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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의 삶과 노래 2006/09/22 22:00 굴렁쇠(rufdml)
(* 빅토르 하라의 영상자료를 수집했더니 모두 7개였다. 공연 모습과 사진을 모아 한 개의 영상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민주화를 열망하던 칠레의 군중과 함께 했던 하라와 1973년 9월 11일 아옌데 대통령궁이 폭격당하는 당시 화면, 군부 탄압 장면이 눈에 잡혀 같이 편집했다. 이 영상에는 그의 대표곡인 Te recuerdo Amanda(아만다, 너를 기억해)와 Canto Libre(자유의 노래)를 앞뒤로 나누어 담았다. 재생시간 8분 53초.)
내 기타는 돈 많은 자들의 기타도 아니고
그것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지
내 노래는 저 별에 닿는 발판이 되고 싶어
의미를 지닌 노래는 고동치는 핏줄 속에 흐르지
내 노래에는 덧없는 칭찬이나
국제적인 명성이 필요 없어
- 빅토르 하라의 노래 '선언' 부분
빅토르 하라는 라틴 아메리카 노래 운동의 상징인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 운동'을 하다가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처형된 칠레의 대표적인 민중가수다. 1932년 산티아고의 변두리 로꾸엔이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칠레 민중의 삶과 애환을 노래와 연극으로 보듬어준 문화전사였다.
그는 한 때 산티아고대학에서 연기와 연출을 공부한 전공을 살려 칠레에서 뿐만 아니라 남미와 유럽을 순회하며 연극활동에 심취하기도 했다. 토속민 혈통을 이어받은 어머니로부터 칠레 구전 민요를 들으며 자란 그는 일찌감치 시와 노래와 연극을 사랑하던 청년이었다. 스무살이 되던 해에는 사라져가는 칠레의 전통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면서 포클로레(Forklore, 안데스의 민속음악)의 뿌리찾기에 열정을 보였다.
하라의 민요 채보 여행은 라틴 아메리카 민중의 전통과 고난에 찬 생활상을 직접 보고 느끼면서 현실의 모순에 눈을 뜨게 했다. 그런 그에게 누에바 깐시온의 선구자 비올레따 빠라(Violeta Parra)와의 만남은 그의 열정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안데스 민속음악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집단 작업을 통해 진보적 문화계의 중심에 서게 된 하라는 민중저항노래로 커다란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하라가 칠레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1966년 첫 솔로음반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래와 연극으로 파시스트와 보수우익에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어 선거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빅토르 하라는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이끄는 인민연합의 승리를 위해 민중벽화운동, 민중발레단, 노래운동 등 다양한 방면의 민중문화 운동 세력을 모아 나갔다. '벤세레모스'는 하라가 쓴 시로 만든 첫 번째 선거운동극이었다. 대통령 후보인 아옌데를 지지하는 콘서트를 개최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그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1970년 9월 4일의 선거혁명. 대선에서 민중연합 후보로 나선 살바도르 아옌데가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승리했다. 칠레의 봄이었다.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는 봄의 주역 중 하나였다. 하라는 1971년말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순회하며 칠레 민중들의 삶의 역사와 고난의 역사를 노래했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누에바 깐시온의 구호처럼 하라의 노래는 파시스트의 폭력에 저항하는 무기가 됐다.
아옌데가 이끄는 사회당 정부는 미국의 시장 교란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칠레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73년 3월 의회선거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은 과반수가 넘는 지지를 확보했다. 아옌데의 개혁은 추진력을 얻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개혁에 앞서 국민들로부터 재신임을 묻는 투표를 실시하려고 했던 날 쿠데타가 발생했다. 9월 11일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Ugarte)가 군부를 장악하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산티아고의 봄은 짧았다. 1844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1932년 이후로 여러 차례의 쿠데타로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불황에 시달려 왔던 칠레.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최초로 민주주의 선거에 의해 역사적인 사회주의 정권을 탄생시켰던 그 칠레가 붕괴되고 말았다.
쿠데타 당일 3군총사령관 피노체트는 2대의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당시 상황을 그린 영화 제목 '산티아고에 비는 내린다'는 쿠데타군의 작전 암호였다. 쿠데타 당시 아옌데 대통령은 18명의 지지자들과 쿠데타군에 맞서 항전하다 최후를 마쳤다. 사망 직전 아옌데 대통령의 마지막 방송연설은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 이 암울하고 쓰라린 순간을 극복해내리라 믿습니다. 머지않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해 위대한 길을 열 것이라고 여러분과 함께 믿습니다."
쿠데타 일주일 동안 아옌데 대통령을 포함해 3만여명의 칠레 민중이 학살됐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 최고의 경찰국가답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미국 CIA는 칠레 비밀경찰과 손잡고 양심적 지식인들을 암살하기까지 했다. 쿠데타 이후 아옌데 정권에 협력했거나 인민연합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 국외 강제추방, 구금, 고문, 사형집행 등 가혹한 탄압이 자행됐다. 누에바 깐시온 운동에 참여한 음악인들도 대부분 추방되거나 행방불명됐다.
(피노체트 집권 기간동안 사망자 3천여명, 실종 1천여명, 고문 불구자 10만명, 국외추방 100만명에 이른다. '17년 피의 독재' 피노체트 군사정권은 이렇게 서막을 알리며 칠레 역사를 거꾸로 돌려 놓았다.)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로 아옌데가 칠레의 모데나 대통령궁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던 바로 그 때 처형됐다. 쿠데타군에 의해 에스타디오(Estadio)스타디움에서 아옌데의 지지자들과 함께 기관총에 난사당해 사망했다. 그의 무기인 기타를 치던 손목은 부러져 있었다. 칠레 인민연합 3년과 함께 했던 그의 노래운동은 끝이 났다.
9월 14일과 15일 집단 처형을 당하기 직전까지도 빅토르 하라는 민중연합 찬가 '벤세레모스'(단결하라)를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빅토르 하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고통받는 칠레 민중을 위해 노래불렀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칠레 민중의 가슴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아만다, 너를 기억해'는 하라의 대표곡이다. 서정성과 사회적 메시지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노래다. 절절한 혁명의 노래, 순수한 열망으로 노래하는 혁명가, 아름다운 그의 노래를 가슴으로 듣는다. /굴렁쇠
<빅토르 하라의 주요 노래>
빅토르 하라의 주요 노래로 그의의 진보적이고 정치적 이념성향을 담고 있는 La plegaria a un labrador(농부의 기도), 고향 로꾸엔을 노래하며 칠레 민중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는 El lazo(올가미), 칠레 민중의 훌륭한 재능을 담요짜는 여성의 모습을 통해 노래한 Angelita Huenuman(앙헬리따 우에누만), 마약으로 사망한 한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칠레에 침투하는 천민자본주의의 침략을 고발하고 무분별하고 방만한 소비주의를 경계한 Quien mato a Carmencita?(누가 카르멘시타를 죽였나?), 어머니와 딸의 이름인 아만다를 소재로 노동자의 삶을 표현한 Te recuerdo Amanda(아만다, 너를 기억해), 경찰의 폭력으로 사망한 인민연합의 친구이자 당원이었던 로베르또 아우마다를 기리는 Cuando voy al trabajo(일하러 가는 길), 정권과 자본을 풍자하는 Menifesto(성명서), 자유를 염원하는 Canto Libre(자유의 노래)가 있다.
<노랫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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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크랩합니다~~ 건제님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첫 앨범을 소리미 님이 미리 제 것까지 사 놓으셨더군요..2월에 나가면 실컷 듣겠습니다..
어느날 남미 음악을 접하게 되고, 칠레의 누에바 깐시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기타 하나로 정치,경제, 그리고의 그들의 어려운 삶들을 희망을 실어서
노래를 하는것을 봤습니다.. 다시 보니 가슴이 짠 하면서 뭉클합니다.
아-우리에게도 그런 정도의 무게와 신념을 가진 뮤지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