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사진
최향란
한 문예지에 실린 내 글의 약력 난에 있는 인물 사진을 보고 주위사람들이 실물하고 다르다고 했다. 순전히 내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실물보다 좀 못하다는 소리로 들렸다. 사진을 좀 자세히 보게 되었다. 사진 속에서 나는 영락없는 중년 아줌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성들인 화장에도 불구하고 더도 덜도 아닌 딱 내 나이만큼 보였다. 잔뜩 굳은 표정은 하다못해 영화 ‘25시’의 주인공 안소니 퀸이 마지막 장면에서 사진을 찍을 때 지었던 그 애매한 미소 한 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왕이면 살 짝 미소를 띤 모습이 좋지 않겠냐며 누군가가 다시 찍으라고 권해왔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퇴근길에 한 사진관에 들렀다.
친절한 사진사의 안내에 따라 카메라 앞에 앉는데 거대한 문명의 기기 앞에 벌써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상.하악근을 몇 번 움직여 긴장을 풀어 주는데도 금방까지 내 맘대로 되던 안면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내 얼굴에 붙은 살 갗 하나마저도 내 뜻대로 안되니 세상살이가 녹녹할 리 없는 건 당연한 이치 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눈에 힘이 들어가 치켜떴는지 사진사가 앵글의 아래쪽을 봐 달라고 주문을 해온다. 결국 이를 앙다물고 앵글을 노려보다가 의자에서 내려오고 말았다. 한번만 다시 찍어 보자고 말해보고 싶었지만 그런 배짱은 지니지도 못하고 사는지라 그냥 참는다.
사진사는 컴퓨터 앞에서 내 사진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니 몇 올 쭈뼛대던 머리카락이 정돈이 되고 잡티와 주름도 없어져 버린다. 왼쪽 눈썹 밑에 눈에 뛸만한 점 하나가 있는데 그것마저 사라져 버린다. 평소 어떤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복점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는데 저것을 순식간에 지워 버렸으니 저 사진을 쓰는 동안에는 복이 좀 덜 들어오겠다 싶어진다. 이리저리 마우스를 움직여 나를 기생같이 만들어 놓은 사진사가 내 얼굴 왼쪽과 오른쪽이 대칭이 잘 안되어 있는지라 손 좀 봤다고 한다. 비대칭이라,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오래전 한 때 내 취미는 좀 우습게도 증명사진을 찍는 것 이었다. 퇴근하는 내 뒷모습이 참 을씨년스럽더라고 사람들이 무심코 말 해 올 정도로 삶이 고달플 때였다. 그날, 찬 겨울날이었을 것이다. 거리를 한참동안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사진관을 지나치게 되었을 때 나는 퍼뜩 의자를 떠 올렸지 싶다. 검은 커튼 안쪽에서 심심한 의자 한 개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삶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지친 다리를 쉬게 해 줄 것만 같았다. 하여튼 마력에 끌리듯 사진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 곳의 의자에 앉아서 할일이란 사진을 찍는 거 밖에 달리 뭐가 있겠는가. 점잖게 차 한 잔을 청해 마시고 앉았다 나올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날 이후 나는 고단할 때마다 사진관 의자에 앉아서 증명사진을 찍었고 찍을 때 마다 조금씩 늙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른쪽 턱 부분에 왼쪽 턱에 없는 도톰한 근육질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서 자세히 보면 사진속의 내 모습은 약간 비뚤어져 보였다. 아는 의사에게 물어보니 완전한 대칭이 되는 얼굴은 잘 없노라고 했다. 자세히 보면 누구나 오른쪽과 왼쪽이 조금은 다르니 개의치 말라고 했다. 사진관 아저씨 말로는 오른쪽으로만 음식을 씹어서 그런 것이니 앞으로는 왼쪽으로도 씹어 주란다. “정상적인 얼굴로 돌아오려면 일이년은 족히 걸릴걸요.” 했다. 그때부터 희한하게도 나는 사진 찍기를 그만 두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그렇게 사진을 찍었던 이유가 비대칭의 얼굴이 어딘지 이상하고 마음에 안 들어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귀퉁이가 딱 맞아 떨어지는 얼굴의 구도를 가진 사진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비대칭인 내 삶을 닮은 듯 한 사진속의 얼굴이 못마땅했을 것이다. 내 삶도 아귀가 척척 맞아서 두 번 입 다실 일이 없을 정도로 대칭이 잘 이루어지길 바랐을 것이다. 누군가 내 삶의 각도를 조금만 기울게 해도 견디질 못하는 때였다. 한 치의 오차에도 민감했던 반응이 사진에 까지 적용이 되었다는 사실이 머쓱했다.
오래된 증명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하나같이 굳은 결의에 찬 표정을 하고 있다. 누군가 에게 내 자신을 증명하는 일이 방어의 또 다른 면이라 생각했을까. 네 귀퉁이가 깔깔하고 반으로 접으면 완벽한 대칭이 되는 증명사진은 지난날의 내 삶의 지향을 말해주는 듯 하다. 논리학자 괴델은 ‘수(數)라는 투명하고 확실한 영역조차,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고 하면서 세상일이란, 증명보다 복잡하며 기승전결이나 육하원칙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명과 논리로 밝혔다. 진리가 증명보다 큰 것임을 주장했던 것이다. 나는 사진속의 비대칭인 얼굴은 예민하게 감지하면서도 그 뒤의 여백이 주는 여유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던 걸까.
자신을 오래 들여다보는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일 것이다. 타인을 오래도록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누군가가 자신을 유심히 봐 줄 것처럼 신경을 곤두세운다. 타인에게 반듯하게 보이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자신을 어떤 틀 속에 가두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에 자신의 삶도 비로소 껴안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 할 때 남도 나를 사랑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을씨년스러웠던 내 뒷모습을 어루만져 본다.
늙어가는 여인들은 사진 찍기가 싫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평소 느낄 수 없었던 나이를 정직한 거울처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진속의 내 모습은 주름하나 없는 중년이 되어 알쏭달쏭 해 보인다. 능숙한 컴퓨터 처리로 내 얼굴은 한 겹 베일을 쓴 듯 모호해 보인다. 비대칭이면 어떻고 늙어 보이면 어떻냐고, 그저 웃는 사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늘 완벽을 고집하는 내게 어떤 이는 더러 실수도 해봐야 타인의 실수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좀 뭉툭한 것, 둥그스름한 것, 적당히 비껴나고 어긋나 있음에의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일까.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내 사진을 바라보고 있자니 비로소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