭숭한 패배였다. (후일 86년 월컵 아시아예선에서 다시 만난 말레이시아에 0대1로 패했으나 말련이 네팔과 비기는 기적같은 행운으로 다시 희망이 생긴 서울경기에서 전날 비가 내리자 운동장에 겹겹이 비닐을 깔았던 우리의 눈물겨운 경험이여..... 과거의 한국축구는 수중전에 넘 약했다)
이미 한국은 74년 서독 월드컵은 호주에 밀리고,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은 이란에 밀려 탈락했던 아픈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호주나 이란은 한국이 질만한 이유가 되는 수준의 팀이었으나 말레이시아는 경우가 달랐다. 암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한국축구가 그때만큼 위기였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당장 장경환 감독은 경질되고 축구계 안팎에서 대폭적인 신진선수들의 물갈이가 단행되었다. 그리하여 주로 대학의 우수한 선수들을 중심으로 아예 판을 다시짜는 새로운 대표팀 구성이 진행되었으며 언뜻 기억나기로는 고대의 황석근, 이정일 연대의 정해원, 박복찬 등이 청대에서 나름대로 실력을 인정받은 정용환, 이태호, 박영수 등과 함께 일종의 상비군으로 여러가지로 검증받고 있었다. 당시 한국축구대표팀은 "화랑(1진)"과 "충무(2진)"의 이원화된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주로 화랑이 진정한 대표팀이라 해도 무방했다. 차범근, 황재만, 김재한, 홍성호, 이영무, 허정무, 박상인, 박성화, 김황호, 조영증 등이 화랑이었으며 박항서, 변일우, 조병득, 박창선 그리고 최근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는 신문선 등이 충무팀 소속이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 80년이 되자 이러한 이원화체제는 유명무실화되고 일종의 상비군처럼 보다 폭넓은 선수의 풀 속에서 대표팀을 구성하려는 몸부림이 있었다. 그만큼 절박했었을 게다. 워낙 79년 올림픽 예선에서의 말레이시아에게 당한 패배가 뼈아팠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오늘 벌어질 레바논과의 경기는 절대로 져서는 안되는 절대절명의 게임이다. 그 후폭풍이 너무 크다)
2. 80년 - 전혀 생소한 그러나 인상적인 두 플레이어
그런데 80년이 되자 반가운 손님이 한국을 방문했다. 바로 프랑크푸르트팀이 차범근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79년의 아픔을 뒤로한 채 여러가지로 검증되다가 어느정도 윤곽을 드러내던 신생대표팀과 경기를 벌이게 되었다. 나는 이경기를 아버지와 함께 지금의 동대문운동장에 직접가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운동장 입구에서 팔던 선수프로필을 넘겨보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른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다 무슨무슨 대학이거나 실업팀 소속인데 유독 머리가 아직 자라지도 않은 까까머리에 여드름 많은 한 선수가 "청주상고"라고 찍혀있는 거였다. 이름은 최순호라고 했다. 관중석에서 "최순호가 누구냐?"고 몇사람이 웅성거렸지만 곧 나의 뇌리에도 그 까까머리는 잊혀지고 게임을 관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마 두번인가 대표팀과 프랑트푸르트의 경기가 있었던 것 같고 차범근은 당시 허벅지 부상으로 붕대를 맨 몸인데도 불구하고 고국의 팬들을 위해 1차전을 뛰어 예의 그 호쾌한 드리블 질주에 이은 왼발슛으로 한골을 기록했던게 기억난다. 경기 후 프랑크 푸르트 선수들은 "한국선수중에서는 이정일이 가장 인상깊었다."는 평을 했다. 한마디로 엄청 빨라서 잡기 어려웠다는 거다. 그러나 빠르기만 했지 게임을 보다 효율적이고 정교하게 풀어가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이 경기들에 최순호가 출전했는지 안했는지는 전혀 기억이 없다. 그만큼 당시의 최순호는 '도대체 왜 대표에 뽑혔는지도 모르는' 그런 선수였던 것이다.
프랑크푸르트팀이 다녀간 후 조금 있다가 포르투갈의 보아비스타가 내한했다. 특유의 바둑판 무늬의 유니폼이 색달랐던 이 팀은 당시 신문에 유세비오(에우제비오)의 후예들 내한이라는 이미지로 소개되었다. 바로 이 경기가 최순호라는 선수가 한국의 축구팬들에게 실질적으로 데뷔한 경기였다.(아마 본인도 인정할 것이다.) 보아비스타와도 두 번 경기해서 모두 1대2로 졌는데 한국이 득점한 두 골을 다름아닌 최순호가 모두 기록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더욱이 첫 경기에서 대단히 감각적인 힐킥 - 최근 앙리가 찰튼과의 리그경기에서 기록한 힐킥골과 상당히 흡사햇다-으로 기록한 득점과 두번째 경기에서 30미터 가까이 되는 먼거리에서 빨랫줄같은 중거리슛으로 기록한 골은 작년의 예선탈락으로 암울해있던 축구팬들에게 어떤 설레임과 기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최순호 - 장신인데다 그 이전의 김재한이나 오석재의 둔중하고 뻣뻣함과는 사뭇다른 유연한 볼센스를 갖춘 포스트플레이어 - 앞으로 지켜보리라. 나만이 든 느낌은 아니었으리라.
그러던 어느날 전국선수권인가 국내대회 한 경기를 티비로 관전하게 되었다. 결승전이었는데 연세대학과 충의(당시의 군팀은 요즘의 상무가 아니라 '충의'라는 명칭을 가졌다)의 경기였다. 당시의 충의팀은 과거 대표팀이었거나 현대표팀 선수가 거의 대부분인 명실상부한 국내최강팀이었으며 당시의 대표팀이 아직은 설익었지만 가능성을 보는 신진기예들로 구성된 팀이었음을 감안할 때 축구팬들의 심정적인 대표팀은 어떤 면에서 충의팀이라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날은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충의에는 이영무, 이강민, 신현호 등 기라성같은 면면을 자랑하는 선수들을 무기로 국내대회는 물론 심지어 킹스컵과 메르데카에서도 선전하는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고 있었고 연대는 과거 대우에서 뛰던 유태목과 현기호, 박복찬 등의 만만치 않은 선수들이 중심 플레이어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장운수 감독의 노련한 작전이 돋보인 연대가 유태목의 페널티킥을 발판으로 게임을 잘 운영한 결과 2대0의 승리로 우승컵을 안았다. 물론 그날따라 충의팀이 지독하게 골운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다. 그러나 그 경기의 두 번째골의 주인공인 1학년 정해원이 하프라인에서부터 무려 6명을 돌파하여 성공시킨 골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정해원 - 그 날카로운 슈팅력하며 무엇보다 발에서 공이 붙어다닌다고 할 만큼 볼컨트롤이 숙달된 플레이어- 이전의 한국축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정해원은 후일 국내프로리그(슈퍼리그던가?)에서도 국민은행과의 경기에서 골키퍼를 포함 대여섯명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켜 당시 83년 세계청소년 4강멤버를 위주로만 대표팀을 구성하여 84년 LA올림픽 예선을 대비하려던 박종환 감독에게 "아니 이렇게 뛰어난 선수를 놔두고 누굴 대표로 뽑으려 하느냐?"는 거센 팬들의 비난을 받게 햇으며 결국 정해원은 대표로 뽑혀 올림픽 아시아예선에 참가하게 된다.
최순호와 정해원 - 나는 이 두 플레이어가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한 나의 인상대로 그들은 곧 대표팀에 뽑혀 특히 80년의 아시안컵에서 대활약을 펼치게 된다. 최순호는 한국이 기록한 대부분의 골을 기록할 정도로 확실한 주득점원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여 당시 아시아언론이 "무서운 아이(앙팡테리블)"라는 타이틀을 달아줄 정도였고, 정해원은 역시나 유명한 북한과의 4강전에서 이강조의 센터링을 그림같은 방향을 바꾸는 헤딩슛으로 동점골, 그리고 이영무의 낮게 깔린 센터링을 그대로 논스톱으로 왼발터닝슛, 극적인 역전골을 성공시켜 아나운서가 "골인! 골인! 골인! 골인!..........."을 무려 스물 몇번인가 했다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81년 - 가능성 그리고 또다른 좌절
한국축구는 밟아도 밟아도 일어서는 잡초인가? 그 척박하기 그지없는 맨땅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인재가 꾸역꾸역 들고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토양을 지녔다. 늘 한국축구의 위기는 또다른 천재 혹은 자질이 그 출현을 알리는, 그래서 우리의 기대를 부풀리게 하는 어떤 패턴이 존재하는 듯 하다. 원래 혈통자체가 북방유목민의 강인한 생명력을 이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서울시청의 돌풍을 이끌던 독사감독 박종환이 조용히 그러나 야심차게 청소년팀을 조련하여 곧 세계대회가 열릴 호주로 향할 터였다. 일본과의 쉽지않았던 예선전을 2대1로 마무리하고 공격에 최순호와 곽성호(케비에스에서 해설위원이던가?), 미들에 재간둥이 이경남 그리고 수비에 듬직한 백치수를 중심멤버로 세계대회에 1회전에서 이탈리아와 맞붙게 되었다. 당시의 이탈리아는 서독과 더불어 유럽의 청대최강반열에 드는 수준급의 팀이었으며 당연히 우승을 노리고 있었던 강호였다. 브라질, 루마니아, 이탈리아, 한국이 한조였으며 당시 국내에는 그저 루마니아 정도나 잡을 수 있으면 크나큰 다행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다시말해서 우리가 이탈리아를 그것도 4대1이라는 큰 스코어차로 소위 "관광(?)"할 수 있으리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순호의 크레이지모드가 빛을 발한 경기였다. 최순호는 머리와 발로 두 골을 기록하는 동시에 득점력 못지않은 패싱과 게임운영까지 곁들여져 곽성호와 이경남의 추가골에 직간접으로 관여했고 아무도 예기치 않은 4대1승리를 첫판에서 장식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호주 현지에서 난리가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 최순호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축구관계자들에게도 깊이 각인되었으며 훗날 유벤투스의 최순호에 대한 일종의 짝사랑은 아마도 그 81년의 센세이션에서 비롯되었던 같다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다음의 브라질과는 0대3, 기대를 걸었던 루마니아전에는 아쉽게도 0대1의 패배를 당하여 예선탈락했지만 당시 참관했던 유수의 해외축구관계자들은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며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는 코멘트를 남겼다.(아시아를 대표하여 우리와 동반출전한 카타르는 4강에서 기가막힌 오버헤드킥 한방으로 브라질을 3대2로 잠재우고 빗속에서 펼쳐진 서독과의 결승에서 0대4로 패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81년의 따사로운 기대에 더불어 곧이어 82년 스페인월컵으로 가기위한 예선전이 벌어졌다. 상대는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 이었다. 한국은 사실상 쿠웨이트와의 경기가 최종예선 진출의 갈림길이 될 것으로 보고 (당시는 지금같은 홈엔드 어웨이가 아니라 쿠웨이트 한 장소에서 한 팀과 한 경기씩만 갖는 방식이었다.)이에 대비했다. 이미 80년의 아시안컵에서 예선전에서는 3대0으로 이겼으나 결승에서 0대3으로 패했기때문에 상대에 대한 경험은 어느정도 충분했다고 볼 수 있었다. 쿠웨이트의 발빠른 측면공격, 특히 무바라크만 막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한국의 공격투톱이 최순호와 이태엽이라는 장신에 볼센스있는 선수들이었으므로 이번에야말로 한을 풀 수 있을 거라고 모두들 기대가 컸다. 말련과의 경기에선 선취골을 허용하여 또다시 지긋지긋한 징크스가 되풀이 되는가 했으나 홍성호의 헤딩골, 이강조의 강력한 왼발 발리슛으로 역전하여 2대1승, 태국은 가볍게 6대0으로 셧아웃 시키며 최종전인 쿠웨이트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이상 더 무기력할 수 없다할 정도로 공격이 안풀리면서 예의 쿠웨이트의 예리한 측면공격에 2실점하며 0대2로 패배, 스페인행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예선전이 특히 기억에 남는 이유가 이태엽이 정상적으로 헤딩하여 성공시킨 골을 심판이 이유도 알 수 없는 석연찮은 노골로 선언하였는데도 우리 선수나 감독이 별다른 항의도 하지 않았던 점, 그리고 잘라먹는 헤딩으로 허용한 두번째 실점은 그렇다쳐도 사각에서 허용한 첫번째 실점은 조병득 당시 골키퍼가 그저 손만 올리고 있었을 뿐 조병득의 실력으로는 충분히 막고도 남을 평범한 슛을 허용하는 의문투성이의 경기 였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당시는 2차석유위기의 여파로 5공의 군사정권이 석유수급과 물가안정때문에 전전긍긍하던 때라 쿠웨이트의 석유공급때문에 우리가 사실상 일부러 져 준 - 애초부터 승패가 결정되 있었던 게임이라는 풍문이 끈질기게 나돌았기 때문에 정말 지금이라도 당시의 감독과 특히 조병득 코치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한번 솔직히 물어보고 싶다. 그때의 내막을...... 축구기자들이란 작자들은 이런거 한번 취재안하고 뭐하는지.........
4. 82년 - 또다른 침체(아시안게임의 예선탈락)
81년 월컵 예선전 실패의 여파였을까? 한국축구는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도 조예선에서 탈락하는 치욕을 당했다. 게임내내 내용에서는 리드하고도 지독하게 골운 없는 게임끝에 파곳시의 대각선 슛에 무릎꿇은 이란과의 1차전도 아쉬웠지만 1대2로 패한 일본과의 경기는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다. SBS해설위원인 강신우의 터닝슛이 멋지게 일본의 네트를 흔들때만 해도 낙승을 거두는 가 했으나 어설픈 패스미스를 남발하는 삽질모드로 돌변하더니 급기야 두 골을 헌납하고 역전패당했던 것이다. 상대가 일본이라서 그 쓴맛이 더욱 컸었다. 쓸쓸히 운동장을 빠져나오는 강신우의 처진 어깨와 타들어가다 못해 허옇게 변한 최은택 감독의 갈라진 입술이 뇌리에 잊혀지지 않는다.
한국축구는 이렇게 81년의 희망에 이은 좌절과 또다른 침체에 빠지며 83년의 멕시코 고원에서 들려온 조춘제 아나운서의 희열에 찬 절규를 기다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