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제목: 타자의 죽음, 주체의 탄생
본문: 마가복음 15, 33~41
33 낮 열두 시가 되었을 때에,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34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그것은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뜻이다.
35 거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몇이, 이 말을 듣고서 말하기를 "보시오, 그가 엘리야를 부르고 있소" 하였다.
36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신 포도주에 푹 적셔서 갈대에 꿰어, 그에게 마시게 하며 말하기를 "어디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두고 봅시다" 하였다.
37 예수께서는 큰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지셨다.
38 (그 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39 예수를 마주 보고 서 있는 백부장이, 예수께서 이와 같이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서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하고 말하였다.
40 여자들도 멀찍이서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도 있고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도 있고 살로메도 있었다.
41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예수를 따라다니며 섬기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들이 많이 있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최후를 맞으시는 장면은 사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이 원형이다. 즉 초대교회에서 전해지던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가장 가까운 형태라는 것이다 마태는 이 장면을 중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마가의 원형에 몇 가지 내용을 덧붙였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던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는 내용이 그 중 하나이다.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이 장면은 괄호 처져 있는데, 그 이유는 마가복음 사본에 따라 어떤 사본에는 이 내용이 들어가고 또 다른 사본에는 없기 때문이다. 즉 후대에 마가복음을 베껴 쓰는 과정에서 마태의 이 본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서기가 이를 마가복음에 추가한 사본이 있는 것이다.
마태가 이 장면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는 그가 마가복음에 추가한 내용을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27:51절 이하에서 이미 언급한 성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어 다음과 같은 내용이 53절까지 이어진다. 마태 27:51~53절을 읽어보자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의 몸이 살아났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에,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나타났다."
마태는 예수의 죽음이 종말론적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최후의 심판을 예고한다. 사도신경이 고백하고 있듯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종말론적 믿음은 이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죽음으로 확증된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죽어간 한 사람, 존경과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젊은 지도자의 십자가상에서의 비참한 죽음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기 비움(kenosis),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궁극적인 사랑의 행위로 믿는다.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 비합리적인 이해는 역설적으로 우리들이 이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하는 하나님의 과도한 사랑에 대한 과도한 사랑의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합리적인 눈으로 대상을 본다면 그 대상을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항상 과잉이다. “합리적인 사랑”이라는 말은 형용모순이다. 오늘날 젊은 남녀들 사이의 합리적인 결합을 중매하는 소위 결혼 사업체들이 성행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세상의 신음일 뿐이다. 그래서 사랑은 사건이다. 이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과도한 리비도 투자는 인간에게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사건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인간의 정체를 휘저어놓는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달라진다. 사랑은 변화에 빨려 들어가는 모험이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쓰러질 수도 있으며 반대로 한 인간의 잠재력이 용량을 초과해서 발휘될 수도 있다. 사랑을 견뎌낸다면 말이다.
오늘은 ‘가상칠언(架上七言)’ 중 가장 결정적인 발언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에 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보자. ‘가상칠언’이란 십자가의 일곱 말씀이란 뜻이다. 네 복음서에 나오는 십자가상의 발언을 모두 합치면 일곱 마디 말씀이 된다. 이 ‘가상칠언’에 대한 가장 멍청한 해석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 말씀을 모두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멜 길슨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가 곧이곧대로 이 멍청함을 시전하고 있다. 이 지루하고 가학적인 영화에서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 일곱 마디 말씀을 모두 하는데, 그 결과는 참혹할 지경이다. 예수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마치 술 취한 아저씨처럼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있다.
‘가상칠언’에 대한 적절한 접근은 일곱 마디 말씀이 각각 십자가의 죽음에 접근하는 상이한 차원의 길을 열어준다고 보는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일곱 개의 시선이라고나 할까? 또한 일곱 마디 말씀 중 어떤 말씀을 주인 기표로 삼아 나머지를 읽을까에 따라 십자가의 깊은 의미가 각각 다른 차원에서 열린다고 할까? 나는 그중에서도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다니?”에 집중하고 싶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지난 성경공부 시간에 잠시 논의했던 “신의 침묵”이라는 절망의 상황을 지시한다. 모든 죽음은 비록 그것이 치명적인 질병에 의한 것일지라도, 혹은 극악무도한 범죄에 내려진 사형선고, 그도 아니면 노화에 따르는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인간에게는 항상 낯선 것이며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죄 없는 자의 고통과 죽음이 가져오는 트라우마는 어떨 것인가? 그것은 더더욱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구원자, 메시아의 죽음, 나아가 신의 죽음이라니?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는 이 절규가 정오에서 세시까지의 어둠, 아마도 일식인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발해졌다는 점에서 신의 일식, 세상에 빛을 비추는 존재의 죽음을 암시한다. 죄 없는 자가, 아니 오히려 세상의 죄를 구원할 존재가 죽어가는데, 이 비극적인 절망을 중지시키고 극적 반전을 통해서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를 구출하고 그야 말로 죽어서는 안되는 존재, 하나님의 독생자라고 우렁우렁 선포해야 할 존재는 어디 있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부재, 곧 타자의 부재 혹은 죽음이다. 이 타자, 대타자라고 하면 좀 더 의미가 분명해질 그는 우리가 그의 존재를 철석같이 믿는 그런 존재다. 대타자는 우리가 사는 현실을 최후의 차원에서 지켜주는 그런 존재다.
코미디언 김준현을 최고의 스타로 만든 <개그콘서트>의 ‘비상대책위원회’라는 코너가 있었다. 이 짧은 소극은 항상 폭탄 테러 위협이 발생해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열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두 명의 고위 관료가 나오는데 하나는 경찰이고 김준현이 연기하는 또 한 사람은 군 장성이다. 경찰 관료는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엉뚱한 말만 늘어놓는다. 이때 군 고위 관료로 분장한 김준현이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라는 호통을 치며 개입한다.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해결할 대타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는 고압적인 표정으로 대책을 말하지만, 사태를 브리핑하는 명민한 실무자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깍아 내린다. 그 순간 김준현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고뤠?”라며 자신의 무기력을 비굴하게 인정한다. 결국 자포자기하듯 중얼거린다. “안 되겠다. 사람 불러야 되겠다.” 이 소극은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될 끔찍한 사건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를 끌고 들어와 웃음이라는 방어 기제를 자극하는 전략을 활용한다. 관객들의 폭소는 사회의 안전을 책임질 사람들이 전혀 무능하다는 사실, 나아가 이들의 무능이 드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그 “사람”, “안 되겠다. 사람 불러야 되겠다”라고 할 때의 그 사람 역시 부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무의식적 공포가 유발한 방어 행동이다.
세계의 창조자로서 모든 피조물에 대한 주권을 가진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이자 그 자신의 현현인 그리스도,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할 하나님의 메시아가 피조물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매달리게 두어서는 안 되었다. 아니 설사 매달릴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위력을 보여주는 극적 장치여야 했다. 그렇게 그냥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되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어떤 반전도 없이 살해당하고 만다.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대체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곤 한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다니?”는 그 최후의 보루, 극적 반전을 이룰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규이자 선언이다.
벌써 9주년이지만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겪은 일도 그런 일이 아닌가? 500명 가까운 사람들을 태웠었다는 배가 바다 한가운데 뒤집혀 있는 장면은 도저히 현실적일 수 없었다. 우리 모두는 눈을 의심했지만 그것이 현실임을 인정한 이후에도 뭔가 대책이 있어 승객들을 구조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이 거대한 물체가 대개는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던 304명의 승객을 끌어안고 바닷속으로 잠겨버렸을 때에도 우리는 대부분 구조될 것이라고 믿었다. 믿고 싶었다. 믿어야만 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을 현실로 유지해줄 그런 존재, 바로 대타자가 존재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 사회 공동체 전체가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바로 세월호와 함께 그것을 바라보는 현실 자체가 바닷속으로 침몰했기 때문이다. 이 충격은 결코 의식적인 차원에서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더 큰 진동을 일으켰을 것인데, 이 사건에서 우리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는 존재, 즉 대타자의 부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이 바로 트라우마이다.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허구일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바로 이 타자의 부재라는 경험이 모든 인간 정신의 근저에 깔려 있다. 이미 의식은 잊었지만 시간을 모르는 무의식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트라우마의 경험,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지만, 그래서 현실이 무너져 내리고 있지만, 이를 수습하여 현실을 있는 그대로 회복시켜 줄 대타자의 부재. 그것은 모든 유아들이 겪기 마련인 어머니의 부재라는 끔찍한 경험이다. 라깡은 11번째 세미나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그 트라우마의 결과를 알려준다.
“저 역시, 어떤 아이가 칭얼거리면서 일찍부터 저를 부르는데도 제가 몇 달 동안이나 자리를 뜨는 일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트라우마를 입은 것을 제 눈으로 — 엄마들의 예지력에 눈을 떴다고나 할까요? — 직접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제가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아이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는데, 이 잠이야말로 트라우마가 생긴 그날 이후로 아이가 살아 있는 시니피앙이 된 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지요(101~2).”
생명을 담보하는 아버지, 즉 대타자의 부재라는 경험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지된다. 사물의 죽음으로서의 시니피앙으로 화한 아버지. 아이는 이제 살아있는 아버지를 잠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잠은 아이의 환상 스크린이다. 살아있는 아버지는 이 스크린 너머에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된다. 아이는 현실에 눈 감고 잠에 빠져야만 살아있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은 환상인가? 한편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예수의 절규와 함께 찢어진 장막 뒤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입각한다는 점에서 환상의 통과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환상 통과 이후의 하나님을 만난다.
현실에서는 부재가 선언되었지만 그리스도인의 현존과 함께 살아있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령이다. 성령은 예수 공동체의 사랑의 능력으로 현존한다. 사랑할 수 없는 인간이 사랑하고 있다면 거기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이자 예수의 영이 현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서 완성되는 것입니다(4:12).”
십자가의 절규, 하나님 부재 선언은 단순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빼내는 무신론이 아니다. 십자가의 무신론은 인간이 제멋대로 이용해 먹는 하나님, 우상으로 전락한 신의 부재 선언이다. 진정한 하나님은 그가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보여준 것처럼 오로지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는 능력으로서만 그 생생한 현존을 드러낼 것이다. 예수는 생물학적으로 부활한 게 아니다. 누가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났다면 그저 신기한 일일 뿐이다. 이 소식은 해외 토픽 감으로 무료한 일상을 죽이는 잡담거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 기쁜 소식은 인간이 초자아의 횡포에서 해방되어 기꺼운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차원이 열렸다는 것이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사랑의 사건으로 나타나는 부활은 우리가 다른 삶,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든든한 근거다. 슬라보예 지젝이 성령을 “상징적 실재”라는 개념으로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성령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개시한다.
첫댓글 타자의 죽음, 주체의 탄생에 대해 다시 복습하며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