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비보이들은 어디로 갔는가?
인디 문화 포장하기
얼마 전, 내 칼럼을 읽은 독자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졸업 작품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는 중인데, 인디 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별에
대한 나의 의견이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생각하는 인디 문화의 특징에 대해서 멋진 부분만 골라서 설명하다가 나는 나의 설명이 지나치게 개념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있고, 한 쪽에 치우쳐서 인디 문화를 포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고자 하는 본래의 기준을 잃고 특정
몇몇 인디 문화에만 집착해 ‘진짜와 가짜’ 운운하고 있는 모습은 모순이었다. 사실 이번 달에는 ‘거리의 비보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는
제목의 다소 비판적인 글을 적어볼 계획이었다. 스타를 꿈꾸는 비보이 문화의 흐름에서 상업화를 빼고 이야기 할 수 없었고, 그것에 대해 비판해 볼
계획이었지만, 혼란스러워졌다. 비보이라면 거리의 한 구석에서 삼삼오오 모여 춤을 추고 있어야 했으니까. 영화나 다큐멘터리 속에만 존재하는 연출된
풍경 같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그러한 풍경을 보고 자라왔다. 또래의 친구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이었고, 작지만 강한 문화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렇게 몇몇의 세계적인 스타가 나왔지만 길에서 보고 느낄 수 있던 문화는 모두 사라졌다. 무대가 아닌 곳에서는 춤추지 않는 사람이
진짜 비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불만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한민국 비보이=세계 최고
국내 인디 문화의 흐름에서 비보이 문화는 가장 막강한 힘과 역사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비보이들이 여럿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문화에서 우열을 가리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지만, 비보이 세계에서 만큼은 분명한 서열이 존재한다. 배틀(Battle)이라는
문화 덕분이다. 비보이 배틀에는 DJ가 만들어 내는 즉흥적인 비트에 맞춰 동일한 박자만큼 춤을 출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고, 그 기회는
동일하다. 한 명이 춤을 추고 난 뒤, 상대가 춤을 출 기회를 얻는데 열정적인 매니아들이 관중의 주를 이루기 때문에 반응은 언제나 공정하다.
심사위원들이 있지만, 승부는 매 순간, 현장에 있는 관중들의 호응에서 이미 알 수 있다. 각자가 가진 무기는 자신의 몸밖에 없는 것이다. 실력
앞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영향력도 통하지 않는 공정한 무대는 모두가 볼만한, 긴장감 넘치는 각본 없는 무대가 된다. 비보이 문화는 세계를 하나로
만든다. 거리에서 시작해 세계 최고가 된 한국의 비보이들은 세계 무대에 대한민국을 알렸다. 세계는 대한민국의 비보이와 대한민국의 비보이 크루에
열광하고 있다. 지금의 비보이 문화를 여전히 인디 문화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내 마음을 비보이 디퍼(Differ)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좋은 친구이자, 내게 비보이 문화를 알게 해 준 사람이며, 2013년
‘Redbull BC One’ 세계 대회에서 결승 무대에 올랐던 세계 최고의 비보이다. 이 글은 디퍼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알게 된 것, 그리고
마음이 바뀌게 된 과정에 관한 이야기다. 다음은 디퍼의 이야기다.
비보이 디퍼의 이야기
“한국의 비보이 문화는 드라마틱한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픔과 충돌이 많았다. 모순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 처음에는
순수했다고 하지만, 순수했다기보다 무지했다. 처음에는 관객을 의식하지 말고 스스로 즐기자는 의식이 일반적이었다. 모두가 고결한 가치를 스스로
컨트롤하기 위해 상업화 되는 것을 염려했고, 비보이가 아닌 사람과는 타협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낯선 이가 다가오면 침범이라고 생각해 자신들만의
영역을 긋고 벽을 만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비보이 모두가 환경에 대해 불만이 많았는데, ‘왜 불만을 가지고 있지?’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채 그냥 주어진 환경을 탓했다. 생각해 보면 상업적인 제의를 한 그들은 ‘Win-Win’을 위해 접근했는데, 그 때 그들이 비보이의 가치를 너무
낮추어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던 것도 사실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비보이로서 대우만 받으려고 했던 경향이 있었다. 세계는 우리에게 열광하는데
국내의 대중과 사회와 국가는 왜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가? 왜 더 많은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해 주지 않는가? 사실 이렇게 불평하는 것은
모순이었다.
비보이 댄스는 거리에서 시작되었지만, 거리에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의 흐름도 스트릿 댄스가 스튜디오 댄스로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으로 비보이 스스로가 주축이 된 협회도 생기고, 대기업의 스폰서를 구하기도 했는데, 자기네들끼리 싸우다가 씬은 더
망가졌다. 정치적으로 편을 나누고 ‘진짜’와 ‘한국 힙합’ 논쟁을 할수록 상품성이 떨어졌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떠났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떠나자 ‘진짜’를 외치던 사람들도 사라졌다. 그렇게 많은 기회가 지나가고, 비보이 환경은 다시 처음의 상태로
돌아왔다. 미디어가 만들어낸 말-‘브레이크 댄스’라는 명칭에 화를 내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거리의 비보이’로서 순수함을 지키는 것이 나의
사명인가? 비보이 문화는 추리닝을 입고, 계속해서 바닥을 도는 이미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예전에는 낮은 문화적 인식과 열악한 환경에 불만이
많았다. 지금은 부정적인 인상을 바꾸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대중이 나와 이 문화를 무엇으로 부르든 나는 댄서고, 춤은
하나이며, 나는 나의 춤을 통해 나의 환경과 세상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발레나, 현대무용은 고급 예술 대우를 받는데 비보이는 왜 예술이 될 수
없는가? 나는 내가 멋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인정과 상관없이 시도해 보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꿈꾸던 것들을 억지로 밀어붙여 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결과를 떠나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이것은 비보이의 오리지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오리지널에 자신을 가둘 필요는 없다. 시대가 지나면
상황이 바뀔 수 있고, 나는 나의 삶을 즐기고 있다.”
편견을 무너뜨리다
디퍼와의 대화 속에서 나는 인디(Independent)의 정수를 깨달았다. 인디는 특정 장르, 특정 집단의 입장의 논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립적인 행동과 생각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에는 스스로를 포장할 필요도, 갇혀서 벽을 쌓을 필요도 없다.
자신의 삶을 살고자 하는 그의 솔직함은 강렬하고 후련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비보이 문화에 대한 나의 편견은 완전히 무너졌다. 편견과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을 경험할 때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 칼럼을 진행하면서 나는 대화를 통해, 그리고 경험에 관한 글쓰기를 통해 공정한 기준으로 중요한
가치를 찾아나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