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트의 신학과 사상
글쓴이: 박 양수 목사(왕림장로교회 담임)
바르트는 19세기 자유주의를 강하게 질타하고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하라”는 주장을 하면서 신정통주의(Neo Orthodoxy)를 주장 했다. 그 후 그의 신학은 20세기 동서양의 신학계를 주도하여 왔으며 우리나라에도 바르트의 신학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으로 바르트의 신학사상을 연구함으로 역사적인 정통기독교 사상과 무엇이 다른가를 비교 분석하여 개혁주의 신학 사상을 더욱 새롭게 하고자 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이 글은 3가지로 구분하여 첫째는 바르트의 생애에 대하여 기술하고, 둘째는 바르트의 신학형성 배경에 대하여 기술할 것이며, 그의 신학의 여러 이론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자 한다. (1)그의 신학에서 성경관, 신관, 인간관 그리고 그리스도관 과 (2)성령론에서 성령계시, 성령의 사역, 성화와 성령의 역사를 다루고, (3)교회론에서 교회의 부정적인 이해와 긍정적인 이해를 고찰하고, 그의 교회론을 역설적 초월주의적 변증법신학으로 규정 짓고, (4)인간론으로 결론을 맺고자 한다.
1. 바르트의 신학
바르트의 신학시대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곧 그의 신학시대(1909-1919), 다음으로 과도시대(1919-1932), 그리고 성숙시대(1932-1968)까지를 꼽을 수 있다. 바르트는 1886년 5월 10일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하여 대학 교육을 그의 아버지가 신학 교수로 있었던 베른에서 받았다. 그리고 그는 신학적 교훈을 베들린과 튜빙겐, 그리고 말북에서 자유주의 학자들에게서 받았다. 그는 특히 말북대학에서 신학자 헤르만과 하르낙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주1) 그는 제네바에서 목사가 되어 아르간 칸튼(Aargan Canton)에 있는 자푼빌(Safenwil)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의 유명한 로마서 주석 초판을 이곳에서 펴냈다. 그후 튜빙겐 대학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고, 1925년 에는 뮌스터 대학으로 갔고, 1930년에는 본(Bonn)대학의 교수가 되어 히틀러가 강요한 서약을 거부함으로 나치정권에 의해서 쫒겨나기까지 큰 인기를 끌며 강의를 했다. 그후 그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하다가 82세를 일기로 1968년에 사망했다.
1) 바르트의 신학의 발전
칼 바르트의 사상은 3단계를 통해서 발전 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현대철학과 고투하여 그가 그 대표자가 되는 성경 교의학(Biblical dogmatics)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1) 바르트 신학의 초기
바르트 신학의 초기는 쉴라이엘 막허의 사고형에 빠졌다. 즉 19세기에 발전한 종교적 개인주의인 자유주의 신학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바르트의 자유주의와 이상주의는 일종의 기묘한 것이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죄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이러한 단계는 1918년 그의 로마서주해의 출판으로 시작되었다. 주2) 그당시 신학은 인간을 하나님 위에 올려놓 려는 인본주의 신학사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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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신학정론 1권 박윤선[칼 바르트의 신학]서출판바라. 1990
주2)현대신학자 20인, 대한기독교서회, 1970,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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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선생 헤르만(Hermann)은 릿츌 학파의 신학자로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이 아니고 도덕적 의식이며 양심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종교에 있어서 역사적 상대주의를 가르쳤고 원리의 속성을 주장하였으니 그것이 19세기의 신학의 일반적 특색이였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와 다른 종교 사이에 질적 차이는 없고 다만 정도상차이니 그리스도나 다른 종교의 교조들이나 다름이 없으며 성경이나 다른 종교의 경전들과의 사이에 절대적인 차이는 없다고 했다. 바르트는 그의 신학의 초기에 있어서 이러한 헤르만의 신학사상에 참여했다. 이러한 헤르만의 신학사상은 종교 다원주의를 불러오고 오늘날 W.C.C의 근간이 된 것이다.
바르트는 1919년에 발표한 [현대신학과 실천교육]이라는 책에서 신약성경의 문헌은 다른 종교들의 문헌에 비교하여 원리에 있어서 더 높은 가치를 가질 것이 아니라 한 종교의 창설자인 예수는 다른 종교의 창설자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다고 했다. 그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 바르트는 동시대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사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르트는 초기 신학에 있어서 이렇게 헤르만의 신신학에 참여했다.주3)
(2) 바르트 신학의 중기
갑자기 바르트의 신학사상에 변화가 일어 났다. 그가 1911년부터 자푼빌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위기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 그는 그의 자유주의 신신학 사상으로 설교할 말을 잃어버렸다. 다시 말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자유주의 신신학은 인간의 내부가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과 인류사회는 점진적으로 개량 된다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이제 세계 대전에서 나타난 비극을 볼 때 그의 인생관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학사상과 맞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가진바 자유주의 신 신학 사상은 공허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바르트는 성경을 다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서 이상한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 때 그에게 있어서 성경은 역사나 윤리나 종교를 내요으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였다. 바르트의 이 새로운 깨달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했다. 자유주의 신신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께로 이른다는 것은 바리세주의 같은 의식과 교만이라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솔선하여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모든 인간의 문화와 도덕과 종교가 그의 새로운 깨달음에 있어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그의 신학을 가르켜 위기신학(危機神學)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있어서 바르트은 아주 강력한 말로 그의 신학 사상을발표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절성과 사람의 부패성을 역설했다. 주4)
그러나 초판이 나왔을 때는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지 못하였으나 수정판이 나오자 독일과 스위스의 신학과 철학사상에 많은 동요를 주었다. 그의 책에서 바르트는 인간을 하나님과 혼돈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을 하나님 자리에 놓는 자유주의 신신학의 주관주의에 대해 깊은 불만을 표시하며 자기 스승인 하르낙과 헤르만을 강하게 질타하고 그당시 인본주의 신학사상을 공격하기를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인간이 되게하는 방법을 다시 배우게 하라고 했다. 주5)
(3) 바르트 신학의 후기
그가 1932년에 교의학(敎義學)을 출판한 후로 오늘날까지 또 하나의 시기를 이룬다. 1955년에 이르러 그의 교의학 제10권이 나왔다. 이 시기에 그의 신학사상은 최고의 발전을 보게된다. 비록 그의 사상에 있어서 약간의 수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상의 것이고 그의 신학원리의 수정은 아니다. 물론 그의 신학은 보수주의도 아니고 정통주의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받아드리기 어렵다. 일례를 드면 그의 성경 교리는 [성경 기자들이 역사와 전기를 분별없이 썼다고]고 하며 [성경에 오류없는 부분이 없다]고 했으며[성경 기자들이 기록한 말마다 실수했다]고 했다. 주6) 이와 같이 그는 성경의 무오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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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바르트 신학, op.cit, p17
주4)신학정론 1권, op.cit. p18
주5)현대신학자 20인, op.cit, p46
주6)신학정론 1권, op.cit.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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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만의 성경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해부하는 비신화화 신학이 나오게 된 것이다. 바르트의 스승 하르낙의 예수는 죄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아들이 아니다. 단순히 사랑과 인본주의적인 이상의 화신이다. 또한 그의 스승 헤르만의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오직 위대하지만 역시 일반 책처럼 오류가 있음으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비판을 가해야 할 책이라고 했다. 주7)
바르트는 그의 스승으로부터 이러한 신학사상을 받아서 그의 교의학을 발전시켰다. 바르트를 포함한 이들의 신학은 경건주의 색채가 짖으며 실생활의 기독교 경험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이다. 그들의 진리의 척도는 경험이요 느낌 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성경을 읽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단순히 하나의 표시나 최소한 그것을 통해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는 표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성경과의 관계는 사실적이기는 하나 간접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한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어떤 사건에서만 말씀이 된다. 성경이 실존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기 까지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다만 성경은 과거의 계시의 기록이요, 미래 계시의 약속이라고 말 했다. 주8) 결국 그는 자유주의 신신학을 앞문으로 쫒아내고 다시 뒷문으로 받아드리고 말았다.
윌리암 호오던(William Hordern)은 바르트를 비롯해서 라인홀드 니이버, 에밀 브른너 등을 가리켜 신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 신학 운동은 19세기 데마크의 철학자 죄렌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유주의 신학이 말하고 있는 헤겔 철학을 공격했다. 그는 말하기를 생명은 절대로 합리적인 사상 체계 안에 강제로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체계의 한 구절도 사람과 바꿀 수 없다고 하였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참다운 철학은 생명을 위한 철학이요, 사변을 위한 철학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는 직업적인 사상가들이 사념으로 아름다운 궁전을 짓고 생활은 시궁창에서 하고 있다고 조롱했다. 그는 생명은 역설적인 것이며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시간과 영원히 통일되어 있다는 가장 중심적인 역설을 제시해 주었다. 그 결과로 신앙과 책임이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진리를 발견함이 아니라 진리대로 사는 일이 우리의 과제이며 그리스도교가 어떤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크리스쳔이 될 수 있느냐를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이 와 같이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의 낙관주의를 부숴버리고 그 내부의 어둡고 침침한 실정을 폭로하였다. 그는 19세기 숨어있는 동굴 속에서 죄, 불안, 허무, 절망을 끄집어냈다. 주9)
시대적인 낙관주의는 키에르케고르의 고함에도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결국 20세기에 들어와서 사람들은 그의 예언이 적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통해서 20세기의 종교개혁 운동의 시발을 고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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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7)현대신학 해설, 간하배. (한국개혁주의신행협회,1973) p20
주8)ibid. p22
주9)신정통주의신학, 윌리암 호오던 저 (대한기독교서회,1975)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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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르트의 신학형성의 배경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바르트의 신학 형성의 배경은 키에르케고르에게서 그 배경을 찾을 수 있다. 특히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철학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변증법적 사색에 대하여 동조했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신학형성의 배경을 고찰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철학 사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바르트는 키에르케고르의 변증법적 사색에 대하여 언제나 칭찬 했다.
1) 키에르케고르의 종교철학 사상.
키에르케고르는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재능과 음울한 심리와 놀라운 시적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는 1813년에 태어나서 유년 시절부터 매우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모든 일에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한다는 가정 교육을 받아 오면서 기쁨이 없는 생활을 하였다. 1931년 그가 18세 때에 부친ㄴ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문학과 헤겔의 철학도 동시에 공부했다. 신학생으로 키에르케고르는 거펜하겐의 사회에 섞여 놀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이 그의 방탕한 생활에서 떠나도록 만들었다. 그 한 가지는 그의 형들과 누이들(4명)의 사망과 다른 한 가지는 그의 부친이 전에 하나님 앞에 범했던 죄(하나님을 저주한 것)에 대한 보응을 두려워하는 사실이 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이 그의 전 생애를 뒤집어 놓았다. 그의 나이 25세 때에 4사람의 현제가 죽었으며, 몇 달 후에 그의 아버지도 사망했다.
다음으로 키에르케고르에게 영향을 준 것은 그의 나이 28세 때 레기네 올센(Regine Olsen)이라는 여자와 약혼을 한 사건이다. 그는 약혼 한 것을 잘 못한 일로 깨닫고 약혼을 파혼했다. 파혼한 이유는 자기 자신이 저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약혼자에게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파혼을 했지만 그 여자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파혼을 당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에게 두 가지 사실이 전개되었으니 그가 종교적으로 각성하게 된 것과 그가 저술가로서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 후 4년 6개월 동안 4가지 큰 저서를 완성했다. 그는 친히 증거하기를 “나는 나의 사무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와 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일 하였다”고 했다. 그 결과로 그는 저서를 해마다 발행했으니 1843년에 [이것이 아니면 저것], 1844년에 [철학적 단편들], 1845년에 [생의 계단들], 1846년에 [철학적 단편에 대한 최후적인 비과학적 보증]이란 책을 출판했다. 주10)
그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실존” “홀로 하나님 앞에 서는 단독자” 이것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높고 참된 실존의 모습이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적인 유신론적 실존주의의 길을 열어 놓은 사상가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신앙 속에 사는 경건과 엄숙한 종교적 실존에서 인간의 보람과 목표와 의의를 찾으려고 했다. 그의 저서는 어떤 의미에서 자기 분석이요, 자기 고백이요, 자기 비판이요, 자기 검토였다. 그는 철두철미한 자기 성찰을 했으며, 자기 없는 철학과 자기를 문제로 삼지 않는 철학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키에르케고르의 성격과 인간을 상징하는 한 구절을 인용해보면 [나는 무엇이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우수만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주11) 이와 같이 그는 우수의 종교철학자 였다.
2) 키에르케고르와 그 시대의 사상
키에르케고르는 덴마크 개신교회를 공격하기를 “덴마크 교회는 사상과 타협하고 기독자의 이름은 가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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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0)신학정론 1권, op,cit. p22
주11)세계의 사상대전, 휘문출판사, 1988,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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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나 그 이름에 합당치 않으며 정신과 행위에 있어서 기독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런 날카로운 공격은 교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는 자기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말하기를 “자신들이 주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려는 것은 불 경건이요, 이 세상주의요,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두려움의 표현으로 다른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는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의 노력이다”라고 하였다. 주12)
키에르케고르는 세속화된 기독교계에 대해서만 반동한 것이 아니고 그 때 시대적으로 수납된 철학에 대해서도 반동하였다. 그 때의 교계와 철학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져 있었다. 그당시 헤겔의 철학은 1830년부터 1850년까지 구라파에 있어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저술을 발표할 때 였다. 그 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헤겔 철학은 모든 철학 체계를 포괄하는 최후의 완성의 철학으로 알려졌다. 헤겔의 철학은 기독교를 그 일면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것으로 완잔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기독교의 술어들 죄악, 구속, 등이 그 당시의 철학으로 인하여 새롭게 해석되어 진정한 기독교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헤겔 철학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정, 반, 합(Thesis, Antithesis, Synthesis)의 단계에 맞춰지는 것으로 생각되어 있다. 키엘케골이 헤겔 철학을 평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은 그 존재를 떠나 관념으로 증계 되어 나타나니 그 모든 것이 다 참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철학 사상이 유럽의 대부분의 기독자들로 말미암아 수납되었으니 그들은 이 철학을 가르켜 기독교를 지적으로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 철학은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반영시킨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키엘케골은 그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아주 위험한 일로 여겼다. 그러나 그 자신이 헤겔 철학에서 아주 깨끗하게 떠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친히 교육받은 철학이 헤겔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헤겔에 대한 그의 공격은 하나의 반동적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 반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 반동에 관계되어 있는 본래의 사실들로 말미암아 결정 되어지는 면을 면치 못한다. 반동이라는 것은 그것이 배척하고 있는 본래의 사상 전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법이다.
예를 들면 누가 나를 좋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반동할 수 있다. 그러나 반동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 이라면 신앙과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헤친 그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그것은 반동이 아니고 이 행동은 전적으로 나에게서 난 것이다. 내가 취한 반동들은 모두 나를 해한 그 사람의 행동에서 인연을 가지고 나온다. 그 사람의 행동이 나의 반동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키엘케골이 헤겔에 반동 했다는 것은 헤겔의 철학 사상이 키엘케골의 사상 속에 들어 있어 다른 것으로 반동했다는 것이다.
근대 철학사상에 있어서 역시 반동으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니 합리주의에서 경험주의로 관념주의에서 유물주의로 각각 반동했다. 이런 반동을 떠나서 살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은 정통 기독교 사상 뿐이다. 그것만이 반동하여 유행하는 철학적 전제들을 받지 않고 오직 신앙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설 수 있다. 키엘케골의 작품을 읽어 보면 그가 비록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을 기준하여 잘 했다 할지라도 그는 헤겔에게서 배운 여러 가지 사상적 형태와 체계를 깨끗이 떠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반동을 완잔히 면치 못하여 진정한 개혁을 이루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키엘케골은 인간의 이성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헤겔의 말을 반대했다. 헤겔에 있어서는 인간의 모든 성질의 행동이 모두 그의 사상체계에 알맞게 들어갈 자리가 있음을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말하기를 이 모든 성질의 행동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인간이 마음의 관활아래 들 수 있다고 한다. 주13)
그러나 키엘케골에 있어서 존재라는 것은 그렇게 통솔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개체성이라는 것은 완전히 설명 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정서적 비합리적 윤리적 불가해적인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이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했다. 개체적 존재가 기본적으로 고려되는 것이지 국가나 민족이나 인인류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키엘케골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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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2)신학정론 1권, op.cit. p25
주13)Ibid,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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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기독교인의 이상은 하나님과 더불어 홀로 있는 개체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바르트나 브른너에게도 종종 나 타난다. 그리고 키엘케골에게는 기독교 단체나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중에 또한 이 사상이 바르트의 교회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키엘케골은 헤겔의 중계 사상혹은 종합 사상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절대적 구분과 선악간의 절대적 구분을 없애버린다고 비평한다.
헤겔 철학에서는 악이 선의 한 부분이고 인간이 신의 한 방면이 되어지는 것처럼 말을 한다. 이런 사상 체계를 정. 반. 합의 원리로 움직여 모든 것을 다 포괄한다. 그와 반대로 키엘케골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절대적 구분을 성립 시킨다.
3) 키에르케고르의 사상
그의 철학적 사색은 그의 생애의 모든 분투의 결과였다. 그는 하나의 역리적 인간 이였음으로 그의 사색은 필연적으로 불합리주의로 흘렀다. 그는 무엇이든지 일반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개인주의적 이고 주관주의적인 것에 치중했다. 그는 개적인 인간에 특별히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인 주관주의만 진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에 속하며 이를 그르켜 그는 실존적 절망이라고 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과 위기가 깔려 있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로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높으시며 형용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전적으로 자유하시여 그 어떤 법칙에도 지장을 받지 않으시나 인간은 악하고 작은 존재이다. 그러나 실존적인 인간 또한 자유의 사람이어서 그 어떠한 법칙에도 매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사상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계시하지 않는 초월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에 의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모르는 면도 있지만 그가 기록한 계시의 말씀(성경)에 의하여 그를 알 수 있는 면도 있다. 주14)
신명기 29:29절에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했고, 마11:27에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당시 키에르케고르의 유신론적 실존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그의 교의신학 체계를 설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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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신학정론 1권 op.cit,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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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르트 신학의 등장 원인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이 본래부터 선하다는 것과 세상은 개량되어 간다는 그릇된 주장을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성경과 위배되고 사실에도 맞지 않는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예수를 하나의 인간 뿐으로서 선구자로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사상으로 바울의 증거와 요한 복음의 역사서 와 공간복음의 가치를 감하여 본 것이다. 그들은 공간복음에서 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요소를 뽑아버리려고 애썼다. 여기에 반동으로 바르트의 신정통주의 신학이 등장하여 자유주의 신학을 공격하였다.
바르트는 처음에는 자기의 스승 하르낙과 헤르만 등의 유명한 자유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그의 로마서 주석이 나오기 전까지는 자유주의 사상에 젖어있었다. 그는 세계 대전을 목격하고 자기를 비롯하여 자기 스승들과 자유주의 자들이 즈장하는 이론이 그릇된 줄 알고 고민하기 시작하여 자기의 신학사상을 전면 수정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 신학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항으로 규정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자유주의에 대한 비난이 자자 했으니 여기에 그 중 몇가지 중요한 것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자유주의 자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거리(gulf)를 잘 모르고 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이 최선의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과 연속적인 상태에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고 생각으로 자유주의 자들은 자아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 또한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활동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이 이 지상에 건설한 인간의 조직제도와 동일 시 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가 자연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법칙을 연구하는 것처럼 꾸준히 하나님을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찾아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 오셨다는 기록된 성경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한낱 인간이 하나님을 탐구하는 서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의 인격적인 본성은 흐려지고 하나님은 우주의 합리적인 질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바르트의 스승 하르낙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단순히 사랑과 인본주의적 이상의 화신이며, 또한 헤르만의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오직 위대하지만 역시 오류가 있음으로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비판을 가해야 할 책이라고 했다. 그는 진리의 척도는 경험이요 느낌이라고 했다.”주15) 바르트는 1921년 로마서 주석 개정판에서 자유주의 신학사상의 부당성에 대하여 지적했다. 바르트의 로마서 주석을 통해서 그의 스승들에게 반기를 들고 하나님은 오직 타자(他者)로서 하나님을 지적했다.
바르트의 타자로서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종교 문화적 가치를 고양했으나 바르트는 종교를 최고의 죄로 정죄했다. 자유주의는 윤리의 기초 위에다 신학을 세웠으며 바르트는 신학의 기초위에 윤리를 세우고자 했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반대하여 인간에게 계시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는 계시를 주장하면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시키지 않고 구별하였다. 성경을 읽되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을 수 있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성경은 최소한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오는 표시라고 했다. 하나님과 성경과의 관계는 사실적 이기는 하나 간접적이라고 하면서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성경이 실존적인 상황에서 우리에게 말하기까지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과거의 계시의 기록이요 미래의 계시의 약속이라고 한다. 주16)
바르트는 그의 주석에 변증법이라는 새로운 신학 신술법을 창도했다. 그 방법은 이미 상술한바와 같이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에서 빌려왔다. 바르트에 의하면 페러독스(paradox)는 기독교 신학에 있어서 어쩌다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의미에서는 교리적 중심에 있는 것이라고 했다. 계시는 모순
을 수단으로 하여 진행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숨겨졌으나 또한 계시된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동시에 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 안에 선택 되었으나 버림을 받는 사실, 예도 되었으나 아니요도 되는 예수, 의롭다 함을 받았으나 죄인도 되는 사실 등등 변증법으로 신학을 해석 했다.
“바르트는 계시는 역사에 들어오는 법이 아니라고 하면서 역사 안에는 신앙이 자리 잡을 아무런 터가 없다고 한다. 신앙은 지상의 역사로 채워질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계시로 채워져야 할 진공이라고 한다. 이러한 사상은 키에르케고르와 프란츠 오버백의 역사관에서 영향을 받아 역사를 히스토리(Historie)와 게쉿테(Geschichte)로 분류했다.”주17) 이 두 단어는 모두 [역사]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으나 독일어 단어가 함축하는 의미는 아주 다르다. Historie는 객관적으로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과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들의 총화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Geschichte는 나에게 실존으로 부딪치는 일들,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하며, 내 결심을 촉구하는 일들을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Geschichte에 속하고 Historie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면 Historie의 영역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했다. 예수는 Geschichte의 영역에서 만나야 한다고 했다. 주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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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5) 현대신학 해설. 간하배 지음, 개혁주의 신행협회, 1973 p.20
주16) Ibid, p22
주17) Ibid. p25
주18) Ibid.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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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바르트 신학의 개관
여기서 바르트의 학설과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을 낱낱이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바르트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서 칼빈주의 신학과 바르트의 신학을 정당하게 비교 분석하고자 한다.
1) 바르트의 성경관
신구약 성경이 그 원문에 있어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견해는 칼빈주의 교리와 신학에서 기본적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 칼빈주의 신학과 교리를 강력하게 부정한다. 그는 자기의 개념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자유를 부정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완성된 계시인 성경에 구속 받을 리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은폐되지 않고 계시만 되었다면 그 계시는 인간에게 좌우되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이 어느 책의 내용을 취급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취급할 수 있는 모순이 생긴다고 했다. 그는 성경을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경이 원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에게 욕을 돌리는 것이라고 했다. 많은 책중의 하나의 책인 성경은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계시에 대한 증거자가 되기를 원한다.주19)
개혁주의에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고 무오함과 절대적인권위를 갖는 것으로 보고 인간은 성경이가라는 곳까지 가며, 멈추라는 곳에서 멈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이러한 성경 계시를 직접적인 계시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비난하고, 성경은 간접적인 계시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성경 계시의 이중적 간접성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성경)가운데 은폐되어 계신다는 관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그렇게 말을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만약 성경에서 증명되는 하나님의 계시가 은폐되지 않는다면 주권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아닐 것이라고 한다. 이는 계시를 증거하고 있는 성경은 그 자체를 초월하여 계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성경 그 자체를 계시 자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는 언제나 현재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과거와 미라는 것이 없고 다만 현재만 있는데, 그 현재는 달력에 날자를 지칭하는 그런 현재가 아니고 신적 현재를 말한다. 바르트의 전체적인 계시 교리는 신적 현재라는 관념에서 계시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계시는 하나님의 성육신 행위요, 인간에 대한 그의 화목 행위이다.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현재 임하신다. 그리고 계시는 그 자체의 시간이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보통 시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성육신은 역사적 과거에서 일어난 나사렛 예수 생애에서 일어난 것과 동일시 될 수 없다고 한다. 주20)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봉착한다. 바르트와 역사적 개혁주의 사이에 문제는 역사에 하나님의 계시가 실제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바르트는 큰 소리로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역사적 정통 개혁주의는 [있다]고 대답한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직접적으로 나사렛 사람인 동일하다. 이는 신구약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유기적 영감설을 믿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나사렛 예수와 직접적으로 동일시 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는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를 사람에게 전달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의 말대로 나사렛 에수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이 그대로 인간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고 하면 그 사실들이 기록 된 성경이 그대로 계시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 예수가 누구라는 것과 그의 행하신 것과 그의 말씀하신 것이 그 자체로는 계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만큼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는 한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재의 인간을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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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9) [칼 바르트] 코닐리어스 밴틸 저. 한국개혁주의 신행협회, 1977. p13
주20) Ibid.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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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사건)에 대한 신앙을 표현한다. 성경은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지는 것이니 이런 [되어지는] 관계에 대해서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르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다만 어떤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했다. 이는 말씀을 실존이 되게 할 때만 말씀이 된다는 말이다.
“바르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성경 본문에 매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성과 이 인간성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오류를 가진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이 성경은 세상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오류 있는 인간에 의해서 기록된 오류 있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에있는 인간적 언어의 오류를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며, 성경의 역사적 또는 과학적 오류와 신학적 모순과 무엇보다도 유대적 성격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성경에서 정확무오한 성격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고집과 불순종이라고 했다.”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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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1) Ibid. p17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성경이 정확무오하다는 것을 부정 한다. 성경을 정확무오한 것이라고 주장 하는 것은 기독교의 메시지의 중심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성격과 하나님의 계시의 은폐 성격을 공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나님은 계시 이면에 숨어계시는 하나님인데 성경을 정확무오하고 유일한 법칙이라고 규정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유를 성경 계시 속에 가두어 두기 때문에 잘못이라고 했다. 계시가 항상 은폐되어 있는 것처럼 신앙도 늘 숨겨져 있다. 계시는 간접적으로 성경 말씀과 동일하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와 계시에 관해서 인간의 인식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라는 유일한 [사건]에 참예함으로서만 실재화(實在化)한다. 이간이 계시의 사건에 참예됨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계시의 주관적 실재자인 성령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원에서 하나님의 자녀이다. 주22)
여기서 바르트가 말한 [영원]이라는 말은 직선적인 시간의 무한 연장의 시간(Historie)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초절주의(超絶主義)에서 말하는 초역사(超歷史)(Geschichte)의 사건과 만나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역사(Historie)적으로는 믿을 수 없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서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처럼 살 때 나를 통해서 예수님이 부활하게 하는 이 역사를 초역사(Geschichite)라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역사 속에서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현재 실존에서 성경과 동일한 행동으로 만나는 장소가 곧 복음이며 계시라고 한다. “바르트는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정통 개혁주의 자들에게 말하기를 유오한 인간의 책인 성경책 속에다 영원하시고 무한자이신 하나님을 가두지 말라고 했다.” 주23)
지금 까지 바르트의 성경관(계시관)을 보면 역사를 통해서 기록된 성경은 실존에서 초역사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 계시는 성경을 통해서 현재라는 실존에서 사건과 만났을 때 나타나는 것이 실재적인 계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하시는 은혜의 복음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시고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영원토록 구원 얻는 정확무오한 유일한 법칙으로 우리에게 주셨다는 정통 개혁주의 성경관을 필연적으로 거부하게 된다. 바르트는 성경에다 하나님의 은폐와 자유를 가두지 말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무한히 자유로우신 하나님은 현재 실존적인 사건을 통해서 계시하시는데 그것이 참다운 계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경관은 계시가 단순히 사람에게 향한 하나님의 서언(선포)가 아니라 계시는 만남이요, 대화라고 한다. 성경이 실재적으로 우리에게 오기 까지는 계시가 아니라고 한다. 이로서 계시자체의 개념을 파괴한다. 바로 이점이 바르트의 성경관은 키에르케고르의 초절주의 실존 철학과 슈라이엘막허와 헤겔의 변증법적 실존철학에 근거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스승 헤르만과 하르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바르트의 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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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1) Ibid. p17
주22) Ibid. p21
주23) [현대신학은 어디로] 바아론 저, 성문사 1969, p29
바르트는 하나님의 속성이라는 말을 즐겨쓰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 또는 하나님의 완전성이란 말을 자주 사용한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그의 진술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행동으로 계시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자신으로 말미암아 사신다. 여기서 [행동]이란 말은 일정한 형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해서 긍정과 부정으로 바뀌는 성질의 행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은 그의 행동으로 계신다”고 하면서 그가 인간의 사색으로 파악될 상태성(stative)에 속하지 않고 동태서(activistic)의 존재란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스스로 [결정]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자유의 개념이다. 주24)
바르트는 신관도 기독론으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를 얻지 않고는 하나님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던 그대로 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을 생각해서는 안 도니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그의 계시와 동일하시다고 했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를 통해서 인간에게 자기를 전적으로 주신다고 하면서 그의 주심은 죄인이 주는 것 같지 않고 자유 결정으로 주신다.
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자유하시는] 여기(실존)에 그의 은혜(계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행동]에서 구별하여 취급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별의 필요는 하나님의 본질이 전적으로 계시될 때 역시 전적으로 은폐된다는 사실을 기억시키는데 있다고 한다. 그의 본질은 전적으로 계시되지만 사람에게는 전적으로 숨기운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의 계시 배후에 그가 스스로 가지신 영원자존성과 단순성과 영원성 같은 비공유적 속성에 있는 것이아니라 그의 자유성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주24)
하나님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자기 자신이 아닌 타자(他者)가 되기도 하고 다시 자기에게 돌아갈 수도 있는 [자유]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본질은 그의 계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그는 외적, 내적으로 전체에서 존재할 수 있다. 그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행동으로 그의 본질에 속한 사항 들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타자]로 보는 것은 엄격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묘사할 수 없는 분으로 만든다. 그는 케이르케고르의 말을 빌어 하나님은 시공에 속한 어느 객체가 아님으로 [알지 못하는 분]으로, [혹은 측량 못할] 분으로, 감춰짐(은폐됨)이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그 분의 속성이므로 사람은 그 분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고 한다. 주26)
그러므로 바르트의 [타자]의 하나님은 알수 없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은 결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재하고 계신 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절대 [타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최선의 것을 아무리 검토하여도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의 선량과 지식은 부단히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다는 것이다. 주27)
그래서 바르트 신학을 위기 신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주권 앞에서는 완전히 무력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자유의지대로 이 세상 안에서 활동하시고 계신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의 신관은 인간의 활동, 종교, 윤리적 경험을 신학의 중심 과제로 삼으려고 하는 일에 대하여 비난하고 공격한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실존을 인간의 실존과 일체화 시키며 인간적 실존을 신적 실존으로 변화시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지금 여기(실존)에서 행동으로 만나야만 한다. 주28)
바르트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계시관을 부정하기 때문에 역시 정통적인 신관을 부정한다. 바르트는 계시(실존)와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고 해면서 하나님은 독단적인 하나님이여서 그의 의는 은혜 속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본성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속하시는 하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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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4) [바르트의 교의학에 나타난 신론, 그리스도론, 성령론] 박윤선, 바라 1990, p25
주25) [칼 바르트] p.26
주26) [현대신학 해설] p.28
주27) [신정통주의 신학] p.154
주28) [칼 바르트] p.27
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믿는자와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사랑)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신관은 실존적 방법에 의한 신관이다. 바르트가 신학에서 사용하는 실존적 방법은 중세의 신학자 안세름(Anselm)처첨 가능성을 논한 후에 현실성을 논하는 실재론적 방법과는 대조적으로 14세기 영국 유명론자(nominalist)인 옥캄(W. Occam)이 사용한 방법과 흡사하다.
그의 신관은 계시(성경) 배후에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의 현실성(실존)을 통해서 본 하나님의 자유에서 출발 한다. “이렇게 유명론적 혹은 실존적 방법에 의하여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를 말하는 바르트의 초월적 신관은 동시에 범신론적 성격을 가진다.”주29) 왜 그런가 하면 바르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 존재하는 존재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유일신 하나님이 아니고 실존 속에서 느끼고 의지하는 자기만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되었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을 취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범신론적 신관 때문에 오늘날 주로 바르트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W.C.C(세계 기독교 협의회)를 구성하여 모든 종교를 하나로 통일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에 관하여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심판한다는 것은 참 유일하신 사람인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것을 말한다. 반대로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참 유일하신 인간 그리스도가 선택을 받았음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인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유기(심판)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까닭은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버릴 수 없다 하나님이 인간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르트의 신관은 범신론적 신관이다.
개혁주의 신관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을 공유적 속성과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별하여 창조주와 피조물을 완전히 구별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신관은 하나님은 자신 안에 인간을 완전히 흡수해 버린다. 바르트가 범신론적인 신관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된 존재로 보지 않고 인간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케 하여 인간을 하나님 자신에게 완전히 흡수해 버리는 하나님으로 생각해한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관은 스피노자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스피노자는 인간을 신의 본질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양샹을 가지는 실체는 유일하고 무한하며 모든 것을 함유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주30)
이제 정통 개혁주의 입장에서 바르트의 신관을 비판 한다면 그는 실존주의 방법을 사용하여 개혁주의 시학과 떨어졌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3위1체 하나님과 멀어졌다.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범신론적 신관을 신봉하다보니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3) 바르트의 인간관
바르트의 인간론은 그의 신관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참여 하시며 피조물은 하나님에게 참여 한다는 관념을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전적으로 동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동일하게 되고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하게 되는 것은 직접적인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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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필자기 수년전에 계룡산에 있는 [세계 일가공회] 교주 양도천씨를 일부러 만나본적이 있는데 그는 바르트가 하는 말과 흡사한 말을 했다. 그의 주장은 물(物) 인(人) 신(神)은 동일하다고 주장하며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이며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양도천씨가 바르트의 주장을 따른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범신론적인 신관을 터득했는지는 알수 없지만 자기를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든 바르트의 신관은 양도천씨와 유사한 범신론이며 매우 이단적이며 위험한 신관이다.
주29) [현대신학은 어디로] p70
주30) [세계의 대사상] 스피노자의 [신에 관하여] 휘문출판사, 1988. p.209-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멀리 옮기시므로 인간에게 강림하신다. 다시 말하면 자기 계시의 주체가 자기를 피조물과 동일하게 하시므로 그의 창조의 대상(피조물)에서 자기를 전적으로 숨기신다. 계시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냥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대상화 하신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에게 대상화 하시므로 그는 진정한 사람이 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참 사람이시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멀리 옮기셔서 자기 자신이 진노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죄가 발생하였고, 죄가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가룟 유다를 시켜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게 그 일을 행하셨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자기 진노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진노는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최종적인 결론이다.
(1)예수 그리스도의 간접성
예수 그리스도는 독특하게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비록 하나님의 진노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노는 포기와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선택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의 진노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는 간접성이 있다. 이 간접성은 이중적이다. 인간이 하님의 계시와 실존에 참여하는 것이 피조성으로 밖에 참여하지 못 한다는 간접성과, 또한 피조성의 참여가 하나님의 기이한 성품을 상대하는 것인 만큼 인간이 깨닫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간접성이라는 것이다. 소위 바르트의 이중 간접성은 첫째, 계시가 피조물에 나타난 것만큼 타락한 세상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계시 효과의 간접성이고, 둘째는, 그 계시는 이중적인 것이니 인간으
로서는 알기 어려운 만큼 제이차적인 간접성이라고 한다. 주31)
그는 이 이중적인 간접성에 대하여 그의 교리학 제1권 제1부 172-175페이지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174페이지에 계시의 이중간접성이 피조물에 나타난다는 사실과 그 계시 행위의 자체가 하나님을 가리우는 불가사의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말로 보아서 바르트가 생각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인간관에 있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목격한다. 바르트는 그의 인간관을 가르켜서 신학적 인간관이라고 한다. 보통 인간관은 인간 현상을 취급하는데 그치지만 그러나 신학적 인간관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알려지는 진정한 인간을 포착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제3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이며 진정한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 받은 그대로의 인간이다. 바르트는 그인간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하고 유일한 모델 인간으로 삼는다. 인간이 인간적 성격을 소유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인간적 성경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만인 구원자로서 그리스도
바르트의 인간관은 개혁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명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의 배우자라고 하면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하여 지음을 받고 그와 함께 일생을 살도록 작정함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또한 그의 이웃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인간을 그의 이웃 사람 없이 생각한다면 인간을 바로 보지 못한다. 인간이 이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인간이 있을 수 없다. 주32)
이제 우리는 이웃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진정한 이웃 사람이라는 사실에 착안해야 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이 된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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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1) [칼 바르트] p.32-33
주32) [현대신학은 어디로] p.94
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을 위해서 있는 존재인 것이다. 예수님의 인간성은 철저하게 우리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제 그의 이웃 사람 예수를 가진 인간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언약의 배우자 인 것이다. 불 신앙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가 자신을 파괴할 수 없다. 아무리 인간이 타락한다 할지라도 그는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웃 사람 예수를 가진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주33)
이웃 사람 예수를 인간이 가졌다는 것은 예수가 인간에게 이웃 사람이라는 뜻 이상의 뜻을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이웃인고로 또한 인간의 대표자가 되며 인간에게 그의 삶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한다. 만일 인간이 그리스도를 떠난다면 인간의 그의 존재의 본성을 상실한다. 바르트의 인간관은 피조물로서의 인간보다 이웃 사람 예수를 가진 인간이 우선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인간이 예
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보장 된다.
바르트는 인간이 초역사(Geschichite)에서 그리스도께 참여해야 한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초역사요, 초역사는 그리스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피조물은 진정한 의미의 역사를 가지지 못하고 다만 어떤 의미에서만 역사를 갖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알려질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인간은 인간이 될 수 있다. 주34)
인간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이웃 사람이며 대표자인 에수를 통해서 초월적인 하나님 절대 타자인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그의 대표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진정하고, 유일한 인간 예수에게 이미 진노를 내리셨음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에게 내리지 않는다. 주35)
바르트에 의하면 선택과 유기는 궁극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하면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선택에 모든 사람이 포함 되어 있다. 우리가 선택자와 불택자를 구별한다면 이 두 가지의 유일한 차이는 자기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을 전자는 승인하고, 후자는 승인하지 않는데 있다. 그리스도께서 이삭과 이스마엘과 야곱과 애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가룟 유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포함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죄가 이미 정복당했다. 주36)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은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 전에 승리하신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실패하지 않은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주37) 마치 모든 위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것같이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인간관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어지며 또 유일한 참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계시에 참여함으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역시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선택과 화목이다. 인간의 죄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자기 자신을 거스리는 것이 죄이다. 죄는 인간에게는 불가능의 가능이 되었다는 것이다. 주38)
바르트의 인간관은 그리스도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유기될 사람은 없고 다만 죄는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 그것이 죄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그리스도께서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은 유기되거나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웃 사람으로 참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언약의 배우자로 영원 전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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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3) Ibid. p.96
주34) [칼 바르트] p.35
주35) op.cit. p96
주36) op.cit. 41
주37) op.cit. 97
주38) Ibid. p.43
나님이 예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의 대표자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다고 한다. 이같이 바르트는 정통 개혁주의 인간론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만인 구원설을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구태여 전도가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필요 없다. 이런 이론을 신봉하면서 전도, 교회, 지옥, 천국, 심판을 말하는 것은 참으로 교인을 속이는 것이요, 지극히 바리세적기이라고 할 수 있다.
(3) 영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고 제한한다.
바르트의 인간관에 있어서 두 번째로 중요한 명제가 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육신을 다스리는 혼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의 혼을 말하고 인간이 존재할 때 가지는 형식은 그의 육을 말한다.고 했다. 바르트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에 관하여 그리스도적 해석을 내린것과 같이 [혼과 육으로서의 인간]에 관하여 그리스도적 해석을 내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 구조를 정당하게 이해 하려면 인간의 진정한 이웃이며 대표자인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39)
진정한 인간 예수는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육신을 가진 영혼이며, 영혼을 가진 육체이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며, 영혼과 육체을 동시에 소유한 인간이며, 그러한 인간으로 그가 살고, 죽었으며, 부활했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이다. 이 진정하고 유일한 인간 예수 안에서 영혼과 육신은 불가분리 이며 영혼과 육신이 합하여 한 인격체를 구성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인간의 존재구조를 말함에 있어서 혼과 육으로 말하는데 그치지 않고 영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영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영을 가진다 그러나 인간이 영을 가진다고 하기 보다는 영이 인간을 가진다는 것이 옳다고 했다. 영이 인간의 존재 구조에 속한 다는 것은 영이 인간의 존재를 결정하고 제한하는 근거가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영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를 맺고 친교를 성립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이란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에 대하여 행하는 사역이며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움직임이다. 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게 하며 그의 육의 혼으로 살게 한다.
이제 우리가 영을 소유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가능성을 받을 때 우리 안에서 혼의 통치와 육의 봉사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제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 안에 있는 통치하는 혼과 혼에 봉사하는 육은 유추적(類推的)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한다. 인간의 혼이 육을 다스리며 인간의 육이 그의 혼을 섬기는 것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몸된 교회의 통치자로서 존재하고 그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봉사자로서 존재한다는 명제는 결국 그리스도의 이미지에 결부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4) 바르트의 기독관
바르트는 성경 계시론 과 신론, 인간론 모두 기독론에 중심하고 있기 때문에 이같은 교리들을 연구하면서 중복되는 설명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르트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참 신이요, 참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로우시며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유롭다고한 바르트의 이 주장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 것이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때는 자충족(自充足)하신 내재적(內在的) 또는 실체적(實體的)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하여는 자충족 하신 하나님께서 인성을 그리스도와는 따로 창조하셨다고 한다. 주40)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체와 영혼에서 인적 발전은 통상적인 법칙에 복종하셨다. 즉 그는 자라며 강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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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9) [현대신학은 어디로] p.98
주40) [칼 바르트] p.44
지고, 지혜가자라고, 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며, 순종을 배우며, 시험을 당하시고, 수난을 당하셨다. 워필드는 말하기를 예수는 지혜와 그의 인성의 모든 특징들에서 그의 전 지상 생활기간에만 아니라 그의 승천 이후에도 계속해서 지혜와 인성이 증가하신다고 했다.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기 때문에 사람이며, 참 사람이시니 사람의 어떤 것 전부요, 사람됨에 전부이다. 모든 시대들을 통하여 여원의 영원까지 그러하다고 했다“ 주41)
정통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이 되어 인간과 똑 같은 성질을 가지고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존재하신 역사 속에 인물이시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선택하기도 하고 그리스도 밖에서 사람을 버리기기(유기)도 한다.
(1) 하나님의 3위1체를 부정하고 통일된 한 양태로 본다.
바르트는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을 주시지 않는다. 그는 인간과는 먼 거리에 계신다. 즉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에서 자충족 하게 독립되어 있다. 그 신성은 성육신해서도 인간에게서 격리되어 있어서 공통성이 없는 속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라는 면에서는 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인성도 본래 그에게 속하였던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삼위이신 그가 역사적 아담에게서 유래한 인성을 자기 자신에게 취하셨다.
그러므로 이 인성도 역시 그리스도와는 별도로 그 자체의 속성과 자질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인성을 자신에게 취하실 때 이 인성은 참으로 그의 신성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인간 예수)이 체계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서로 관계된다고 말하는 것이 바르트의 기독관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실체론적, 인식론적, 근거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사상 대신에 변증법적 관계에서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라는 개념을 말한다. 주42)
이와 같이 바르트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완전히 분리해서 인성을 취할 때는 신성을 취할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다. 바르트 신학의 특색은 3위1체 하나님을 부정하고 모든 신학 체계가 그리스도를 중심하며, 하나님은 인간 과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기독론은 하나님이 자기와 다른 분이되시고도 자유롭게 자기로 그냥 계속 계신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격위들은 모두 자의식이 있는 3주체가 아니고 유일신 한 분의 존재 양태를 3가지로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즉 3위1체 하나님을 기독론에 통일시킨 바르트 신학은 기독론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통일된 한 양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여기서 양태(樣態)란 실체의 여러 변화 상태인데 그리스도는 타자(他者)안에 존재하며 타자에 의해서 사유(赦宥)되어질 뿐이다”라고 했다. 주43) 바르트는 스피노자와 하이데거의 양태론적 타자의 하나님을 자기 신학에 옮겨 온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삼위1체의 하나님인 제2위 되시는 그리스도가 주체라기보다는 신적 실존의 한 양태라고 하면서 계시의 은폐성과 자유성을 겸하여 주장하면서 3위1체 교리를 삼신론에 이르게 된다고 비판한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과 외적 활동을 동일하게 여기므로 성립되는 하나님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이로써 바르트는 모든 것은 존재인 동시에 계시라는 하나의 원칙아래서 해석한다. 존재와 계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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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타자는 자아의 상대개념이다. 인간은 홀로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나의 타자가 된다. 하지만 인간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므로, 무세계적 주관일 수도 없고, 타자 없는 고립된 자아일 수도 없다. 종종 현존재에게는 타자와의 관계 방식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바람직한 관계방식인가의 여부를 떠나서, 현존재는 언제나 타자를 의식하고 고려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점에서 현존재에게 타자는 이미 언제나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타자들은 눈앞에 있는 현전자도 아니고 손안에 있는 용재자도 아님은 물론이다. 그들도 나와 같은 현존재이다. 그들도 나처럼 현존재이며 세계-내-존재로서 도구적인 것을 둘러보는 가운데 고려하며 실존한다.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 세계이고, 이 공동세계 속의 우리는 서로 타자이지만 동시에 공동 현존재(Mitdasein)이다
주41) [교의신학] 박형룡 저 (은성문화사, 19730 p.56
주42) [칼 바르트] p.46
주43) [세계의 대사상] 스피노자, p.209
초역사(Geschichite)에서 하나님의 지체함이 없는 계시가 임했다는 것이다. “초역사는 그리스도인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의 사실을 포괄하고 있다. 이 초역사는 그리스도가 유일하고 진정한 사람인만큼 이러한 사실들을 포함한다. 그것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포함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행동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참여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참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과 전적으로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한다고 했다.”주44)
(2) 예수님의 탄생
바르트 신학은 근대 실존주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키에르케고르와 칸트, 그리고 헤겔, 스피노자와 자유주의 신학자 다비드 흄과 슐라이엘 막허, 헤르만과 하르낙 부른너 등 신학과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우연을 모든 실존의 한 방면으로 생각한다. 특히 인간을 하나의 우연이라고 표현하고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연 속에 들어오셨다고 했다.
바르트를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활 그리고 죽은과 부활에 대한 바르트의 사상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쩨 문제는 그의 동정녀 탄생 문제이다. 에밀 부른너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을 보고 바르트는 부른너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기를 바랬다. 그러나 바르트가 말하는 동정녀 탄생의 주격은 3위1체의 2격이 아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현대신학이 말하는 것같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 계시의 순수한 은폐 또는 순수한 우연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르트는 부른너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에 대하여 비평을 가 했으나 그가 가한 비평은 동정녀 탄생을 부인함으로 하나님의 은폐성을 바로 내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은폐성과 계시는 실상은 개혁주의 신학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도구로 사용해야 하는데, 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부른너는 생물학적인 사실에 의해서 동정녀 탄생을 부정하며 그리스도의 초역사와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오산이라고 했다. 바르트는 전통적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했다. 바르트가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같이 나사렛 예수의 생애에 관한 정통 개혁주의 신학도 부정한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다고 말할 때 성령이란 말은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참여 하게하는 가능성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자유롭게 되며,성령을 통하여 모든 사람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동정녀 탄생에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이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자유로와지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실존과 행동에 참여한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가 의미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성경은 직접적이 아니라 간접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이 직접적인 것이 아니고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모든 역사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는 계시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책은 선지자들과 제자들이 기록한 역사적인 책이기 때문에 계시가 될 수 없고 성경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현재 실존에서 나타나는 행동이 참 역사이며, 참 계시라고 한다. 바르트는 일반역사 속에서 기록된 성경 속에 숨기시는 하나님과 그 성경 배후에서 현재 행동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통해서 나타나시는 실존적 행동을 진정한 계시라고 한다. 바르트는 실로 성문화 된 특별계시 인 성경을 믿지 않고 성경에서 파생된 실존적 행동을 계시로 믿는 것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전적으로 계시 되어있다고 거듭 주장하지만 이와 동시에 이 계시에서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폐되신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역사상 누구든지 갈릴리 해변에 걸어다닌 사람을 가리켜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다] 예수님도 친히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못했다고 했다. 주45) 이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보통 역사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직접 지칭될 수 없다는 주장은 그의 기독론 원리에서 시종일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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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4) Ibid. p.50
주45) [칼 바르트] p.54
(3) 예수님의 무죄성
바르트는 [누구든지 나사렛 예수의 무죄하심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다른 사람 또는 종교적 선생과 달리 규정짓는 의미에서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이 유달리 완전한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을 참고하면 된다. 성경은 오해와 모순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대로 성경을 자기의 말씀이라고 하고, 성경으로 자기를 게시하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나사렛 에수가 사람이며 유대의 선생으로서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종교적 선생과 유리하게 비교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서 전적으로 게시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죄성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그의 어떤 완전성을 이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욕망하지 못하는 것을 하시려는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고 한다. 주46)
바르트의 예수님의 무죄성에 대한 견해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예수님은 사람들의 표준이라고 하는 관념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람에 이르게 하는 표준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규범과 표준이 될 수 있다. 그는 유일하신 참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이상적 인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여부는 첫째 예수님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상적인, 또는 표준적인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둘째 하나님을 전적으로 숨기는 예수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상적 혹은 표준적 인간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셋째 사람들이 이상적 또는 표준적 인간에 대하여 스스로 작정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계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숨기는 것이라고 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그리스도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만 그리스도를 알며 겸하여 자신들을 알게 된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동참함으로 사람으로서의 진정한 인식에 도달한다. 그 후부터 그들이 그리스도를 한 인간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동료인간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료인간 동료 생존자들로 인식하기만 하면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주47)
(4) 대리적 속죄
바르트에 있어서 예수님의 대리적 속죄는 예수의 무죄성에 포함된다고 할지는 모르지만, 예수의 무죄성 그것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것이 그의 대리적 속죄인 셈이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그의 무죄성은 첫째 그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사신다는 뜻인데 그와 같이 함으로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한 표준적인 대리자이다. 둘째 그런 의미에서 무죄자이신 그는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택하신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신을 대리적 구속자로 보내신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르트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보낼 그리스도의 배후의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선택하심에 있어서 그는 다른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선택하신다.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
스도는 첫째 아담과는 달리 하나님의 심판아래 자기를 복종시켰다고 한다. 주48)
그의 대리적 속죄는 구주로서의 그의 사건에 그들이 동참함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사렛의 랍비에게서 예외적으로 탁월한 도덕적 신분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초역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지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첫째 아담을 통해서 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도 죄를 지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참된 존재는 일반 역사에는 없고, 초역사, 즉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서만 존재 한다.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대속은 보편적 속죄를 말한다. 그의 보편적 속죄 설은,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자기를 유기했기 때문에 이제 이 땅에 유기 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이미 자기를 선택했기 때문에 인간의 표준이 되는 예수로 말마암아 모든 사람이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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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바르트의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은 3위1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유일하게 예수 그리스도만 인정하기 때문에 보내심, 선택, 구속 등은 모두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행위이다.
주46) Ibid. p.56
주47) Ibid. p.57
주48) Ibid. p.59
택 되었다고 한다. 그는 타락전 선택을 말하며 예정을 주장한다. 그리고 무조건적 선택을 주장한다. 그러나 타락전 예정이나, 무조건적 선택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 말하는 원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보편적이고 전 우주적인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즉, 성경 속에 은폐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르트의 대리적 속죄는 기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부정하는데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신학 체계는 정통 개혁주의 신학 구조를 어느 한 부분이라도 뒤집지 않고 그대로 나둔 곳은 하나도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악한 정통 기독교 신학은 번증법적 원리를 주장하지 않고 조직적 원리를 계속하여 주장함으로 사람들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앗아 간다고 비난하면서 정통 신학은 스스로 숨겨지신 하나님에 대하여 마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인간에게 알려지는 하나님이 있는 것같이 말하기 때문에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나사렛 예수를 유일한 참 인간으로 여기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고 비난한다. 주49)
(5) 그리스도의 부활
바르트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루돌프 불트만과 묵시적인 담화를 했다고 했다. 그는 불트만의 비신화를 단호히 반대하고 자기의 입장을 세웠다. 에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목격된 사실로 경험된 것이다. 부활기사는 모호함과 모순됨과, 신화, 전설로 착색하고 있기는 하나 부활 기사가 우리에게 비역사적 혹은 전역사적(前歷史的) 형태로 임한다고 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에게 목격 되었다는 것은 불트만의 견해와 반대되지만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정통 신학을 가르켜 복음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에 있어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역사 그 자체는 결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 못 된다는 주장을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생물학적 동정녀 탄생도 없다고 하며 나사렛 예수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죄인들로서 존재하는 사람들을 위한 유대인의 랍비(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대리적 속죄라는 것도 없다고 한다. 그는 예수의 부활도 마찬가지 원리로 취급한다. 주50)
바르트는 예수의 부활을 일반역사 사건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확실히 그의 부활은 있었다. 그것은 시간적 사건과 공간에서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간(역사)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초역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은 순수한 현재라는 시간이다. 그 부활의 시간은 월력에 표시된 시간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주51)
보통역사의 사건들은 어디서나 사람들이 계획적으로 취급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사건은 그의 제자들에게만 곧 신앙의 눈에만 나타났다. 이것이 그렇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보통 역사에 일어나지 않고 초역사에서만 일어나는 까닭이라고 한다. 주52)
한마디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을 믿지 않는다. 다만 그의 부활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의 극치를 표시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르트의 만인 구원설은 그리스도의 부활 그 자체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다.
(6) 바르트의 구원관
바르트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는자 천국과 불신자 지옥 아란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사람이 영원히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모든 사람이 다 영원히 영광중에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단언하지도 않는다. 이미 말한바와 같이 바르트는 정통 기독교의 특징을 그의 변증법적 원리의 특징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는 하나님의 계획고, 역사적인 창조와, 타락과 , 구속, 부활교리를 버렸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리스도의 재림도 역시 역사의 결정은 아니다. 그의 생각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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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0) Ibid. P.63
주51) Ibid. p.64
주52) Ibid. p.66
사람의 영원한 종말을 결정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왼편에 있는 자들의 최후 심판이란 있을리 없다. 바르트는 인류 역사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본질(사랑)포함시키는 통일원리를 주장하기 위하여 위의 모든 사실과 교리를 부정한다. 그는 인류역사는 그리스도의 초역사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바르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중생하는 교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개혁교회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에서 죄인이 빠져 나오도록 회심을 시키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데, 바르트는 전하는 자는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는 전도자는 성경이 영원한 형벌을 도무지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처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곧 예수님 하나님의 저주를 자신이 받았기 때문에 이 저주가 다시금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좌절시킬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유기자 이시다. 따라서 예수 밖에는 유기된 자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자들도 역시 선택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선택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해도 택함 받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의 빛 가운데 있다. 주53)
바르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신앙이 성경에 근거한다는 의미가 거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만 구원 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바르트는 모든 사람이 성경을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구원이 결정되어 있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도자가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바르트의 기독관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즉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자기 자신에 대하여 타자가 되시며, 인류를 자기 자신에게로 이끄는 하나님과 모든 사람이 본래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것을 고찰 했다. 이 세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은폐 되시고, 전적으로 계시 되시는 하나님의 본질인데 후사에 중점을 둔 것이며 이것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본질적으로 포함한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이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원 은혜의 복음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반박하지 못 한다면 교회의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바르트 신학은 현대 철학에 근거한 변증법적 유신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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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3) Ibid. p.69
4. 바르트의 성령론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자유로 피조 세계에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피조물에 생명이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특별히 계시 활동에 있어서 사람에게 오실 뿐 아니라 그 사람 속에 계셔서 그로 하여금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바르트는 여기서 성령의 사역을 인간의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삶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성령은 구체적이고 이해 가능한 삶의 특성들과 행동들을 불러일으킨다.
1)하나님의 자유
바르트가 말하는 [하나님의 자유]란 실존주의적 자유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두 단어에 불과하지만 이 자유라는 말은 그의 신학 전반에 있어서 정통 개혁주의 신학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하나님의 자유]라는 말 때문에 [피조물(세계)에 대한 성령의 내재적 활동]이 상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찰라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인식 능력과 선택 능력에 의해서 자유를 얻고, 믿음에 이르게 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진술은 그들의 귀납적 사고의 결론이 아니라, 그들의 새로운 연역적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소위 인간에게 이미 내재한 능력이라는 잘못된 사고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 “새로운 능력”, 즉 믿음의 능력은 하나님의 계시에 상응하여 성령이 일으키시는 종말론적 현실성이다. 이 현실성 안에서 성령은 인간을 자유케 하는 분으로 자신을 예시 하신다. 그 안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자유 개념은 실존적 자유 개념인데 피조물이 하나님의 능력에 접촉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에 있어서 실존적 자유 개념을 말하지 않고, “성령이 친히 우리 영(심령)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 나니”(롬8:16)라고 했다. 참으로 믿는 사람 속에 하나님이 거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신다(롬8:9) 그 뿐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말씀도 있다(고전2:12).
바르트가 성령을 실존적으로 진술한 것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더욱 강조한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되 시간 세계의 것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서 시간 세계는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초역사(행동적 실존)를 말하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신앙에 대하여 기적적인 요소이며, 시작이며 끝이고, 보이지 않으시며, 보이는 인간 세계 밖에 계시며, 심리적 분석 건너편에 계신다고 하면서 그분은 종교적 체험이 발견하지 못한다고 했다. 주54)
바르트가 하나님은 시작이며 끝이라고 말한 뜻은 시공세계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성령을 접촉하는 듯 마는 듯 하는 동안에 접촉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인 동시에 끝이라는 것이다. 결국 접촉이라고 할 수 없는 불확실한 접촉이다. 바르트는 실존주의 인식론으로 영계를 증명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인식론에 있어서 영계는 불확실성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실존주의 특성이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의 역사에 대한 신자의 지식이 불확실하다고 하지 않는다. 성령의 역사를 받은 신자는 획기적으로 확신과 담력을 가진다고 했다.(행4:8,9, 9:17-21, 13:19) 성령께서 시간을 잡으시고 말씀도 하셨고, (행13:2, 18:9-10, 21:11, 23:11, 27:23-24).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기도 하셨다(행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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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귀납적-개별적인 특수한 사실이나 원리로부터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명제 및 법칙을 유도 해내는 일
연역적-어떤 명제로부터 추론 규칙에 따라 결론을 이끌어냄 또는 그런 과정이다.
귀납적-한마디로 관찰을 통하여 과학적 지식이 도출 된다는 것이다.
반대로 연역법은 어떤 가설을 설정해놓고 그에 따른 경험을 하면서 지식을 도출하는 것이다
주54) [신학정론 3권] p.187
2) 구원 사역
바르트는 성령의 구원 사역에 대한 교리를 진술함에 있어서 역시 실존주의적 색체를 가지고 있다.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는 부정적이고, 교리학에서는 긍정적이므로 정통적인 것 같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그의 변증법적(부정과 긍정을 같이 시인함) 사색은 성경이 아니다.
(1) 거듭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
바르트는 거듭난 사람에 대하여 “세 사람이란 비존재(非存在) 밖에 존재를 소유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의 교리학에서는 이 말과는 정 반대로 [성령의 세례는 사람 위에서 또는 그의 안에서 효과적이고 창조적이다. 그것은 참되이 또는 전적으로 사람을 깨끗이 하며 변화시킨다. 이 일은 비유가 아니고 현실이다]라고 했다. 위에서 바르트는 중생에 대하여 두 가지 모순된 말을 하였다. 그가 로마서 주석에서는 중생한 사람이 현실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했고, 교리학에서는 중생한자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존재라고 했다.
이 같이 두 가지 모슨된 말은 긍정과 부정의 건너편에서 진리를 찾는다는 그의 변증법적 사색이다. 그것은 성경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그의 사랑과 능력에 의하여 역사 세계에 들어 왔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롬8:9-10에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신자들 속에 거하심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고 있다.
(2) 사람을 회개시키는 성령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회개는 사람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최후로 고상하게 이룬 의에 성취가 아니고 회개는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의(義)의 기초적 행위라고 말했다. 그는 회개라는 것은 인류에게서 초절(실존)한 순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진술한다. 그의 교리학에서 [회개]에 대하여 인간의 행위 면이 있다고 말하면서 긍정으로 바꾼다. 그는 말하기를 [회개의 각성은 하나님의 행동 법칙에 의하여 발생하며 하나님의 질서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 행동의 여건과 형편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도 사실이다]라고 한다. 주55)
바르트의 이 같은 변동(變動)은 변증법적으로 사색하는 실존주의 철학 사상에서 생긴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시공(時空)세계에 그대로 들어 올 수 없으므로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항상 부정과 부정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확실하게 나타난다. 다윗의 회개가 확실하고 (시51편) 베드로의 회개도 확실하다(마26:75) 한마디로 바르트의 신학은 사람을 회개 시키는 성령은 회개 시킬 수도 있고, 회개 시킬 수 없기도 한다. 이는 실존주의 철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오히려 사람들에게 문제만 안겨주는 것과 똑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바르트의 신학은 실존철학에 뿌리를 내린 초절(실존)주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성령의 역사
성경적 정통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신앙은 복음을 듣는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되(롬10:17) 듣는 사람의 마음에 작용한다(행16:14)고 했고, 신앙이 좋은 사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해지는 되 그것은 그리스도를 일관성 있게 믿는 사람에게 생긴다고 했으며(요8:30-31), 신자가 덕을 행함과 함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말했으며(갈5:16, 약2:17,26), 책임과 의무를 잘 감당하는 성도가 성령이 충만하고(행4:8, 5:41, 딤전3:13), 자기의 마음을 믿기보다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은 역사한다(엡6:10, 딤후2:1)고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신앙을 기리켜 [진공]이라고 했으며, 신앙은 인간적 내용을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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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5) [신학정론 3권] p.190
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나님이 인정하신다. 그러나 그의 교리학에서는 달리 말하기를 인간의 행동으로 서의 신앙은 인정과 고백과 인식으로 성립 된다.고 했다. 그는 영적인 문제와 구원문제를 변증법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문제를 부정과 긍정의 교체에 의해서 논하면서 인간이 진리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이 긍정과 부정의 원리를 헤겔철학에서 도입한 것이다.
폴 틸리히 역시 실존주의적 해설이 바르트와 비슷하다. 그는 말하기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신아의 행위로서 담력의 모험을 요하는 것이다. 이 같은 행위는 궁극적으로 그릇된 상징을 능히 긍정하는 행위이다. 신앙은 확실감과 의심을 섞어 가지는 것인데 의심도 신앙의 요소라고 했다. 이 같은 틸리히의 말은 바르트와 같이 영적사리(靈的事理)들에 대한 실존주의적 해석이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역사적 사색이나 행위가 영적인 이치를 확실히 파악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을 모험으로 말하지 않고 의심 없는 순수한 것으로 진술한다(약1:6-8, 벧전1:8). 에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셨고(막5:36),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9:29)고 했다.
(4) 성화와 성령의 역사
성도를 성화시키는 분은 성령님이시다(갈5:22-23), 그러나 신자는 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전15:58, 빌2:12, 골3:5, 히12:4). 그러나 바르트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성화는 현 세상에서는 불가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는 말하기를 [새 사람(성화된 사람)은 인간의 현실 생활에서 실제 된 데로 영점이고 그의 영원계에서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성화는 인간측면에서는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고 하나의 부정이다. 그는 절대적으로 전 타자인만큼 현실적 자아와 정반대이다. 그는현실적 자아가 아닌 자이다]라고 했다. 주56)
이와 같이 바르트는 성회에 대하여 조철(실존)주의로 진술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교리학에서는 이런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재래 개혁주의적 진술을 답습하는 것 같이 보인다. 칭의와 성화는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 나누일 수 없다고 하면서 첫째, 칭의 와 성화는 서로 독립된 행위가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하해운동의 두 가지 방편이라고 했다. 둘째,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어떤 이념에 속박시키려 함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합시키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셋째, 성화는 행위와 관련 되었다고 한다. 행위가 공로는 아니지만 신자는 선을 행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했다. 넷째, 신자들이 십자가를 짐로 성화된다고 했다. 그는 십자가를 지는 효과는 4가지로 나타난다고 했다. 즉 겸손하게 만들고, 죄값으로 벌 받는 훈련을 주고, 신앙과 기타 덕행을 형성하는 훈련이 되고, 고난 때문에 신자 자신의 정체가 알려진다고 했다.
위의 바르트의 말은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말하는 것과는 정 반대이다. 이렇게 부정에서 긍정으로 옮기는 그의 논법은 변증법적 사색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그의 진술은 유동적이고 불확실하니 성경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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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6) Ibid. p.191
5. 바르트의 교회론
바르트는 자연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본질적 단절을 주장하는역설적 혹은 초절(실존)주의 변증법적 신학을 수립했다. 로마서 주해를 집필하던 1918년경에 바르트가 주장한 역설적 변증법적 신학이 후기에 와서 다소 수정된 것은 사실이나 그는 끝까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입장을 유지했다.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원리는 그의 신학 전반에 영향을 미쳤는데 여기서 그의 변증법적 신학원리가 그의 교회론에 어떻게 반영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의 바르트는 교회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는데 후기에 와서는 긍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1) 부정적인 견해
그가 로마서를 집필하던 초기 바르트는 교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인간과 역사가 신과 계시로부터 무한이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가견적 교회는 복음과 계시가 모순되는 것으로 보았다. 복음은 교회를 녹여 없애고, 교회는 복음을 녹여 없애고 만다고 했다. 가견적 교회는 인간이 이루어논 가장 커다란 성취인바 신적인 것을 인간화하여 자기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인간적 시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정적인 기능만을 발휘한다. 즉 교회는 인간의 죄성과 어두움만을 드러낸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주57)
(1) 로마케토릭에 대한 비판
바르트가 살았던 시대는 역사적으로 신학적으로 격동기로서 그에게 신학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르트는 그 시대에서 새로운 반성을 통하여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자펜빌(Safenwill)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종종 교회를 주제로 설교 했다. 그의 지배적이고 특징적인 관심은 무엇보다도 매우 진지하게 로마 카톨릭교회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사실에 있었다.
그는 카톨릭 교회에 관하여 그리스도의 이름하에 버젓이 존재하는 이교적 우상 숭배이며, 거기에는 인간과 인간의 말과 행동을 찬양하느라 살아 계신 진리와 사랑의 하나님를 없애 버렸으며 순전히 외식적인 것이 되어 버린 종교로 마음과 양심을 빼 버리고서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소위 선하고 칭찬 받을 만한 행업에 몰두하느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고 혹평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이 카톨릭 교회 안에서 인간 본성의 악하고 저열한 충동의 욕구의 껍데기 속으로 빠져 든 것처럼 보았으며 여기서 바르트는 왜 종교개혁이 필요했었는지를 명시하였다. 1913년 11월 2일에 행한 설교에서 바르트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문자의 기독교, 과거의 기독교라고 표현하고, 그것은 영의 기독교의 진정한 계승자인 종교개혁 신앙과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주58)
(2) 개신교에 대한 비판
바르트는 초기 목회를 통해서 그의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던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 계기는 1914년에 발발한 세계 제 1차 대전과 이에 대한 독일의 93명의 저명 지성인들이 독일 황제의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포하였을 때 바르트는 그가 존경하던 스승들이 그 서명에 가담한 것을 보고 시민사회의 이데올로기화한 자유주의 신학의 이데올로기를 실감 한데서 시작한다.
자펜빌이라는 소도시에서 목회 하던 젊은 바르트는 새롭고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즉 무엇을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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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7) [신학 정론 2권] p.167-168
주58) [바르트의 교회론] (naver 검색)
교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항상 그의 고민거리가 된 것이다. 그는 열정적으로 참여하였던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첫 발을 내딛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새로운 출발을 결심하면서부터 그에게는 모든 기독교 선포 행위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완전히 새로운 관점이 강렬하게 일어났다. 그는 성경 속에서 전혀 놀랍고 새로운 세계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서를 거듭 다양한 눈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주석 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1919년에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주석서에는 낭만주의, 이상주의, 경건주의 및 종교사회주의와도 투쟁한 그의 내면적 고심이 드러나 있고 그 시대와 교회에로 향한 날카로운 비판이 번득거린다.
바르트는 로마서 9-11장의 주석을 통하여 교회와 이스라엘간의 연대성을 보고 하나님의 역사적 공동체인 이스라엘, 즉 교회는 궁지에 빠졌고 실로 사이비 교회로 타락했음을 비판한다. 교회의 궁지는 그의 숙명이 아니라 잘못 때문이다. 그 잘못은 교회가 하나님께 주목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만이 그의 사역 속에서 유일한 통치자가 되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였고 그 결과로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했다. 교회는 항상 구하고 듣고 기다리지 못했다.
교회는 의의 구호 아래서 자신의 의에 몰두했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일을 추구함으로 결국 하나님 자신과 치명적인 불화에 빠졌다. 교회는 믿음과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에 결정적으로 실패했다. 교회는 바로 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을 원치 않았다. 교회는 자신의 전통과 확고한 세상적 위치를 사랑하고, 자신의 생명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다고 하면서 인간적인 말들만 늘어놓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다고 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변종의 종교성, 경건, 기독교로 이해하거나 정치적. 문화적 이적 현상으로 이해했다고 했다.
여기서 바르트가 무엇을 배격하려 했는지 분명해졌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일을 인간의 목적에 유익하게 변형시키고,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안전한 길을 가려고 복음의 모든 거리끼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지 않고 인간적 복리에 맞게 그의 일을 뜯어고치려는 당대의 교회, 하나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에 몰두하려는 당대의 교회에 맞서서 맹렬히 항거했다. 이러한 교회는 결국 이스라엘이 추구했던 길이기에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 속에 처한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저버림을 받았으며, 이제 교회는 사이비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3) 경건주의에 대한 비판
바르트가 로마서 주석에 착수하려던 그 즈음에 당시 여러 종류의 문헌들을 통하여 경건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는 경건주의(Pietismus)에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경건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신학적 사고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비판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즉 개인주의와 기계주의에 근거를 둔 것이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 나라에의 참여는 인간의 개인적인 욕구와 사회적 욕구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스위스 내에 종교 사회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라가츠도 이에 참여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개인의 영혼 구원에만 국한하는 스위스 개신교의 보수주의에 반대하여 하나님 나라의 사회적 차원과 역사 내에서의 하나님 나라 실현 가능성을 강조하였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주의적인 영혼 구원의 갈망의 성취가 아니라 개별화로부터 벗어난 포괄적, 전체적, 영육적 삶의 유기체로 이해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과 우주의 생명력으로 인해 회복되는 완전한 세계적 유기체로 파악된 것이다. 바르트는 교회를 철두철미 유기적인 관계, 살아 있는 친교와 공존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경건주의의 개인주의는 철저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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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크리스토퍼 브룸하르트Christoph Blumhardt (1842-1919)는 우리 나라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독일의 루터파 목회자였으며, 엄밀한 의미에서신학자는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Johann Christoph Blumhardt는 독일 경건주의 전통에 속한 목회자였고, 치유와 축사를 강조한 은사주의적 인물이었다. 아들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무엇보다도 기독교 사회주의 즉 Christian Socialism 전통을 창출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치 참여에도 큰 관심을 가져 독일의 사회민주당 Social Democratic Party의 당원으로 폭넓게 활약했고. 그의 기독교 사회주의 사상은 후에 칼 바르트, 헤르만 쿠터, 레온하르트 라가즈에게 심대한 영향을 주다
라가츠(Leonhard Ragaz(1868-1945)는 스위스 산간마을 타민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종교사회주의자가 되었는데 헤겔의 역사철학이 그를 범신론자가 되도록 영향을 주었다.
2) 긍정적인 견해
바르트는 로마서를 재판하면서부터(1922년), 그리고 교의학을 출판하면서부터(1932) 교회를 보다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신과 인간 은총과 자연사이의 [접촉점]을 인정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인간적 존재에서 소급되는 [존재]의 유추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신적 본질을 제시하는 [신앙의 유추][계시의 유추] 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교회를 성육신하신 계속적인 활동과 관련하여 보기 시작했다. 결국 바르트는 교회를 기독론적 혹은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주59)
(1) 인류를 위한 교회 공동체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란 더 높은 뜻에 의해 형성되고 보존되는, 내적으로 필연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이 세상에서 개인의 불행한 처지로부터 건짐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집합이나 무더기가 아닌, 질서정연한 조직의 형태를 띠는데, 결코 자신을 위하지 않고 매우 활동적인 관계 안에서 서로에게 복종한다.
그러므로 분명해지는 점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기계적 일치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일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또한 지체들로 형성된 일치라는 것이다. 물론 이 공동체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몸 사상으로부터 도출되었으며, 따라서 바르트의 교회론은 이 사상을 근본적인 내용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 안으로 들어 왔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과 옛 세계 사이로 하나님 나라의 유기체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나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들어 왔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유기체 안에 뿌리박고 있고 그 안에서 성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된 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 세상에서 그 머리가 당하는 고난에 참여하면서 성장하고 완성된다.
바르트에 의하면 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이기도 하다고 했다. 블룸하르트를 통하여 바르트는 하나님이 세상의 전적인 갱신자이며 세상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새로운 자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요, 그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기체요 그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신실로부터 믿는 자에게 주어진 성향을 통해 인간은 하나님의 의의 성장,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로 이식되었다. 이 하나님의 나라의 공동체인 교회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에 있어서 교회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곧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바깥을 향해 존재한다. 물론 그는 교회가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 설립과 더불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교회는 자신에게 부여된 전권에 힘입어 세상으로 보냄 받음으로써 그 자체상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는 교회가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세 가지 임무가 있음을 말한다.
첫째는 교회가 세상에 관하여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화해 행위의 계시와 인식에 근거한 세상 지식 속에서 세상과 대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는 곧 전적으로 세상에 참여해서 세상의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우는 것을 말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봄으로써 세상과의 연대성을 인식하고 확증하게 된다.
셋째는 교회의 주어진 책임성이다. 교회가 세상에 관해 앎으로써, 교회가 세상과 연대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으로써, 교회는 세상에 대해 함께 책임적이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대성 아래 세상 속에서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고통을 받고, 세상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에 대면해서,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일에 함께 협력하고,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특정 시대 속의 명확한 고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은 교회로 하여금 당대의 시대사에 대하여 책임적이게 한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선포할 때, 시대를 떠난 어떤 추상적인 영역 속에 있지 않고 바로 그 시대 속에 있기 때문에, 교회는 시대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과 연루되어 있고, 그것의 도전과 요구를 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시대에서 시대사에 참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르트는 당시 독일의 고백교회가 증언해야 할 세 가지 책임을 지적하였다.
첫째는 교회는 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것을 증언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악한 세상도 통치하시며, 악한 사람들의 주(主)도 되시며 그들의 심판자, 구원자 및 보호자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은 지상에서 옳고 자유로운 국가를 필요로 하신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정의와 자유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백성들과 통치자들에게 증언해야 할 사명이 있으며 국가 안에서 국가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셋째는 사죄에 관한 말씀으로 교회는 죄인이라도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생명을 얻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르트는 교회의 임무를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 요약하고 있다.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자로서 그 시대를 가장 잘 이해하고 시대에 필요한 교회의 역할을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바르트는 교회 공동체라는 말로 장차 휴거할 유기체로서의 가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주의에 입각한 사회 개발과 사회개혁의 주체로서의 교회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영향은 블룸하르트와 라가츠의 기독교 사회주의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세상으로 들어온 교회
바르트는 교회가 단순히 인간적 성취가 아닌 신적 제도라고 한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는 신이 제정한 공동체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발생한 신앙과 순종의 공동체이다. 그는 교회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실제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요, 도구이다. 교회 안에 신앙이 존재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교회는 신적기관이이라고 말하면서 바르트는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그의[교의학]에서 분명하게 나타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적이며 인간적인 사건이 계속적으로 발생하는 장소이다. 영원히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역사 안에 들어와 성육신 하신 것처럼 선택과 소명과 조명과 칭의로 불가견적인 교회가 성육의 사건과 상응한 가견적 교회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바르트의 긍정적인 교회론은 그의 후기 작품인 [신의 인간성](1956년)에서 나타났다. 교회는 두 영역이 만나는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 땅위에서 머물기를 원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인간성이 땅위의 시간과 공간에서 구체적 형태를 취하시기를 원하는 곳이라고 했다. 주60)
(3)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하신 것
바르트는 교회를 말씀의 성육이 반복되는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묘사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하신 사건의 반복이라고 했다. 바르트는 반복의 사건을 말씀의 계속적인 활동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하면 한번 육체를 입으시고 말씀하시던 그 말씀이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시고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을 창조한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의 천상적 존재의 지상적 반영이요 형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가견적 교회와 성례 안에서 지상적 실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주61)
이 반복되는 신적 사건은 그 근거를 성부 하나님의 화해의 영원한 섭리애 두며, 성자의 성육 안에서 객관적으로 한번에 실현되었으며 그리고 그 성령에 의하여 개인들 안에서 주관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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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0) Ibid. p.170
주61) Ibid. p.171
이와 같이 교회의 3위1체론적 이해는 이미 바르트의 과도기 때 형성 되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교회는 신적 화해의 섭리에 의해서 영원부터 재정 되었고 말씀의 성육에 의해서 시간 안에서 실재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에 부르심에 의해서 하나의 인간적 조직체와 제도롤 성립되었다고 한다. 바르트는 이와 같은 3위1체론적 교회 이해를 그의 [교의학]에서 더욱 분명히 했다. 성경에서 선택의 개념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교회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과 직접적이고 분리할 수 없는 결정적 연합의 관계를 가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계시가 참으로 [시간화] 되었고 그래서 우리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실재적 사건들처럼 시간적으로 결정되고 제한되었다고 하면서 바로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중간기적 형태의 예수 그리스도의 귀환(재림)은 성령의 약속 안에서 오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 안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시고, 존재하시고, 활동하심을 의미한다. 역시 비르트의 교회론은 범신론에 입각한 교회론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와 성령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 통일을 이루게 하는 일체론적 교회론을 주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초절(실존)주의적 변증법 교회론 이라고 볼 수 있다.
(4) 초절(실존)주의적 변증법 신학
바르트는 여전히 역설적 혹은 초절주의적 변증법적 교회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복 수 있다. 바르트는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영역은 여전히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영역에 머문다고 주장하면서 주어진 신적인 것을 단지 교회에 반영하는 것뿐이고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 비시간적 혹은 비공간적 초역사(Geschichite)안에 머문다고 했다. 바르트는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역사적 제도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의 의미로 이해했다. 그는 말하기를 [성령의 깨우치는 능력은 지상적 혹은 역사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증거의 능력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주62)
바르트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응답(긍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바르트는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닮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존재 안에서 그의 존재를 증거 하도록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안에 신의 속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신의 속성에 근거해서 하나님과 동일 수준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믿는 자의 공동체인 교회는 은혜의 신비를 소유하는 신적이며, 인간적인 실체가 아니고 단지 인간적인 반영(실존)에 불과하다.”고 했다. 주63)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소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은혜는 항상 새롭게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로 나타난다고 했다. 교회는 항상 성령이 내주하시는 장소도 아니고 성육의 연장도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몸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도 아니고, 교회는 하나님의 실재(실존)의 한부분이 된 것이라고 했다. 결국 바르트의 교회론은 그의 변증법적 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바르트의 역설적 초절(실존)주의는 결국 하나님과 계시를 인간과 역사로부터 단절시키고 역사(시간)의 연속성을 부정해버린 회의론과 부정주의에 빠지고 말았다. 따라서 바르트에게는 교회도 성경도 단순히 인간적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성경은 계시 자체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 자체도 아니며, 계시를 반영하는 싸인에 불과하다 고했다. 이로써 바르트의 교회론은 역설적 실존주의적 변증법 철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성경을 유기적 영감에 의해서 쓰여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않고 실존적 현실에서 하나님을 반영(투사)하는 도구로 보았다. 이와 같은 성경 계시 사상에서 발원한 교회론 역시 하나님과의 실존적 만남의 의미로 보았다. 즉 인간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 하는 것이 교회라고 했다. 그러나 개혁주의 교회론은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로 말씀하고 있으며(고전12:27), 성령 하나님이 친히 자기의 몸 된 가견적 교회(고전6:19)를 이 땅에 세워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르게 하여(마6:10), 주님의 재림과 더불어 무궁한 역사(시간) 속으로 옮겨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벧후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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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2) Ibid. p.172
주63) Ibid. p.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