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사
일찍이 예가 없엇던 4대동시선거를 훌륭히 치루어 낸 여러분의 노고에 대하여 만강의 치하와 위로를 드립니다 지금 정신적 육체적으로 몹이 피곤할 터인데도 불초한 나의 퇴임에 자리를 함께하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여건에도 나로 하여금 퇴임인사를 할수 있는 이와 같이 좋은 자리와 기회를 마련하여 준데 대하여 장호근 국장이하 국과장 및 직원여로분께 충심으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돌아보면 37년여의 긴 기간을 대과없이 마칠수 있었던 것은 오직 상사 동료 후배여러분의 분에 넘치는 사랑과 항상 따뜻한 관심으로 감싸준 덕택이라고 믿어 진심으로 감사를 드려 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도 이 자리를 빌어 내가 고통스러워 할 때 같이 아파하고 같이 움며 나를 격려하고 헌신하여 지켜준 그 고마움에 깊이 감사하며 앞으로는 가능한한 사랑과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공개적으로 밝혀두고자 합니다
대과없이 임기를 마친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 아니겠읍니까만은 나는 6.25전쟁의 상처가 계속되어 백성도 가난하고 나라도 가난하여 공무원이 봉급도 제 날자에 받지 못하던 어려운 시절에 공무원에 입신했는데도 사회나 나라에 기여함이 별로 없이 물러나는 것이 나라에 죄송하고 나 개인으로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나는 공무원의 시작을 1956년에 군산시에서 임시직으로 출발했습니다만 뜻한바 있어 1958년 1년을 쉬고 정식으로는 1959년에 지방서기로 시작햇습니다 그 이듬해 3.15 부정선거 바로 이어 4.19혁명 또 다음해에 5.16혁명등 숨까쁘게 다가온 격변기 때마다 공무원 숙정과 감원선풍등을 견디어 내야햇고 혁명업무를 직접 담당하여야 했습니다 그 때는 미혼시절로 군청과장이 국가주사일 때 나는 지방서기로 임명된지 5개월만에 국가주사로 특진되었기에 청내에 화제의 대상이기도 하고 질시의 대상도 되엇으나 열과 성을 다하여 밤을 새워 일을 햇을 뿌만 아니라 4.19대모의 여파가 지방에도 파급 확산되던 즈음 하루는 대모대가 시청으로 몰려온다는 다급한 전갈이 있자 2층에 자리한 우리 총무과 직원들은 모두가 다급히 비상계단을 통해 뒷마당으로 피신햇지만 나는 나자신의 결심으로 혼자 총무과를 지키다 대모대를 맞았읍니다
그전에도 불상한 사람을 대신해 벌을 저청했다가 심한 곤욕을 치뤘던 경험이 있었지만 이날과 같이 대모대 대표와의 극적인 만남은 일생 잊울수가 없습니다 나야 이미 각오하고 기다리는 처지이지만 뜻밖인 듯 놀라는 눈치 엿습니다 딴덴 가니 자리가 텅 비어 만나기가 어려웠는데 바로 나를 만날 수 있어 다행 이라는겁니다 그들의 요구 사항을 선선히 들어 주었더니 오히려 고맙다한다 나는 그들의 요구 데로 코로나 택시 1대와 앰프장치를 빌려 가두방송을 할수있게 설치해주고 본네트에 태극기를 덮어주어 가두 방송을 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좀 괴롭고 힘은 들었지만 당시 위기관리에 최선을 다 햇던 것을 외람 되지만 젊었을 때 나라에 대한 조그마한 기여라고 자위하고자합니다
엊그제 지방선거 때도 지방공무원들이 어느 후보쪽에 줄을 서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보며 문든 나의 젊은 시절 의 자화상이 눈에 서언히 떠올랐습니다 4.19로 여당이 묺어지고 야당인 민주당이 부상하던 시절 축첩공무원 병역기피공무원 무능력공무원 숙정바람이 부는데 지방공무원들은 3.15 선거때 불가피하게 여당인 자유당쪽에 줄을 서야 햇던 죄책감 때문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싶어 좌불안석 할 때 나는 젊은 공무원으로서 많은 고뇌를 하며 결심했습니다
앞으로는 여 야 어느쪽에도 줄을 서지 말자 굳이 줄을 서야한다면 정의쪽에 줄을 서자! 그리고 인내하자 이렇게 마음을 다지고 있는사이 다급하게 다가온 격랑의 5.16을 다시 맞았습니다 불안하고 긴장된 분위기 에 눌려 있는 사이 혁명정부는 인력감사를 실시하고 기구의 통패합과 정원감축이 단행되어 모든 공무원이 순차적으로 1급식 강등되고 최하위직급은 감원 되어야 했습니다 이 무렵 선관위가 창설되었고 나는 생애의 대부분을 의탁 햇던 선관위에 오게 되었습니다
초창기엔 국민들의 인식이나 이해가 부족하여 선관위에 있다고 소개하기가 거북할 정도이었습니다 인원도 전임간사와 직원등 2인으로 장비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남의 사무실 구석에 책상 하나로 놓고 초라하게 출발 하였는 데도 얼마 안가 50%감원으로 2인중 1인이 감원되는 고통을 또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 후 30년이 지난 지금은 여러 차례의 선거와 국민투표를 관리하고 정당사무를 관리하며 사무의 기량과 역량의 향상은 물론이고 인원도 자질이 향상되고 소속감이 강해졌며 장비시설도 괄목할 만큼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관위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기대도 우리가 감당하기 벅찰만큼 높아지고 커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외적으로 보이는 다소 과장된 외양이고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고민도 적지 않습니다
이 고민은 여러분이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높아진 위상에 걸맞게 내실을 다져야 할 일과 둘째는 일선위원회의 고충을 해소하는 일입니다 일선위원회의 국 과장만 해도 직급이나 직명은 상위로 승차 했으나 타 부처처럼 상위 부서로 올라 앉는것도 아니고 통솔할 부하직원이나 영역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며 직명에 상응하는 기대치에 현실이 미치지 못하니 좌절과 욕구 불만으로 사기가 정체되어 있으며 또 이들 세대는 상사로부터 꾸지람을 들으면서도 순종해야하나 신세대인 부하직원들로 부터는 자기가 상사에게 하는 것 만큼의 예우는 받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치받히는 샌드위치같은 처지를 십분 이해하면서도 해소책을 찾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고 연민의 아픔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선거관리를 위하여 탄생하고 존립하는 기관이면서도 특히 이번 4大 지방 선거를 앞두고 격무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인지 일부 예외가 있긴 하지만 명예퇴직자가 증가했는가 하면 저 지난 지방선거와 국선 대선을 치룰 때도 전국에서 순직자가 생기고 아직도 과로로 앓고 있는 분이 게신줄 아는데 불행중 다행으로 우리 대전은 다 건강해주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도 그런 불행한 일이 없지 않을 듯 하여 마음 아프고 뭐라 위로할 말을 찾자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이번 4대선거의 동시관리는 우리위원회의 과리능력도 한게에 이르렀지만 유권자들의 후보자 선택안목도 한계를 초과했다고 보여져 앞으로 인쇄물과 홍보물의 양을 줄이고 선거별 식별을 용이하게 하고 우편투표함 개함 시간의 신축등 효과적인 개선안이 연구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선 국과장들에 대한 예우와 사기앙양을 위해서도 선거때에는 특별위로금의 지급이 실현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재임하는 동안에도 여러분의 지위나 대우의 향상을 위해 나름데로 고민을 많이 했읍니다만 비록 떠나가서도 여러부 편에 서서 미력아나마 그 고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제 선관위를 떠나면서 굳이 자부심을 갖게하는 것이 있다면 정치적 중립을 존립목적으로 하는 선과위에 있는동안 유신과 5공등 어려운시기에 소신을 새워 일하기가 어려운 때인데도 선거관리에 있어서만은 중림을 지키겟다는 내 양심을 확고히 지켜낸 것이 위원회에 대한 기여라 생각되며 그 결과가 나라에 대한 기여로 귀의한다고 생각되어 나는 자랑스럽게 기억하고저 합니다 그레서 나는 선관위와 여러분들을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할것이며 선관위에서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려 합니다
이제 며칠 편히 쉬시고 건강을 돌보시며 선거의 마무리에 최선을 다 해 주십시오 끝으로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이와 장호근 국장이하 직원여러분의 앞날에 영광과 행운만이 함께하시고 가정은 평화와 축복만이 충만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나는 이제 미지의 지평을 향해 불확실한 먼 여정을 떠나려 합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요
1995.6.30
허 재 규
첨언; 이상은 1995년 5월 27일 4大선거를 치룬직후 6월 30일에 대전광역시 상임위원을 퇴임하며 남긴 고별사 다)