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울산-책을 즐겨 읽는 사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역사 & 철학 & 종교 스크랩 동학운동(東學運動)
도 리 추천 0 조회 31 09.07.23 22: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학운동(東學運動)

 

  1894년에 있었던 일명 2차 동학운동. 전라 고부군수 조병갑은 빈농에게 면세한다며 황무지 경작을 권하고 나서 가을이 되면 도조(賭租)를 받고 부농(富農)은 죄명을 씌워 재산 약탈을 일삼으면서, 농민을 징용하고 수세(水稅)라 하여 7백 석을 강징, 1893년 농민 대표가 탄원을 했으나 불응하였다. 이에 동학 접주(接主) 녹두장군 전봉준은 1894년 2월 15일 만석보 기슭으로 천여 명의 농민, 동학교도들을 집결, 진격하였다. 조정은 이용태(李容泰)에게 체포령을 내려 탄압하였으나 분노가 터져 인접한 태인(泰仁), 정읍(井邑), 부안(扶安) 등에까지 파급되었다. 5월 4일 태인이 함락되고 5월 8일에는 부안이 점령되었으며 20일에는 함평에 진격하였다.

  정부에서는 원세개에게 청원, 정여창이 인천에 상륙하였으며 일본도 6월 9일 7천명이 인천을 통해 입항하였다. 이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동학운동은 민족 고유의 신앙을 토대로 한 민중의 종교로서의 독립정신이었으며, 양반과 지배계급에 대한 사회혁명이요 제국주의 외세에 대한 호국구민의 민족운동이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신앙과 행동이 3ㆍ1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 등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이 운동은 처음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통하여 정치운동으로 성장하고 뒤에 민란과 결합하여 동학농민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황현이 ‘동학이 난민과 합쳐졌다.’라고 표현한 것은 이 경우를 가리킨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에 있어서 동학은 농민의 요구를 횡적으로 연결시킨 조직적 매개체 역할, 또는 단순한 종교적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사상적 계기 또는 농민운동의 지도원리로서의 동학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데서 나온 학설에 지나지 않다. 동학은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내면적 구제에서 구하려고 하는 종교적 성격과, 국가의 보위와 농민 구제 활동을 철저화하려는 정치운동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면서 역사적으로 전개시켜 나간 것이다.

 

【배경】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군에서 일어난 민란에서 비롯되었다. 전라도는 물산이 풍부한 곡창지대로 국가재정도 이 지역에서 크게 의존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전시대에 걸쳐 수탈의 대상이 되어 농민들은 항상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고 있었다.

1894년 2월 10일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지나친 가렴주구에 항거하는 광범한 농민층의 분노가 폭발하여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의 직접적인 불씨가 된 것은 만석보이 개수 문제에 따르는 수세징수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892년말 고부군수로 부임해온 조병갑은 탐관오리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기회 있는 대로 갖가지 명목으로 수탈을 자행하였는데 농민에게 면세를 약속하고 황무지 개간을 허가하여주고도 추수기에 강제로 수세하고 부민을 체포하여 불효. 불목. 음행. 잡기 등의 죄명을 씌워 그들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은 것만도 2만여 냥에 달하였으며, 자기 아버지의 공덕비를 세운다고 강제로 거둔 돈이 1000여냥이나 되었고, 대동미를 정미로 받는 대신 돈으로 거두고 그것으로 질이 나쁜 쌀을 사서 상납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기도 하였다.

1893년 12월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보내는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봉기를 맹약함과 동시에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할 것.

(2) 군기창과 화약을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유하여 인민을 침어한 탐리를 격징할 것.

(4)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직향할 것

등의 4개항을 결의하였다.

이듬해인 1894년 2월 10일 전봉준은 김도삼ㆍ정익서ㆍ최경선 등과 함께 봉기하여 고부군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거부군수 조병갑은 간신히 난을 피해 전주에 이르러 전라감사 김문현에게 보고하고 다시 그는 정부에 알리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조병갑의 죄상을 알게되자 그를 체포하여 파면하고 새로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처리를 동학교도 탄압의 기회로 삼아 온갖 악행을 자행하여 그들의 격분을 샀다.

 

【동학농민군의 봉기】

 

  1894년 4월 전봉준은 동학 접주들과 함께 무장현에 모여 민간에 포고하여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였다. 이 창의문에서 과감히 봉기할 것을 요청하자 근방의 10여 읍에서 이에 호응하였고, 10여일 만에 1만여 명이 동원되었다. 동학교도와 농민과의 결합은 이때부터 비롯되었고, 전봉준은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봉기의 앞장에 서게 되었다. 전봉준은 창의의 뜻을 천명하는 4개의 행동강령인,

  (1) 사람을 죽이거나 재물을 손상하지 말 것.

  (2)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히 할 것.

  (3) 일본오랑캐를 내쫓아 성도를 밝힐 것.

  (4) 군사를 거느리고 입경하여 권귀를 모두 죽일 것

등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창의의 뜻을 표하는 또 다른 격문을 작성하여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무장. 백산에서의 봉기는 외세와 집권층에 대한 도전이면 개혁운동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 농민군이 5월에 들어서면서 부안 관아를 점거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영장 이광양과 초군 이재섭 등에게 명하여 별초군 250명과 보부상으로 편성된 관군을 이끌고 부안 방면의 동학 농민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관군은 5월 10일에서 11일 새벽에 걸쳐 도교산에 근거를 둔 동학 농민군과 황토현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자 동학 농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으로 진격하여 이를 점거하였다.

 

【경군의 남하와 전주성 함락】

 

  전라감사 김문현의 보고에 의하여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알게 된 정부는 5월 6일 홍계훈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경군을 보내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현지로 출동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주에 입성한 경군은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어 도망자가 속출함으로써 병력이 반감되어 홍계훈은 정부에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부는 증원군을 보내주었다. 이 무렵 동학 농민군은 이미 영광일대를 점거하고 있었다.

  한편, 왕은 5월 23일 직접 전라도민에게 윤음을 내려 불법 지방관의 징계를 약속하고 실제로 민폐가 되는 것은 여론에 따라 시정할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위협에 못 이겨 가담한 사함은 아무 벌도 주지 않을 것을 약속하여 난도로 하여금 스스로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타이르는 선무책을 썼다. 전주성내에게 정세의 추이를 관망하던 홍계훈은 증원군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5월 22일 동학 농민군 추격 작전에 나서 전주를 출발하여 남진을 시작하였다. 증원군과 합류한 초토사의 경군은 동학 농민군을 추격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장성 남쪽인 황룡촌에서 접전을 벌였다. 처음에 경군의 별동대는 동학 농민군에 대하여 기습적인 포격을 가하여 사상자 수십 명을 내게 하였으나 즉시 반격을 받아 패주하고 말았다.

  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동학 농민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으며, 이 여세를 몰아 5월 28일에는 장성을 떠나 북상의 길에 오르고 5월 31일에는 드디어 전주성에 육박하기에 이르렀다. 황토현에게 패배한 뒤 전주는 거의 무방비 상태여서 전 감사 김문형과 판관 민영승은 성내에 남아 잇던 군졸과 민정을 동원하여 성문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동학 농민의 공격에 놀라 대항해 보지도 못하고 다투어 도망갔다. 전주에 무혈 입성한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성내를 지키면서 사태에 대비하였다.이 무렵 정부의 청국에 대한 구원 요청에 따라 청군이 출동하고 뒤이어 일본군도 출동해옴으로써 사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른 한편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 남접의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고 있을 무렵, 북접의 최시형은 처음 거사에 반대하고 순수한 종교운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중진들이 농민운동에 교단을 들어 참여할 것을 권고하게 되자 이를 받아들여 5월 6일에는 교주 최시형의 이름으로 각처의 동학접주에 통문이 띄워졌다.5월 10일 충청도 청상현 소사리에 집결한 동학교도의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고 그들은 곧 행동을 개시하였다. 그 동안 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공주. 청주 이남의 여러 지방은 거의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이 되었으나 5월 14일에는 공주와 진잠 사이에서 갑자기 해산하고 말았다. 그 까닭은 교주 최시형이 무력으로 봉기하는 것을 꺼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농민들의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봉건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 요구는 사태의 진전에 따라 보충되고 또한 수정되어 주장된 것이다.

 

【전주화약과 집강소의 설치】

 

  한편 초토사 홍계훈이 거느린 경군은 동학농민군의 뒤를 따라 6월 1일에는 전주성 밖에 이르러 서로 대치하는 상태로 들어갔다. 그 동안 6월 일과  6월 6일의 두 차례에 걸친 양군의 접전은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나와 선제 공격한 출격전이었는데, 이번에는 동학농민측에 큰 피해를 준 패전으로 그쳐 도리어 전의를 상실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초토사 홍계훈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학 농민군에 대한 선무 공작에 착수함으로써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간다. 그는 고종의 윤음과 자신의 효유문을 성내의 동학 농민군에게 전하고 탐관오리는 법으로 다스릴 것을 약속하면서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본업에 종사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에 전봉준은 원정서를 두 차례에 걸쳐 양호순변사 이원희에게 제시하였다. 동학 농민군이 두 차례에 걸친 패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전의를 상실한 아래서 전봉준은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는 강화안을 제시하였다. 여기에 초토사 홍계훈도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되고 동학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거한 지 10여일 만에 철수하고 모두 해사하여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전봉준은 20여명의 동지와 함께 전주와 인접해있는 순창. 남원에 남아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고 있었다. 관군도 동학 농민군이 해산한 지 며칠뒤 강화병 200명만 남겨 전주성을 지키게 하고 대부분은 철수하여 서울로 돌아갔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이 휩쓸고 지나간 전라도 일대에는 치안과 행정이 거의 마비상태에 있었고 어떻게든지 복구되어야 할 형편이었다. 양호순변사 이원희는 6월 22일에 효유문을 내려 민폐의 근절과 관리의 탐학을 엄금할 뜻을 밝히는 한편, 각자 면리에 집강을 두어 민간에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집강을 통해 영문에 호소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전라감사 김확진은 전봉준을 그의 감영으로 초치하여 치안의 복구와 관민의 화합에 대한 방책을 상의하였다. 동학교도의 협력이 없이는 지방 행정의 질서와 수령의 위신은 돌이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강소는 전라도 53주(읍)의 관아 안에 설치된 일종의 민정 기관이었다. 이 집강소의 설치로 동학교도가 각 읍의 집강이 되어 지방의 치안과 행정은 사실상 이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수령들은 형식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았고, 또한 서리들은 모두 동학에 입적을 해야만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집강소에서는 동학 농민군의 봉건제 개혁 요구였던 폐정 개혁도 추진하였는데 ,그 요강은 이때까지의 주장이 수정 정리된 12개 조목으로 되어 있다.

  이 조목은 널이 알려져 있는 것으로 일주 학자에 의하여 부정되고 있으나 동학농민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던 동학교도의 기록이며, 이보다 앞서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되었던 강령ㆍ격문ㆍ포고문ㆍ원정서 등의 내용과 크게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개혁안 제시를 간략이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탐관오리의 숙청, 동학 농민군의 참정권 요구, 양반 토호들의 탐학 배격, 토지 재분배의 요구, 노비 해방 등 반봉건적 개혁요구와 일본 세력의 배격 등 반침략적 요구 등 1884년 갑신정변 때의 개혁 정강보다도 혁신적인 주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칠반천인의 대우개선도 요구하며 노비해방과 함께 모든 천민의 해방을 추진하였다.

  한편, 집강소에서는 그들이 제시한 12개 조목의 개혁안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가 따랐다. 이미 관에서 작성된 문부를 그들 자신이 검열하여야 했고 농민들의 소장도 처리해야 했다. 동학교도들은 이미 전주성에서 철수하여 각자의 출신지로 돌아갔을 때 마을마다 포를 설치한다는 구호로 조직망을 침투시키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더욱 포교에 힘써 전라도에서는 청소년의 대부분이 동학에 입교하여 접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주변의 각 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쳐, 동으로는 경상도 일대, 북으로는 충청ㆍ강원도는 물론 경기ㆍ황해ㆍ평안도에까지 그 세력이 확대되었다.

 

【제2차 봉기】

 

  이보다 앞서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먼저 청국에 대한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거한 전후의 일이었다. 원세개를 통하여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에 전해지고 그는 즉각 파병을 명하여 섭지초로 하여금 6월 8일과 12일 사이에 아산만에 도착하게 하였다. 한편, 청국이 텐진 조약에 따라 조선 파병을 통고해오자 일본도 즉각 파병을 청국에 통고하는 동시에 일본 겨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서 12일 사이에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들어왔다. 이리하여 조선을 둘러싸고 청.일 양국 사이에 전운이 짙어져갔다. 국내정세의 급격한 변화는 전봉준으로 하여금 집강소에서 정세만 관망할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이 신정권을 세웠다는 소식은 그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켜,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시 봉기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공주에서 척왜를 부르짖으면서 기포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 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의 동학교도인 북접은 처음 종교적 입정을 고수하여 무력항쟁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남접의 전봉준 등을 가리켜 ‘국가의 역적이며 사문의 난적’이라고까지 극언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 접주들의 권유를 받은 오지영이 그 종정책에 나서 항일구국투쟁이라는 명분 앞에 남․북접을 화해시켜 공동 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손병희 지휘하의 1만여 명에 이르는 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청산에 집결하고, 곧 남ㆍ북접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의 북상 계획을 세웠다.

 

【공주 우금치 전투】

 

  한편, 남ㆍ북접의 동학 농민군이 논산에 집결하였다는 소식은 충청감사 박제순에 의해 정부에 보고되고, 곧 관군을 출동시키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11월 하순에 이르러 전봉준이 거느린 동학 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밖에 북접의 김복명이 거느린 동학 농민군 1부대가 목천 세성산에 포진하고 있었고 일본군이 남방 해상으로부터 상륙할 것에 대비하여 손화중 부대는 나주에. 기개남 부대는 전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동학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을 받아 처음으로 접전을 벌이게 된 것은 11월 27일 목천 세성산의 전투였는데 여기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김복명이 붙잡혀 죽고 사상자 수백명을 내고 패배하였다. 동학 농민군을 서전에서 참패시킨 일본군과 정부군은 공주로 진격하여 전자는 우금치에 후자는 이인과 효포에 진을 쳤다.

  전봉준은 공주성 공격을 결행하기 위하여 전주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과 광주지방의 손화중에게 통문을 보내 북상. 내원하도록 요청하였다. 11월 29일 이인 방면으로 진격한 동학 농민군의 주력부대는 정부군과 일본군을 물리쳤으나 이튿날 이두황이 거느리는 정부군의 반격을 받아 효포로 진격하려던 계획이 일단 저지당하고 양군은 공주를 앞에 두고 대치상태에 들어갔다.12월 11일 동학 농민군은 웅치 방면에 대한  총공격을 가하였으나 도리어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양군 사이에는 혈전이 벌어지고 끝내 많은 사상자를 내고 공주 남쪽 30이 지점의 경천점까지 물러나고 말았다. 동학 농민군이 여기서 전열을 가담고 김개남의 동학 농민군과 합세하여 다시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다. 정부군이 핀치와 이천에서 진을 치고 있었는데 동학 농민군이 판치 방면을 공격하자 정부군은 쫓겨 우금치레 있는 일본군 진영으로 후퇴하였다. 동학 농민군이 다시 우금치로 육박하자 이곳을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 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 혈전이었다. 그러나 6∼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 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노성.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남은 동학 농민군은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한편 김개남 부대도 정부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고 손병희가 이끈 부대도 패하여 모두 해산하고 말았다.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 농민군은 뒤에 항일 의병 항쟁의 중핵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ㆍ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고종 31) 전라도 고부군에서 시작된 동학계(東學系) 농민의 혁명운동. 그 규모와 이념적인 면에서 농민봉기로 보지 않고 정치개혁을 외친 하나의 혁명으로 간주하며, 또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外勢)에 항거하였으므로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역사적 배경】 조선 왕조의 봉건적 질서가 해이(解弛)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곧 농업ㆍ산업ㆍ수공업ㆍ신분제도 등 하부구조에서의 봉건적 구성의 붕괴가 바로 사회의식에 반영되어 실학(實學)의 발생과 평민의식의 대두를 보게 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실례로서 1811년(순조 11)에 있었던 홍경래의 난을 들 수 있으며, 그 후 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봉기를 시초로 삼남 각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에 대한 반항으로, 이미 이때부터 혁명 발생의 역사적 배경은 조성되고 있었다.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동학은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풍수사상과 유(儒)ㆍ불(佛)ㆍ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서학(西學: 기독교)에 대항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을 내걸고, 새로운 세계는 내세(來世)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하여, 당시 재야에 있던 양반계급은 물론 학정과 가난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교도들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궐기하여 혁명에 호소하자는 강경론이 대두되었고, 뒤에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하였다.

【제1차 농민운동】 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감행하여 조선을 일본의 시장화하는 한편, 조선에서 쌀을 반출해 감으로써 물가를 자극하여 농민들의 생활을 이중으로 억압하였고, 일본인 어부들의 횡포는 조선 어민의 생활을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 기선(汽船)이 조선 연안에서 무역에 종사함은 물론, 세미(歲米) 운송을 위한 기선의 도입으로 종래의 조군(漕軍)과 선상(船商)은 몰락하게 되었고, 그 위에 세미운송의 책임자인 전운사(轉運使)의 횡포 또한 막심하였다.

  이러한 절박한 사정 속에서 탐관오리의 횡포는 갈수록 가중되어 백성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무렵 고부군수로 조병갑(趙秉甲)이 부임하였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로부터 무리한 세미를 거두어 들이고, 백성들에게 무고한 죄명을 씌워 2만 냥이 넘는 돈을 수탈하는가 하면 부친의 송덕비각(頌德碑閣)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1,000여 냥을 농민들로부터 강제로 징수하였다. 또한 시급하지도 않은 만석신보(萬石新洑)를 축조한다고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쌓게 하고, 가을에 수세(水稅)를 받아 700여 섬을 착복하는 등 온갖 탐학을 다하였다.

  농민을 중심으로 한 고부군민은 학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동학의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있는 녹두장군(綠豆將軍) 전봉준을 선두로 마침내 울분을 터뜨렸다. 94년 1월 10일 새벽, 1,000여 명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몽둥이와 죽창을 들고, "전운사를 폐지하라, 균전사(均田使)를 없애라, 타국 상인의 미곡 매점과 밀수출을 막아라, 외국상인이 내륙 각지로 횡행(橫行)하는 것을 막아라, 각 포구의 어염선세(漁鹽船稅)를 혁파하라, 수세 기타 잡세를 없애라, 탐관오리를 제거하라, 각읍의 수령ㆍ이서(吏胥)들의 학정 협잡을 근절시키라"는 등의 폐정개혁 조목을 내걸고 노도와 같은 형세로 고부관아에 밀어닥쳤다.

  이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모두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전라감사(全羅監司)로부터 고부민란에 관한 보고를 받은 조정에서는 군수 조병갑을 체포 압송하게 하는 한편, 용안현감(龍安縣監) 박원명(朴源明)을 후임으로 부임하게 하고, 이어 장흥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使)로 보냈다. 신임군수 박원명은 도내 형편을 잘 아는 광주사람으로, 그의 적절한 조처에 의하여 군중은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후에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모두 동학교도와 농민에게 전가시켜 농민봉기의 주모자를 수색하는 한편 동학교도의 명단을 만들어 이들을 체포하고자 하였다. 전봉준은 피신하여 정세를 관망하다가 이 기회에 고질의 뿌리를 뽑아야 하겠다고 판단, 인근의 동학 접주들에게 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교조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마침내 94년 3월 하순, 태인(泰仁)ㆍ무장(茂長)ㆍ금구(金構)ㆍ부안(扶安)ㆍ고창(高敞)ㆍ흥덕(興德) 등의 접주들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전봉준이 먼저 점령한 백산(白山)으로 모여드니, 그 수가 1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전봉준은 대오를 정비한 다음 거사의 대의를 선포하였다. 곧,

  ① 사람을 죽이지 말고 재물을 손상시키지 말 것,

  ② 충효를 다하여 제세안민(濟世安民)할 것,

  ③ 왜적을 몰아내고 성도(聖道)를 밝힐 것,

  ④ 병(兵)을 몰아 서울에 들어가 권귀(權貴)를 진멸(盡滅)시킬 것

등의 4대강령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관리들의 탐학에 시달리던 인근 각처의 동학군과 농민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앞을 다투어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태인의 동학군은 3월 29일 자발적으로 관아를 습격하여 관속(官屬)들을 응징하고 무기를 탈취하니 혁명군의 기세는 한층 더 충천하였다. 급보에 접한 전라감사 김문현(金文鉉)은 영장(營將) 이광양(李光陽)ㆍ이재섭(李在燮) 등에게 명하여 영병(領兵) 250명과 보부상대(褓負商隊) 수천 명을 이끌고 동학군을 섬멸하라고 하였다. 4월 6일부터 7일 새벽까지 관군은 도교산(道橋山)에 진을 치고 있던 동학군과 황토현(黃土峴)에서 싸움을 벌였다. 관군은 철저히 참패하여 이광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장병이 전사하였다.

  사기충천한 동학군은 불과 한 달 만에 호남 일대를 휩쓸면서 관아를 습격하고 옥문을 부수어 죄수를 방면하였으며, 무기와 탄약을 빼앗고 이서가(吏胥家)에 방화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전라병사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에 임명하고 군사 800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전주성(全州城)에 입성한 초토사 홍계훈의 경군(京軍)과 동학군은 월평리(月平里)의 황룡촌(黃龍村)에서 첫 대전을 벌였다. 일대 격전의 결과 경군은 대패하였고 동학군은 정읍 방면으로 북상, 4월 27일에는 초토사가 출진한 뒤 방비가 허술한 전주성을 쉽게 함락시켰다. 한편 홍계훈의 경군은 28일에야 전주성 밖에 이르러 완산(完山)에 포진하고 포격을 가하였다. 동학군은 여러 차례 반격을 가하였으나 소총과 죽창만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차차 수세에 몰려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되었다. 홍계훈은 이 때를 이용하여 선무공작(宣撫工作)을 시작하였으니, 즉 정부는 고부군수ㆍ전라감사ㆍ안핵사 등을 이미 징계하였고, 앞으로도 탐관오리는 계속 처벌할 것과 폐정(弊政)의 시정을 약속하였다.

  때마침 앞서 요청하였던 청(淸)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였고, 일본은 일본대로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에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렇게 되자 동학군은 우세한 장비를 갖춘 정부군과 지구전(持久戰)을 벌이는 것은 불리할 뿐더러 청ㆍ일 양군이 출동하여 국가의 안전이 염려되는 시기에 정부군과 싸운다는 것은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폐정개혁 12개조를 요구하고 정부군의 선무공작에 순응하여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강화(講和)가 성립된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하고 동학군은 폐정개혁의 실시와 교세확장을 위하여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요청으로 청군은 이미 상륙하였고, 일본도 톈진조약[天津條約]을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였다.

【제2차 농민운동】 전라도 각읍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정치의 실현을 꾀하던 전봉준은 일병(日兵)이 궁궐을 침범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고, 청ㆍ일 양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 폐정개혁을 논할 때가 아니라 항일투쟁을 벌일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신곡(新穀)이 여무는 시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가 9월에 접어들자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孫華中)은 광주에서 궐기하였으며, 호남ㆍ호서의 동학교도와 농민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전봉준은 전주 삼례(參禮)를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고 대군을 인솔, 일단 논산에 집결한 뒤 3방향으로 나누어 공주(公州)로 향하였다. 또한 각지의 수령들도 수원ㆍ옥천 등 요지를 점거하여 동학군을 원호하였다. 한편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관군과 일본군은 급히 증원부대를 요청, 동학군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10월 21일 전봉준의 10만 호남군과 손병희의 10만 호서군은 관군과 일본 연합군을 공격, 혈전을 거듭하였으나 상대방의 막강한 근대적 무기와 화력으로 인해 우금치(于金峙)에서 결정적 패배를 당하여 논산ㆍ금구ㆍ태인 등으로 퇴각하였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11월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95년 3월 서울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써 미증유(未曾有)의 광범한 민중의 무장봉기로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30∼40만의 희생자를 낸 채 끝났고, 이들의 개혁의지는 이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 위정자의 반성과 각성을 촉구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의 정치적 혁신을 가져왔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