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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가 있는방 스크랩 로고와 함께 알아보는 명품브랜드이야기
빛 운반자 추천 0 조회 1,347 09.11.27 0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Logo srceret

 

로고를 보는순간, 몇초안에 당신은 브랜드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나 로고에는 몇초만으로는 너무 아까운 소중하고 진귀한 뒷얘기들이 담겨있다.

그단순한 마크를 뛰어넘는 '로고'에 담겨있는 특별한 이야기.

로고와 함께 알아보는 브랜드이야기를 다뤄보겠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가방을 볼 때, 늘 나에게 의문이었던 점은 ‘왜 사람들이 어느 브랜드 것이라는 불도장을 찍은 듯한 로고 프린트에 열광하는가’였다(로고 프린트 백을 소장한 분들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그러나 내 눈앞에서 윙윙거리는 LV, GG, FF, CC 등 브랜드 머리글자 시리즈는 늘어만 가니, 이 로고 라인들의 선풍적인 인기는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내 취향과는 반대로, 왜 브랜드들이 로고 라인에 열광하는지는 자못 선명하다. 그것은 마치 국가를 세울 때 국가의 탄생 설화와 국기 같은 상징물을 중요시하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브랜드들은 앞날을 좀 더 공고히 하기 위해 브랜드의 상징인 로고를 발전시키는 데 비용과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샤넬  CHANEL

20세기 최고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코코샤넬" "그랜드 마드모아젤"이라 애칭되던 20세기 최대 디자이너의 한사람이다. 1883년 8월 프랑스의 오베르뉴에서 태어났다.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그녀는 18세까지 고아를 교육시키는 엄격한 수도원에서 지냈는데 이때 입었던 검은 제복은 후에 샤넬의 의상에 종교적인 엄숙함을 반영시키는데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남성 디자이너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여성복 세계에서 유일하게 첫 번째로 승리한 여성인 샤넬은 처음에는 파리의 조그만 모자가게의 디자이너로서 출발해 알려지기 시작했고 1910년 경부터 패션계에 진출해 여성복 디자인을 시작했다. 1914년에는 파리 캉봉가에 그녀의 이름으로 매장을 열었다. 심플하고 스포티한 옷제작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여러 개의 혁명적인 디자인을 발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남성들이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공장과 회사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여성들은 당연히 편안하고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을 선호하게 됐다. 그 예로써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상의가 길고 스커트가 짧은 남성스런 옷(가르손느룩)을 창안하여 복식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스웨터를 일상복과 함께 입기도 하고 저지를 옷의 소재에 사용한다든가 스포티하고 입기 편리한 복장의 보급에 힘씀으로 그녀는 30년대 유럽과 남미, 중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39년에 폐점하고 향수의 샤넬 NO. 5를 발표해 이 분야에서도 대 성공을 거두었다. 1954년 샤넬은 파리로 돌아와서 소위 "샤넬룩"이라 불리는 가디건 수트, 사슬끈을 단 퀼팅의 핸드백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샤넬은 1954년부터 1971년까지는 파리 모드계의 전무후무한 여왕으로 군림했다. 장식이 달린 정장 투피스, 모슬린 원피스, 두터운 퀼팅 핸드백, 동백꽃, 모조 보석, 금색 체인, 검정과 흰색의 장난스런 조화, 반 모드의 모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샤넬룩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1971년 1월의 컬렉션 준비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샤넬은 사생활이나 연애도 매우 다채로웠으며 스트라빈스키, 피카소, 콕토, 디이기레프 등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전설적인 화제가 많다. 현재는 칼 라거펠트가 디자이너로 샤넬라인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샤넬의 패션은 편안함, 활동성, 심플함에 우아함을 가미,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영원한 브랜드다

 

 

■ 루이뷔통 LUIS VUITTON

나폴레옹 3세 유제니 황후의 짐꾸리는 도제로 시작한 루이비통은 1854 년 피리 카푸신가에 매장을 열어 이 매장에서 왕족들과 귀족들의 여행가방을 제조해 주면서 현재 명성의 기초를 닦았다. 그때까지는 원형으로 되어있어 운반하기에 불편하기 짝이 없던 가방을 뚜껑을 평평하게 만들어 여러 개의 여행가방을 한데 포개어 운반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수십개의 가방을 가지고 여행을 다니던 귀족에게 있어서는 루이비통이 개발한 여행 가방은 그들에게 대단한 혁신을 안겨다 주었다. 이로 인해 루이비통은 여행 가방의 대명사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왔다. 144년이 지난 현재까지 루이비통의 가방은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여행 가방의 으뜸이 되었고 전통이 소중히 지켜지면서 시대상의 혁신을 반영하는 그들의 디자인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역사와 중요한 순간을 같이 해왔었다.

루이비통의 전통은 제작 과정에서 뿐만이 아닌 디자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나의 디자인을 수십년동안 계속해서 만들어 오랜 시강 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꽃과 별 그리고 창시자 루이비통의 이니셜 LV를 조합해 만들어 진 모노그램 캠퍼스는 루이비통의 아들인 조르쥬 비통이 당시 극성이었던 모조품과 구별하 기 위해 1896년 창안 한 것이다. 이 모노그램 캔버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루이비통 가방 의 이미지로서 100여년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루이비통은 전통만을 고집하지않는다. 전통을 소중히 간직해 나갈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전통 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1986년 루이비통 제품에 처음으로 검정,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색을 도입한 에피 제품, 1993년 현대를 바쁘게 살아가는 남성들을 위한 타이 제품,1997년 의류 사업 도전으로 새로움에의 전통을 루이비통은 증명해왔다. L과 V와 꽃,별의 무늬가 조화된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캔바스 시리즈는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문양으 로 탄생 100주년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 세계인의 시각에 선명한 각인을 새긴 제품. 특히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위해 96년 초에 로메오 질리 , 헬무드 랭, 아이작 미즈라히, 시빌라,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7인의 디자이너들이 모노 그램을 이용해 자신들의 개성적인 디자인 세계을 표현한 제품들로 전 세계를 도는 순회 전시를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에디터에게도 이 로고 백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저 코코 샤넬 머리글자의 조합이라 여겼던 CC 로고가 샤넬이 어린 시절을 보낸 수녀원 창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 달빛이 비치는 수도원의 창문이 마치 C자가 등을 댄 듯 보이는 것이었다 - 다분히 순정만화 같은 스토리를 들은 후, 왠지 모르게 CC 로고가 새겨진 샤넬 백에 정이 가는 것이었다.

이렇듯, 루이 비통의 LV, 구찌의 GG, 펜디의 FF 등에는 단순한 머리글자 이상의 재미난 뒷얘기가 많다. 브랜드의 창립자인 루이 비통의 머리글자인 LV와 모노그램 플라워, 이 두 가지 로고에는 아버지에게 바치는 존경이 담겨 있다. 패션 비즈니스에 천재적이었던 루이 비통의 아들인 조르주 비통은 자신의 성공이 모두 아버지의 덕이라 여겨 1896년, 아버지를 상징하는 LV 로고를 디자인하게 된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꽃 모양을 새긴 모노그램 플라워 로고를 발표해, 아버지에게 헌사한다. 그의 각별한 효도심 덕이었을까? 루이 비통의 성장은 거침없는 질주 그 자체였다.

 

 

 

■ 페라가모  Slavatore Ferragamo

80년 전 시작된 페라가모의 구두와 기타 패션상품 속에서의 혁신적인 사고방식, 기술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투자, 우아한 연출에 대한 노력은 처음과 같은 강도로 지금까지 늘 유지되어 오고 있다.

페라가모는 라이센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구두의 디자인은 누구나 모방할 수 있지만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다는 지론 때문이다. 토탈 패션을 추구하는 페라가모지만 사업의 중추는 여성용 구두로 전체 매출의 1/3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 비중은 각 시장상황에 따라 다르며, 현재 한국시장에서는 의류의 매출이 좋은 편이다. 페라가모는 가을/겨울 시즌에 내추럴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의 컬러를 도입, 전통적으로 클래식한 스타일을 고수했다. 몸, 선에 맞는 라인이 자연스럽고 우아한 모습을 형성하며 여성미를 강조한다. 더블 스트레치, 울, 울 크레이프, 조젯, 세이블 스트레치, 플란넬, 리버서블 셜링 등이 소재로 사용되었고, 구두와 핸드백은 기존의 전통적인 스타일에 조금 더 장식을 기묘하게 연출해 모던룩을 강조했다. 현재 페라가모의 매장은 3개가 있으며, 하반기에는 2개의 매장을 더 오픈할 예정이다.

 

 

구찌  GUCCI

귀족적 취향과 세련된 감각 [구찌]는 이탈리아의 마구아 피혁제품의 생산으로 출발, 격조높은 우아한 귀족적인 취향과 현대여성의 세련된 감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토털 패션 브랜드로 인식 전세계를 열광시키고 있는 브랜드. 창업자인 구치오 구찌씨에 의해 말안장과 가죽 제품을 제조하면서 시작된 [구찌]는 그의 아들 로돌포가 가방, 구두 등의 피혁제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로돌포의 아들 모리지오는 숄, 스카프, 향수 등으로 사업을 확장, 지금의 구찌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가 바로 루치아노 소프라니와 손을 잡고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성립시킨 장본인이다.

네임벨류를 인정받은 구찌의 명예를 바탕으로 프레타 포르테 라인은 성장가도를 달려 오늘날 전세계 1천2백여개의 체인망을 형성하고 있다. [구찌]는 1990년대부터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트렌디하고 모던한 콜렉션과 젊고 경쾌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시킨 주인공은 디자인의 총책임을 맡고 있는 젊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톰 포드이다.

톰포드는 거리나 나이트크럽에서 얻은 새로운 영감으로 섹시한 가죽 샌들, 스파이크 힐, 테크니컬 디자인에 구찌 특유의 금색 말재갈 문양을 혼합시킨 스타일을 등장시켰다. 최첨단의 디자인과 구찌 특유의 전통을 혼합해 놓은 그의 작품들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구찌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이 향수를 느끼는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를 현대에 맞게 적절히 조화시키는 그의 탁월한 감각은 복고물결에 편승해 단순히 과거를 재현한 것이 아니라 구찌가 갖고 있던 클래식함과 품격을 현실 가능한 것으로 변형시켜 여성들에게 새로운 섹시함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옷은 구찌의 클랙식함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미래적인 클래식함과 모던의 미묘한 균형을 찾았으며 이렇게 디자인된 의상들은 구찌의 모든 아이템과 토털 코디네이트 됨으로써 완벽한 룩을 제시, 매시즌 새로운 실루엣으로 끊임없는 변혁의 움직임을 메시지로 전하여 패션계의 이슈가 되고 있다.


구찌를 대표하는 GG 로고는 회사 창시자인 Guccio Gucci의 이니셜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이 GG 로고의 열풍은 1960년대 중반 GG 캔버스라 불리는 코튼 패브릭 위에 더블 G 로고를 장식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바로 구찌의 베스트셀링 아이템인 ‘재키 백’에 사용된 GG 프린트이다. 재키 백으로 인해 구찌의 얼굴이 된 이 GG 로고에 대한 편애는 대단했다. GG 프린트 위에 투명 합성수지를 덮어(GG프린트 빈티지 제품 중 반짝이는 비닐같이 느껴지는 제품이 이에 해당된다) 실용적인 시도를 했는가 하면, 여러 층의 PVC를 이용해 엠보싱 처리를 하이도 했다. 변화에 변화를 거듭하여, 드디어 2005년, 이 GG 로고는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다. 이름하여 구찌시마 컬렉션. 지금까지 캔버스에 프린팅으로 작업하던 기술이 아닌 스탬핑, 즉 기계의 열로 GG 로고가 영구히 프레싱된 가죽 제품이 탄생한 것이다.

 

 

 

■  크리스티앙 디오르  Christian Dior

모자 디자인의 스케치로 호평을 받아 디자이너로 데뷰한 프라스 꾸띄르에. 1905년 프랑스 그랑빌 출생으로 부유한 실업가 가정에서 태어나 부친의 희망대로 외교관을 지망하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가정의 몰락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태피스트리를 시작했으나 자금 부족으로 패션 디자인으로 전환, 1938년 로베르 피게사에 들어가 지도를 받았다. 그후 1941년 루시아 뤼통사에 일했고 그곳에서 피에르 발망을 알게 됐다. 1946년 매종 '크리스티앙 디오르'를 열고 오뜨꾸띠르를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 성공을 거둔다. 전쟁과 경제 침체기를 겪은 여자들은 디오르의 풍성한 코롤 (꽃잎) 라인과 당시 황금기에 달한 텍스타일 산업의 산물인 아름다운 직물을 즐겼다.

1949년부터 디올은 50년대를 대표하는 스타일로 '뉴 룩'이라는 새로운 라인을 발표해 이것을 계기로 패션 혁명을 가져왔다. 디올은 전 세계 여성들의 높은 어깨와 짧은 스커트를 처진 어깨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통 스커트로 바꿔 버리고 말았다. 이로인해 크리스찬 디올이란 이름은 전 세계에 알려지고 1957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 시즌 발표하는 창작 실루엣을 튜립 라인, H라인, Y라인 등으로 이름을 붙여 패션계를 계속 리드했다. 그의 최후의 라인은 스핀들 라인 ( SPINDLE LINE ) 이었다.

스탈린과 간디처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다섯 사람들 중 한명으로 꼽혓던 디올이 죽은 후 이브생 로랑, 마르크 보앙 등이 디올사를 이끌어 갔으며 현재는 이탈리아 패션계의 거장 으로 불리는 지방시의 디자이너였던 존 갈리아노가 쟝 프랑코 페레에 이어 주임 디자이너로 새로운 디올만의 뉴 룩을 선보이고 있다. 페레는 97년 S/S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마지막으로 디올사를 그만두고 이탈리의 자사 브랜드 [페레]에만 전념하고 있다.

존 갈리아노는 영국의 디자이너로 세인트 마틴 예술학교 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졸업 작품은 브라운 백화점에 전시돼 많은 언론과 바이어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1987년 존 갈리아노는 BGC에 의해 그해의 디자이너로 뽑혔으며 바드의 의상 박물관은 그가 디자인한 옷을 그 해의 옷으로 선정했다. 이 외에도 패션에 관련된 많은 상을 수상했 으며 요즘 뛰어난 평가를 받고있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 프라다 PRADA 

패션계 안티룩의 거장이라고 불리우는 [프라다]는 입기편하고, 세련되며 우아한 클래스가 있는 옷을 만들어내는 적지않은 브랜드 중 하나다. 밀라노의 유명한 가죽제품 메이커인 프라다의 상속인인 미우치아 프라다는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 정치학을 공부한 좌익학생 이었다.

밀라노 유명 가죽제품 사업을 상속받은 그녀는 조부의 마리오의 사업을 이어받아 오늘날 토틀 패션을 지향하는 국제적인 패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78년 전통적인 가죽 백의 전통을 이어 미우치아 프라다는 프라다백을 창조한다. 현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지만 당시에는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행동파 여성들을 위한 우아하고 견고한 나일론 소재의 가방으로 당시의 모드와는 완전히 다른 가방이었다.

그후 80년대 경영학을 전공한 기업인인 남편 파트리지오 베르델리와 만나면서 프라다의 사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마구공 장식의 가죽백에서 나일론 레인코트,베이지와 갈색을 조화시킨 마스코트 컬러에 이르기까지,프라다가 지향하는 스타일은 뚜렷하다. 튀지않은 옷 특별히 [섹스 심벌]로 불리우는 몇몇의 소수 여성이 아니라 자신이 즐겁기를 원하는 [ 보통 아줌마 ] 를 위한 옷을 만드는 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패션세계다. 데생이나 재봉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단순하고 클래식한 형태에서 순수하게 본능을 따라 창작 작업을 하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백에 이어 제화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1988년에는 최초의 프레타 포르테 컬렉션을 발표했다.

부부가 창작과 제조를 맡은 프라다 에서는 제조 전 과정에 있어서는 엄격한 퀄리티를 자랑한다. 소비자의 욕구를 잘 감지하고 재빠르게 들어준다는 점이 프라다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나일론 파커, 소매없는 짧은 원피스, 무릎까지오는 블루 마린 스커트에 가는 벨트, 검은 개버딘 밀리터리 외투에 이르는 옷들로 패션을 주도해왔다.

그녀는 그녀 자신의 우아함과 평화로운 분위기를 창조 하는 것이다. 프라다 실루엣은 특별히 정의할수 없는 특징을 가지지만 프라다 나름의 친숙함으로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왔다. 프라다의 옷에는 한순간반짝이는 인기가 아닌 영원히 사랑받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련됨이 있다.


 


크리스찬 디올 역시 구찌처럼 창립자의 이름에서 비롯된 로고를 제품 디자인에 충실히 반영하는 실속파이다. 1970년대 초 Dior 네 자를 사선으로 배열하는 ‘빈티지 로고 라인’을 디자인한 무슈 디올은 이 로고 라인이 ‘슈퍼맨 시리즈’보다 더 많이 리바이벌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쨌든 그가 디자인한 이 전설적인 로고 라인은 2001년 ‘뉴 로고 라인’으로 부활했으며, 그 인기에 힘입어 2002년 ‘뉴 빈티지 라인’으로 재해석되었다. 이 로고 라인이 일대 변화를 맞은 해는 바로 2003년. 이때 론칭한 ‘핑크 로고 글래머’는 핑크 컬러와 하얀 가죽 꽃 장식이 더해진 귀여운 디자인으로, 그동안 선보여온 빈티지 라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2004년 가을, 로고 라인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던 존 갈리아노는 빈티지 로고 라인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한 ‘라스타’ 컬렉션을 발표한다. 존 갈리아노는 자메이카 흑인들의 문화인 ‘라스타’의 컬러 코드인 옐로, 그린, 레드 등을 덧입혀 모던한 로고 라인에 복고적이고 펑키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올해 크리스찬 디올은 무슈 디올의 빈티지 로고와 가장 흡사한, 기존의 로고보다 좀 더 두꺼워진 로고를 사용한 빈티지 컬렉션으로 로고 라인의 열풍을 다시 한번 재현하고 있다.

프라다 역시 디올과 마찬가지로 창립자이자 브랜드 이름인 Prada 철자를 로고로 사용한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철자 주위를 둥그런 매듭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은 사보이 왕가의 문장을 둘러싼 매듭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왕가의 제품을 제작하는 공식 업체로서의 자존심과 위엄을 로고에 담은 것이다. 그리고 이 위엄 있는 로고는 자카드 기술을 응용하여 아예 로고를 새긴 채 패브릭을 짜나가는 ‘로고 자카드 라인’으로 재탄생되어 그 파워를 더하고 있다.

 

 

 

 ■ 로에베 LOWEBE

로에베는 언뜻 보기에 스페인 제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명품하면 이태리나 프랑스 産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며 이는 우리가 가지는 선입견의 뿌리가 깊음을 의미한다.  스페인은 GDP 규모 세계 8위의 경제 대국이며 세계 제2의 관광대국이다. 산업 구조 상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아.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열악해 보이나 자동차, 철강, 건설, 항공 기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확보하고 있다.  21 세기 유럽 경제의 성장을 이끄는 견인차로 주목 받고 있는 스페인. 그 스페인의 다국적 브랜드 로에베를 알아본다.

 1872년 마드리드에 도착한 엔리께 로에베는 가죽공방을 연다. 독일인의 장인 정신에 스페인의 재료로 제품을 만들며 점차 명성을 알려가던 가죽 제품 공장은 1892년 새로운 도약을 한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특수한 재질 즉 이구아나, 악어, 뱀 가죽 등을 이용한 제품으로 세인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한다.

1905년 콩키스타 공작부인의 소개로 스페인 궁정에 로에베를 납품하기 시작하고 품질의 우수성에 반한 알폰소 XIII 왕은 로에베를 왕실 공급 업체로 선정한다. 그 후 영국 왕실의 빅토리아 여왕, 세기의 연인으로 유명한 윈저공과 심슨 부인 등이 즐겨 찾음으로써 고급 명품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로에베는 가죽 전문 브랜드로 항상 고급품만 만들었던 것은 아니라 때에 따라 품목을 달리했다. 스페인 내전 (1936-1939)동안은 가죽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한 권총집, 탄약 벨트, 탄띠 등 군수품을 만들어 공급했다. 1965년에는 아르마니 등과 ‘프레타 포르테’ 라인을 만들어 가죽 제품에 의류용품을 추가했으며 1970년대 후반에는 향수를 발매하며 토탈 패션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스페인적 이미지 즉 가우디와 벨라스케스, 살바도르 달리 등 스페인의 혼이 담긴 작가의 작품을 바탕으로 강렬한 색을 선보인 로에베는 나르시소 로드리게스에 이어 2002년 컬렉션부터 스페인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호세 엔리케 오냐가 로에베의 ‘프레타 포르테’라인을 이끌고 있다.

 

 

■ 버버리  BURBERRYS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 영국이 낳은 것은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이다. 특히 코트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토마스 버버리의 [버버리]는 인간에 대한 강한 애정에서 탄생한 옷. 1835년 영국 남서부의 셔리주에서 태어난 버버리는 20살이라는 나이에 포목상의 주인으로서 당시 농부들이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버버리는 이 옷의 소재가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며 세탁하기에도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는 이러한 특성을 다른 직물에 이용해보기로 결심하고 소재연구를 거듭한 끝에 1888년 [개버딘]이라는 천을 개발했다. [개버딘]은 미리 방수처리한 면사를 촘촘히 직조한 후에 다시 한 번 방수처리를 한 것으로 방수성이 뛰어나고 비나 눈을 맞아도 한기를 느끼지 못할 만큼 보온력이 뛰어나며 더운 기후에서도 열을 차단하는 내수성과 내구성, 통기성 및 단열성이 뛰어난 천. 1세기 전인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소재였던 [개버딘]은 많은 스포츠 애호가들과 탐험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아문잰과 스코트도 개버딘으로 만든 옷을 입고 남극탐험에 성공했고 최초로 대서양을 횡단했던 알콕경도 이 소재로 만든 특수 방수복과 텐트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개버딘의 우수성과 뛰어난 실용성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개버딘은 당시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도 애용해 그는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하인들에게 말해 오늘날 영국의 상징처럼 되버린 [버버리]를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버버리사를 대표하는 품목인 [트렌치 코트]는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참호(Trench)에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때 50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착용, 방수복으로 많은 각광을 받았으며, 영국 육군성과 해병대도 공식 방수복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그 후 전쟁의 형태가 참호전으로 발전하자 버버리 방수복에 견장과 군장비를 담을 수 있도록 'D고리(앞면에는 수류탄을 뒷면에는 칼을 휴대하도록 고안)'를 부착한 새로운 스타일의 코트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트렌치 코트]이다. 팔의 움직임을 자유롭게 해주는 '라글란 소매(Raglan Sleeve : 팔이 움직이기 쉽도록 되어있어 운동량이 많은 옷에 좋은 소매)'와 가슴쪽의 비바람을 차단하기 위해 '스톰 플랩(Storm Flap : 비바람을 막기위해 오른쪽 어깨 위에 덮는 천)'이 달린 나폴레옹 칼라 등으로 실용성이 뛰어난 이 코트는 디자인이나 길이로써 그때 그때의 유행을 반영해 변화를 주기도 한다.


1백60년이라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로에베는 로에베의 과거 제품을 다시 구입하는 독특한 프로젝트를 통해 로고의 역사와 변화 과정을 추적하는 작업을 전개했다. 로에베는 연대별 제품을 수집하는 이 작업을 통해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가 격변을 겪는 시기마다 심벌을 달리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집된 로에베의 로고들이 그 변화에 얽힌 히스토리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재미난 모양들을 일곱 개의 핀으로 만들어 1백60주년을 기념하는 ‘앤티크 컬렉션’을 탄생시켰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현재, 로에베에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로고인 애너그램은 로에베에 있어 의미 있는 해였던 1980년, 로에베의 첫 글자인 알파벳 L 네 개를 조합하여 디자인한 로고다. 이로써 로에베는 혼재된 브랜드 로고를 하나로 통일할 수 있었으나, 하마터면 귀중한 로고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흘려보낼 뻔했다.

올해로 1백50주년이 된 버버리는 비로소 새로운 로고로 통합하며, 그야말로 ‘전진’을 위한 맹세를 다졌다. 사실, 공식적인 버버리의 로고는 1901년 창업자인 토머스 버버리가 강하고 진취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제작한 ‘창 든 기마상’이다. 그리고 이 기마상이 들고 있는 깃발에는 라틴어로 ‘전진’이라는 뜻인 프로섬(Prorsum)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창 든 기마상은 ‘버버리 체크’의 위력에 밀려서인지 많은 제품에 활용되지 못했고, 브랜드 상징으로서 확고한 이미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나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버버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하면서, 이 기마상에도 광영이 비치기 시작했다. ‘전진’이라는 뜻이 마음에 들었는지, 베일리는 버버리 프로섬 라인에 이 로고를 극대화했고, 2006년 1백50주년을 맞이해 그동안 버버리 런던과 버버리 프로섬으로 분리해 전개해온 액세서리 라인을 하나로 통합해 이 기마상 로고를 표시하는 일대 변혁을 일구었다. 고로, 앞으로 우리는 ‘전진’이라는 깊은 뜻을 지닌 ‘창 든 기마상’ 로고에 더욱 친숙해질 것이다.

 

 

 

■셀린느  CELINE

가장 고급스럽고 편안한 소재를 우아하면서 동시에 모던하고 입기 쉽게 디자인한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셀린느(CELINE) 브랜드의 시작은 셀린느 비파이나 부부가 1946년 프랑스 파리 말트가에서 아동용 신발 매장을 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이 부부는 그들의 성을 딴 셀린느라는 브랜드네임을 붙였고 아동용으로 시작한 매장의 구두는 곧 좋은 품질로 인기를 얻게 되면서 여성용 구두 또한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1959년 선보인 여성용 '잉카 로퍼(Inca Loafer)'는 전세계적으로 커다란 인기를 모으며 셀린느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셀린느의 지금의 명성이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1966년에는 전설적인'포니 백'을 포함한 세린느의 첫 가죽 제품 컬렉션을 생산해냈습니다. 여러 제품에 걸쳐 세린느의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전달해주는 장식을 사용한 디자인은 그 후에도 세린느의 역사와 함께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린느 역사의 전환점이 된 시기는 1969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신발과 가방 등 가죽 제품으로 큰 성공을 거둔 세린느는 기존의 제품에서 보여주었던 좋은 품질과 높은 품격을 의류에도 적용시키고자 1967년 꾸뛰르 디자인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2년 만에 레디 투 웨어(Ready to wear) 컬렉션을 출시하여 첫 브랜드 중 하나가 되었다.
세린느의 의류업계 진출은 곧 큰 성공으로 이어졌으며, 세린느 기성복은 그 시작부터 오늘날까지 활동적인 여성을 위해 고급스러운 소재를 사용하여 입기 쉬운 의상을 만드는 일관된 철학을 가지고 디자인돼 왔다.
그리고, 1971년에는 파리 에뜨왈 광장의 개선문을 둘러싸고 있는 체인 장식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블라종' 로고가 프린트된 '에뜨왈' 블라우스가 출시되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고 이어 1975년에는 세린느의 백 및 액세서리 컬렉션인 '블라종' 라인이 탄생했다. 아르 누보적 성향이 짙은 블라종 장식 무늬는 그 후 단순한 세린느 로고의 차원을 넘어 전통과 우아함, 그리고 프랑스 디자인 노하우의 상징이 되었으며, 의류브랜드의 성공으로 파리에서 프랑스 전역까지 그 영역을 넓힌 셀린느는 세계 시장으로 진출을 꾀하였다.
특히 아시아 시장에서의 성공은 주목할 만한 것으로 1984년까지 28개의 매장이 일본에서 오픈하고 동남아시아 까지 시장을 확대하였으며 그 결과로 1985년에는 아시아 지역의 매출이 셀린느의 전세계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렇게 아시아에서의 매출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그 인지도가 다소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셀린느의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동용 신발 매장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죽 제품 브랜드가 되기까지는 좋은 품질과 우아하고 모던한 디자인, 그리고 고객에 대한 성실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에르메스  HERMES

예술로 불리우는 에르메스의 정신은 150년간 6대에 걸쳐 변함없이 전과정을 수작업으로만 하는 완벽한 장인정신에서 비롯된다. 원래 프랑스에서 마구를 만드는 메이커로 출발, 1837년 마구상이었던 티에리 에르메스는 훗날 자신의 성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에르메스는 말의 장식품을 제작했고 1879년에는 마구도 제작했다. 자동차가 출현하자 에르메스는 피혁제품과 여행용 가방, 그리고 일반 가방과 핸드백류로 사업의 방향을 전환했고 뛰어난 기술의 장인들이 마구를 꿰매던 기술을 새로운 분야에 적용, 최고의 품질을 보장받았다. 창립 후 5대를 이어오면서 12개의 계열사로 이루어진 에르메스가 오늘날까지 지속적인 확장과 발전을 해올 수 있었던 까닭은 명쾌한 스타일과 단순성, 품질의 우수성 때문이었다.

에르메스의 모든 상품은 파리에서만 생산 일체의 라이센스가 없으며 스카프는 리옹에서 가죽제품은 뽕당에서 생산한다. 에르메스에서 장인정신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가죽제품은 특히 제품 한 개당 한사람의 장인정신에 의해 전 작업과정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모든 가방에는 이를 만든 장인에게 가방의 수리를 직접 요청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에르메스의 가방을 대를 물려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파리의 직업학교에서는 에르메스의 가죽 마스터가 평생의 꿈으로 학생들이 벽에 에르메스의 로고를 붙여놓고 공부할 정도로 유명하다.

에르메스의 백중 유명한 것은 역시 켈리백이다. 이 백은 모나코의 그레이스 켈리가 캐롤라인 공주를 임신했을 때 배를 가리기 위해 가장 큰 사이즈의 켈리 백을 든 사진이 공개되면서부터 폭박적인 인기를 끌었다. 켈리백은 아직도 전세계적으로 미리 예약을 하고 제품을 기다려 할 만큼 큰 인기를 끌고 있으며 늘 공급이 부족한 아이템이다.

이밖에 H자 마크로 유명한 콘스탄스 백, 세계 최초로 지퍼를 단 백인 볼리드 백 등도 인기가 높다. 가죽제품에는 핸드백, 가방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다이어리, 가죽상자, 말안장 등이 포함된다. 에르메스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품목으로는 스카프가 있다. 매년 주제에 맞춰 12가지의 디자인을 선보이는 스카프는 생생한 디자인과 화려한 색감으로 미국 워싱턴박물관에 소장될 정도로 유명하다.  


셀린의 상징인 블라종 로고처럼 우연한 기회에 브랜드의 상징을 만나게 되는 행운도 있다. 1973년 셀린 비피아나 여사는 파리 개선문 앞의 에트알 광장에서 우연히 자동차 사고를 겪는다. 그때 우연히 개선문을 둘러싼 쇠사슬을 보았고, 묘한 매력을 느낀 쇠사슬 가운데 패턴에서 블라종 로고는 탄생되었다. 그러나 블라종 로고가 애초부터 셀린의 상징은 아니었다. 셀린 하우스의 원래 심벌은 지난해, 셀린 탄생 60주년을 맞아 재탄생된 아메리칸 슐키였다. 말을 끄는 마차가 아로새겨진 이 로고는 1966년 승마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남편 비피아나에 의해 고안되었다고.

이처럼 행운의 여신이 브랜드 로고를 점지해준 또 다른 케이스는 바로 에르메스의 샨당크르 로고이다. 배에 연결된 닻을 상징하는 이 로고는 1938년 당시 회장이었던 로베르 뒤마가 부둣가를 산책하던 중 우연히 발견했고, 그는 이 닻 모양을 에르메스가 ‘여행’을 상징하는 브랜드가 되도록 이바지하는 데 사용했다. 브랜드 정체성이 가장 확실한 브랜드 중 하나인 에르메스는 의외로 로고만큼은 매우 유동적으로 사용한다. 에르메스를 대표하는 로고는 에르메스의 주황색 박스를 실은 사륜마차를 끄는 말이 새겨진 ‘칼레쉬 로고’와 에르메스 첫 글자인 H를 일컫는 ‘아쉬 로고’이다.

칼레쉬 로고에는 마부가 없는 ‘뒤끄’라는 이름의 사륜마차가 새겨져 있는데, 빈 마부석은 고삐를 조절할 고객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칼레쉬 로고는 상품에 생명을 부여하는 진정한 주인이 바로 고객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에르메스는 포장을 하는 리본에서 비롯되어 브랜드의 심벌로 자리 잡은 볼딕 리본, 베이비 라인에 독자적인 로고로 사용되는 목마까지 제품의 라인과 이미지에 따라 다양한 심벌과 로고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어떠한가? 단순한 로고에 숨겨진 이 복잡다단한 뒷얘기가? 물론, 베스트셀러처럼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단순한 로고만 보았을 때보다 덜 지루하지 않은가? 베스트셀러의 근간이 되는 실존 인물의 탄생 설화처럼, 이 로고들은 브랜드의 히트 아이템을 제작하는 밑거름이 되어왔다. 단순한 듯 보이지만 가장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를 지닌 것은? 가장 단순하지만 시공을 초월하는 단단한 내공을 지닌 것은? 이 알쏭달쏭한 패션 퀴즈의 정답은 바로 ‘로고’인 것이다.

 

 

출처-www.wkorea.com  와 인터넷정보를 발췌하여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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