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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25일
타계한 소설가 이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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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홍성식 |
2003년 2월25일 밤 10시 40분, 조선의 마지막 선비가 세상을 뜨셨다. 한국문학의 왕이 '붕어(崩御)'하셨다. 명천 이문구(62)의 타계는 내게 그렇게 다가온다.
사단(事端)은 미련한 내 손끝에서 시작됐다. 소설가 이문구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걸 처음으로 전해들은 건 지난 2월 초순 현기영(소설가·현 문예진흥원장)을 통해서였다. 마포에서 신촌으로 술자리를 옮기던 택시 안. "나는 이렇게 젊은 사람들과 좋은 술도 마시는데 나하고 동갑인 이문구는 사경을 헤맨다니 쓸쓸하다"는 말을 내뱉은 현기영의 얼굴이 어두웠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는 이문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재직 시절
사무국장으로 이문구를 보좌했던 이흔복 시인(그는 이문구의 타계 2주전부터
병실을 지켰다)의 전화를 받았다.
"성식아, 일주일을 넘기시기가 힘들 것 같다."
유명작가가 타계하기 전이면 문학담당 기자들은 미리 부고기사를 써놓고 별세한 날짜만 수정해서 기사화 한다는 풍문을 나 역시 못 들은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문구는 내게 문학담당 기자의 취재대상인 '한 사람의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지상에서 내가 진실로 존경하는 두 사람 중 하나였고(이는 아래 관련기사 '동인문학상과 이문구와 나'를 참고하기를), 내 손끝에서 먼저 그를 죽일 수는 없었다. 이흔복과 이산하(시인) 역시 내 생각에 수긍의
고개 끄덕임을 해주었다.
그리고, 2월 25일. 게으른 내 손끝은 핸드폰 배터리를 켜놓는 걸 잊었고, 새벽
2시는 돼야 기어들던 잠이 그날 따라 일찍도 찾아들었다. 깨어난 26일 아침.
핸드폰을 켜니 거기엔 작가회의 모순영 사무차장의 슬픈 목소리가 녹음되어
있었다.
"홍 기자님 제일 먼저 전화했는데 전화가 꺼져있네요. 이문구 선생님이 돌아가셨어요..."
모 차장이 그 메시지를 녹음한 시간은 이문구가 타계한 후 15분 뒤인 밤 10시55분이었다.
핸드폰을 던져두고 나답지 않게 참으로 나답지 않게 한참을 울었다. 그러나,
울음만으로 이문구가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참혹하게 깨닫는데 걸린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는 이제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는 곳, 우리와는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문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하고, 어떤 글을 써야할까?
<관촌수필>과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통해 가난하고, 소외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질박한 삶을 그만이 구사할 수 있는 문어체와 유장한 문장을 통해 소설화한 한국문학이 낳은 위대한 작가라고 말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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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6월 고향인 충남 보령을 찾은 독자들과
자리를 함께
한 이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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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홍성식 |
<매월당 김시습>과 산문집 <나는 남에게 누구인가>를 통해 스스로 금도(襟度)를 지키는 선비의 길을 설파했고, 박정희가 지배하던 공포와 어둠의 유신시대에 일신의 안녕을 떨쳐내고 참여문학을 통해 해방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이었다고 말해야할까?
그게 아니면 <이문구 소설어 사전>의 저자 민충환 교수처럼 '그의 문체는 평단 전체가 달라붙어 연구해도 모자랄 풍요로운 숲'이라는 혹은, '이 나라 제1급의 말의 감각과 운용의 대가'라는 문학평론가들의 평가를 옮겨 써야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난해 4월 '창작과비평'에서 출간된 <4월혁명과 한국문학>에서 평론가 황광수가 했던 것처럼 해방공간의 좌익활동을 이유로 학살당한
이문구의 아버지와 두 형, 그 죽음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뜬 상투머리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까지를 쓰고, 토정 이지함의 후손이었던
이문구의 장편 <장한몽>은 '전쟁 때문에 자기 몫의 삶을 잃어버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투사하고 있다'고 써야할까?
그러나, 모두가 부질없는 일. 죽음 이후의 어떤 평가가 그의 지난했으며, 온통
흙바람투성이였던 삶을 온전히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 한 가지.
아직도 문단 호사가들의 이야기 속을 떠도는 아래 일화는 이문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참여-순수논쟁이 뜨겁던 1980년대 말 한국문단. 펜클럽대회가 열린다. 참여문학쪽을 대표하던 민족문학작가회의(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후신)에 의해 이문구의 스승이자 그가 '문학적 아버지'로 존경하던 소설가 김동리가 냉혹하게
비판받는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이문구는 민족문학작가회의에 깊숙이 몸을
담고있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자신이 몸담은 조직이 제아무리 정당성과 명분을 가졌다손 치더라도 그 조직이 아버지를 거부하는데. 이문구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민족문학작가회의를 떠난다. 혹자는 이를 두고 '소아(小我)를 위해
대의(大義)를 포기한 것'이라고 힐난하지만, 어디 대의와 소아가 칼에 잘린 2쪽의 두부처럼 그렇듯 쉽게 나눠지고, 하나의 잣대만으로 재단될 수 있는 것인가.
그에게 있어 대의는 '아버지와 스승은 같다'는 '아무리 위대한 이데올로기도
인간을 제의(祭儀)의 제물로 쓸 수는 없다'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덧붙여 하나. 이문구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으로 있을 때, 상임이사를 맡아 함께 일했던 김정환(시인)은 말한다.
"우리가 처음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다면, 세상이 이렇게 나빠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여 민족문학작가회의 산하 자유실천위원회 부위원장 이승철(시인)은 말한다.
"비단 작가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볼 때는 총체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이문구가 지난 2000년 조선일보사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을 받았을 때 쏟아진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들을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의 마음으로 이문구를 좋아할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조차 무슨 소용일까. 그는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곁에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이제 고인의 영전에 향불을 사르는 마음으로 또박또박 그의 발자취를 여기에 남기는 것으로 이문구의 위대한 문장 앞에 한없이 부끄럽기만 한 이 조사(弔詞)를 마치고자 한다.
이문구 선생님. 다툼과 고통이 없는 땅에서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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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천(鳴川) 이문구 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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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충남 보령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6년 <현대문학>에 추천완료돼 등단
1972년 소설집 <이 풍진 세상을> 상재. 한국창작문학상 수상
1974년 소설집 <해벽> 상재
1977년 소설집 <관촌수필> 상재
1978년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1981년 소설집 <우리동네> 상재
1982년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1987년 장편소설 <장한몽> 상재
1990년 장편소설 <산너머 남촌> 상재. 요산문학상 수상
1992년 장편소설 <매월당 김시습> 상재
1993년 소설집 <유자소전> 상재. 만해문학상 수상
2000년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상재. 동인문학상 수상
2003년 2월25일 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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