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에 관한 잡지는 시조전문 계간지 『시조문학』과 『시조세계』, 반연간지 『시조시학』, 『서정과 현실』, 『시조월드』, 시조에 비중을 두고 있는 시 전문지로는 『유심』, 『열린시학』, 『다층』 등이 속간되었는데 그 중 『열린시학』 가을호부터 시조란을 별도로 신설하였으며, 『유심』에서는 ‘격외시단’란을 신설하여 1편의 원고료로 문예지 사상 유례가 없는 백만 원의 원고료를 지급하였다. 이 ‘격외시단’은 매호당 6명의 시인을 격론을 거쳐 선정하고 원고청탁을 하고 있는데 그 중 2명을 시조 쪽에 배정하고 있어 시조활성화에 한몫을 담당하였다. 시조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는 또한 『중앙일보』사의 노력을 간과할 수 없는데 매월 3명씩 선정, 연말에 이들로부터 다시 작품을 받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시키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수영 씨가 당선되었다. 대상은 홍성란 시인이, 신인상은 전정희 시인이 수상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시조문학상 중 가람시조문학상은 박시교 시인이, 유심작품상에는 이지엽 시인이, 이호우 시조문학상에는 오승철 시인이, 이영도 시조문학상에는 박옥위 시인이 선정되었다. 한국시조작품상은 김삼환 시인이, 시조시학상은 조주환 시인이 수상하였다.
주요행사로는 백담사에서 열린 만해축전과 전북 익산에서 개최된 시조문학축제를 들 수 있다. 만해축전에서는 한국시조학회가 주최한 “21세기 지식환경의 변화와 시조문학연구”라는 주제의 윤영옥(영남대), 임종찬(부산대) 교수의 기조발표와 이종건(수원대), 양희찬(전북대), 여지선(건국대), 박미영(천안대) 교수의 주제발표가 있었다. 여기에서는 또 현대시조포럼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국정교과서에서 시조가 제외된 점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이어졌다. 전북 익산에서는 한국시조시학회 주최로 삼행시 전국 현상공모 시상식과 김제현(현대시조 포럼 회장), 김학성(성균관대), 장경렬(서울대), 이지엽(경기대), 이정환(교원대) 교수의 주제발표와 토론이 있었다.
2005년도에는 또 주목할 만한 시조집이 많이 출간되었다.
정완영의 「내 손녀 연정에게」, 송선영의 「院村里의 눈」, 박시교의 「독작獨酌」, 이한성의 「가을 적벽」, 김정희의 「연못에서 만난 바람」, 오영호의 「화산도, 오름에 오르다」, 김옥중의 「돌감나무」, 김민정의 「지상의 꿈」, 김주곤의 「색깔없는 무지개」, 박권숙의 「홀씨들의 먼 길」, 이달균의 「장롱의 말」, 곽홍란의 「직선을 버린다」, 현상언의 「별, 외로움과 사랑의 별」, 이구학의 「가면의 나라」 등이 출간되었는데, 정완영, 송선영, 박시교의 시집은 문예진흥원 우수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각 지역의 활동 중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곳은 전북 익산과 경북 청도 지역이다. 전북 익산에서는 전국 규모의 시조축제가 열렸을 뿐만 아니라 『가람시조』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가람시조』 창간호는 역대 가람시조 문학상 수상자 특집, 강인순, 김경자 등 123명의 초대 시조회원 작품들을 싣고 있다. 청도 지역은 이호우, 이영도 문학상을 운영할 뿐만 아니라 대규모 시비공원 등을 계획하고 있어 시조문학의 메카가 될 전망이다.
II. 생에 대한 반성, 혹은 경계
독도의 한밤중을 두른 큰 걱정께서//
울릉도 동백 꽃물/급히 요기하옵시곤//
단숨에 득달하여 와/깨라신다/ 잘못든 잠.//
-서벌, <첫닭소리> 전문
서벌 시인의 타계는 2005년도 시조단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온실 같기만 하던 시조단을 예리한 평문으로 뒤집어놓기도 했으며, 시조단의 혁신을 위해 다른 무엇보다 수범을 보일 만한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유작인 이 작품도 평이하지는 않다.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독도에 대한 인식을 준엄하게 나무라고 있는데 사뭇 진지하기만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에서도 재미성을 가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지함을 진지하지 않은 것으로 위장하며 눙치는 수법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내가 바라보는 건 고목나무 가지뿐이네
거길 봐야 고향이 보이고, 이 저승이 다 보이고
아득한 눈물이 곡간 밑창까지 환히 비치네.
-정완영, <요즘 내가 바라보는 건> 전문
노시인의 심경은 다 사라지고 없는 세월의 뼈대를 마치 “고목나무 가지” 선연함으로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자연을 노래하며, 자연의 인간을 노래하고, 자연으로 사는 시인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셈인데 이 노래는 지적처럼 “도취의 노래가 아니라 우리를 반성의 자아로 유인하는 환기력의 노래”다. 자연적 존재로서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성을 확인시키며, 동시에 그 한계초월의 세계를 열어놓은 전일체적 상상력을 울리는 깊은 감동의 세계(진순애, <전일체의 상상력, 그 감동의 울림>)를 보여주고 있다.
수시로 꺾이는 목숨/지키기 위한 궁여지책의//
정직한 독기를/미워하지마라, 건들지 마라.//
초원의 비를 기다리는/작은 풀꽃일 뿐이다.
-김제현, <독풀> 둘째 수
다소 강한 느낌을 주는 <독풀>은 자화상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욕망을 지닌 현대인들의 자만과 아집을 경계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러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무욕의 세계만을 얘기해오던 시인의 변모는 이러한 시대상의 변모와 결코 무관해보이지는 않는다.
그리움과 / 외로움이 / 한 말이라 생각나는 날 //
저 청명한 / 가을 하늘도 / 푸른 바다와 한 빛이구나 //
눈 부셔 / 눈물 고이는 / 이 저승의 / 먼 / 길이구나
-박시교, <길> 전문
박시교는 이에 반해 <길> 등의 작품들을 통해 그 경계를 지우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을 하늘도 / 푸른 바다와 한 빛”이라는 인식에는 세상의 순리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겸허한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하얀 등 너울거리며 길을 열어 놓았다/
수묵화 번져가듯 스러져간 생애들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고요의 집 한 채./
---(중략)---
비로소 떠오른다 그 눈물빛 사랑의 힘/
바람의 허리를 타고 건너오는 이를 위해/
지상은 아껴두었던 푸른 등을 내어 건다./
-백이운, <미타원에 와서> 전문
이 작품에도 수묵화가 번져나가는 듯한 자연스러움이 있다. 그 자연스러움은 한없이 무겁고 어두운 죽음까지도 환히 내보이는 마력을 가지게 한다.
세상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든, 순리를 담고 있든 이들 작품들은 생에 대한 성찰을 조용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조단의 특징적 한 국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된다.
III. 이미지, 선명성과 지워짐
시가 관념과의 끝없는 싸움이라면 이 명제는 시조일 경우 더욱 강조되어야 할 것 중의 하나일 터이다. 시조는 시보다는 더 경제적인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지로 창을 가려 문명사를 봉합니다.
하늘은 단풍물 든 봉서를 내리시니
한 생애 남루를 벗고 빈손 들어 받듭니다.
솔씨만큼 초점을 모아 밀지를 묵상하면
물소리 층층 높고 서릿발 서는 말씀
청태 낀 돌종이 울려 가을 인장 찍습니다.
머루주 익어가는 가을밤이 무거워
누군가 현을 당겨 별자리를 고르나니
산열매 무한(無限)이 실려 가지 가만 휩니다.
-정해송, <다시 가을 초막에서> 전문
오랜 침묵을 잠재우기라도 하듯 정해송의 신작에 나타난 서정성은 선명하면서도 한결 깊어진 느낌이다. “청태 낀 돌종”이나 “현”, “무한(無限)”이라는 단어들이 주는 고루함이나 관념성을 적절한 이미지를 통해 부드럽게 육화시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전깃줄에 새들이, 어두워지는 시간에, 더욱더 어두워지면서, 하나씩 지워지고//
지워진 그 자리에는 슬픔, 지워지고
-김영재, <지워지는 슬픔> 전문
‘슬픔’이라는 관념을 어둠이 배어드는 것에 비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탈관념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시인들이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보이는 실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실체를 그려내는 것이 이미지의 힘이 아니겠는가.
이한성은 2004년 <가을 적벽>으로 중앙시조대상을 수상했다. 이 시집은 수상기념 신작시집인 셈인데 팽팽한 시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은유와 상징, 화자의 교체 등의 시적 장치를 통해 시조 전통 율격의 구속력을 초월해 자유에 이르는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다(백수인<갈등을 초월한 희망의 메시지>)고 평가되고 있다. <採蘭記> 연작 등 개인적인 관심사에서부터 <밥詩> 연작, <그것은 불이었다>, <컴퓨터 사설> 등의 사회적인 문제까지 일상 속에서 체험하는 것들을 비교적 진솔한 직접화법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화법보다는 서정적으로 육화된 작품들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갓맑은 백금 햇빛
쟁그랑 부셔내고
얼비친 빛무리도
말끔히 가신 알몸
다소곳 명상에 젖어
하얀 이를 내보인다.
- <사발> 초장
이 서정성을 이끌고 있는 것은 주로 이미지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데 인용된 작품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투명하고 탄력적인 질감을 유도하고 있다.
황사에 꽃샘바람 애터지게 견디더니 봄밤도 사무쳤는지 몸비늘을 털어낸다
눈가에 등불을 매단 듯 꽃집 속이 다 보이고.
가난한 시간일수록 외려 따스한 체온
서녘 비낀 볕발로도 윤이 나는 쪽마루에 처연히 손님마냥 앉은 꽃 그림자, 긴 속눈썹
-이승은, <벚꽃 앞에서>
시조가 갖는 형식적 제약을 최대한 지키면서도 내재적인 자유로움을 한껏 구가하고 있는 이 작품 또한 꽃의 이미지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지는 벚꽃의 속살은 물론 그 내면을 다 훑어보기라도 하듯 시인의 시선은 내밀하면서도 정감이 있다. 그러기에 “긴 속눈썹”이나 “꽃집 속이 다 보이고”, 벗은 가난이어도 외려 감싸는 따사함이 그 자리에 자연스레 놓일 수 있는 것이리라.
김민정 역시 이미지스트라고 할 수 있는데 시적 대상과의 화해를 통해 구현되고 있다.
기다리던/꽃소식에/마음이 온통 달아//찻잔으로/가는 손길/그도 한참 뜨겁더니//비로소/꽃 한 송이가/내 안에서 벙근다//(<기다리는 마음> 전문)에서 보듯 서정시의 일반원리인 동일화의 원리를 잘 활용하고 있다. 동일화의 기법은 근본적으로 세계와의 화해를 모색하며 친화성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IV. 역사성과 현실성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다른 해에 비해 역사성과 현실성에 기댄 작품들이 많아지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기섭의 <엮음 愁心歌>는 사설시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 연작은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그들의 화법을 통해 진솔하면서도 질박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내떤지뿌고”, “아예 전 거둘껴”, “싸게들 나돌아 댕기는 판에” 등 시중의 유통언어를 그대로 삽입함으로써 실감을 더해주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작으로 소문난 오승철은 <송당 쇠똥구리> 연작 등 비교적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의미를 더 지니는 것은 제주 4.3의 역사성과 서사성이 제주의 향토정신으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자리라면 보목리 자리, 한 일년 푹 절여도/바다의 야성 같은 왕가시는 살아 있다./딱 한 번 내뱉지 않고 통째로는 못 삼킨다.//”(<자리젓> 둘째 수)에서 나타났듯 <자리젓>은 이러한 제주 정신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당연히 그의 시에는 우리가 전혀 접하지 못한 제주 방언이 많이 등장한다.
<엉겅퀴>에서 “가메기 모른 시께”(까마귀 모른 제사)나 “뱃도롱”(배꼽)도 그 한 예에 속한다. 탐라 천 년의 발상지인 산지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산지천 멀구슬나무>에서는 “메께라”라는 의성어를 쓰고 있는데 이는 제주 여인들이 황당한 일을 당하거나 황당한 모습을 봤을 때 은연중에 나오는 소리로 이 소리를 신화의 발상지의 “멀구슬나무”에 빗대어 쓰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송키(반찬거리의 제주어)나, ‘솔개’의 제주말인 ‘똥수레기’를 “똥수레기 같은 바람”으로(<고추잠자리ㆍ 8>) 살려 쓰고 있는 노력 등은 소중하게 생각되는 대목이다. 그가 최근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송당 쇠똥구리> 연작은 그가 줄기차게 밀고 온 이러한 제주정신의 결산적 의미를 담고 있다.
아, 섬과 섬 사이, 저 오름과 오름 사이
대명천지 이 봄날, 누가 나를 격발擊發하라.
삘기꽃 낭자한 터에, 소리라도 굴리고 싶다.
-<송당 쇠똥구리ㆍ 5>에서
청정지역에만 존재하는 멸종 위기의 쇠똥구리를 통해 시인은 풀리지 않는 아픔과 상처를 “누가 나를 격발擊發하라”고 한다. 어떠한 역사적 굴욕에서도 쓰러지거나 기대지 않는 ‘왕가시’의 자유정신인 제주의 정신을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가구(佳句)가 아닐 수 없다.
제주 시인들의 작품에서는 제주의 4.3 정신이 아직까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영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주 오름의 유연한 품새가 자리잡고 있는데 그러나 제주 오름을 오른 사람이라면 그 오름 안에 아픈 속내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듯, 보기와는 다르게 그의 시에서는 아픔이 배어나온다. 속으로 아픔을 간직하면서도 부드러움을 갖고 있는, 대지적 여성성의 오름. 그 오름의 이미지를 잘 잡아내고 있다.
바람이 쓰러뜨리고 바람이 일으키는
무자년 그 핏빛 음성 빈 들판 서성이며
한 사발 맑은 넋으로 불신의 벽 헐고 있다
-<3월 들판에는> 부분
날 세운 푸른 잎이 하늘 한 장 베어 물고
모진 비바람에도 꺾임 없이 휘날리며
순한 귀 열어놓고 사는 백수(白手)이고 싶다
-<억새꽃, 너를 보면> 마지막 수
전자의 작품에는 참혹했던 무자년이 “핏빛 음성”으로 은유되어 있다. 3월의 들판이니 4. 3의 전주곡이 지배했던 공간이다. 불어오는 것이 모두 “바람”일 수 밖에 없는, 그리고 그것이 모든 것들을 “쓰러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하는 상황이 연속되었던 공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바람”은 무소불위(無所不爲)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공간에 현재적 자아는 서 있다. “바람”도 물러가고, 이제 더는 쓰러뜨릴 것도 일으킬 것도 없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공간에서 과거 그 “핏빛 음성”을 떠올린다. 그 “핏빛 음성”이 이제는 “한 사발 맑은 넋”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불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 그러지 않으면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몰랐던 암울한 시대. 그 “불신의 벽”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그 현재적 자아가 <억새꽃, 너를 보면>에서 “순한 귀”를 열어두려 하는 것은 과거 역사와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백수(白手)” 또한 ‘빈손’이라는 축자적(逐字的)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영식의 시집 「자전거를 타고서」에는 파토스와 로고스와 파토스적 경향의 두 세계가 잘 어우러져 있다. 당연히 그래야 할 현실이 그렇지 못함으로써 여기에서 상충되는 자아의 갈등이 드러나는 파토스적 세계는 <서울 五月>에 잘 나타나 있다. ‘오월’이 갖는 생명성(첫 수)에 비해 “스크럼 짠 스타워즈 처벅이는 군화발소리”의 폭력에 짓눌린 상황이 아이러니하게 동시적 공간에서 연출되고 있다(둘째 수). 이 아이러니는 “속살을 반쯤 드러낸 살냄새의 아가씨”까지(셋째 수)를 동시적 공간에 설정함으로써 그 극적 효과를 더욱 고조시킨다. <朝刊을 펼치며>에도 첫 수에서 설정되는 낙관적 공간과는 다르게, 둘러싸고 있는 현실은 믿기지 않는 사건들이 난무하고, “U.R의 높은 파고”가 몰아치는 그래서 “아사의 운명 앞에서 조장(鳥葬) 서두는 독수리떼”로 은유할 수밖에 없는 삭막한 공간으로 설정된다. 말하자면 시인은 펼쳐지는 위악적인 현실 앞에서 이성의 고리를 놓지 않고 응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반면 파토스적 경향은 격조 있는 서정성으로 나타난다.
이달균의 최근 작품들은 세 가지 방향으로 압축된다. 하나는 언더그라운드의 삶에 대한 애정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 계승에 대한 부단한 노력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과 세월에 대한 긍정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삶에 대한 애정은 <우리 기쁜 언더그라운드> 연작과 <뫼르소의 도시> 연작을 통해 나타나고, 시간과 세월에 대한 긍정은 <중심의 시>, <모래늪>, <채송화>, <자화상>, <안개 사원> 등 많은 작품에서 잘 형상화되고 있다. 특히 그는 최근 「2005, 다섯 광대의 노래」를 발표했는데 <상여놀이>, <양반타령>, <나는 말뚝이로소이다>, <비비타령> 등 전통 계승에 대한 부단한 노력의 결산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역작으로 판단된다.
V. 내면성의 추구
단간 방 어디에도 해초처럼 자라던 빛
온몸이 귀가 된 흰 새알 나를 품고
목젖을 꾸르륵거리며 바다새가 울었다
눈먼 꿈의 화석들이 섬그늘을 키우고
단단한 껍질 밖의 껍질로 저무는 바다
한 생애 부리를 세운 제 울음이 섬인 것을
길은 잠시 빛나다 가라앉는 상처인데
불안한 날개짓의 이명으로 떠난 새는
다시는 눈먼 섬으로 돌아오지 않으리
-박권숙, <자화상> 전문
이 작품은 시인의 고독과 아픔이 은유되어 있다. 여기에서 시인은 “온몸이 귀가 된 흰 새알”로 은유되어 있다. “온몸이 귀”가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흰 새알”은 부화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다. 세월이 가고 알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알은 당연히 바깥의 세상일이 몹시 궁금할 것이다. 신경은 바깥의 돌아가는 사정에 집중되게 마련이다. 그러니 “온몸이 귀”가 될 법도 하다. 그러나 바깥에 귀를 기울일수록 “바다새”의 울음만이 처량하게 들려올 뿐이다. “바다새”는 알을 보호하면서 알이 새가 되도록 해주는 말하자면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이 어미 바다새는 지쳐 있다. 삶의 고달픔 때문이고 알 때문에 그렇다. 알이 꿈꾸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고, 더욱이 알이 바라는 아름다운 꿈과는 거리가 있는 현실, 그 파고를 혼자서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혼자서 “목젖을 꾸르륵거리며” 울음을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다. 둘째 수는 문맥에 따라서는 어미 바다새의 입장을 은유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제목을 감안하면 시인 자신의 입장으로 보는 것이 더 온당한 해석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흰 새알”은 알에서 깨어나 “바다새”가 된 것이다. 알에서 깨어나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이미 첫 수에서 예견된 것처럼 “눈먼 꿈의 화석들이 섬그늘을 키우”는 곳이다. 동시에 그곳은 “단단한 껍질 밖의 껍질로 저무는 바다”이다. 말하자면 더 이상 볼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존재들만이 모여 있는 곳이다. 껍질 밖이기는 하되 껍질뿐인 적막한 곳이다. 그러니 “한 생애 부리를 세운 제 울음이 섬”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변모한다. 새 울음이 섬으로 은유되면서 새는 곧 섬이 되는 것이다. 셋째 수의 문맥은 이렇게 읽을 때라야 그 묘미가 완전히 살아난다. ‘떠나가는 새’가 아니라 ‘떠난 새’이기 때문이다. 나는 ‘새’를 기다리는 “눈먼 섬”의 존재가 되어 오롯이 혼자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암담하고 쓸쓸한 적요의 세계를 떠안고 있는 비극성이 곧 시인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시 앞에서 숙연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울지 마라, 산정 높이 휘날리는 깨끗한 눈물
박제된 꽃잎 같은 수혈을 한 겨울저녁
눈발의 고요한 통화 우리의 길은 멀다
아미동 저문 능선 폭설이 내리고
평화로운 아침 모든 것은 덮여서
가슴 속 은밀히 찍힌 긴 병고의 발자국
울지 마라, 눈부신 은닉의 흰 산 아래
침엽의 정신들이 푸른 가시를 세우듯
묵묵히 겨울을 나는 저 깨끗한 눈물
-박권숙, <폭설주의보> 전문
그리고 그것이 시인이 안고 있는 오랜 병고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어이 알아차리게 된다. 수혈을 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지병을 오랫동안 안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수혈을 “박제된 꽃잎 같은 수혈”이라 비유한 부분에서는 눈물이 핑 돈다. 그 수혈을 한 저녁에 눈은 내린다. 시인은 시야가 흐려지는 눈을 닫고 가슴으로 길을 연다. <자화상>에서 보듯 그 “길은 잠시 빛나다 가라앉는 상처”일 뿐임을 알고 있지만 설원 한가운데로 길을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어머니를 위해, 기어이 이 사정을 눈치챈 우리 우둔한 독자를 위해 “울지 마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를 읽고 어찌 뜨거운 속울음을 울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시인은 의연하게도 “침엽의 정신들”로 그 푸른 가시를 세워 우리를 슬픔에서 몰아내려 한다. 거기 있다고 내색하지도 않고 묵묵하게 겨울을 감내하는 푸른 정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 연속되더라도 이를 초연하게 극복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결연함 위에 “깨끗한 눈물”의 의미는 단순한 눈물의 차원을 떠나 생의 정죄로까지 연결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에게 드러내놓고 그 아픔을 얘기한 적 없지만 시인은 그것을 자족적인 읊조림이나 절망이 아니라 지순하고 지순한 “깨끗한 눈물”로 돋아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눈물은 내부로부터 오랫동안 정제되어 온 아픔의 소금꽃 절정이자 온전한 육화를 거쳐 나온 시적 상상력의 집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는 시조단도 이러한 내면성을 추구하는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시 한 편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고, 그것을 기대하는 심정에서 다소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2006년은 현대시조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06년 7월 23일 대한매일신보에 <혈죽가>라는 작품이 발표된 이래 현대시조는 눈부신 발전을 계속해왔다. 현대시조를 창작하는 등단시인은 초창기 십수 명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천여 명을 상회하고 있다. 2006년에는 시조 중흥을 위한 행사들이 줄지을 전망이다. ‘시조의 날’ 선포식, 100권의 시조집 완간, 번역사업, 노래화 작업 등.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틈 내서 다시 읽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